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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356화 (113/2,000)
  • # 356

    356화. 가짜를 진짜로

    이제 딱정벌레 날개 위의 은색은 바늘구멍 만하게 남아있었다. 눈앞에 가까이 두고 관찰하지 않으면 거의 온전한 금빛만이 번뜩였다.

    그래도 아직 최후 성장까지 이르지 못해 기쁜 와중에도 조금 실망했다.

    하지만 이제는 금색 서금충의 위력에 새로운 세상을 맞본 기분이었다. 그는 삼색 서금충 백여 마리와 새로 진화한 금색 서금충을 한데 둔 적이 있었다. 그러자 삼색 서금충보다 체구가 두 배는 될 법한 딱정벌레들이 순식간에 그것들을 갉아먹어 버렸다.

    갉아대는 힘이나 몸의 강도나 삼색 딱정벌레의 수준은 훌쩍 뛰어 넘은 것이다. 게다가 진화를 하고 나서 서금충의 몸에서 평범한 사람은 덜덜 떨게 만들 만한 흉악한 기운이 풍겼다. 더욱 잔인하고 폭력적으로 변했고 무엇이든 갉아먹어 없애고 싶어 하는 충동이 강하게 느껴졌다.

    이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한립이 미리 딱정벌레들의 몸에 통제를 위한 금제를 심어 놓지 않았으면 그도 서슴지 않고 잡아먹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대비에도 불구하고 한립은 통제권을 잃어 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보아하니 다음 번 진화 때에는 일반적인 통제 방법으로는 서금충의 흉포한 성정을 다스릴 수 없을 듯했다.

    이런 생각을 하며 한립은 서금충들 중 몸집이 큰 것들을 따로 골라 격리해 배양했다. 그들이 하루 빨리 진화시켜 만황(蠻荒) 시대에나 볼 수 있었다던 완전한 성체의 모습을 보고자 함이었다.

    서금충을 진화 시킬 때마다 그 시일이 길어진 것으로 판단하건데 백 여 년 내로는 최후의 모습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 정도 기간이면 성충이 된 서금충을 통제할 방법도 찾을 수 있을 테니 나쁜 일은 아니었다.

    한립이 고민하며 서금충을 회수하고 거처 내부의 약재 밭으로 가서 이미 본래의 모습과 엇비슷해진 영안수와 구곡영삼을 조심스레 채취했다.

    구곡영삼은 단약을 만드느라 원기가 크게 상했었지만 한립이 꾸준히 녹색 액체를 이용해 성장시킨 결과 지금은 거의 원래의 기력을 회복한 상태였다.

    영안수 또한 이미 오랜 세월 키워냈으니 순액을 취할 수 있는 때가 멀지 않았다.

    한립은 순액을 이용해 다량으로 만들어낼 명청영수에 대한 기대가 컸다. 그것으로 두 눈을 씻어 내면 어떤 술법이든 명확하게 꿰뚫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들을 제외한 잡다한 것들은 챙기기도 귀찮아 그대로 두고 거처를 나섰다.

    허공으로 날아오른 한립이 무의식중에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모 가 여인이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돌산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문제가 뭔지 듣지 않아도 알만했고 그 정도를 해결해 주는 것은 누워서 떡 먹기였다.

    하지만 막 낙운종 태상 장로가 되자마자 자신의 권위를 앞세워 다른 이들을 억누르려 한다는 인상을 다른 수사들에게 남기고 싶지 않았다. 또한 이 일에 연관된 모 가와 언 가는 모두 계국에서 힘깨나 쓰는 수도가문이었다.

    게다가 이전의 그녀와의 무미건조한 관계를 생각했을 때 굳이 나설 이유가 없었다. 연기기 제자일 때 알았던 이들의 청을 다 들어 줄 수야 없지 않은가?

    소리 없이 빠져 나온 그가 새로운 거처가 있는 산봉우리 정상에 도착했다. 운무가 서서히 갈라지며 한립에게 길을 열었다.

    서금충과 영초들을 처리한 후 다른 일은 모두 은월에게 맡기고 그는 서둘러 밀실로 들어가 원영 단계를 공고히 하기 시작했다.

    이 기간 동안, 은발 노인과 려 수사 역시 한립이 무엇을 하는지 알았기에 찾아와 성가시게 굴지 않았다.

    백 일이 지나 한립이 순조롭게 원영의 응결을 굳건히 하고 정신과 원영이 하나가 되는 초보적인 단계를 달성했다. 이제 원영이 몸에서 빠져 나가도 자유롭게 조종할 수 있었다.

    한립이 석실에서 빠져나오자 예전처럼 은월이 젊은 여인의 모습을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한립을 보고는 표정이 조금 이상했다.

