# 370
370화. 추풍낙엽(秋風落葉)
함운지와 류옥은 태악산맥에 접근한 적도 없었으나 멀리서 지목령영을 제압한 수사가 그 근처에 반나절 가량 머물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류옥이 빛을 머금은 눈동자를 굴리다 입을 열었다.
“저희는 태악산맥에는 발을 들인 적도 없습니다. 다만 멀리서 어떤 수사가 태악산맥 쪽으로 향하는 것은 보았지요. 순 사형은 아마 그 자를 찾나봅니다?”
“멀리서 보았다라. 그것만으로 어찌 그 자가 태악산맥에 머물렀는지 알 수 있지? 귀 종의 수사가 의도를 가지고 다녀간 것일지도 모르지 않소.”
아름다운 두 여인의 신체를 거침없이 훑어보던 비단옷의 사내가 실실거리며 하는 말에 류옥이 일부러 뺨을 붉히는 척 하며 답하였다.
“궐 사형은 또 무슨 말씀을 그리 하십니까. 저희가 월국에서 사형들을 속여 봐야 득 될 것이 뭐가 있다고요. 못 믿겠으면 직접 그자에게 내막을 물어보시지요. 그 자가 태악산맥에 머문 것은 확실하지만 그 사실을 알게 된 연유는 사정이 있어 말씀드리기가 곤란해 그럽니다.”
흑의 수사가 반신반의하며 고민하다가 잠시 후 굳은 얼굴을 풀었다.
“평소였다면 류 사매의 말을 믿어 주었겠지만 이번만큼은 어렵겠습니다. 육 사제와 그의 무리가 태악산맥에서 피살되어 시체조차 발견되지 않은 일로 이미 사부님께서 크게 진노하셨습니다.
그리고 월국을 지나는 고계 수사들 중 사매의 일행들의 행적이 가장 의심스러우니 말입니다. 기왕 류 사매가 다른 흉수를 지목하였으니 그 자와 대질신문을 해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밝혀 봅시다.”
“대질신문이요?”
류옥이 일순 당황해 난색을 표했다.
“어찌 그 정도 협조도 못 해주십니까?”
흑의 수사는 말은 부드럽게 하면서도 이미 귀령문 수사들을 풀어 함운지 일행을 둘러싸고 있었다. 까딱 잘못하면 당장 공격을 당할 분위기였다.
그때 류옥이 안색이 변하며 ‘훽’하니 고개를 돌렸다.
그녀만이 아니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수사들이 살벌한 고계 수사의 의식을 느끼고는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다.
아직 의식의 주인은 파악하지 못했지만 살을 애는 듯한 서늘한 살의가 명백히 전해졌다. 우아한 자태의 여인이 강력한 의식을 감지하고는 분노해 일갈했다.
“원영기 수사가 아닙니까! 당신들이 말하던 자가 원영기 노괴란 거군요. 다 같이 이 자리에서 죽어 보자는 겁니까!”
“허튼 소리 하고 있을 시간 없다. 즉시 흩어져 달아난다!”
순 수사도 화가 나기는 매 한가지였으나 그 일을 따지고 있을 형편이 아니었다. 그는 동문 수사들에게 분부를 내리기가 무섭게 검은 빛줄기로 변해 달아나기 시작했다.
비단옷의 사내도 놀랐으나 바로 도망가지 않고 미적거렸다.
“이 원영기 수사가 육 사제를 죽인 흉수라는 확증도 없지 않나요? 벌써부터 이리 벌벌 떨게 뭐랍니까.”
“목숨이 열댓 개 되면 사형은 기다렸다 흉수가 맞는지 확인하시지요! 이 사매는 먼저 갑니다!”
귀령종 결단기 수사 중 유일한 여인이 냉랭히 경고하고는 붉은 빛줄기로 변해 순 수사와 다른 방향으로 달아났다. 그러자 비단옷 사내도 어쩔 수 없이 어령종 무리를 매섭게 노려보고는 몸을 날렸다.
원영기 수사의 무서움이야 모르는 이들이 없었으니 귀령문의 다른 저계 수사들도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고 있었다.
“쓸모없는 것들! 큰 도움이 안 될 줄은 알았지만 괜히 도망갈 시간만 날렸습니다.”
“아니, 상황은 훨씬 나아졌어. 저들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달아났으니 우리가 살아날 가능성도 그만큼 높아진 셈이야. 이제 우리의 운에 달렸어.”
류옥의 성난 목소리에 함운지가 차분하게 답하고는 영수대를 스쳐 하얀 기운을 뿜는 거대한 새를 불러냈다.
다른 어령종 수사들도 지체하지 않고 각기 다른 방향을 골라 법기를 타고 질주하거나 함운지처럼 영수를 타고 날아올랐다.
다 각기 다른 수법을 쓰고 있었지만 모두 이전 사람들이 향한 방향과는 다른 곳을 향해 전력을 다해 쏘아져 나간 것은 똑같았다. 혹시라도 여러 수사들이 모여 오히려 원영기 수사의 표적이 될까 걱정한 탓이다.
