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0
360화. 요영(妖嬰)
갑자기 산중에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호호호호! 우스워라, 잠깐 눈이나 붙이려고 누워있었더니 별 꼴을 다 보게 되는 구나! 둘이 작당을 해서 수사를 죽이고 보물을 털어 보겠다? 그런데 어쩌나 겨우 축기기 수사 둘이서 원영기 수사를 노리고 있으니. 내가 잠이 깨지 않아 꿈이라도 꾸고 있는 것이더냐?”
까르르륵 거리는 여자 아이의 음성이었지만 내용은 결코 아이가 할 만한 말은 아니었다. 동시에 한립의 표정이 미묘해졌고 두 수사는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워, 원영기 수사?”
날카롭게 비명을 지르듯 외친 뚱뚱한 수사가 산발 수사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마치 귀신이라도 만난 얼굴이었다.
“말도 안 돼! 원영기 수사일 리가 없습니다. 아마 저 놈과 한패인 녀석이 고의로 우리를 속이려 아무렇게나 지껄이는 소리일 테지요!”
대머리 수사가 이미 대경실색해 안색이 파리해진 채로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그러나 슬금슬금 뒷걸음질치는 다리나 여자아이를 찾아 쉼없이 움직이는 눈동자는 그의 불안한 심리를 그대로 보여주었다.
여자 아이의 실체만 눈으로 확인해도 용기가 솟을 것 같았는데 아무리 살펴도 도무지 기척을 잡아낼 수 없었다.
그 순간 한립도 두 수사만큼 놀라고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단전에 위치해 잠들어 있는 그의 원영이 팽팽한 긴장감 속에 눈을 뜨고 두려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더욱 이상한 것은 의식을 이용해 반경 십여 리를 샅샅이 뒤졌음에도 아무런 흔적도 없다는 점이었다. 분명 근처에 숨어 있을 텐데 대연결까지 익힌 원영기 수사의 의식을 피해 자취를 감추다니 특수한 공법을 익혔거나 엄청난 수준의 수사인 것이 틀림없었다.
한립은 경계심을 최고조 높였다.
“누구냐! 누가 이런 장난질을 치려는 게야! 우리가 그런 얕은 수에 놀아날 것 같아!”
핏기가 가셨던 뚱뚱한 수사의 얼굴에 다시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대머리 수사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원영기 수사가 자신들과 오랜 시간 어울리며 일부러 속일 이유가 없었다. 그의 몸에서 노리끼리한 빛이 돌더니 검은 방패가 생성되어 앞을 가로막았다.
“히히! 이 늙은이가 겨우 너희들에게 모습을 들킨다면 머리를 바위에 박아 죽는 게 낫겠구나. 하지만 너, 원영기 수사의 의식은 강력하도다. 조금만 더 강했다면 이 늙은이의 위치를 찾아 낼 수도 있었겠어.”
자의식이 강해 보이는 아이의 목소리에 한립의 안색이 한층 어두워졌다.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더욱 전력을 다해 의식을 퍼트렸지만 어떤 기척도 찾아내지 못한 것이다.
“흠, 안 그래도 조금 출출했는데. 너희 셋으로 배를 채우면 좋겠구나! 쩝, 원영기 수사는 맛을 본지가 너무 오래 되었어. 먹음직스럽기 그지없구나.”
기겁할 만한 내용이었다. 본색을 드러낸 아이의 말에 한립은 감추었던 수행을 고스란히 개방했다.
전신에 푸른빛이 번득이며 놀라운 기세의 영기들이 범람을 하니 곧 수십 개의 푸른빛이 뿜어져 나와 총 72개의 청죽봉운검들이 전신을 휘감아 보호했다.
“지, 진짜 원영기 수사잖아! 히익, 선배님 살려 주십쇼!! 저희가 어리석어 태산을 앞에 두고도 몰라 뵈고 죄를 지을 뻔 했습니다! 넌 뭐하는 게냐? 지금 달아나고 싶다고 달아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야!”
뚱뚱한 수사는 한립의 진정한 수행과 법보를 보고는 거의 혼백이 달아날 듯 했다. 그는 지체 없이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처박았는데 무릎이며 이마에서 피가 터져 나오는 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반대로 대머리 거한은 본능이 시키는 대로 순식간에 금색 부적을 꺼내 몸에 붙이더니 한 줄기 빛이 되어 그 자리를 벗어나려했다.
“도망치시겠다? 겨우 금둔부(金遁符)로 가능할 듯 싶더냐.”
한립의 얼굴에 비웃는 기색이 스치고 손가락을 까딱하는 것만으로 비검 하나가 청명한 울음소리를 냈다. 푸른 빛줄기로 사라진 비검은 막 날아올라 얼마가지 못한 금빛 줄기를 뒤쫓았는데 속도가 엄청났다.
