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7
357화. 전봉배원공(顚鳳培元功)
이틀 후 모패령이 다시금 은월의 안내를 받아 한립을 만나러 왔다.
“잘 생각 했더냐. 하녀로 20년이냐 아니면 금제를 품고 시녀로 살겠더냐.”
“소녀 결정하였습니다. 수도계에서 원영기 수사를 모실 수 있게 되는 것은 저계 수사에겐 기회라 할 수 있지요. 하지만 선배님의 첩이 되기 전에 한 가지를 약속해 주십시오. 이 조건을 수락해 주신다면 정신을 구속하는 금제를 지닌 채 평생 곁을 지키겠습니다.”
“조건? 구체적으로 말해 보거라.”
한립의 안색은 담담했다. 아무래도 그녀의 대답이 그의 예상과 일치한 것 같았다.
“저도 한 선배님이 여색을 탐하는 분이 아니란 것을 압니다. 그러니 저를 거두시고 30년 동안은 정절을 지키게 해주십시오. 지금은 제 수행의 가장 중요한 시기인데 결단에 성공하려면 30년은 족히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제가 익힌 공법은 처녀의 몸을 유지하는 것이 극히 중요하기에 그간 죽어도 혼례를 치루지 않고 버틴 것입니다. 다만 30년 후에도 저 모패령이 결단을 이루지 못한다면 상관없이 선배님을 모시겠습니다.”
여인이 생각해도 스스로의 요구가 과하다고 여긴데다 낯부끄러운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자연히 얼굴이 붉어졌다.
“30년이라. 그래, 수락하지.”
한립이 전혀 놀라지도 불만스러워하지도 않고 즉시 약속을 했다. 그 모습에 모패령이 오히려 놀라 멍하니 있다 곧 크게 기뻐하며 답했다.
“아……. 제 청을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틀 뒤 정식으로 본 종의 다른 장로들에게 너를 첩으로 들인다 알릴 것이다. 허나 30년 후에나 내 시중을 들겠다니 내 처소 근처의 봉우리에 따로 거처를 마련해 주마. 그곳에서 잠시 머물며 수련에 임하거라. 나도 짬이 나면 들러 지도를 해주겠다.”
“예! 패령, 모든 것을 앞으로 선배님의 분배에 따르겠습니다!”
“앞으로는 선배라 칭할 것 없다. 그냥 ‘공자’라 칭하면 된다. 어차피 이제 겨우 200여 년을 살았으니 천년이 넘는 수명 속에서는 아직 젊은 축이 아니더냐.”
한립의 안색이 부드러워지며 슬며시 미소 지었다.
모패령이 희미하게 상기된 얼굴로 조용히 답했다.
“그리하겠습니다, 공자!”
한립이 눈빛을 거두고 품에서 보라색 옥패를 꺼내 탁자위에 내려놓았다.
“돌아가 짐을 꾸리고 인근 봉우리에 거처를 만들거라. 이건 이곳을 보호하는 결계의 영패이니 지니고 다니면 수시로 드나들 수 있을게다. 그 후 내가 네게 금신술을 걸면 정식으로 내 첩실이 되는 거지.
허나 미리 경고하건데 마음에 품고 있는 사내가 있다면 깨끗이 정리하는 게 좋을 게다. 이후 문제가 된다면 내가 무정하다 원망하지 말고. 지금이라도 결정을 번복한다면 아직 늦지 않았다.”
모패령이 고민 없이 손을 뻗어 보라색 영패를 가지고 갔다.
“어린 나이에 입문해 수련을 하며 오직 수도의 길에서 더욱 정진하는 것만을 목표로 달려왔는데 어찌 마음에 품은 사내가 따로 있겠습니까. 게다가 소녀 이미 결정을 내렸으니 결코 번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별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인 한립이 거대 원숭이 꼭두각시들 불러 그녀를 안내해 돌아가게 했다.
꼭두각시를 본 여인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일단 꼭두각시의 남다른 위력에 놀랐고 일전에 본 하녀는 어째서 보이지 않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일들은 굳이 파고들 필요가 없음을 알고 있었기에 즉시 꼭두각시를 따라 거처 바깥으로 나갔다.
그녀가 나가고 대청 한 쪽의 허공이 흐릿해지며 은월이 나타났다.
“벌로 첩실이 되라 하셨으면서 어째서 30년이나 기다려 주신다고 약속하셨는지요? 혹시 주인님께서 따로 계획하는 바가 있으십니까?”
“당연히 계획하는 바가 있지. 여인이 청하지 않았어도 그녀가 결단에 이르기 전에는 건드릴 생각이 전혀 없었다.”
“네? 어째서요?”
여우가 펄쩍 뛰어 탁자 위에 올라 검은 눈동자를 반짝이는데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다. 한립도 여우를 보며 그저 웃는 것이 기분이 괜찮아 보였다.
그가 바로 답하지 않고 허리춤에서 분홍색의 서책을 꺼내 올려놨다.