순식간에 수사들로 붐비던 허공이 텅 비어버렸다.
그들은 아무리 원영기 수사라도 많은 무리를 모두 추격해 죽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긴 것이다. 적어도 몇 명은 목숨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한립은 이미 백 리 안으로 근접해 있었다.
의식을 통해 마도 수사들의 무리가 추가된 것을 보고 조금 황당했는데 거기다 그들이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기 시작하자 자연히 미간이 좁아졌다.
눈빛에 살기가 스치고 그가 깊게 숨을 내뱉는 순간, 천둥소리가 들리며 은색 날개 두 쪽이 등 뒤에 나타났다.
체내의 벽사신뢰를 풍뢰시에 주입하자 한립은 마치 벼락 그 자체가 된 듯 사라져 수 십리 밖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신묘한 술법을 통해 그는 ‘번쩍’ ‘번쩍’ 거리며 마도 수사들이 흩어진 곳에 바로 도착했다.
가만히 서서 의식을 퍼트리니 달아나는 중인 모든 마도 수사들의 위치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가볍게 냉소한 한립은 가장 멀리까지 날아간 결단기 수사를 향해 빛을 번뜩이며 사라졌다.
* * *
가장 멀리까지 간 수사는 제일 먼저 출발한 순 수사가 아니라 서른 살의 여인이었다.
어떤 희괴한 공법을 수련한 것인지 겨우 결단 초기의 수행이었지만 붉은 불길에 휩싸인 요괴라도 되는 듯 쏜살같이 날아간 것이다. 불길 밖에서 길이가 각기 다른 빛들이 푸른빛을 반짝이며 허공을 갈라 노를 저어 댄 덕분이었다.
여인은 지금 상당히 뿌듯했다.
자신의 공법은 적과 싸우는 데는 최상이 아니었지만 달아나는 데는 발군의 능력을 발휘하게 해주었다. 바람과 불의 속성을 동시에 활용하는 이 수법은 바람의 속성을 지닌 표령대 법보와 만나 극성으로 발휘되고 있었다.
이 속도라면 원영 초기 수사와도 비견할만하다고 자신했다.
‘만일 달아난 이들 중 단 한 사람만 살아남는다면 그건 당연히 나일 거야!’
꽤나 안심을 하고 있는 와중에 ‘쿠르릉!’하는 소리가 불길하게 따라붙었다.
우아한 자태의 여인이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지만 인적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천둥소리만은 계속 이어지며 시간이 갈수록 더욱 커졌다.
곱던 여인의 얼굴이 창백해지며 미친 듯이 사방을 살피다가 모든 영력을 쏟아 부어 이전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필사의 도주를 시도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은빛 날개를 단 한립의 추격을 피할 길은 없었다.
놀란 것은 여인뿐만이 아니었다. 한립 역시 여인의 놀라운 속도에 놀라고 있던 참이었다. 오래 살다보니 세상에는 신묘한 공법들이 허다하다는 것을 실감했다. 결단기 수사의 속도라기에는 무서울 정도의 둔술이었다.
‘아마 풍뢰시와 맞먹는 비술이나 법보도 적지 않겠지.’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한립은 풍뢰시를 쉼 없이 펄럭였다. 곧 은빛이 호선을 그리며 번뜩인 순간, 그는 이미 여인의 눈앞에 있었다.
“선배님 제발 목숨만은!”
한립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며 손끝에서 푸른 검기 다섯 줄기를 방출해 날려 보냈다.
퓨퓨ㅤㅍㅠㄱ.
바람과 불의 속성이 깃든 보호막의 위력이 상당했던지 처음 세 개의 기운은 막았지만 네 번째부터는 속절없이 파고들어 여인의 숨을 끊어놓았다.
한립이 떨어져 내리는 시신을 보며 가볍게 고개를 젓더니 손가락을 튕겨 보낸 불꽃으로 시체를 재로 만들어 버렸다.
그녀가 지니고 있던 저물대와 기다란 띠 형태의 법보는 당연히 미리 챙긴 뒤였다.
“여기서 너를 죽이지 않으면 마도 원영기 노괴의 추격이 있겠지.”
그가 바로 몸을 빛내며 다른 수사가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이번 목표는 수사들 중 수행이 가장 높은 흑의 수사였다. 이미 결단 중기의 막바지에 이러 기회만 된다면 후기에 이르는 것도 불가능은 아닐 듯한 사내였다.
한립이 날아가는 도중 영수대를 치니 대량의 삼색 서금충들이 날아올랐다. 열 댓 자루의 삼색 비검으로 변한 서금충들이 죽을힘을 다해 달아나고 있을 축기기 수사들을 노리고 각각 쏘아져나갔다.
