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6
366화. 쇄혼진인의 제자
“날 아느냐?”
한립이 눈을 반짝이며 흑의 노인을 바라보자 노인은 상대의 서늘한 눈빛을 감지하고는 서둘러 부인했다.
“아닙니다. 제가 사람을 잘못 보았습니다. 소인이 어찌 선배님을 알겠습니까!”
“사람을 잘못 보았다?”
턱을 분지르며 시선을 노인에게서 다른 흑의 수사에게로 돌리는 한립의 모습은 마치 그 말을 믿는 것 같았다. 회의 사내가 답답하다는 듯 흑의 노인을 힐끗거렸다. 그가 무어라 말하려는 찰나 한립이 먼저 차분히 말했다.
“너희 귀령문 수사들이 내 종적을 발견했으니 아주 운이 나쁘구나. 너희는 여기서 목숨을 내어 주어야겠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음산한 얼굴의 한립이 한쪽 소매를 털어냈다. 그러자 열댓 개의 푸른 검들이 방출되었는데 바람에 흔들리듯 어른거리더니 순식간에 3, 40개로 수가 불어나 하늘을 뒤덮었다.
회의 사내는 일이 잘 못되었음을 깨닫고는 곧바로 검은 기운을 흘려보내 전신을 보호했고 이어 금색과 은색의 삼지창 두 자루가 나타나 검은 기운과 함께 구렁이처럼 꿈틀거렸다.
방비를 마친 그가 검은 연기로 변해 달아나기 시작하는데 남아 있는 동문 수사들의 생사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 했다.
남은 귀령문 수사들은 흑의 노인을 제외하고는 한립의 검기에 속수무책으로 조각이 났고 노인 역시 한립의 손끝에서 나간 푸른빛을 맞고 쓰러졌다.
한립이 노인에게 시선을 거두고 벌써 백여 장 밖까지 날아간 회의 수사를 보며 입 꼬리를 비틀었다.
그가 손가락을 움직이는 대로 푸른빛들이 모여 푸른 거검으로 변하였다.
“가라.”
우웅.
거검이 부르르 떨더니 푸른 무지개처럼 하늘을 가로질러 검은 연기를 순식간에 따라 잡았다.
곧 회의 수사의 비명이 들리고 그를 보호하고 있던 보호막까지 단 번에 잘려나가 재로 흩어져 내렸다.
서늘한 얼굴로 법보를 회수한 한립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흑의 노인에게 시선을 주었다. 잠시 생각을 하던 그가 한 손가락을 들어 빼빼마른 몸을 가리켰다.
슉!
푸른빛이 순식간에 노인의 머릿속으로 사라졌다.
일다경이 지나고 빛을 거둬들이자 노인 역시 다른 이들처럼 재로 변해 소실되었다.
“합환종의 배신자라. 그리고 동훤아! 뜻밖에 그녀도 결단을 했군. 그런데 왜 사람을 풀어서까지 나를 찾는 거지?”
흑의 노인의 정체는 조금 복잡했다. 원래는 합환종의 제자로 문규를 어기는 큰 죄를 지어 혼을 뽑혀야 했는데 이름과 외모를 바꾸고 귀령문에 귀의해 지금까지 숨어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사소한 일이야 그의 관심 밖이었지만 놀라운 사실은 그가 동훤아의 수하로 부려진 적이 있었던 것이다. 이미 금단에 성공한 그녀는 합환종 제자들을 시켜 미친 듯이 한립의 소식을 수소문했다.
그 때문에 노인은 심지어 구국맹에 까지 침투했었던 기억이 남아 있었다. 당시 한립은 난성해에 있었기에 절대 찾을 길은 없었을 테지만.
노인은 바로 그때 한립의 용모가 담긴 족자를 보았기에 방금 전 그를 알아보았던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동훤아가 그에게 반해 오랜 세월 잊지 못해 찾아 헤맸다고는 믿지 않았다. 분명 그가 알지 못하는 사정이 있을 것이다.
