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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364화 (121/2,000)
  • # 364

    364화. 유언과 유품

    한립이 가볍게 둘둘 말린 족자를 펴서 바라보았다.

    푸른 천삼을 걸친 남자가 미소를 머금고 서 있었는데 한립 자신의 모습 그대로였다.

    한참 멍하니 바라보던 한립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족자를 접었다. 그는 침묵하다 부인을 직시하며 차분히 물었다.

    “어찌 그대의 조모가 이것을 남겼는지 알 수 있겠나?”

    잠시 주저하던 부인이 조심스레 입을 뗐다.

    “한 선배님 그 답을 드리기 전에 제가 먼저 한 가지 질문을 올리고자 합니다. 혹시 당초 신여음 아가씨와 했던 약조를 기억하시는지요?”

    “그렇다. 그 일에 대해 아는가?”

    “사실 제가 이곳에서 기거하며 버틴 이유는 바로 그 약조와 관계가 깊습니다. 다만 선배님께서 아직 약조를 이행하지 않으셨다면 더는 말씀 드릴 수 없다는 점을 용서해 주십시오.”

    그녀는 한립을 힐끗 보며 불안해하면서도 할 말을 다했다.

    탁!

    네모난 목합이 한립의 저물대에서 나와 탁자 위에 떨어졌다.

    “이것은…….”

    놀란 가슴을 붙들고 부인이 한립의 의도를 몰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긴장하지 말게. 안에는 부 가 가주의 머리가 들어 있으며 이미 부 가의 직계 제자들은 모두 사라졌네. 남은 방계 제자들로는 앞으로 원무국에서 가문을 재건할 일이 요원하겠지. 이것이면 당시의 약조는 이행한 것으로 보아도 되겠는가?”

    “예에?  부, 부가가 선배님에 의해…….”

    크게 놀라 목함을 바라보던 여인이 이를 악물고 목함을 열자 피비린내가 진동을 했다. 하지만 안에 든 것은 냄새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정말 부 가 노인이군요. 오래 전 몰래 찾아가 멀리서나마 원수의 얼굴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

    창백해진 얼굴이었지만 부 가 노인의 얼굴이 맞음을 확인한 그녀의 얼굴에 기쁨과 놀람이 교차했다.

    “며칠 전 일이니 이미 소식이 퍼져나갔을 터. 부인은 가까운 지인이나 방시를 찾아 소식을 확인하게.”

    “이걸 들고 이곳에 찾아오신 것은 그러면…….”

    “그렇네. 오랜 벗들을 기리기 위함이지. 한 평생 벗이 몇 되지는 않았지만 신 소저와 제 수사의 원수를 갚았으니 그들에게 할 도리는 다했다고 보네.”

    “아가씨와 공자님의 원한을 풀어 주시다니 저 세상에서도 그분들이 기뻐해 마지않을 것입니다! 선배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여인이 다급하게 말을 맺고는 바로 문을 나섰다.

    이번에는 대나무 누각들이 있는 뒤쪽으로가 거대한 나무 아래를 파내더니 은은한 녹색이 도는 옥함을 꺼내 들고 돌아왔다.

    “이것은?”

    “한 선배님. 오래 전 신여음 아가씨는 병으로 세상을 뜨기 전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이 옥함 속의 물건을 선배님에게 전하라고요. 다만 반드시 선배님께서 그분과 하신 약조를 지키셨을 때, 부 가가 멸문을 당한 뒤에 말입니다.

    아가씨의 하녀였던 조모께서 명을 지키고자 평생을 이곳에서 살다 돌아가시며 이 일을 제게 남기신겁니다. 친히 그린 초상화를 남겨 제가 혹여나 선배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일을 그르치지 않을까 대비하신 거지요.

    오늘 선배님께서 오래 전 약조를 지키신 후 여기까지 찾아 주셨으니 유언에 따라 이것은 선배님의 것입니다. 저도 이제 큰 짐을 내려놓은 기분입니다.”

    그녀도 한결 마음이 편해진 듯 했다. 보아하니 그간 이 일로 항상 신경이 쓰였음이 분명했다. 한립이 의식을 이용해 옥함 안을 살피고는 바로 그것을 들어 뚜껑을 열어보았다.

    안에는 은은한 푸른빛이 도는 옥으로 만든 서책이 놓여 있었는데 그 위에는 노란색과 은색 부적이 붙어있었다.

    부인도 옥함 안을 보며 궁금한 기색을 드러냈다. 한립이 고개를 들었다.

    “어찌 수사도 처음 보는 것인가.”

    “예. 선배님을 속이지는 않겠습니다. 아가씨께서 이것을 보관하라 하셨지 보지 말라는 말은 남기지 않으셔서 조모가 한 번 내용을 살피려 한 적은 있다고 들었습니다. 허나 몇 초 되지 않아 피를 쏟으며 쓰러져 3일 밤낮을 정신을 잃으셨고 이후 바로 고계 부적을 사서 이것을 봉인해 버리셨습니다.

