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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358화 (115/2,000)
  • # 358

    358화. 언약 그리고 출발

    잠시 후 금빛 두루마기가 충분한 영력을 흡수했는지 금빛을 방출했고 개미 같은 작은 빛의 글자들이 속속들이 떠올랐다. 한립이 그것을 보고 거침없이 외쳤다.

    “와라!”

    동시에 빽빽한 빛의 글자들이 그의 손바닥을 통과해 미친 듯이 머리로 향했다.

    그의 표정은 시종일관 편안했다.

    드디어 청원검결에서 보이지 않던 부분이 눈앞에 펼쳐졌다. 두루마리를 다시 거두어들인 그가 눈을 감고 새로 얻은 법결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대경검진(大庚劍陣)이 무엇이지?  진법과 연관이 있는 건가.”

    낯선 구절을 보며 그의 얼굴에도 놀란 기색이 떠올랐다.

    의식 속에 떠다니는 글자들에 담긴 의미를 파악하느라 그의 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순간 흥분을 했다가 다시 근심에 찌들더니 마지막에는 이마에 식은땀이 맺히기도 했다. 이렇게 앉은 자리에서 삼일 밤낮이 지나갔다.

    * * *

    3일째 되는 저녁, 한립의 안색이 결국 안정되었다.

    “대경검진에 대한 설명이 광대하구나. 극성으로 익혀 두루마리에 적힌 위력의 삼분의 일만이라도 발휘가 된다면 충분히 천남 지역에선 적수가 없을 텐데.”

    한립이 입술을 적시며 홀로 생각했다.

    ‘허나, 이 기술을 발휘하는 것이 언제가 될는지. 검진을 완성하는데 드는 검기의 수량이 너무 많아 적어도 백 개는 넘어야 할 텐데. 어쩐지 이래서 두 장의 두루마리 중 하나는 청원구결을 다른 한 장은 청죽봉운검의 제련법을 담고 있었구나. 둘은 각기 따로가 아니라 본래 하나였어! 검영분광술 역시 이 기술을 쓰기 위한 디딤돌에 불과하다.’

    비검의 위력이 강하고 수가 많을수록 완성되는 검진의 위력도 커질 것이다.

    한립이 예상하건데 충분한 시간이 흘러 72개의 비검이 각각 4개의 검기를 불러일으키면 총 360개의 검기로 거대한 검진을 완성할 수 있다.

    원영 후기의 수사는 모르겠으나 중기만 되어도 여기에 걸려들면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수행이 더욱 높아져 검영분광술로 늘릴 수 있는 검기의 수가 늘어나면 원영 후기 수사를 죽이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양을 늘리는 것 외에도 이 술법을 펼치려면 다시 한 번 청죽봉운검들을 제련할 필요가 있었다. 각 비검에 경정(庚精)이라는 재료를 첨가해야 했다.

    경정은 수도계에 명성이 자자한 보물로 도검 법보에 섞어 제련하면 날카로움과 예리함이 크게 증가하니 비도나 비검 등의 법보를 지닌 수사들이 목숨처럼 갈구하는 재료였다.

    비검 속에 많은 양의 경정을 넣을 필요는 없었지만 그래도 72자루를 모두 제련하려면 엄청난 수량이 필요할 것이다. 한립이 어딜 가서 이렇게 많은 재료를 구하겠는가.

    이렇게 귀한 물건은 수도계에 등장하는 순간 소리없이 종적을 감추었다. 천남 지역이 아니라 재료 수급이 편한 난성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엄청난 위력의 술법을 앞에 놓고도 호수에 뜬 달그림자나 안개 속의 꽃처럼 그냥 지켜 볼 수밖에 없었다.

    석실에서 찬찬히 생각을 정리하며 그가 저물대 속에서 옥함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 안에는 금빛이 찬란하며 은은한 벼락소리가 울리는 구슬이 담겨 있었다.

    “건람빙염.”

    석실 안의 분위기가 다시금 무거워졌다.

    이제 법력이 크게 증가했으니 건람빙염을 통제하려는 시도를 해볼 만 했다. 이것에 성공하면 허천정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도 높아진다.

    눈앞에 원영기 수사마저 가볍게 멸할 수 있는 물건을 두고 한립이 조금이라도 경거망동할 리 없었다. 머릿속에 마화를 제련할 수 있는 공법들이 몇 개 떠올랐고 최종적으로 현음경 내의 비술 하나를 선택했다.

    결심을 한 그가 금빛의 구슬을 잠시 응시하다 손가락을 들었다.

    파밧!

    손끝에서 미세한 불꽃이 튕겨 나와 옥함 속의 구슬에 떨어진 것이다. 동시에 금빛 구슬이 몇 차례 진동을 하더니 불꽃에 이끌려 석실 천장을 향해 떠올랐다.

    한립이 금빛에 둘러싸인 구슬을 보며 열손가락을 쉼 없이 움직였고 복잡한 수인들이 형성되었다.

    은은하던 불꽃이 동시에 ‘쿠르릉’ 크게 울리며 번갯불을 번뜩였다. 이후 바람조차 넘나들 수 없을 만큼 빽빽한 불꽃막의 그물이 펼쳐져 구슬을 그 안에 감추고 기다렸다.

