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9
369화. 행적
한립이 문인과 거한을 일으켜 세우고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내 초상화가 있다했는데 이곳에 있다면 가져와 보거라. 누가 남긴 것인지 궁금하구나.”
문인이 바로 답하였다.
“바로 이곳에 있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가져오겠습니다.”
그가 서둘러 한쪽 벽으로 가 구석의 벽돌을 누르자 ‘덜컹’하는 소리와 함께 벽돌이 회전하며 안쪽의 비단 족자들이 나타났다.
한립이 큰 보폭으로 다가가 족자에 그려진 그림을 살피니 열 일고여덟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청년이 미소를 지으며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앳된 얼굴의 한립이었다.
중년 문인이 공손히 뒤로 물러나며 조용히 설명했다.
“이 족자는 려 가의 선조님께서 저희 가문에 남겨주신 것이라 들었습니다만, 어느 분의 솜씨인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말았는지 한립의 시선은 다음 그림으로 넘어갔다. 기억 속의 모습보다 훨씬 나이가 들어 보이는 아버지의 얼굴이었다.
어떤 초상에는 흰머리가 성성한 노인이 그려져 있었는데 한립은 한참을 보고 나서야 자신의 형님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족자들을 하나 둘 들추며 회한에 잠긴 그를 문인과 거한이 눈치 있게 방해하지 않았다.
간혹 무언가를 중얼거리기도 하였으나 두 사람의 귀에는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한립의 몸에서 눈을 찌를 듯한 요란한 빛이 방출되었다.
“헛!”
“……!”
두 사람이 놀라 무의식중에 눈을 질끈 감았다 떴을 때는 이미 한립은 사라진 후였으나 귓가에 목소리만이 맴돌았다.
“내 비록 선도를 걸으며 실력을 키웠지만 그만큼 막강한 자들과 척을 지게 되었다. 괜한 화를 입지 않으려면 나와 만난 일은 일평생 함구해야 할 것이며, 서금영검 또한 절대 외부인에게 노출해서는 안 될 것이야.
나는 앞으로 오직 수선(修仙)에 매진할 것이고 다시 한 가의 일에는 개입하지 않을 것이니 알아서들 잘들 헤쳐 나가거라!”
한립의 목소리가 연기가 흩날리듯 흩어졌다.
한립은 이미 오리구를 벗어나 수십 리 밖을 날아가고 있었다.
지금의 한 가는 그와 인연이 있기는 했지만 진정한 가족의 범위는 부모님과 형제자매까지였다.
문인과 거한이 시종일관 공경하게 자신을 대우하였어도 그는 전혀 친근한 친족의 정을 느낄 수 없었고 거기에 완전히 변해 버린 청우진과 산골 마을의 모습이 더해져 거리감은 더욱 커졌다.
그래도 고향에 한번 다녀옴으로써 마음속에 희미하게 남아있던 미련마저 훌훌 털어버릴 수 있었으니 헛된 여정은 아니었다. 한립이 묵묵히 방향을 정해 속도를 더했다.
며칠 후 한립은 남주를 지나며 옛 기억이 남아 있는 가원성에도 잠시 들렀다. 그 결과 가원성 역시 세월의 흐름을 피하지 못하고 모든 것이 달라졌음을 절감했다.
손이구와 사평방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은 물론이고 남주 일대를 제패했던 오색문 역시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던 것이다. 100년 전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천일회라는 세력이 그들의 자리를 대신해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오색문의 배후에는 수도문파인 영수산이 있었는데 마도 침공 직전 영수산은 어령종의 일부가 되는 것을 거부하고 반기를 들었었다.
이미 월국이 마도 귀령문의 수중에 떨어진 마당에 오색문의 몰락은 당연한 수순이라 볼 수 있었다. 문옥주와 이영아는 어찌 되었는지 알 수도 없었고 이미 너무 오래 전 일이라 소식을 알 방법도 없었다.
뭐, 손이구야 그를 주인으로 모신다고 맹세는 했지만 그에게 여러 이익을 주었으면 주었지 제대로 부려먹은 적도 없었으니 마음에 걸릴 까닭이 없었다.
한립이 즉시 가원성에서 다시 원무국 방면으로 날아올랐다. 원무국을 지나 낙운종으로 돌아갈 참이었다.
그런데 그가 가원성을 채 벗어나기도 전에 얼굴을 굳히며 허공에서 멈춰 섰다. 고개를 돌려 어딘가를 응시하는 한립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그리고 같은 시각 이백 리 밖에서 길을 재촉하던 무리도 허공에서 정지했다. 그 중 백의 여인 둘이 서로를 바라보며 앞으로 나아가기를 주저했던 것이다.