아쉽지만 흑의 노인의 당시 지위로는 무슨 이유로 그를 수색했는지 작은 실마리조차 알지 못했다. 잠시 숙고를 해보아도 동훤아가 자신을 찾는 목적을 알 수 없자 일단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이렇게 오랜 세월이 지났으니 더 이상 찾을 이유가 없어졌을 가능성도 컸고 또 이미 원영에 성공한 몸으로 걱정할 것도 없었다.
정리를 마친 한립이 황풍곡 방향을 마지막으로 바라보고는 태악 산맥을 벗어났다.
그는 모르고 있었지만 우홍이 죽자 엄월종의 한 폐관실에서 여위지만 정신은 또렷해 보이는 검은 장포 수사가 크게 탄식하고 있었다.
“……!”
수사가 품에서 이미 빛을 잃고 암담해진 뼈로 만든 골패(骨牌)를 꺼내들었다. 골패를 만지작거리는 검은 장포 수사의 눈에서 매서운 기운이 넘실거렸다.
잠시 뒤 몸을 일으킨 그는 폐관실을 빠져 나왔다.
기다란 회랑을 지나 대청에 이른 그가 무표정하게 돌로 만든 커다란 의자에 앉더니 손에서 빛을 번쩍이며 청동으로 만든 작은 종을 불러냈다.
당!
그의 작은 손짓에 천둥과 같은 거대한 종소리가 낮게 울며 엄청나게 먼 곳까지 퍼져나갔다.
잠시 후 대청의 쪽문이 열리며 세 명의 결단기 수사들이 황급히 모여들었다. 두 사내와 한 여인으로 이루어진 결단기 수사들은 공손한 얼굴로 예를 올렸다.
“조금 전 너희 육 사제의 본명패(本命牌)가 빛을 잃었다. 무슨 일을 당했는지는 모르나 너희는 바로 흉수를 찾아 끌고 오거라!”
“존명! 제자들이 사부님의 명을 받들어 흉수를 잡아 오겠습니다.”
“그래. 다음에 너희가 나를 보러 올 때는 흉수가 곤선뢰(困仙牢)에 갇혀 있어야 할 것이야.”
검은 장포의 수사, 바로 귀령문 쇄혼 진인이 할 말을 마치고 다시 대청을 나가 버렸다.
이제 결단기 수사 세 명만이 대청에 남았다.
“오 사매는 바로 태악 분타로 전음부를 보내 육 사제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사정을 알아보고, 궐 사제는 다른 분타의 단주들과 친분이 있으니 수사들을 차출해 알아 볼 수 있는지 연락을 취해주게.
각자 문내의 실력 좋은 제자들을 데리고 육 사제가 마지막으로 발견된 곳을 수색해 본 후 단서를 찾으면 다시 모이도록 하지! 어쨌든 육 사제를 죽인 자이니 수행이 만만치 않을 것이 분명해. 다들 조심히 움직이자고.”
세 수사 중 새까만 옷을 입은 수사가 다른 사제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다른 두 수사는 우아한 자태의 여인과 전신에 음산한 기운이 가득한 비단옷의 서생이었다.
여인은 바로 지시에 응했지만 서생은 얼굴을 찌푸리며 조금 주저하다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궐 사제. 나도 자네와 육 사제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는 것은 아네. 아니, 불화가 있었다고 봐야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사부님께서 친히 내리신 명을 수행하지 않을 생각인가? 일전에 이 사형과 칠 사제가 일을 그르쳐 엄벌을 받았던 것을 잊지 말게.”
흑의 사내가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는 듯 서생을 향해 냉랭히 경고했다. 궐 사제라 불린 서생이 바로 표정을 달리하며 억지웃음을 터트렸다.