    “어찌 그러느냐. 할 말이 있으면 해 보거라.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이더냐?”

    은월이 슬쩍 웃었다.

    “주인님께서 수련에 들어간 지 열흘 뒤부터 ‘모 사숙’이 찾아오기 시작했고 오늘도 밖에 있습니다. 이미 산봉우리 밖의 모처에서 며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분수를 모르는구나. 그리 기다리는 게 좋다면 마음대로 해보라 하거라. 난 상관하지 않을 것이니.”

    “그게 여인이 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언 가와 모 가에서 전음부를 보냈습니다. 주인님께서는 폐관 수련 중이라 제가 전음부를 복제해 두었는데 들어보시겠습니까?”

    “모 가와 언 가에서 전음부가?  네가 하는 양을 보니 이미 내용을 보았구나. 무엇이 문제더냐.”

    참다못해 은월이 웃음을 터트렸다.

    “헤헤! 역시 모르는 것이 없으십니다. 직접 들어보시지요.”

    “내보거라”

    은월의 몸에서 즉시 붉은색과 하얀색의 전음부를 꺼내 두 손으로 받쳤다. 한립이 곧 노한 기색을 드러냈다.

    “흥! 담도 크구나. 설마 명의상 사숙으로 몇 해를 살았다고 내가 이 거짓말을 참아 주리라 여겼던가!”

    그의 얼굴에 한기가 어렸다. 은월이 간신히 웃음을 삼키며 말했다.

    “물론 그녀도 이렇게 하면 주인님의 화를 부를 것이란 것은 알았을 겁니다. 하지만 그간 주인님을 겪어 오며 무정한 인물이 아니라고 파악했겠지요. 그렇지 않았으면 어찌 감히 축기기 수사가 원영기 장로에게 도움을 청했을까요. 게다가 아무리 엄한 벌이 떨어지더라도 그 ‘언 사형’이란 자의 반려가 되는 것보다는 낫다고 여겼겠죠.”

    좋은 구경거리라도 찾은 듯 재미있어 하는 은월을 보며 한립이 입을 열었다.

    “직접 양가를 찾아 내가 자신을 시침 시녀로 들였다 말하다니. 두 일가가 서둘러 전음부를 보내 내게 사죄하고 혼약을 없던 일로 하겠다 공표했다. 절대 원영기 수사의 눈 밖에 나고 싶지 않았겠지. 허나 이리 무모하게 일을 벌였을 때는 이후의 일도 각오를 했겠지!”

    “주인님의 말씀은…….”

    의아한 기색의 은월을 보며 한립이 갑자기 나른하게 웃었다.

    “이미 원영기에 들었는데 나도 시침 시녀 한 명을 거두는 것이 이상하진 않겠지. 게다가 여인의 미색이 남다르고 나도 사내이니.”

    다만 입가에 맺힌 웃음기에 한기가 돌았다. 은월이 그것도 모르고 뾰로통하게 투덜댔다.

    “주인님께서는 줄곧 여색을 멀리하시고 수 명의 절색의 여인들을 거절하셨는데. 이번 여인은 무엇이 다른 것인지…….”

    “이전은 이전이고 지금은 지금이다. 원영기에 이르지 못해 수행이 일천할 때야 다른 것을 생각할 여력이 없었지만, 예전의 문사월을 지금 다시 조우한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겠지.”

    은월이 멍하니 서서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은월이 머뭇거리다 큰 눈을 더욱 동그랗게 뜨고 다시 물었다.

    “주인님, 진담은 아니시지요?”

    “진담인지 아닌지는 보면 알게다. 지금 그 여인을 들라 하거라. 그녀의 수행으로는 네가 여우 요수의 몸으로 변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할 테니.”

    “존명!”

    온갖 추측과 상상을 하며 은월이 공손히 응했고 한립은 즉시 대청으로 걸어갔다. 일다경이 지나 우아한 걸음으로 돌아온 은월 뒤에는 약간 파리해진 얼굴의 모패령이 함께였다.

    “주인님, 모 소저가 왔습니다.”

    “알았다. 물러가거라.”

    “예.”

    은월이 대청을 나서며 옆에선 모 여인을 향해 씨익 웃었다.

    “한 선배님을 뵙습니다.”

    모패령은 예를 다하고 말이 없는 것이 한립의 벌을 기다리는 듯 했다. 그런 모습을 보는 한립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을 훑고 있었다. 한립은 분노를 드러내지 않고 아주 담담히 한 글자 한 글자를 내뱉었다.

