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8
368화. 사숙조(四叔祖)
한립이 가볍게 웃음 지었다.
“호오, 내가 태어나기를 이렇게 생겼을지도 모르지 않나? 아니 그런가?”
문인이 노기를 가라앉히고는 냉랭히 쏘아 붙였다.
“세상천지에 사숙조와 비슷한 외모를 지닌 이들이야 허다하겠지만 남의 선조의 용모를 하고 그 가문의 사당에 나타나는 자는 당신 뿐일 듯 하외다.”
“말주변이 나쁘지 않구나! 조정을 위해 일 할만하다. 오늘날 한 가가 번성할 수 있었던 것도 너와 같은 후손들의 공로가 쌓여서겠지!”
한립이 한결 편해진 얼굴로 그를 칭찬했지만 문인의 얼굴은 더욱 어두워졌다.
“정말 남의 집안 선조를 사칭해 한 가를 우롱할 작정이시오.”
“사칭이라, 내가 나인 것을 사칭할 이유가 없지. 일단 너희가 말해 보아라. 난 어릴 때 본가를 떠나 내 외모를 아는 집안사람이 없을 것인데 어찌 나를 알아보았더냐? 설마 칠현문에서 내 초상을 지니고 있었던 겐가? 그리고 너는, 려 씨 성을 쓰는 듯한데 고인인 려비우와는 어떤 관계지?”
말을 하며 거한을 꼼꼼히 보니 눈매가 려비우와 약간은 닮은 듯도 싶었다. 거한이 려비우라는 이름에 흠칫 놀라며 화를 버럭 냈다.
“어떻게 우리 선조의 이름까지 아는 겁니까!”
한립이 그저 웃으며 명확한 답을 하지 않았지만 문인은 그가 ‘칠현문’과 ‘려비우’까지 언급하자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숙조께서는 어린 시절 이곳을 떠난 이후 행방이 묘연해지셨습니다. 만일 당신이 제 사숙조시라면 200살이 넘었다는 것인데 도통 그리 보이지 않습니다.”
자신도 한 가와 려 가의 사연을 최근에서야 한 서찰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런데 상대가 이리 속속들이 가문 내의 비사를 알고 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서찰을 본 것인가? ’
자기도 모르게 문인의 시선이 위패 뒤쪽의 숨겨진 틈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선조들의 기록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한립도 문인의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채고 의식으로 위패 뒤쪽의 틈새를 훑었다.
그가 거침없이 한 손을 들어 그곳을 가리켰다. 동시에 거한과 문인의 눈이 휘둥그레질 일이 벌어졌다. 탁자에 푸른빛이 스며들더니 오래되어 누렇게 변한 서찰들이 허공에 떠올라 한립을 향해 날아온 것이다.
한립이 차분하게 그것들을 살펴보았다.
문인은 웬만한 일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 인물이었지만 이번에는 놀라 숨을 들이키며 거한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거한 역시 그를 마주보고 있었지만 그의 얼굴에는 놀람과 더불어 희색이 만연했다.
문인이 어찌할 바를 모르자 거한이 포권을 하며 한립을 향해 깊이 허리를 숙였다.
“실례일 수도 있으나 꼭 여쭐 말씀이 있습니다. 귀하는 혹시 전설 속의 수도자가 아니신지요? 만일 그러시다면 귀하의 신분을 저희 같은 속세의 범인들이 감히 의심할 수야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 혹시 신분을 증명할 신물을 지니신 것은 없으십니까.”
문인이 멍하니 거한의 말을 듣다 ‘수도자’라는 말에 기함을 해 한립을 바라보았다.
“오, 네가 수도자에 대해 알 줄은 몰랐구나! 서찰을 보니 네가 정말 려비우의 후인이었어. 려 가의 후손들이 대대손손 한 가와 인연을 맺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네가 말하는 신물은…… 당초 오로지 수행을 위해 급히 떠나느라 무엇도 챙기지 않았으니 보여줄 것이 없는데. 려 형에게도 단약 몇 병만을 남기고 인사도 나누지 못하고 헤어졌으니 말이야.”
대수롭지 않게 한립이 한 말에 거한이 바로 반응을 보였다.
“단약이라면! 저희 사당에 줄곧 모셔져 있는 약병이 바로 선배님이 남겨 주신 물건이란 말입니까!”
“그 옛날 려 형은 무공을 위해 추수환이라는 극약을 복용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지. 내가 남겨 놓고 떠난 단약이 있었더라도 춘수를 누리지는 못했을 터.”
한립이 탄식하며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러자 거한이 조심스레 물었다.
“저는 집안의 비사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아직 아버님께서 건재하시니 소식을 전해 이 일에 대해 알리고 확인을 해보아도 될런지요.”