    이제야 한립이 한숨을 돌리고 의식을 건람빙염 외부의 벽사신뢰와 연결했다.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금빛이 요란하게 번지더니 가느다란 금실들이 속속들이 구속을 풀고 구슬에서 떨어져 내렸다. 공중의 그물 안에는 깊은 남색의 구슬이 투명하고 영롱한 자태를 드러낸 것이다.

    건람빙염을 보며 한립이 호흡을 멈추었다. 이것의 위력을 친히 보았는데 다시금 조우하니 조금 두려움이 인 것이다.

    이제 건람빙염이 원형을 되찾았기에 한립은 머뭇거릴 것 없이 입을 벌렸다. 푸른 비검이 튀어 나오자 양손을 한 데 모았고 굵직한 금빛의 벼락이 손바닥 사이에서 쏘아져 나가 흉흉하게 구슬을 내려쳤다.

    쿠쿵!

    파열음이 들려오고 구슬에서 남색 불길이 꽃잎처럼 피어났다.

    동시에 ‘츠즈즉’ 거리는 소리도 커지며 쪽빛의 서릿발 같은 불꽃이 지면과 석실을 타고 번지려 했다.

    마치 석실이 통째로 얼어붙기라도 하 듯 순식간에 딴 세상이 되었다.

    한립은 미리 방비를 해두었음에도 표정이 무거워졌다.

    그래도 당황하지 않고 온몸에서 푸른빛을 방출해 두꺼운 보호막을 둘러쌌다. 건람빙염의 냉기는 지독했으나 그의 수행으로 푸른 불길에 직접 당하지 않는 한 보호막 정도면 큰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다.

    건람빙염의 한기가 보호막에 막히자 한립은 조금 안심했고 이 틈을 노려 허공으로 팔을 뻗었다. 벽사신뢰가 변한 그물이 바로 수축하며 불길을 안에 가두고 조여 들었다.

    그물의 금빛이 강해지니 꽃처럼 피어나던 남색 불길도 원래의 형태로 돌아갔다.

    한립이 다시금 속박된 불길을 보며 숨을 고르고는 의식을 이용해 순간적으로 벽사신뢰의 그물에 미세한 틈을 벌렸다 닫았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아주 가느다란 건람빙염의 푸른 실타래가 새어나와 살아 있는 것처럼 그를 공격해 들어왔다!

    무표정한 얼굴의 한립이 즉시 두 손으로 수결을 맺으며 두 눈을 감았다.

    두개골에서 푸른빛이 감돌더니 1촌 길이의 아기가 불현듯 나타났다. 한립은 뜻밖에도 자신의 원영을 불러낸 것이다. 원영의 얼굴에도 긴장감이 감돌았고 다가오는 남색 불길을 주시하며 작은 두 손을 힘차게 모아 펼쳤다.

    눈을 찌르는 듯한 강력한 두 줄기의 푸른빛이 그 사이에서 뿜어져 나감과 동시에 원영이 입을 벌렸다. 그러자 입 안에서 주먹만 한 빛기둥이 방출되었다.

    총 세 줄기의 푸른빛이 동시에 불길을 향해 나아간 것이다.

    실낱같은 불길이 막기에는 너무 엄청난 위력이었다. 푸른빛 속에 단단히 갇힌 쪽빛 불길은 금방은 빠져나올 수 없을 듯 했다.

    원영이 그것을 보고 미소를 보이더니 자신의 정기로 만든 푸른 손을 보내 잘 포장된 건람빙염 한 줄기를 가져왔다.

    지척에서 불길을 쳐다보는 아기의 얼굴에 두려움과 주저가 떠올랐지만 아주 잠시 뿐. 바로 그것을 입 안으로 밀어 넣어 버렸다.

    놀랍게도 건람빙염을 삼킨 것이다!

    이후 푸른 몸이 요동을 치며 반짝 거리더니 아기가 한립의 머리끝에서 다시금 사라졌다. 한립의 육신이 뻣뻣해지며 몇 차례 부들부들 떨더니 마치 깊은 잠에 빠진 것처럼 축 늘어졌다.

    * * *

    한 달 후 석실을 나온 한립의 얼굴이 어딘가 모르게 어두웠다.

    건람빙염 불길의 지독한 한기를 제어하려면 아무래도 시일이 필요할 듯 했다. 또한 제련을 시작한 후에도 아직 허천정을 어찌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한 실마리도 주어지지 않았다.

    한립이 석실에서 나온 것은 은발 노인 등을 찾아 혹시 경정의 소식에 대해 아는 바가 있는지 묻기 위함이었다. 또한 다시 낙운종을 떠나 원무국에 다녀올 사정도 있었고 말이다.

    이전에 신여음과 약속했던 바를 지금 해치울 계획이었다. 현재 그의 수행으로 수도 가문 하나를 없애는 일 정도는 간단했다.

    알아보니 원무국 부 가(家)와 백교원 부 가는 약간의 관계가 있기는 했다. 원무국 부 씨 가문이 백교원 부 가의 먼 친척뻘 되었던 것이다.