    후인들이 호기심에 보았다가 몸을 상할까 염려하신 게지요. 그 후 자손들의 수행은 조모에 미치지 못했기에 아무도 이것의 내용을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한립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 옥간을 향해 입김을 부니 푸른 안개가 흘러 나와 부적들을 감싸 떨어뜨렸다.

    “……!”

    전혀 아무렇지 않게 이런 일을 해내는 것을 보곤 옆에서 지켜보던 부인이 속으로나마 크게 놀랐다.

    오랜 세월 부적을 떼어보려는 시도를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봉인을 위한 고계 부적의 수준이 엄청난 것으로 아는데 겨우 입김 한 번에 금제를 해제하다니 수행의 깊이가 상상을 초월했다.

    이전에도 축기기 수행을 지녔었는데 이제 부 가 전체를 멸문하고 부 가 노인의 머리를 베어왔으니 적어도 결단기 후기 심지어 원영기 수사일 가능성도 있었다.

    한립이 소리 없이 서책을 살피고 푸른빛이 반짝이더니 손에 들고 있던 옥간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좋군. 내게 도움이 될 만한 물건이니 사양하지 않고 받아 두겠네. 다만 내게 이걸 전하기 위해 오랜 세월 여길 지키고 있었다니 그냥 가기 마음이 편치 않군. 여기에는 홀로 기거하는 겐가?”

    “아닙니다. 부군도 자질은 낮아도 수도자인지라 저와 비슷한 수준의 연기기 수사입니다. 부족한 아들은 그래도 영근 자질이 괜찮은데 아직까지 제대로 된 지도를 받지 못해 수도종파에 들거나 하는 연을 얻지는 못하였습니다. 서, 선배님께서… 제…….”

    여인이 한립이 먼저 운을 떼자 방망이질 치는 가슴을 애써 달래며 이야기를 꺼냈다. 자신과 남편은 그렇다 치더라도 아들이라도 높은 수행의 사부를 모시고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면 이런 부탁을 못 할 것도 없었다.

    다만 이런 말을 함으로서 고인의 심사를 어지럽힐까 두려운 마음은 여전했다.

    “더 말 할 것 없네. 부인의 뜻은 알겠으니!”

    차분한 얼굴의 한립이 바로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막자 부인이 흠칫 놀라 입을 다물었다.

    “수사가 매 소저의 후인인데다 나를 위해 물건을 이리 오래 보관해 주었으니 자제를 제자로 받지는 않더라도 축기의 기회 정도는 주어야 옳겠지. 축기단과 연기기 수행에 큰 효용이 있는 단약 두 병이네. 축기에 성공하고 말고는 스스로의 운에 맡겨야겠지만 일단 축기기 수사가 되면 분명 받아 주는 수도대파가 있을게야.”

    “축기단이요?”

    그가 품에서 꺼낸 작은 약병 세 개에 부인이 좋아 어쩔 줄 몰라 했다. 순간 느낀 실망감은 이미 사라져 버린 지 오래였다. 한립이 그 틈을 타 지나가듯 물었다.

    “그렇지, 부 가를 멸했지만 마염문 수사들이 엮여 있어 성가신 일이 생겨서는 안 될 텐데. 이 일에 대해 부군이 아시나?”

    영민한 부인이 바로 한립이 걱정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고 서둘러 답했다.

    “선배님, 마음 놓으십시오! 조모께서 임종 전에 신신당부 하시기를 선배님에게 성가신 일이 생길 일은 절대 만들면 안 되다며 비밀을 엄수하라 이르셨습니다. 저는 평생 명을 받들어 부군은 물론이고 자식에게도 일언반구를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럼 다행이네. 나는 신 소저와 제 수사를 위해 잠시 시간을 가질 것이니 이만 가보겠네.”

    한립이 몸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 부인이 따라 일어났다.

    “벌써 이리 가십니까?  잠시 후면 부군과 아들 녀석이…….”

    틱!

    말을 다 마치지 못하고 하얀 빛과 함께 부인의 몸이 허물어졌다. 한립은 미리 방비를 해두었던 듯 바로 소매를 흔들어 빛을 뿜었고 그녀의 몸이 무사히 바닥에 안착했다.

    하얀빛이 사라지며 은월의 화신인 작은 여우가 나타났다.

    “주인님 갑자기 왜 이 여인을 기절시키라 하신 거예요?  무슨 이상한 구석이라도 있다거나 아니면 이 여인이 마음에 드신다거나.”

    은월이 웃음을 흘렸다.

    한립이 코웃음을 치며 언짢은 기색을 드러냈다.

    “무슨 헛소리야. 나와 나름 인연이 있는 자니 오늘의 기억을 지우려는 것이다. 자기도 모르게 오늘 일을 발설해 화를 자초하는 일을 방지하는 셈이지.”

    이어 푸른빛을 뿜는 다섯 손가락을 부인의 머리에 얹어 현음경에 기재된 몽인술(夢引術) 비공을 시전했다. 중요한 대목의 기억을 봉인하고 왜곡해 오늘 관대한 고인을 만나 우연히 축기단과 단약들을 얻었다 믿게 만든 것이다. 한립과 연관된 기억은 모두 봉인이 될 것이다.