“제가 감히 어찌 그런 마음을 품겠습니까. 저와 육 사제 사이가 소원했지만 이미 고인이 된데다 사부님의 명까지 있으니 전력을 다해 흉수를 찾을 것입니다. 사형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공사를 구분할 줄 아니 다행이네. 그럼 움직이지!”
세 수사가 대청을 나서 곧바로 흩어졌다.
며칠 후 귀령문 수사들은 우홍이 살해당한 주변을 샅샅이 수색한 끝에 한립의 옛 거처를 발견해냈다.
쇄혼진인의 세 제자가 그 소식을 듣고 한립이 뚫어 놓은 동굴로 들어가 영안의 샘을 챙겨 사라진 흔적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이미 태악 산맥 부근에서 멀리 떨어진 함운지와 류옥이 어령 제자들을 이끌고 다급하게 산맥을 넘어 월국 국경으로 향하고 있었다.
경주는 월국 서북부 변방에 위치한 곳이었다. 큰 고을이나 성곽은 없지만 몇몇 작은 마을들이 있어 드문드문 모여 사는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도둑과 같은 잡범들이나 강호의 조무래기들이 범람하여도 무림의 큰 세력들이 이 구역을 정리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자연히 이곳에 거주하는 백성들은 스스로 살아남을 수밖에 없었고, 이곳을 통과하는 상인 무리를 지키는 표국도 규모가 커졌다.
오늘 황야의 어떤 구릉에서 경주 각지에서 늘 벌어지는 장면이 또 한 번 연출되었다.
두꺼운 광목옷을 입은 100명이 넘는 거친 사내들이 머리에 검은 두건을 쓰고 형형색색의 병장기를 휘두르며 30명의 청의인들을 공격하고 있었고, 청의인 또한 높게 짐을 쌓아 올린 마차를 겹겹이 둘러싸고 지키고 있었으니 아주 흔한 도적과 표국 표사들의 생존을 건 격렬한 싸움이었다.
도적들의 뒤쪽에는 비슷한 인상의 흑의인 셋이 서서 냉랭히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차 주변에는 하인 복장을 한 청색 의복의 청년들이 긴장한 얼굴로 방망이 같은 것을 들고 서 있었고, 뒤쪽에는 화려한 복색을 한 부녀자들이 앞쪽의 마차에는 침착한 얼굴의 중년 문사가 단정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중년 문사는 검은 턱수염과 콧수염을 기르고 있었는데 힘이 없어 보이는 유약한 체격과 달리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가 풍겼다. 또한 그의 맞은편에는 남색 비단 옷을 걸친 구불거리는 수염의 거한이 마차에 등을 기대고 가부좌를 하고 앉아있었다.
팔뚝이 굵고 눈이 부리부리한 것이 놀랍게도 강호에서 보기 드문 절정의 고수였다.
두 사람의 신분은 완전히 달랐지만 이런 상황 속에서도 침착한 것이 닮아 보였다. 창을 통해 교전소리가 그대로 전해졌다.
검은 두건을 쓴 도적들은 수가 훨씬 많았으나 푸른 의복의 표국 표사들의 수준이 높아 한동안은 승부가 날 것 같지 않았다. 상황을 지켜보던 문사가 별안간 미소를 보이며 마주 앉은 거한에게 말했다.
“보아하니 려 형이 나서지 않아도 천무 표국이 당하지는 않겠는데요!”
“하하! 흑건도(黑巾盜) 우두머리들이 직접 오지 않는 한 천무표국이 이런 조무래기들에게 당할 일은 없다. 만일 그 세 놈이 나선다면야 표사들도 버티기 힘들겠지. 그들은 경주에서도 악독하기로 유명한 자들이니 말이야. 흑건도의 세 수령들이 협공에 능해 상당한 고수라도 셋을 한 번에 상대하기는 어렵다더군.”
거한은 말을 하면서 점차 투지가 솟는지 두꺼운 손가락을 굽히며 근육이 터질 듯한 소리를 냈다. 육체 능력을 상승시키는 외문 공법을 극성으로 익힌 듯 했다.
