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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362화 (119/2,000)
  • # 362

    362화. 멸문

    한립은 차분한 얼굴로 무리의 마지막에 안으로 들어갔고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그의 바로 앞에서 걸어가던 수사나 그들을 감시하라 명을 받고 잠복해 있던 부 가의 제자들이나 아무도 이상한 낌새조차 느끼지 못했다.

    부 가의 축기기 수사들은 화려하게 치장된 어느 대청 안에서 손님들을 맞는 중이었다. 거의 300명은 될 법한 손님들은 오늘 도착한 이들도 있었고 4, 5일 전부터 미리 와서 머물고 있던 이들도 있었다.

    이제 기다리던 연회 날이 되었으니 다들 한 곳에 모여 부 가 노인이 모습을 나타내기를 기다릴 일만 남았다.

    다만 그들 중 산수들은 자기들끼리 모여 수근 거렸고 오직 문파와 가문에서 축하사절로 파견된 이들만이 부 가의 수사들과 친밀하게 한담을 나눌 기회가 있었다.

    부 가 가주는 대청 인근에 있지 않고 성 내의 한적한 누각 안에서 은은하게 빛나는 옥으로 만든 책을 보고 있었다.

    어차피 연회의 주인공은 마지막 순간에 등장해서 얼굴을 비추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이 한산한 시간을 틈타 가문의 권력자로서 꼭 처리해야할 일이 있었다.

    누각 안에는 그 외에도 당당한 용모의 구릿빛 피부를 가진 거한이 서 있었는데 결단 초기에 이른 수사였다. 허리춤에는 크기가 제각각인 가죽주머니들이 묶여 있었다.

    “흥! 이곳이 자금국도 아닌데 어령종에서 사라진 무언가를 찾으려 감히 우리 보고 인력을 차출해 소식을 캐내라 하는구나?  우리 부 가를 무슨 장기 말의 졸로 보는 것도 아니고!”

    부 가 노인이 탁자를 내리치며 음산하게 중얼거리는 소리에 거한은 흥미롭다는 듯 턱을 쓸어내렸다.

    “숙부님 노여움을 거두시지요. 옥간 속에 다른 말은 없습니까?  어령종 수사들이 이리 긴급하게 찾으려는 물건이라면 비상한 것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바로 그게 문제라는 게다. 우리에게 찾으라면서도 구체적인 내용은 숨기니! 원무국 내에 이상한 조짐이 생기면 즉시 보고하라는 구나.”

    “오, 그렇다면 어령종은 이 사실이 마염문에 알려지기를 원치 않는다는 소리군요. 그래서 저희 부 가에 연락을 취하면서도 구체적인 정보는 언급하지 않는 거고요.”

    “그래, 네 말이 맞다. 우리는 겉으로는 마염문에 전폭적으로 지지를 하면서 만일을 위해 어령종에도 줄을 대고 있었지. 그런데 오늘 일을 보니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 차라리 전략을 수정해서 마도육종 중 세력이 가장 약한 귀령종과 친분을 쌓아 보는 것이 났겠어.”

    “그렇게 해도 되긴 하지만…….”

    “쯧쯧! 부 가가 마염문에 한 다리를 걸쳐 놓은 것은 알았지만 어령종과도 결탁하고 있었군. 그러니 겨우 100년 만에 이리 커져 버렸겠지!”

    거한이 의견을 밝히려는 찰나 창 밖에서 낯선 남성의 목소리가 전해졌다.

    “누구십니까?  어느 고인께서 친히 부 가를 방문해 주셨는지. 저 부천화가 친히 영접을 나가지 못한 것을 사죄드립니다!”

    부 가 노인과 거한이 놀라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지만 노인은 놀란 와중에도 현명한 판단을 했다. 결단에 이른 두 사람이 눈치 채지 못하게 이리 가까이 접근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영접까지는 필요 없어. 난 초대 받지 않은 손님이거든.”

    목소리와 동시에 누각 안에 갑자기 푸른빛이 범람했다. 부 가 노인과 거한이 크게 놀라 급히 몸을 움직여 각자 방의 다른 구석으로 몸을 피하며 보호막을 형성해 냈다.

    부 가 노인은 입에서 하얀 비검을 방출해 그 앞을 선회하게 했고 거한은 차분하게 허리춤의 영수대 중 하나를 쥐고는 묵묵히 때를 기다렸다.

    이때 푸른빛이 순식간에 사라지며 방 안에 푸른 장포를 걸친 아주 평범한 인상의 20대 수사가 나타났다. 바로 성 내에 숨어 들어온 한립이었다.

    한립은 뒷짐을 지고 서서는 경계심이 가득한 두 수사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뗐다.

    “의식으로 훑어보니 부 가 전체에 결단기 수사가 셋이고 그 중 너희 둘의 수행이 가장 높더구나. 너희가 바로 부 가 권세의 핵심이겠지!”