푸른빛이 번뜩이며 공중에서 대머리 거한의 외마디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고 공중의 노란빛은 거한과 함께 재로 변해 사라졌다.
“쯧쯧. 아까운 축기기 수사의 원신을 낭비했어. 입맛을 돋우기에는 나쁘지 않은데 말이야. 깨어난 이후 잡아먹은 축기기 수사의 수도 한 예닐곱 명밖에 안 되는데.”
여아의 목소리는 한립을 향해 원망을 드러냈다.
“언제까지 귀신 놀음을 할 것입니까. 어차피 당신도 겨우 원영기 수사에 불과하면서 입만 놀리지 말고 나서시지요.”
한립이 대머리 수사를 처리하고 아직도 바닥에 포복해 있는 뚱뚱한 수사를 무시한 채 인근의 작은 나무를 쏘아 보았다. 그의 눈에 남색 기운이 넘실거렸다.
여아의 목소리에 놀라움이 묻어났다.
“어찌 날 발견했지? 현광화물결(炫光化物決)은 결코 원영기 수사에게 들통 날 수 없는 수법인 것을…….”
“지금 당장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정말 나무라 생각하고 난도질을 해버릴 것입니다.”
한립은 겉으로는 느긋해보였지만 속으로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천만다행이야!’
급한 마음에 자기도 모르게 아직 완전하지도 않은 명청영안을 시험해 보았는데 놀랍게도 남색 빛이 눈에 감돌자마자 대머리 수사 뒤쪽의 작은 나무 한 그루가 이상하게 왜곡되어 보였다.
확신할 수 없어 상대를 떠보았는데 다행히 그 나무가 맞았던 것이다.
“겨우 원영기 수사라…… 말은 잘하는구나. 네 원영을 씹어 삼키면 어떤 맛이 날지 벌써 침이 고이는데!”
여아의 목소리가 음침해지면서 작은 나무에서 녹색빛이 번뜩이더니 수축하며 모양이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겨우 반 자 정도의 소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크기는 작았지만 청초한 얼굴과 긴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 아이였다.
“원영?”
한립이 작은 아이의 형상을 확인하고 바로 ‘원영’을 떠올렸지만 곧 회의적으로 변하였다.
“원영이라! 히히히! 그리 불러도 틀린 것은 아니지. 나를 만나다니 네가 불운한 것인지 내가 운이 좋은 것인지 모르겠구나!”
소인의 신형이 번뜩이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뚱뚱한 수사 뒤에 나타났다.
“일단 네 혼으로 허기를 좀 달래야겠다. 괜찮겠지?”
“히익! 아, 안 됩니다. 살려주세요!”
어린 아이의 모습을 한 괴물이 원영기 수사에 맞먹는 존재라는 것을 눈치 챈 수사는 너무 놀라 순식간에 공처럼 몸을 말아 달아나려 했다.
그러나 소인의 얼굴에 흉악한 빛이 감돌더니 순식간에 녹색빛줄기로 변해 수사의 체내에 쏘아져 들어갔다가 돌아 나왔다. 달라진 점은 작은 손 안에 엄지손가락 크기의 녹색 빛덩이를 쥐고 있다는 것이었는데 이미 빛이 깜빡깜빡 거리며 불길하게 명멸하고 있었다.
두 말 할 것 없이 녹색 빛덩이를 입 안으로 가져간 여아는 그것을 삼켰고 몸에 깃든 녹색빛이 조금 더 짙어졌다.
“정체가 무엇이냐. 감히 생혼(生魂)을 그대로 삼키다니!”
이번에는 한립도 격앙되어 입 꼬리를 말아 올리며 일갈했다. 분명 저 소인의 몸의 영기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원영기 초기 수준에 불과했다. 그런데 혼백을 하나 먹었다고 갑자기 수행이 늘어나 버렸다.
살아있는 수사의 혼백을 아무 가공이나 술법 없이 통째로 잡아먹으며 수행을 늘리는 공법이 존재하다니 기상천외한 일이었다.
“입맛은 돋우었고 이제는 성찬만을 앞두었다. 원영기 수사인 네 놈의 원영을 삼키면 이 노부는 원영 중기가 되겠구나!”
녹색 빛이 번들거리는 채로 소인이 한립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바로 한립의 단전이 있는 방향으로 쇄도했다. 마치 한립의 원영을 꿰뚫어보기라도 한 듯 식탐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내 원영을 삼킨다고 네가 소화나 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한립이 화를 내기보다는 피식 웃으며 두 손을 합장했다. 그러자 굵직한 금빛의 뇌전이 그의 손바닥 사이에서 나타났다.