“사숙님들 왜 그러십니까? 무슨 일이 생겼는지요?”
백의 여인들의 이상을 눈치 챈 노인이 눈치를 살피며 물어오자 버들가지 같은 눈썹에 기다란 눈매를 지닌 류옥이 날카롭게 답했다.
“그래! 위치를 감지하려는데 지목령영이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었다. 설마 상대가 우리가 뒤따르는 것을 눈치 챈 것은 아닐지.”
“그럴 리 없습니다. 아무리 원영기 수사라 해도 이렇게 먼 거리에서 저희를 찾아낼 수는 없을 텐데요. 아니면…… 사숙님들이 펼친 비공이 지목령영에 깃든 금제를 건드려 상대가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챈 걸까요?”
“아니, 우리의 공법은 사조님께서 친히 전수해 주신 것인데 어찌 그럴 수 있겠느냐. 상대의 수행이 원영 후기에 이르지 않고서는 절대 문제가 없을 것이야. 방원 백 리를 꿰뚫어 보는 보통의 원영기 수사도 소름이 돋는데 우리는 상대와 수백 리를 떨어져 있다.”
류옥이 고개를 저으며 애써 불길한 생각을 떨쳐냈다.
“하지만 류 사숙님. 상대가…….”
네 명의 축기기 수사 중 녹의 여인이 걱정 어린 얼굴로 무어라 하고 있는데 수결을 맺으며 침묵하고 있던 함운지가 놀란 표정으로 소리쳤다.
“이런, 령영이 움직이고 있어. 우리 쪽으로 날아온다!”
“우리 쪽으로요? 정말 우리가 쫓는 것을 알아차리기라도 했단 말이에요?”
류옥의 아름다운 얼굴이 당황스럽게 일그러지며 서둘러 수결을 맺어 위치를 확인했다. 잠시 후 그녀의 얼굴에 한기가 어렸다.
“령영을 제압한 자가 이쪽으로 날아오는 속도가 엄청나요. 의심할 여지없는 원영기 수사입니다.”
생각에 잠겨 있던 함운지가 그래도 차분한 어조로 모두에게 대책을 내놓았다.
“우리가 상대할 자가 아니니 도망간다. 이대로 맞닥뜨리면 모두 죽음 목숨이야. 내 기억에 귀령문의 남주 분타가 이 근처이니 일단 거기로 가자. 우리와 불화가 있는 문파이긴 하나 그래도 정체 모를 원영기 수사와 싸우느니 귀령문 결계 속에 갇히는 게 나을 것이다. 상대가 아무리 원영기 수사라도 대놓고 귀령문 분타를 공격하지는 못하겠지.”
녹의를 입은 거한이 원영기 수사가 자신들을 쫓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안색이 창백해져 벌벌 떨다가 얼른 그 의견에 동의했다.
“함 사숙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어서어서 도망가요! 이러다 늦겠습니다.”
“흥! 뭘 그리 조급해 하느냐! 네가 재촉하지 않아도 자연히 서두를 것이다. 우리 여섯이서 영합결(靈合決)을 펼쳐 법력을 하나로 모으면 도망가는 속도를 배로 높일 수 있을 것이다. 어서 술법을 펼쳐라!”
류옥이 냉랭히 거한을 쏘아보며 이리 말하자 그도 더는 입을 놀리지 못했다.
이어서 함운지와 류옥을 중심으로 여섯 수사가 술법을 펼쳤고 각자 다양한 법보와 법기를 꺼내들었다. 그러자 모두의 영기가 하나로 연결되어 하늘을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른 쪽에서는 한립이 음산한 얼굴로 전력을 다해 하늘을 가르고 있었다.
의식이 지금 얼마나 강력해졌는지는 스스로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저 고도로 집중을 하고 사성에 이른 대연결의 힘을 빌리면 백여 리 정도는 우습게 기감을 퍼트릴 수 있는데다 이, 삼 백리의 대략적인 동태도 파악할 수 있다는 것만 알 뿐이었다.
방향을 잡고 날아가던 도중 그는 돌연 아주 은밀한 영기의 흐름을 포착했다. 이 괴상한 영력은 그의 몸을 배회하며 흩어지지 않아 한립을 놀라게 만들었다.
아주 미세하면서도 이상한 기운이라 만일 그의 의식이 조금만 약했어도 보통의 원영기 수사의 능력으로는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몰랐지만 귀찮은 일이 생겼다는 것은 분명해졌다.
그의 추측에 따르면 원무국에서 부 가를 멸문한 일 아니면 태악산맥에서 귀령문 수사들을 죽인 일 중 하나가 사단이 난 것 같았다.
