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367화 (124/2,000)

# 367

367화. 한 씨 가문의 사당

“청우진(靑牛鎭)?”

온 몸에서 푸른빛을 뿜으며 허공 위에 떠 있는 한립의 표정이 묘했다.

성곽은 비록 규모가 아주 작아 겨우 수 리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의 기억속의 작은 골목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하지만 기억 속의 위치는 이곳이 확실했다.

100년이 넘는 시간동안 작은 마을도 어느덧 번성해 규모가 커져있었다.

멍하니 허공에 떠있던 한립이 주저하다가 은닉술을 펼치며 사람이 다니지 않은 좁은 골목에 내려섰다. 그러고는 거침없이 얼굴을 드러내고 큰길을 향해 걸어 나왔다.

“다른 곳 같군.”

거리 양쪽으로 늘어선 건물이나 객잔들 중 눈에 익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서남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자신이 나고 자란 작은 마을이 나오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청우진을 돌아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겉으로는 차분했지만 속으로는 익숙한 무언가를 마주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차올랐던 것이다.

한립이 걸음을 늦추며 세 갈래 길에서 멈춰 섰다.

눈앞에 보이는 작고 오래 된 주루에는 춘향이라 쓰인 누런 편액이 걸려 있었는데 바로 그가 칠현문에 입문하기 전 삼숙과 이틀을 보냈던 곳이었다.

삼숙이 관리를 맡았던 춘향 주루를 보자 잊고 있던 기억들이 차츰 떠오르기 시작했다.

둥근 얼굴에 살집이 좋던 셋째 숙부, 주루 뒤편의 작은 정원, 어슴푸레하게 빛이 들던 주루의 낯선 방, 뜨거운 김이 올라오던 맛 좋은 음식, 칠현문을 상징하는 깃발을 꽂고 달려오던 검은 마차……. 모든 것들이 마치 눈앞에 펼쳐지듯 생생하게 재생되고 있었다.

주루를 바라보는 한립의 얼굴에 복잡한 기색이 떠올랐고 착잡한 눈빛을 감출 길이 없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본 사람들은 이상한 청년을 다 본다는 얼굴로 힐끔 거리며 지나쳤다.

청년이 꼼짝도 않고 오래된 주루를 보며 회한에 잠겨 있으니 충분히 그럴 만 했다. 마음을 다잡은 그가 다시 평소의 담담한 얼굴로 돌아와 주루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작은 주루의 문 앞에 이르자 단정한 차림의 점소이가 한립을 맞이했다.

그는 2층의 방을 잡지 않고 그냥 1층 구석 탁자에 앉아 몇 가지 요리를 시키고 안을 둘러보았다.

주루에는 온갖 사람들이 다 섞여 있었다. 유일하게 눈에 띠는 이들은 한 탁자에 모여 앉은 경장 차림의 체격이 우람한 사내들뿐이었다.

그들은 모두 길쭉한 보퉁이를 손이 닿는 곳에 세워두었는데 의식으로 속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도검류일 것이 분명했다. 거기다 통일된 복색으로 보아 같은 방회의 인물들인 것 같았다.

이런 모습이 한립에게 아주 친근하게 다가왔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다른 방회들과의 세력 다툼이며 싸움에 관련된 화제가 전부였다. 한립의 흥미가 다해 의식을 다른 이들에게로 옮겨갔다.

그때 주루 밖에서 젊은 문인 둘이 걸어 들어왔다.

“한 시랑께서 고향으로 돌아와 제를 올린다던데, 경주 주령(州令)이 친히 인사를 올리러 참석하는 것은 물론이고 범 가와 이 가에서도 축하 사절을 보낸다더군. 이번에는 한 가가 떠들썩해지겠어!”

“나도 들었네! 이번 제례를 위해 한 가에서 각지에 서한을 돌려 직계 방계를 막론하고 인근의 가문 사람들은 죄다 모은다더군. 거기에 조금이라도 세가 있는 지역 유지들도 무조건 참석을 할 기색이니 이번 제례를 기점으로 한 가가 범 가 이 가와 더불어 경주 삼대세가(三大世家)로 거듭나는 것도 시간문제야.”

“허허…… 겨우 100년 만에 이렇게 가세를 키우다니 대단한 일일세!”

“이상할 것도 없네. 한 가에서 어느 대인가 과거 시험 수석 합격자가 나온 이후로 대대손손 조정에 공로를 세우니 그것이 쌓여 가문도 덕을 봤지. 그보다 우리도 어떻게든 참석을…….”

두 문인들이 한립 바로 옆의 탁자에 자리를 잡았다.