    말을 하면서도 지극히 담담한 것이 한립의 얼굴에서 희로애락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원영기 선배님께서 누추한 곳까지 왕림해 주셨습니다! 저희 부 가가 무엇을 해드리면 되겠습니까?”

    자신의 수행을 고스란히 드러낸 한립을 보며 노인은 희미한 미소를 보이며 불안한 마음을 감추었다.

    “네가 그 부 가의 어르신이냐?”

    눈을 가늘게 뜬 한립의 시선이 보랏빛 장포를 입은 노인에게 향했다.

    “어찌 감히 선배님 앞에서 어르신이란 칭호가 적합하겠습니까. 소인 부천화 그저 부 가의 당주를 맡아 일을 하는 노인네일 뿐입니다.”

    공손히 답을 하면서도 한립의 감정 없는 언사에 노인의 불길한 예감은 더욱 강해졌다.

    ‘분명 좋은 의도로 찾은 것은 아닐 터!’

    “그래, 네가 부 가 가주라니 내가 사람을 잘못 찾아 온 것은 아니군. 부 가에 진 빚을 받으러 왔으니 가주인지 확인을 해야 해서 말이야.”

    “빚이요?  그럴 리가. 제 평생 선배님을 처음 뵙는 데 무슨 오해가 있으신 듯 합니다.”

    노인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옆에 있던 거한 역시 혈색이 사라지며 더욱 영수대를 쥔 손에 힘을 더했다. 원영기 수사가 친히 ‘빚’을 받으러 왔다니 그냥 불길한 정도가 아니라 재해를 앞둔 것과 다름없었다.

    “오해라니, 그럴 리가 있나?  원래는 이유를 분명히 밝혀 너희가 죽어서 이유도 모르고 구천을 떠돌게는 하지 않으려 했는데. 너무 잔머리를 굴리는 통에 허튼 소리를 할 틈을 주지 않는군. 일단 먼저 가 있거라. 나머지 부 가 식솔들은 곧 뒤따라 갈 테니.”

    여기까지 들은 부 가 노인도 더는 참지 못하고 화를 터트렸다.

    “뭐라고요?  우리 가문을 멸문이라도 시킬 셈입니까!”

    그러나 몸은 더 없이 차분하게 움직이며 노란 부적을 번뜩이더니 뒤쪽 담을 향해 쏘아져나갔다. 뜻밖에도 아주 희귀한 토둔부(土遁符)였다.

    “도망을 가?  도망갈 수 있다고 보느냐?”

    냉소한 한립이 부 가 노인에게는 어떤 조취도 취하지 않고 어떤 방향을 향해 아무렇게나 손가락을 가리켰다.

    곧 푸른빛이 번뜩이며 나타났다가 사라지더니 순식간에 방구석에 움츠리고 있던 거한의 가슴을 뚫어버렸다. 그의 보호막은 순식간에 부서져 있으나 마나했다.

    거한이 손에 들고 있던 영수대는 검은 빛이 감돌았으나 그의 숨이 끊기는 순간 다시 암담해졌고 안에서 무언가 분노한 포효가 들려올 뿐이었다.

    거한의 시체가 허물어지는 순간 한립의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어차피 결단기 초기 수사를 죽이는 것은 시답잖은 일이었지만 그의 영수대에는 자못 관심이 가 이미 거둬들인 상태였다.

    그리고 나서야 그가 부 가 노인이 사라진 방향을 향해 싸늘한 미소를 보였다. 그가 한 쪽 소매를 털어내니 안에서 하얀 빛의 여우가 튀어 나와 폴짝거렸다.

    “토둔술에 능하니 저 놈은 네게 맡기마. 네 수행과 환술의 조화면 겨우 결단 중기 수사쯤 상대하는 것이야 식은 죽 먹기겠지.”

    “그렇죠! 주인님 잠시만 기다리세요! 금방 다녀올게요!”

    작은 여우의 얼굴이 거만한 표정을 짓더니 노란 빛을 반짝이며 사라졌다.

    한립은 이때서야 허리춤의 영수대에서 무수히 많은 삼색 서금충을 불러냈다. 벌 떼처럼 날아오른 거대한 비충들의 무리가 그의 머리를 맴돌았다.

    “가라!”

    동시에 비충들이 무리를 나누더니 순식간에 10자루의 삼색 소검으로 변해 창밖으로 쏘아져나갔다.

    이어 그가 방 중간에 자리를 잡고 가부좌를 틀었다. 대연결을 운용해 부가 전체를 그의 강력한 의식 아래 두려는 것이었다.

    부 가 직계를 구분해 내는 것은 무척 쉬웠다. 특유의 복색은 물론이고 그들 고유의 공법을 몇 성까지 익혔는지 조차 알아낼 수 있었다.

    다만 성 내의 법력이 전무한 범인 일꾼들은 그가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의식의 인도 하에 삼색 비검들이 부 가 수사들을 노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처절한 비명과 놀란 사람들의 외침 그리고 피비린내가 부 가 안에서 진동을 했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동안 부 가 노인은 땅 속 깊은 곳에서 토둔술 부적의 힘을 빌려 전력을 다해 달아나는 중이었다.