“육도 소주가 지니고 있던 저물대를 기억하더냐? 이 옥간도 그곳에서 찾은 것이다. 연구를 해보니 다양한 마도의 쌍수 공법이 기재되어 있더군.”
뜻밖의 이야기에 은월이 서책을 내려 보다 다시 한립을 올려보았다. 한립이 서책을 매만지며 유유히 말했다.
“다른 비술들은 눈에 들어오는 게 없었지. 평범한 쌍수 공법들 보다는 조금 나았지만 탁월하지 못했어. 그런데 오로지 이 서책에서만 언급 된 두 가지 비술이 남다르더구나. 첫 번째는 인룡결(引龍決)로 결단기 수사에게 적합한 것인데 자질이 특수한 여 수사들을 취해 맹렬히 수행을 높이는 수법이다.
하지만 인룡결을 시행하면 상대 여인에게 일정한 법력 손실이 있어 원기가 상하게 되지. 그러니 이 공법을 이용하는 수사는 거느린 여인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것이다.
당시 육도의 후인이라는 녀석이 그리 많은 축기기 시녀들을 몰고 다녔던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아무리 자질이 뛰어나도 어린 나이에 결단 후기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한립이 말을 이었다.
“다른 비술은 전봉배원공(顚鳳培元功)인데 원영기 수사들을 위해 만들어진 쌍수 공법이지. 이 공법은 인룡결과는 달리 처녀의 몸을 유지한 결단기 여 수사의 협력을 필요로 한다. 여인이 전봉배원공을 일정 수준 익히게 한 뒤 그녀를 취하면 단 한번 수련 상의 고비를 넘길 수 있게 해주지. 물론 여 수사의 조력이 있어야 하기에 상대의 수행이 너무 낮아서는 안 된다.”
여우가 눈을 깜빡였다.
“인룡결이랑 전봉배원공이라니! 그런 대단한 비술들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나도 처음에는 이렇게 대단한 공법이 어찌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는지 의심했지. 그런데 나중에 두 공법의 창시자의 이름을 보고는 진상을 알아차렸다.”
“설마…….”
이미 눈치를 챈 은월에게 한립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네 생각이 맞을 것이다. 바로 육도의 극성이 창조한 공법인게지. 이미 원영 후기에 이러 자타공인 난성해 마도의 1인자인 그의 비술이니 남다를 수밖에. 육도의 소주가 저물대에 고이 품고 다닐만한 서책이야.”
“그럼 모 여인에게 그 공법을…….”
“그래. 결단에 성공하면 전봉배원공을 익히게 해서 내가 수련상의 고비를 만나 나아갈 수 없을 때 타개할 비책으로 쓸 것이다. 원영기에 이르러 대부분의 단약은 듣지 않으니 수련 속도도 극히 느려지겠지. 원영기 수사들이 십중팔구는 모두 초기에 머무는 것만 봐도 수련에 난관이 닥치면 빠져나오기 어렵다는 증거이다. 이 방법이 정말 효험이 있든 없든 한번 시도해 볼만해.”
한립이 털이 복슬복슬한 여우에게 눈길을 주며 냉소했다.
“딱 한번 밖에 쓸 수 없는 방책이란 것이 아쉬울 뿐이지. 이 비술을 펼치면 여인 쪽도 약간은 성취를 높일 수 있으니까 해로울 것도 없고. 그렇지 않으면 내가 정말 갑자기 여색에 취해 처첩을 들이려는 줄 알았더냐?”
은월이 한시름을 놓으며 웃었다.
“그러셨군요! 저는 정말 주인님이 원영기에 이르러 마구 여색을 즐기시려는 줄 알았습니다.”
“여인의 몸에 금제는 걸어 두겠지만 거처 내의 비밀은 일단 알리지 말거라. 금신술에 걸려 생사가 내 손 안에 있어도 사람의 마음이란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니. 나는 멍청하게 앉아 배신을 당해 주느니, 차라리 곁에 두고 경계하는 것을 택하겠다.
총명한 여인이지만 일단 시일을 두고 살펴보아야겠지. 만일 진심으로 나를 따른다면 박대하지는 않을 것이야. 어차피 저계 단약은 아직 많이 남아있으니까. 은월, 네가 은신술에 능하니 별 다른 일이 없으면 항상 여인의 거동을 살피거라.”
“예, 주인님! 폐관 수련을 하시는 동안 주의하여 살피겠습니다.”
“그러면 되었다. 30년이면 한 사람의 됨됨이를 살피는데 충분하겠지. 나를 실망시키지 말아야 할 텐데.”
한립이 중얼거리며 마지막에 이러서는 목소리가 음산해졌다.
* * *
며칠 후 모패령이 다시 찾아오자 한립은 금신술을 펼친 후 축기기에 효과적인 단약들을 선물했다.
여인이 크게 놀라면서도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안 그래도 아름다운 얼굴이 꽃이 피어나듯 화사해졌다. 한립을 대할 때도 극진한데다 다정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가 시첩을 들인 일이 알려지자 은발 노인 등도 찾아와 경사를 축하하고 모패령에게 최상급 법기 하나씩을 내주었다.