‘한 씨 가문!’

한립이 자세히 들어볼 요량으로 귀를 기울였지만 이미 화제는 다른 이야기로 넘어간 후였다. 그가 생각 끝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두 문인들에게 다가갔다.

“저, 잠시 말씀 좀 묻겠습니다. 저는 한립이라 하온데, 조금 전 이야기 하시던 한 가가 어느 한 가를 이르는지요?  본가에서 제례를 올린다는 서한을 받고 이곳에는 처음 와보는 사람입니다. 어릴 적부터 외지에서 자라 본가와 왕래가 없어 그러니 두 분께 도움을 좀 청할 수 있을까요.”

미소를 띠고 다가선 한립을 보고 경계하던 문인들이 상대도 문인 복장에 말투 역시 고상한 것을 듣고는 의심도 없이 대답해주었다.

“아, 한 씨?  저희가 실례를 범하였습니다. 근처에서 한 가라 하면 당연히 오리구(五里溝) 한 가 뿐이지요!”

‘오리구!’

한립이 어릴 적 살던 산 아래 작은 마을은 다른 이들에게 이렇게도 불리기도 했다. 겨우 5리 정도 폭의 작은 산골자기 안에 위치한다 하여 ‘오리구’란 토속적인 이름이 붙은 것이다.

문인들이 떠들던 한 가는 십중팔구 그와 관계가 있는 곳으로 보였다. 한립이 전혀 동요 없이 온화하게 말했다.

“오리구 한 가라면 제가 찾는 본가가 맞습니다. 두 분께 자세한 집안 사정을 들을 수 있을까요?  본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무턱대고 찾아갔다가 우스운 꼴이나 당하지 않을까 염려가 되어 그러합니다.”

“아…… 뭐 대략적인 사정은 모르는 사람들이 없을 정도이니 당연히 이야기 해드리지요.”

두 사람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잠시 머뭇거렸으나 굳이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감사히 듣겠습니다.”

“제례에 참석차 오신 길이라면 일단 오리구로는 가지 마십시오. 이미 수 십 년 전에 한가보(韓家堡)라는 장원을 지어 수십 리 밖으로 이전을 하였거든요. 아마 제례 당일에나 오리구의 옛 거처로 모일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는…….”

고요히 문인의 말을 듣고 있는 한립의 마음이 요동쳤다.

* * *

두 시진 후 한립은 눈에 익은 작은 산 위에서 고요히 아래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곳이 기억 속의 산촌이 맞는가.’

뛰어 놀면 노란 흙먼지가 올라오던 작은 골목, 낮은 초가집들과 배고픈 어린 아이들 대신 커다란 기와집과 정갈하게 깔린 돌길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전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고개를 저은 그는 바로 이곳을 떠날 생각이었는데 돌연 장원의 가장 중간에 있는 한 누각으로 떨어져 내렸다.

거대한 규모라고는 볼 수 없었지만 다른 건물들은 모두 단층이었기에 누각이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누각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은색 글씨로 ‘한가사(韓家祠)’라 적힌 편액이 걸려 있었다.

한 가의 사당이라니, 기분이 묘했다. 몸집 좋은 종복 몇이 문을 지키고 있었지만 한립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사당 안으로 진입했다.

들어가자마자 기다란 통로를 중심으로 수 백 개의 나무 위패가 기다란 협탁 위에 올려져있었다. 아직 빈자리로 둔 곳은 후대를 위한 공간인 것 같았다.

한립이 위패들을 훑어보았지만 한 씨 성을 쓰고 있는 수백 명의 이름들은 낯설게만 느껴졌다.

그는 바로 2층으로 향했다.

2층에도 약간의 위패들이 모셔져 있었지만 훨씬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위패를 올려놓은 협탁은 고급스러웠고 중간에 놓인 거대한 청동 솥 안에는 향유가 그윽한 향기를 발산하며 녹고 있었다.

그러나 한립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이런 것들이 아니었다.

“한주, 한철, 한선생, 한…….”

익숙한 이름들이 서늘한 검은 위패로만 남아 있는 것을 확인하니 마음이 아파왔다.

속세에서는 도를 수행하는 이들은 무정해야 한다 하지만 어찌 인간으로 태어나 작은 감정의 동요도 없이 한 생을 살아갈 수 있겠는가. 범인들의 눈에 산을 무너뜨리고 바다를 가르는 신적인 존재라도 욕망과 감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살아남기 위해 눌러 담고 감출 뿐.’

석상처럼 굳어 있던 그가 결국 걸음을 떼며 가장 가운데에 모셔진 위패들로 다가갔다. 가족들과 따뜻했던 시절로 오랜 세월을 건너 되돌아가는 것 같았다.