    그는 일단 아주 멀리 달아날 생각이었다. 자신의 제자들과 식솔들은 어떻게 하고 싶어도 이미 그의 손을 떠난 문제였고 지금은 어떻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거한이 가문의 영수를 지니고 있다지만 원영기 수사의 손에서 달아나려는 생각은 망상에 불과했다. 그가 자신을 위해 잠시만이라도 시간을 벌어준다면 다행이었다.

    다른 부 가 식솔들의 명줄과 자신의 목숨을 놓고 저울질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내가 살아야해!’

    그만 살아남아도 부 가는 멸문을 피할 수 있었다.

    자도산 본가를 제외해도 원무국 여러 지역에 부 가의 기반이 될 만한 거점이 여럿 있었으니 그만 이 위기를 피할 수 있다면 부 가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일이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유일하게 마음에 걸리는 것은 도무지 어쩌다가 낯선 원영기 고인과 척을 지게 된 것인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나타나자마자 우리 가문의 식솔들을 없어 버리겠다니! 그 감정 없는 얼굴을 떠올리자 더욱 간담이 서늘해졌다.

    부 가 노인이 드디어 본가 밖으로 벗어났다 여겼을 때 귓가에 아리따운 여인의 목소리가 전해졌다.

    “당신의 토둔술이 너무 느려서 한숨이 나오네요. 그냥 여기서 목을 내주고 소녀가 주인의 명을 받들게 해주시지요?”

    부 가 노인이 속으로 크게 놀라 멈칫 하는 순간, 눈앞에 하얀 빛이 번득이며 아름다운 묘령의 여인이 나타났다.

    겨우 수 척 거리에서 만발한 꽃처럼 요염하게 미소 짓는 그녀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

    “너는 누…….”

    부 가 노인이 무어라 하려는 순간 여인의 입이 벌어지며 분홍색 안개를 분출했다.

    자신의 보호막으로 쏟아지는 분홍색 안개를 보고 후퇴하려는데 코끝에 달콤한 향이 스치더니 이미 몸과 목이 분리되어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은월이 숨이 끊어진 사냥감을 내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그녀의 손길에 반월형의 백광이 튀어나가더니 곧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 * *

    연회가 한창인 대청 안의 손님들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중 몇 명의 결단기 수사들은 부 가 자제들의 응접을 받으며 연회 분위기가 물씬 달아올랐다.

    기이한 비명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웅성웅성하던 즐거운 소리들이 일순 사라져버렸다.

    입을 다문 손님들이 서로 눈치를 살폈고 기민한 이들은 경계심을 드러내며 부 가 수사들과 거리를 벌렸다.

    마염문에서 나온 두 명의 호법을 수발하던 남색 장포 노인도 안색이 달라졌으나 곧 표정을 수습하고 크게 외쳤다.

    “모두 당황하지 마십시오. 아마 작은 문제가 생긴 듯한데 노부가 사람들을 불러 알아보겠습니다.”

    그가 바로 부 가의 세 번째 결단기 수사이자 부 가 가주의 사촌동생이었다. 마염문 호법들에게 양해를 구한 그가 뒤 쪽의 부 가 제자 둘에게 명을 내렸다.

    그들이 신속히 대청 밖으로 달려 나갔다.

    두 마염문 결단기 수사들은 표정은 그대로였으나 의심스런 눈빛으로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그러나 다음 비명은 분명 방금 대청에서 나간 두 명의 부 가 제자들에게서 들려왔다.

    이번에는 손님들도 변고가 생긴 것을 확신하고 분분히 자리에서 일어나 경계를 강화했다. 남색 장포 노인도 어두운 얼굴로 심호흡을 하더니 낮게 명을 내렸다.

    “대청을 보호하는 금제를 개방하고 어서 어르신에게 소식을 알려라!”

    옆에서 듣고 있던 수사가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품에서 바로 전음부를 꺼내 무어라 중얼거리고는 쏘아 보냈다.

    부적이 붉은 빛줄기로 변해 대청을 빠져 나가려할 때 모두 식겁할 만한 일이 벌어졌다.

    “크, 큰일입니다. 전음부가 빠져나가지 못합니다. 이미 갇힌 것 같습니다!”

    이 소리에 남색 장포 노인은 물론이고 다른 결단기 손님들도 가만있을 수 없었다. 그 중 마진 자국이 있는 마염문 수사가 눈을 부릅떴다.

    “부 수사, 정말 귀 가에 적이 침입했다면 저와 손 형과 함께 움직이시지요.”

    “두 분께서 먼저 손을 내밀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럼 도와주십시오.”

    경황이 없던 남색 장포 수사가 마염문 막 수사의 말에 기쁨을 표했다.

    마염문의 또 다른 호법인 평범한 얼굴의 손 가 중년인은 미간을 좁혔지만 일행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만 손님들 중 다른 네 명의 결단기 수사들은 서로 눈치를 살폈지만 아무도 나서려는 의지가 없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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