이후, 모패령은 한립이 있는 봉우리 근처에 머물며 고된 수련에 들어갔고, 한립은 때때로 은발 노인 등의 거처를 찾아 원영기의 수련 방법에 대해 가르침을 구했다.
두 낙운종 태상 장로들은 정말 진심을 다해 그의 의문을 해결해 주니 한립도 이곳에 남은 결정이 옳은 것이었다는 확신을 얻었다.
몇 개월 후 거처 약재 밭 내의 영안수가 드디어 순액을 흘리기 시작하자 그의 기쁨은 더욱 커졌다. 급히 산발 노인이 남겨 놓은 약방문대로 명청영수를 배합했다.
지금 그의 실력이면 처음 몇 번은 실패하더라도 한번만 제대로 만들어 내면 이후에는 문제가 없을 터였다.
* * *
현재 한립은 단약 제련실에서 막 배합을 완료한 명청영수 병을 들고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그가 병을 열자 한 손에서 푸른빛이 반짝이며 짙푸른 색의 투명한 액체가 흘러나와 한립의 눈가로 날아왔다.
동시에 그가 입에서 푸른 안개를 뿜어내 액체를 감싸니 빛이 요동을 치며 안개를 뚫고 나온 빛줄기가 한립의 두 눈으로 쏘아져 들어갔다.
처음에는 눈가가 뜨거워지더니 그 다음에는 냉기가 뼈에 스미는 듯 오한이 들었다. 그는 눈을 감고 조용히 눈의 변화를 받아 들였다.
한립이 가부좌를 하고 운기행공을 하기 시작하자 눈에서 느껴지던 냉기가 감소하기 시작했고 반 시진이 지나서는 한기가 모두 가셨다. 한립이 길게 심호흡하며 눈을 뜨고는 즉시 이곳저곳을 돌아보았다.
그의 눈에 의혹이 스쳤다.
“아무 변화도 없는 건가? 정말 조금도?”
잠시 고민을 하던 그가 영력을 눈에 주입했다. 눈의 깊은 곳에서 쪽빛이 번뜩였다.
“오!”
석실에 펼쳐 놓은 술법이 희미하게 옅은 쪽빛을 띠고 있었다.
“어쩐지 결단기 이상의 수사들이 명청영수에 별다른 흥미가 없는 이유를 알겠어. 이 정도 변화라면 다른 보조 법술을 쓰는 것이 훨씬 나을 테니. 하지만 장기간 눈을 씻어내면 어찌 될지 기대가 되는데!”
이어서 망설임 없이 다시 한 번 눈을 씻어내는 과정을 반복했다.
명청영수가 다 떨어졌는데도 한립의 두 눈은 큰 변화가 없었다. 그저 영력을 두 눈에 주입하면 순간 쪽빛이 떠오르며 금제 등을 투시하는 능력이 생겼으나 효과가 분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때문에 실망하지는 않았다. 그에게 주어진 세월은 길었고 천천히 두 눈을 변화시키면 그만이었다.
이튿날 한립은 은월에게 말을 남기고 청원검결의 금색 두루마리와 함께 폐관 수련에 들어갔다.
청원검결은 총 13성으로 이루어진 완전한 공법으로 청원검기, 몸을 보호하는 검의 보호막 그리고 검영분광술 등이 있었다.
앞의 두 종류는 언제든 이용할 수 있어 편리하긴 해도 위력이 사실 뛰어난 건 아니었다. 세 번째 검영분광술이 그의 마음에 찼다.
이전에 몇 번이나 적 앞에서 펼치고도 승기를 잡지 못한 것은 그의 적들이 너무 강해서라고 생각했다.
만일 수행이 비슷한 보통 수사와 싸웠다면 수백 개의 검기가 빼곡하게 에워싼 상황에서 속수무책으로 난도질당할 가능성이 컸다. 이제 제 10성의 검결을 익힐 때가 되었으니 자연히 새로운 기술이 생길 것이다.
청원검결의 수련방법이 적힌 금색 두루마리를 얻었지만 이것을 제작한 사람이 고의로 이리 만들어 놓았던지 마지막 기술이 적힌 부분이 가려져 있었다. 분명 빛이 반짝이는 것을 보았는데 무어라 쓰여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결단 후에도 마지막 능력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물론 13성의 공법 구결은 경지가 너무 높아서인지 한립이 몇 번을 보아도 그저 오묘할 뿐 일말의 이해도 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보아하니 화신기 혹은 그 이상의 경지에 이르러야 구결의 의미를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한립이 이런 생각을 하며 금빛 두루마기를 허공으로 던져 입에서 푸른빛을 뿜어 그것을 감싸게 했다.
이후 그의 열 손가락이 튕기며 청원검기가 분분히 두루마기 쪽으로 날아가더니 잠시 빛이 반짝이다가 완전히 흡수되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