잠시 후 굳게 닫혀 있던 사당의 문이 열리자 한립이 몽상 속에서 깨어났다. 아래층에서 두 명의 중년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형님, 성격이 급해도 너무 급한 거 아닙니까?  제례를 마치면 제가 본 서한을 직접 가져다준다니까요. 굳이 이렇게…….”

“헤헤헤! 서한 뒤에 우리 집안의 선조께서 남기신 이름 모를 보법이 적혀 있다면서?  아니, 우리 집안 선조가 직접 창제하신 무공인데 어찌 나는 들어 본 일이 없는지 궁금한데 어쩌나! 내가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라고. 그런데 이런 귀중한 것을 사당에 놓다니 누가 훔쳐가기라도 하면은 어쩌려고 그러나?”

“어휴, 누가 위패를 모셔 놓는 남의 집 사당에 들어와 무엇을 훔쳐간답니까?  게다가 저희 한 가의 사당이 용담호혈(龍潭虎穴)은 아니어도 밤낮 없이 무공에 정통한 노복들이 지키고 있으니 평범한 인물은 가까이 다가올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훔쳐낸다 해도 한 가의 보복을 감당할만한 가치가 있을까요?”

“그도 그렇군!”

탁탁탁.

두 사람이 계단을 다 오르자 유약해 보이는 문인 한 사람과 수염을 기른 거한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나타났다.

본래 웃음기가 가득했던 둘은 위패 앞에 뒷짐을 쥐고 선 한립을 발견하고는 얼굴이 굳어 버렸다. 거한이 흠칫 놀라 중년 문인의 앞을 막고는 소리쳤다.

“이 도적놈! 감히 사당까지 쫓아와 목숨을 노리다니 넌 죽은 목숨이다.”

말을 마치기 무섭게 거한이 주먹을 불끈 쥐고 도약해 한립을 덮쳤다.

거한이 근접하기도 전에 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내력에 주변 분위기가 달라졌지만 한립은 여전히 그들을 바라보지도 않고 서 있었다.

펑!

둔탁한 울림과 함께 거대한 주먹이 맹렬히 한립의 등을 노렸다.

“……!”

거한은 공격이 성공한 줄 알고 히죽 웃으려다가 크게 놀라 안색이 달라졌다.

푸른빛이 번뜩이더니 마치 사람이 아닌 거대한 종을 때린 방망이처럼 반동으로 튕겨 올랐던 것이다. 거한의 거대한 몸이 화살처럼 튕겨 나가다가 갑자기 속도가 줄어들며 가볍게 바닥에 안착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중년 문인은 안색이 급변하다가 다시 아연한 얼굴로 그를 지켜보았다.

“려 형, 괜찮습니까! 내상을 입은 것은 아닙니까?”

“멀쩡해. 상대는 경지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의 고수지만 우리에게 악의가 있는 것 같지는 않군.”

거한도 길게 숨을 내쉬며 자신의 몸 상태를 확인하고는 작게 속삭였다. 그 말에 문인도 조금 여유를 가지고 다시 한립을 바라보았다.

문인이 평정심을 유지하며 물었다.

“무사 분, 저는 한 가 가주인 한천소라 합니다. 이곳에서 저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계셨던 것인지요.”

“가주?”

드디어 한립이 천천히 몸을 돌려 두 사람을 마주보았다.

“다, 당신은…….”

“허어?”

미처 한립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중년 문인과 거한이 그의 외모를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하지만 문인이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표정이 심상치 않아졌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문인의 부정적인 태도에 거한도 얼굴을 굳혔다.

“……나를 알더냐.”

한립이 미간을 좁히며 두 사람을 자세히 살폈으나 두 사람의 용모에서 눈에 뛰는 점을 찾아낼 수는 없었다.

“어찌 모를 수가 있겠습니까. 저희 집안 사숙조의 초상을 구해 똑같은 모습을 하고 나타난 저의가 대체 무엇입니까?”

‘사숙조’라면 보통 아비의 넷째 숙부를 일컫는 칭호였다. 한립은 웃을 수도 없고 울 수도 없어 애매한 표정을 드러냈다. 중년문인이 어느 형제의 몇 대를 건너뛴 자손인지는 모르겠으나 자신이 집안 넷째였으니 사숙조라 함은 바로 그를 칭함이 아니겠나!

그저 이해가 안 가는 점은 어릴 때 집을 떠나 가족들조차 자신의 장성한 모습을 모를 텐데 어찌하여 초상화가 남아있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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