파지지직!
원영기에 이른 후 한립은 벽사신뢰를 체내에 축적할 수 있었는데 일흔두 개의 비검들이 몸 밖에서 그를 지키고 있음에도 벽사신뢰를 불러일으키는데 아무런 제약이 없었다.
“금빛뇌전? 어디선가 들어 봤는데, 뭐였더라?”
녹색 소인이 한립의 손바닥을 주시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직접 겪어보면 될 일!”
한립의 두 눈썹이 솟구치며 손바닥 사이에서 금빛 구렁이가 소인을 덮쳐들었다.
그런데 소인이 금빛 구렁이의 형상을 한 벽사신뢰를 보며 희희낙락하는 것이 아닌가? 당장이라도 구렁이의 한입 요깃거리가 될 것처럼 보이는 작은 여아의 얼굴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았다.
금빛이 소인의 주변에서 격렬히 폭발하며 벼락이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립은 눈을 가늘게 뜨고 형세를 관망하면서 오히려 안색이 어두워졌다.
상대의 태도로 보아 이미 방비를 했을 것이 틀림없었고 이렇게 단숨에 목숨을 거둘 수는 없을 듯 했다. 과연 금빛이 흩어진 뒤에도 여아의 까르륵 거리는 웃음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아, 기억났다! 이게 벽사신뢰란 것이구나? 쯧쯧, 겨우 원영 초기 수사가 이런 천지이보를 지니고 있다니 놀랍구나. 허나 노부에게 이걸 쓸 생각을 하다니 내가 무슨 마공이나 귀법을 익힌 줄 알았나 보구나. 히히, 검으로 하늘을 베려는 격이로고!”
녹색 소인은 벽사신뢰를 맞고도 멀쩡하게 한립을 비웃어댔다.
“벌써부터 좋아 할 것 없다. 네가 내 원영을 삼킬 수 있었다면 어찌 입만 놀려댔을까. 추측하건데 생혼을 그대로 씹어 삼킬 수 있는 것은 저계 수사에 한해서겠지. 만일 원영을 그대로 삼켰다가는 너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아니면 이전에는 그런 능력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럴 여력이 없다든가. 쓸 데 없는 말장난은 말고 내 비검이나 막아 보거라!”
한립이 냉소하며 내뱉은 말에 소인의 안색이 급변해 악독한 눈빛을 보냈다. 이때 한립이 주변을 선회하던 비검들을 향해 손짓하자 열두 개의 비검이 푸른 빛줄기로 변해 쏘아져나갔다.
쇄액!
녹색 소인의 얼굴이 음침해지며 그 자리에서 꼼짝을 안하자 곧 열두 개의 푸른 빛줄기에의해 조각이나 공기 중에 흩날렸다. 잘린 녹색 소인의 조각들은 희미하게 빛을 발산하며 나풀거렸다.
그것을 본 한립도 잠시 멈칫했다.
하지만 다시 꺄르륵 거리는 괴이한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소인의 찢겨진 몸이 다시 하나로 모이기 시작했다. 아까와 똑같은 녹색 소인이 그대로 다시 등장한 것이다.
“쯧쯧, 솜씨 하나는 빼어나구나! 이 비검은 금뢰죽으로 제련한 것이겠군. 어찌 이리 많은 금뢰죽을 구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걸로 나를 죽이겠다는 것은 어림없는 소리. 노부가 입재간만 있는 사기꾼인지 아닌지는 네가 직접 겪어보면 알 것이다.”
아무래도 조금 전 한립의 언사에 조금 동요한 듯 했다. 소인의 음산한 목소리 뒤로 작은 두 손이 수결을 맺더니 눈부신 녹색 빛이 분출되며 어떤 술법을 펼치려 했다.
그러나 술법이 실행되기도 전에 소인의 머리 꼭대기에서 열두 자루의 비검이 번갯불을 번뜩이며 합쳐졌다. 마치 금빛 그물로 작은 비검들을 엮어 만든 듯 한 거대한 벽이 검은 여아의 머리를 노렸다.
“흥! 아직도 포기를 모르고. 벽사신뢰 따위는 내게 아무런 해가 될 수 없다니까 그러네. 뭐, 뭐하려는 것이냐!”
처음에는 당당하던 음성이 결국 경황없는 목소리로 바뀌어 갔다.
금빛 그물의 벽이 그녀를 향해 폭발한 것이 아니라 소인을 감싸 안고 쉼 없이 수축하기 시작한 것이다.
불길한 느낌에 녹색 빛을 번뜩이며 탈출하려 해보았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순식간에 커다란 금빛 구슬 안에 갇힌 꼴이 되어 버렸다. 한립이 그것을 보고 싸늘하게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