    다만 서로 떨어져 산 세월이 길어 소원해졌고, 원무국이 마도의 손에 떨어진 이후에 원무국 쪽의 일가가 마도에 편입되어 버리니 천도맹 일원인 백교원 부 가에서는 철저히 관계를 끊어 버렸다.

    한립으로서는 마음이 놓이는 소식이었다.

    동굴을 나선 김에 주변 봉우리로 시선을 돌려 의식을 퍼트렸다. 그 결과 모패령이 거처의 밀실 안에서 열심히 폐관수련을 하고 있었다. 이전에 비해 성취가 오른 듯 했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그가 바로 낙운종 주봉으로 날아갔다.

    * * *

    반나절 후 한립이 조금 실망하여 은발 노인의 거처를 나왔다.

    그는 경정에 대해 아무런 정보도 갖고 있지 않았다. 다만 노인이 말해주기를 곧 구국연맹 중 하나인 우국에서 천남 지역 최대의 교역회를 연다고 했다.

    천남 지역의 진귀한 보물은 모두 모일 테고 원영기 수사 중 절반가량은 참여 할 것이란 소식이었다. 어쨌든 수행이 높아질수록 더욱 진귀한 물건이 필요하니 이런 기회에 서로 교환하는 것이 좋았다.

    이런 성대한 잔치가 우국에서 열렸다. 우국은 구국연맹 중 중립에 속하는 세력이었고 모란의 법사들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위기 속에서 패권을 쥔 세 개의 세력이 함부로 움직이기 어려웠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립은 교역회에서 경정을 구할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어디서 경정을 구해 법보를 제련할지 막막했다.

    ‘아니면 먼 길이더라도 전설 속의 대진제국(大晋帝國)에라도 가봐야 할까? ’

    은발 노인에게 경정의 소식을 물을 겸 한립은 잠시 낙운종을 떠나 유람을 다녀온다 일렀다.

    노인은 전혀 의심 없이 그저 각 국가의 정세와 주의가 필요한 원영기 수사 그리고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되는 늙은 괴물들을 설명해 주었다. 물론 그중에는 ‘천한 노괴’도 포함되어 있었다.

    한립도 흥미롭게 그들을 하나하나 기억해 두고는 이별을 고했다.

    다음 날 일찍 중요한 물건을 챙긴 그가 동굴 거처를 철저히 봉해놓고 홀로 운몽산을 떠나 원무국 방향으로 날아올랐다.

    원무국의 부 가는 현재 그 나라를 대표하는 세 개의 수도가문 중 하나였다.

    백여 년 전 마도의 침입 때 대항을 포기하고 마도 육종 중 마염종(魔焰宗)에 투항하니 엄청난 환란 속에서 전혀 세력을 잃지 않고 오히려 성장한 것이다. 그때를 계기로 다른 두 가문을 누르고 원무국 제일의 수도가문으로 거듭났다.

    그 동안 서서히 가문의 제자들을 마염종에 입문시키고 자질이 뛰어난 여 수사들을 마염종 고위층에 시첩으로 바치니 마염종의 비호 아래 세가 불어날 수밖에 없었다.

    부 가는 원무국 서쪽의 자도산이라 불리는 깊은 산 속에 위치했다.

    연중 보라색의 안개가 짙게 내려앉아 범인은 산중에 들면 앞을 분간하지 못할 정도였고 오래 머물면 독기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비록 현지 주민들은 보라색 안개의 위험성을 알아 감히 접근하지 않았지만 매년 아무 것도 모르고 이곳을 지나던 외지인 몇이 화를 입고는 했다.

    이런 범인들의 고초는 이곳에 둥지를 튼 부 가의 수사들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안 되었다.

    범인들이야 조금 죽어나가든 말든 하등 관심이 없었다. 부 가에서 전력을 다해 초빙한 진법사들이 설치해 놓은 독운자장진(毒雲紫藏陣)에 죽을 수 있다면 범인들에게는 영광이라 우스갯소리를 할 정도였다.

    그러나 요 며칠 범인들은 얼씬도 안 하는 자도산에 인적이 끊이지 않았다.

    자도산에서 가장 가까운 범인들의 부락은 태화(泰和)라 불리는 작은 성이었다. 단지 십여 리 정도의 규모에 인구도 얼마 되지 않았지만 주점이나 객잔 등은 갖추어져 있었다.

    아얼은 태화성 두 개의 객잔 중 하나인 영곡객의 점원으로 나이는 18살 밖에 안 되었지만 이 일을 한지 벌써 4년이 넘었다. 마르고 허약해 보이는 그가 객잔 대문 근처에서 힘없이 손님들을 끌어 모으고 있었다.

    무더운 여름날 작렬하는 태양빛을 받으며 오전 내내 소리를 질렀으니 힘이 빠질 만도 했다.

    그래서 야박하기로 소문난 주인장도 작게 꿍얼거리기만 하고는 다시 황목으로 만든 주판을 튕기며 장부 정리에 여념이 없었다.

    아얼이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보며 속으로 욕을 하면서도 거의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계속 호객 행위를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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