    이것은 이전의 상대의 정신을 통제하는 공신술이나 이전에 사용하던 무침(無憂針), 망진단(忘塵丹)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비술이었다. 한립의 수행을 훨씬 넘어서는 수사가 친히 나서지 않는 한 아무도 기억을 회복시키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 비술은 두 수사간의 수행의 차이가 굉장히 큰 경우에만 제대로 실행할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당하는 사람의 의식에 영구적인 손상을 남길 수 있다는 단점을 갖고 있었다.

    한립도 여인의 수행이 턱없이 낮았기에 안심하고 이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그는 여인을 의자에 제대로 앉혀 놓고 이 틈을 타 신여음과 제운소의 위패를 모셔 놓은 사당에 가 인사를 했다. 그리고 부 가 노인의 머리를 재로 만들어 버리고는 유유히 그곳을 떠났다.

    * * *

    “주인님, 옥간 안에 무엇이 적혀 있었나요?  중요한 건가요?”

    은월이 다시 기령으로 화해 한립의 머릿속에서 중얼거렸다.

    “만황 시기의 진법과 관련된 경전이다. 지금의 내 실력으로 단시간 내에 익힐 수도 없는 상고 시대의 심오한 대법이 담겨 있지. 그뿐 아니라 마지막 부분에는 아주 흥미로워 보이는 특수한 비술이 적혀 있더군.”

    하늘을 날아가며 한립이 느긋하게 중얼거렸다.

    “비술이요?  현음경까지 지니신 주인님이 대체 어떤 비술이기에 흥미롭다고 하실까요.”

    “명성이 자자한 ‘일기화삼청(一氣化三清)’을 들어 본 적 있더냐.”

    “예?  거기에 도가 제일의 공법이라 불리는 일기화삼청이 적혀 있다고요? !”

    은월의 웃음소리가 가시고 목소리마저 흥분으로 떨려 왔지만 한립은 단번에 부정했다.

    “당연히 아니지.”

    “에이, 은월을 놀리시는 거예요?  하긴 그런 대단한 비술이라면 도가에서 쉽게 외부에 노출할 리 없겠죠. 이미 그들 내부에서도 실전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잖아요.”

    “옥간에 기재된 비공은 일기화삼청이라는 심오한 공법은 아니지만 비슷한 종류의 마도 술법인 현목화영대법(玄牡化嬰大法)이다.”

    이 말을 하며 차분하기만 했던 한립이 마음도 약간 들떴다.

    “현목화양대법! 한 번도 못 들어 봤는걸요.”

    “나 역시. 그것은 원신을 배양해 두 번째 원영을 배출할 수 있는 공법이지.”

    “두 번째 원영이라니! 정말요?  그게 가능하면 일기화삼청과 다를 바가 없는 엄청난 공법인 거잖아요!”

    다시 진중해진 한립의 어조에 은월이 또다시 흥분했다. 한립의 능력이 커질수록 그녀의 목표와도 한 걸음 가까워지게 된다!

    “정말인지 아닌지는 곧 알게 되겠지. 낙운종으로 돌아가 자세히 연구를 해봐야겠지만 앞쪽에 기재된 것은 명실상부한 상고 시대 진법이니 함께 복제된 비술이 가짜일 가능성은 적을 거다.”

    “놀랍게도 이런 공법을 가져다 바치는 사람이 있다니 주인님께는 운이 따르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도가 비술에 맞먹는 마도 비공을 익히려면 분명 그에 상당하는 병폐가 있을 텐데요. 위력이 뛰어날수록 반작용도 크겠지요. 돌아가면 이 점을 주의해서 비술을 연구하셔야 할 것 같아요.”

    “안다. 만일 이상한 점을 발견하면 익히지 않으면 그만이지.”

    분명한 답을 얻고 난 은월은 바로 안심을 했지만 곧 이상하다는 듯 물어왔다.

    “주인님, 지금 날아가는 방향은 계국 쪽이 아닌데요. 바로 낙운종으로 돌아가시는 것 아니에요?”

    “당분간은 돌아가지 않는다.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월국을 살피고 가야겠지. 내 출신지이기도 하니 속세의 인연과도 확실한 매듭을 지어야 하니까. 그러지 않았다가는 언젠가 마음의 걸림돌로 남아 이후의 정진에 방해가 될 거야.”

    “그도 그러네요. 철저히 세속의 정을 끊어내야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진정한 도에 이를 수 있을 테니까요.”

    “쉿, 전력을 다해 가야하니 이제 조용히 해.”

    한립이 냉랭히 말하고는 즉시 푸른 빛줄기로 화해 몇 배의 속도로 하늘을 갈랐다. 곧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는 몰랐지만 그와 만 리 정도 떨어진 곳에 녹의를 입은 수사들이 수풀을 뒤지며 공포에 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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