한립은 바로 의식을 퍼트려 이상한 낌새를 찾아 반경 이백 리를 샅샅이 뒤진 끝에 요행이도 몇몇 수사들이 괴이쩍게 자신을 쫓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너무 먼 거리라 그들의 신상은 파악되지 않았지만 바로 처리해야겠다고 마음 먹어 바로 방향을 튼 것이다.
어차피 무리 속의 두세 명쯤 결단기 수사들이 끼어있다 해도 그들을 죽이는 것은 촛불을 끄는 정도의 노력도 필요하지 않을 터!
이제 굵은 노란빛 줄기가 죽을 힘을 다해 달아나고 멀리서 열댓 개의 푸른빛줄기가 그 뒤를 쫓는 광경이 펼쳐졌다.
아주 짧은 시간에 한립은 백여 리를 주파했고 그것을 느낀 려 씨 여인도 공포에 질려가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그들이 귀령문 분타의 영역으로 진입하기도 전에 따라잡히고 말 것 같았다.
급한 마음에 그녀가 옆에서 날아가고 있는 사저 함운지에게 어찌 할지 상의를 하려는데, 함운지가 먼저 희색을 드러내며 낮게 읊조렸다.
“앞쪽에 귀령문 수사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
“귀령문 수사들요?”
함운지의 목소리에 류옥은 정신이 번쩍 들었고, 노인 등 네 명의 어령종 수사들 역시 반가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귀령문 수사들이 원영기 노괴를 막아주지는 못 할지라도 약간의 시간을 벌어 줄 수 있다면!
잠시 후, 그들 눈앞에서 열댓 개의 검은 점들이 나타났다.
류옥은 이에 안심을 하면서도 힐끗 함운지를 보며 그녀가 자신보다 먼저 귀령문 수사들을 감지해낸 것을 경계했다.
어쨌듯 지목령영은 하나뿐이었으니 그녀와 함운지 둘 중 하나의 차지가 될 것이다. 겉으로는 친밀한 사저 사매지간일 지라도 결국에는 근본적으로 지목령영과 융합할 기회를 두고 경쟁을 하는 적수였던 것이다.
이때 어령종 여섯 수사들은 귀령문 수사들 앞에 도착해 노란 기운을 거두고 본 모습을 드러냈다. 벌써부터 어령종 수사들임을 알고 있던 상대가 경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음? 어령종의 함 사매와 류 사매 아닙니까? 멀리 월국까지는 어인 일입니까.”
검은 의복을 걸친 귀령문 수사들 틈에서 세 명의 결단기 수사들이 앞으로 나섰다. 사내 두 명과 여인 하나로 이루어진 무리였다.
귀령문 세 수사를 찬찬히 살피니 침착한 얼굴에 흑의인, 경망스런 인상의 비단 장포를 입은 사내 그리고 서른 살 남짓의 우아한 여인이었다.
“쇄혼 선배님 문하의 순 사형 아니십니까? 이런 우연이!”
류옥이 세 수사 모두 쇄혼 진인 문하의 제자들인 것을 보고는 즉시 미소 지었다. 하지만 흑의 수사들은 그저 냉랭한 시선을 던질 뿐이었다.
그들 중 우아한 자태의 여인이 고스란히 불만을 드러냈다.
“우연은 무슨, 원무국에나 있어야할 어령종 사매들이 월국에 몰래 잠입한 까닭이 무엇입니까? 우리 귀령문을 무시하는 처사가 아닌지.”
“임 사저님, 오해하지 마시지요. 제가 함 사저와 이번에 월국까지 오게 된 것은 사부님의 명을 수행하기 위해서입니다. 사정이 급해 미리 귀 문에 알리지 못한 것은 사실이나 며칠만 머무르다 바로 떠날 계획이었습니다.”
흑의 수사가 류옥을 응시하며 냉정하게 물었다.
“사매들이 무슨 이유로 월국에 왔던 그건 이 순 모가 상관할 일은 아니겠으나. 며칠 전 태악산맥에 다녀간 일에 대해서는 이유를 알아야 겠습니다만?”
이번에는 함운지가 미간을 좁히며 반문했다.
“태악산맥이라니요? 순 사형이 말씀하시는 태악산맥이 이전에 월국 칠대 선파였던 황풍곡이 있던 그 산맥을 일컫는 것입니까?”
“다녀갔다는 것을 인정하는 게요?”
순 수사는 물론이고 비단옷을 입은 사내와 여인 역시 안색이 어두워지며 적의를 보였다. 함운지와 류옥이 이를 보고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둘 다 머리가 안 돌아가는 이들이 아니었으니 그들의 어투에서 좋지 않은 일이 생겼음을 알아차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