말은 이렇게 했지만 거한은 이미 한립의 신분을 믿고 있었다. 자세히는 몰라도 당초 가문의 기틀을 세운 선조가 아무 이유 없이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는 것은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됐다! 이번에 돌아온 것은 그저 속세와의 마지막 인연을 정리하고자 함이니 일을 크게 벌이지 말거라. 그래도 한 가와 내 지기의 후인들이 무탈하게 살아가고 있으니 마음이 한결 편하구나.”
거한이 조급히 중년 문사에게 눈짓을 했다.
어쨌든 평범한 사람들은 그 존재조차 모르는 수도자를 선조로 두는 것은 가문의 흥망성쇠와도 관련이 있는 중대사였다.
거한이 아는 것을 문인이라고 모를 리 없었다. 그가 잠시 침묵하다 공손히 입을 열었다.
“정말 귀하께서 제 사숙조가 맞으시다면 확인할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이곳 사당에는 선조들이 남기신 물건들이 보관되어 있으니 알아보실 수 있다면 자연히 저도 귀하의 말씀을 믿겠습니다.”
“선조들의 유품이라, 어디 보기나 해보자꾸나. 너무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몇 가지나 알아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안심하십시오. 이 물건들은 모두 가세가 좋지 않을 때를 회고하기 위한 것들이니 알아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문인이 한립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1층에서 작은 소음이 들리고는 문인이 붉은 천으로 감싼 상자를 들고 한립 앞에 돌아왔다. 붉은 천을 걷고 상자를 열자 투박하고 오래되어 보이는 물건들이 가득했다.
“알아보시겠는지요?”
“신기하게도 대부분 알아보겠어. 두세 가지는 내가 떠나고 난 뒤에 구입한 것들인 것 같고.”
한립도 의외인지 미소를 지었다.
“이 탄궁과 활은 둘째 형님인 한주 형님의 것이고, 이 나무 비녀는 어머니께서 가장 즐겨하시던 장신구였지. 곰방대는…….”
낡은 물건 하나하나를 들어 올리며 중얼거리는 소리에 문인의 의심이 말끔히 사라졌다. 이런 사소한 사정을 아는 것은 한 씨 가문 사람들 중에도 가주 자리를 물려받은 자신밖에 없었다.
그래서 한립이 말을 마쳤을 때 문인은 바로 거한의 팔을 끌며 함께 큰절을 올렸다.
“손자벌인 한천소가 불효하여 사숙조에게 큰 결례를 범하였습니다.”
한립은 더없이 공손해진 두 중년인을 보며 감회가 새로웠다.
“세상일은 참 예측하기 어렵구나. 고향을 떠나 타지를 떠돌다오니 한 가가 어느덧 세가로 불리고 있구나. 두 사람은 그만 일어 나거라! 오랜 세월 가문의 일 따위 안중에도 없던 사숙조에게 그리 대례를 올릴 것 없다.”
중년 문사가 몸을 일으키면서도 아주 정중히 답했다.
“아닙니다. 저희들이 숙조님이 살아계신 줄도 모르고 찾아뵙지 못한 불효의 죄가 큽니다.”
“됐다. 나는 어차피 이 길로 떠날 것이다. 선도를 추구하는 사람은 속세의 인연과는 깊지 않을수록 좋은 법이야.”
한립이 한 팔을 털어 내며 하는 말에 문인이 놀라 되물었다.
“이대로 떠나시려 하십니까? 제가 모실 테니 다른 한 씨 자제들의 얼굴이라도 보고 가시지요.”
“오면서 이미 둘러보았다. 아쉽게도 한 가의 수많은 자손들 중에는 영근의 자질을 지닌 아이가 하나도 없더구나. 인연이 여기까지인 게지. 그렇지 않았다면 한두 명쯤 제자로 들여도 되었을 것을!”
“후손들의 운이 따르지 않아 숙조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였습니다.”
실망한 기색이 스치며 문인이 쓴웃음을 지었다.
“본래 수도자의 자질을 지닌 이는 만 명 중 한 명을 찾기 어려운 것이다. 한 씨 가문 수백 자손 중에 영근을 지닌 아이가 없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란 뜻이지.
게다가 지금의 수도계는 혼란하기 짝이 없으니 되도록 한 가와 려 가는 수도계와 엮이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이런 때에 잘못 휩쓸려 멸문지화를 당한 경우도 허다하다.”
한립이 고개를 저으며 하는 뜻밖의 이야기에 문인이 성실히 고개를 숙였다.
“사숙조의 분부대로 따르겠습니다.”
한립이 시선을 돌려 수염을 기른 거한을 향해 물었다.
“너는 려비우의 몇 대 자손이고 이름은 무엇이냐.”