일일이 하나 씩 죽이러 다니는 것은 영 번거로운데다 이렇게 하면 축기기 수사들은 단번에 처리할 수 있었다. 그래도 결단기 수사들은 직접 움직일 계획이었다.
* * *
흑의 수사가 묵빛 단도를 밟고 울적한 얼굴로 서두르고 있었다.
‘육 사제를 죽인 흉수를 찾으려다가 원영기 노괴에게 쫓기게 되다니!’
이 자가 흉수인 줄은 모르겠으나 분명 관련이 있을 것이다.
게다가 어령종 수사들이 두려움에 떨며 달아나는 꼴을 보아하니 십중팔구는 그들이 밉보일 짓을 벌인 것 같은데 괜히 무관한 자신들이 엮여 피를 보게 생겼다.
월국에 선의를 가지고 온 자가 아니니 십중팔구는 그들을 죽여 입을 막을 가능성이 컸다. 육 사제의 죽음에 원영기 노괴가 연관되어 있다는 실마리를 잡았으니 이미 그의 손을 떠난 사건이 되었다.
‘한 시라도 빨리 사부님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한다!’
주저 없이 마도 결단기 수사들을 죽이는 것으로 보아 어떤 세력에 속하지 않은 산수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마도의 세력이 방대한 지금 후일을 고려한다면 이런 행동은 어려울 것이다.
흑의 수사가 이런저런 걱정을 하며 날아가는데 뒤편에서 괴이한 천둥소리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쿠르릉! 쿠르릉! 콰콰쾅! 쿠릉!
“……!”
그가 목이 부러질 듯 뒤를 돌아보았지만 푸른빛이 반짝이는 것이 잠깐 눈에 들어왔다 사라져버렸다.
크학!
한립이 무표정하게 푸른 거검을 흑의 사내의 몸에서 회수했다.
달아나면서도 주도면밀하게 보호막으로 몸을 보호하고 있었지만 청죽봉운검이 합쳐져 만들어진 거검의 일격은 막아낼 수 없었다.
한립이 시선을 돌리며 바로 다른 곳으로 날아갔다.
* * *
녹색 해골 두 개를 따라가면서도 비단옷의 사내는 긴장한 얼굴로 계속 사방을 주시했다.
아무리 멀리까지 날아왔더라도 상대의 강력한 의식이라면 언제든 자신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는 전력을 다해 날면서도 의식을 최대한 개방해 주의를 기울였다.
“히익!”
이리 저리 고개를 돌리던 그가 앞을 보고는 놀라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 멀지 않은 거리에 이십대로 보이는 청년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리 멀리까지 날아오느라 고생 많았다. 이제 내가 준비한 길을 가야지?”
웽웽웽웽웽.
한립이 입을 열며 소매를 펄럭이자 무수히 많은 금색 점들이 하늘을 뒤덮었다.
비단옷을 걸친 사내는 법보는커녕 비명 소리조차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금빛 점들 속에 갇혀 사라져버렸다.
“이번에 진화한 서금충들은 훨씬 강해졌네. 법보도 순식간에 갉아먹어 버리다니.”
이어 그가 다시 영수대를 꺼내니 금빛의 서금충들이 머리 위를 몇 바퀴 돌고나서야 안으로 들어갔다.
‘강력해 질수록 손을 타질 않아.’
서금충은 진화를 거듭할수록 통제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 * *
함운지는 새하얀 조류 영수를 타고 날아가는 중이었다. 새의 전신이 티끌 하나 없이 하얗고 영력 또한 하얀 빛을 띠어서 멀리서 보면 흰색의 무지개가 하늘에 걸린 모습으로 보였다.
차분한 성정과 달리 그녀는 아주 긴장된 얼굴로 녹색 옥 접시를 ‘꽈악’ 쥐고 있었다.
옥으로 만든 접시는 수정처럼 투명하면서도 비취색으로 고왔는데 그 위에 금색과 은색 안료로 거대문자와 부호가 새겨져 있었고 놀랄 만큼 강력한 영기를 뿜어냈다. 한 눈에 보아도 비범한 이보(異寶)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옥 접시의 매끈한 면에서 색색의 불빛들이 점멸하여 다양한 빛깔의 반딧불이를 품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불빛 중 하나가 빛을 잃고 사라졌다.
“…….”
그녀의 붉은 입술이 굳게 다물어지며 눈도 깜빡이지 않고 이보를 응시했다.
다시 두 개의 붉은 점이 종적을 감추었다. 함운지의 정결한 얼굴에 드디어 표정변화가 생겼다.
접시에 비춘 불빛 중 하나가 또 꺼져 버렸는데 사라지는 불빛의 방향이 동서남북에 우후죽순처럼 나타나 상대의 이동경로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나와 류 사매를 제외한 다른 제자들은 모두 당했구나. 분신술을 펼치는 게 아니라면 기이한 술법을 쓰는 자야. 귀령문 수사들도 대부분 당했을 텐데 이럴 줄 알았다면 하나로 뭉쳐 싸워 볼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