“려 형도 참! 누군가와 다툴 생각만하면 손이 근질근질 거리는 가 봅니다? 려 백부님을 빼다 박았네요.”
문사가 거한의 모습에 빙긋 웃으며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야 당연한 거 아닌가, 아우님! 우리 려 가 사람들은 대대로 무를 숭상해서 흥미로운 상대를 만나면 겨뤄보고 싶어 몸부림을 치는 게 특징이니까. 대대로 유명한 학자를 배출한 한 씨 가문 사람들과는 다를수 밖에. 이렇게 지향하는 바가 다른 조상님들이 당초 어떻게 세대 간에 걸친 교분을 쌓기 시작했는지가 항상 의문일세.”
“허허! 일전에 우연히 작고하신 문중 어르신들의 서한을 정리하다 예전 일들에 대한 기록을 본 일이 있습니다. 려 형이 관심이 있다면 이야기는 해줄 수 있으나 믿고 안 믿고는 제 소관이 아닙니다.”
“정말인가? 우리 려 가에는 그런 기록을 남길 만한 조상님도 없었네. 기껏해야 무공 서적 몇 권이 전부지. 양 가에 관한 이야기는 일절 들어본 일이 없어.”
려 씨 성의 거한이 바로 호기심을 보이며 꽤나 들떠했다.
“이런, 세 놈이 나섰군! 잠시만 기다리게. 일단 저 놈들을 처리하고 와서 다시 이야기 하자고.”
구불구불한 수염을 휘날리며 고개를 홱 돌린 거한이 무언가를 감지하고는 화살처럼 마차 밖으로 튀어나갔다. 이어 밖에서 거한의 웃음소리와 병장기가 부딪치는 서늘한 마찰음이 커져만 갔다.
문사가 작게 한숨을 쉬곤 마차 창문의 휘장을 내려 밖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거한에 대한 믿음이 깊은 모습이었다.
일다경이 지나고 모든 소란이 차츰 잦아들었다.
마차의 휘장이 펄럭이며 거한이 먼지가 묻은 의복을 툴툴 털며 들어왔다. 어깨에 붉은 기운이 도는 것이 가벼운 부상을 입은 것 같았다.
“하하핫! 듣던 대로 세 놈들이 뭉치니 한 가닥 해서 조금 시간이 걸렸네. 그래도 오늘 부로 경주에 흑건도라는 도적 무리는 사라졌다고 보면 돼.”
문사가 그의 부상에 미안한 마음을 드러냈다.
“려 형이 동행해 주지 않았다면, 고향으로 돌아가 조상님께 제를 올리려다 이 한천소가 명을 달리할 뻔 했습니다. 몇몇 적수들이 저에 대한 원한이 골수에 사무쳤나 봅니다! 괜히 저 때문에 려 형이 말려들까 걱정입니다.”
“말려들다니? 려 가가 지금까지 강호에서 무사히 살아남은 것은 한 가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네! 자네의 일이 바로 내 일이나 다름없어.”
문사가 피식 웃으며 미안한 감정을 과감히 털어버렸다.
“맞습니다! 제가 괜히 감성적인 소리나 늘어 놓았네요.”
금창약을 꺼내 어깨에 바르던 거한이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잠깐! 그래도 약속한 이야기는 해줘야지! 궁금해서 걸음을 떼기 힘들었다고.”
“그래야지요. 말하자면 두 가문이 연을 맺게 된 계기가 참 신기합니다. 혹시 수십 년 전 경주성의 패권을 장악했던 칠현문을 기억하십니까? 저희 가문의 조상님들이 뜻밖에도 그 강호 방파에서 만나 사형제로 인연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친형제처럼 가까웠던 두 분은 서로 의지하며…….”
중년 수사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동안 청의인들은 시체를 매장하고 다시 길을 재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