“저는 려풍이라 하옵고, 선조님의 11대 손입니다. 한 숙조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나와 려 형은 어린 시절 형제처럼 지냈으니 네가 나를 숙조님이라 부르는 것도 아주 예에 맞지 않는 것은 아니다. 네가 조금 전에도 천소를 비호하며 나섰던 것으로 보아 그간 한 가를 위해 여러모로 애써주었을 것이 분명하구나.
내 한 가의 숙조로서 려 가 사람들의 노고를 치하하지 않을 수 없겠지! 이 단약들은 무공을 익히는 이들에게 큰 도움이 되는 것들이니 챙겨 두었다가 가문의 제자들을 양성하는데 요긴히 쓰거라.”
한립이 한 손으로 저물대를 스치니 하얀빛이 반짝이며 각양각색의 작은 약병들이 나타났다. 거한이 입이 귀에 걸려 좋은 티를 팍팍 내며 약병들을 받았다.
강호의 무인들은 수도자들에 비해서는 진척이 빨랐으나 그래도 내공을 쌓기 위해 수십 년 세월을 허비하고는 했다. 이 단약들이 있다면 려 가는 앞으로 훨씬 더 많은 고수들을 배출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본 중년 문인도 기대감 어린 눈빛으로 한립을 보고 있었다. 곧이어 한립이 허리춤의 영수대를 향해 손을 저었다.
웽웽웽웽.
동시에 천 마리가 넘는 삼색 서금충들이 미친 듯이 날아올라 사당을 채우니, 날벌레의 껍데기에서 기이한 빛이 반짝여 밤하늘에 뜬 수많은 별들을 연상케 했다.
문인과 거한이 눈을 부릅뜨고 기이한 광경을 기억 속에 담았다. 말없이 한립의 손가락이 날벌레 무리를 가리켰다.
천여 마리의 서금충들이 순식간에 하나로 결집해 삼색의 보검으로 변해 그의 손에 떨어져 내렸다.
우웅!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문인과 거한은 감히 입을 열지도 못했다. 한손으로 삼색의 검을 들고 다른 한손으로 그 날을 쓸어내리는 한립의 표정도 신중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한참 후 그가 길게 숨을 내쉬며 입에서 푸른 기운을 뿜어냈고 기운이 보검에 닿으며 푸른색을 띠는 낡은 검집으로 변해 칼날을 감쌌다.
“이 검은 내가 영험한 기충(奇蟲)을 응결해 만든 것으로 스스로 움직이며 적을 섬멸해 줄 거다. 이것을 사당에 둘 테니 한 가에 멸문의 위기가 닥쳤을 때 가솔들을 데리고 사당 안으로 피하면 고비는 넘길 수 있을 게다.
하지만 명심 하거라. 검은 내가 직접 조종하는 것이 아니니 일단 검이 뽑히면 사당 내의 사람들을 제외한 반경 십 리의 사람과 가축은 하나도 남길 없이 도륙을 당하게 될 것이다. 범인은 본래 무슨 수를 써도 안 되겠지만, 내 기운이 담긴 이 옥패를 차고 있는 한 검을 뽑아 발동할 수 있다. 그러니 옥패는 가주에게 전승하여 관리하게 하여라.”
“명심하겠습니다!”
눈앞에서 엄청난 광경을 목격하였으니 검의 위력에 대해 의문을 품을 여지가 없었다.
문인의 기뻐하는 얼굴에 한립이 담담하게 웃으며 바로 보검과 옥패를 그에게 건넸다.
“또한 검을 봉인한 검집은 세 번을 사용하면 기운을 다하고 만다. 매번 이 서금영검(噬金靈劍)을 사용할 때마다 검집은 얇아질 것이고 이용 회수가 세 번을 채우는 순간 검집이 사라져 검은 다시 기충으로 변해 사라지겠지.
가문의 큰 위기를 세 번 막아주는 것으로 내 사숙조로서의 도리는 다했다고 본다. 무엇이든 영원불멸할 수는 없으니 몇 백 년 좋은 시절을 누리다 쇠락해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
한립의 당부에 검과 옥패를 받는 한천소의 태도가 더욱 조심스러워졌다. 그의 신중하고 침착한 모습이 마음에 찼던지 한립이 다시 두 개의 담황색 약병을 꺼내 문인과 거한에게 하나씩 나눠주었다.
두 사람의 놀란 얼굴에 그가 웃으며 일렀다.
“조금 전에 준 것은 한, 려 두 가문의 몫이고. 이것은 가문의 후손인데다 나를 직접 만날 만큼 인연이 깊은 너희를 위해 따로 챙겨주는 것이다. 두 약병 속의 단약은 속세의 범인들이 복용하면 체력이 좋아지고 수명이 늘게 되지. 너희가 이것을 섭취한다면 100세 까지는 무난히 무병장수할 게야.”
“감사드립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한 숙조님!”
사이좋게 약병을 하나씩 든 문인과 거한이 뛸 듯이 기뻐하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