    “어찌 불러들였는지는 네가 더 잘 알 것이다. 네 멋대로 지껄인 거짓에 나는 원영기에 이르자마자 기고만장하게 날뛰는 수사로 낙인 찍혔겠지. 어쨌든 혼약이 있는 여인을 시침 시녀로 삼다니 듣기 좋은 이야기는 아니니까 말이야.

    그러나 당연히 모 가나 언 가가 감히 불만을 드러낼 수는 없겠지. 허나 어찌 되었든 너의 겁 없는 행동에는 대가가 따를 것이다. 어떤 벌이든 달게 받을 각오가 되어 있겠지!”

    안색이 더욱 창백해진 모패령이 고개를 들었다.

    “용서해 주십시오. 소녀 비록 큰 잘못을 범했지만 언 가와 혼례를 올리느니 선배님의 시녀가 되고자 함은 진심입니다.”

    “흥! 이미 네가 내 시녀라 알려졌으니 이 일을 방관하거나 ‘소문’을 해명하지 않을 것이다. 그랬다가는 축기기 여인하나 비호하지 못하는 인물로 만만히 보이겠지. 내가 널 어찌 벌해야 할 것 같으냐?”

    한립이 눈을 번뜩이며 묻자 모패령이 떨리는 음성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선배님께서 어떤 처벌을 내리시든 모패령 감히 원망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기왕 다른 이들이 너를 내 첩이라 여길 것이니 두 가지 선택을 주겠다. 첫 째, 시침 시녀라는 명목으로 남되 실제로는 하녀로 스무 해를 사는 것이다. 내가 부르면 오고, 시키는 일을 하면 된다. 소문이 사그라지면 자연히 자유를 줄 것이다. 다만 하녀는 하녀! 수련 상에서 어떤 도움이나 가르침도 받을 생각을 품지 말거라.”

    모패령의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번지며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럼, 두 번째는 무엇입니까?”

    “두 번째 방도는 거짓을 사실로 만드는 것이지. 정말 내 시침 시녀가 되어 평생 내 곁에 머무는 것이다. 침상을 함께 쓰는 여인에게 옹색할 수야 없으니 기분에 따라 수련 상의 지도도 해줄 수 있겠지.

    다만 알아 두어야 할 것은, 시침 시녀가 되면 난 네 몸에 금제를 심어 둘 것이다. 만일 어느 날 마음을 바꿔 배신한다면 내 개인적인 비밀들이 다른 이들의 귀에 들어가는 것은 시간문제일 테니 말이야.”

    “저는…….”

    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여인은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얼굴에 그늘이 지는 것이 한립의 조건 중 어느 것을 골라야 할지 고민되는 것 같았다.

    모패령은 한립의 시침 시녀가 되는 것도 크게 꺼리지 않았다.

    “네 거만한 성정을 안다. 원영기 수사라 해도 내가 꿈에 그리던 낭군감은 아니겠지. 하지만 모 수사 역시 내게 가장 최적의 반려는 아니니 상관없다. 내 보호를 받으며 수도의 길에서 더 멀리 나아갈 수 있다면 나쁜 선택은 아닐 것이다.

    게다가 내가 성정이 포악하거나 괴상하지 않다는 것은 잘 알 터. 일단 금제를 걸어 두겠으나 내 곁에서 고생을 하거나 험한 일을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후 안심이 되면 금제를 풀어주는 것 또한 불가능한 일도 아니고 말이야. 아니면 그냥 내 하녀로 스무 해만 보내거라. 어차피 순식간에 지나갈 테니.”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뗀 한립은 어떤 선택을 하든 전혀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모패령의 얼굴이 복잡했다. 지금 당장 결정을 내리기가 너무 어려웠다.

    “선배님, 제게 이틀만 고려할 시간을 주실수 있으신지요?”

    “그러 하거라. 일단 하산 했다 이틀 후에 다시 찾아오면 될 것이다.”

    바로 승낙한 한립이 은월을 불러 들였다. 모패령이 예를 올리고 은월의 안내를 받으며 대청을 나섰다.

    얼마 후 은월이 나긋나긋 걸어 돌아왔다.

    “방금 두 가지 제안은 정말…….”

    흔들리는 그녀의 눈빛에 한립이 눈길을 주었다.

    “정말 어떻다는 거지?  너무 심했다고 생각하더냐. 여인의 염원을 이뤄주는 동시에 나도 젊고 아리따운 시녀를 두는 것이다.”

    “심하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다만 여인의 수련을 향한 열정이 강해 자존심도 꺾지 못하니. 모 소저가 어느 것을 선택하든 후회가 남을까 그러합니다.”

    한립이 은월의 매혹적인 몸을 훑으며 의외의 지적을 했다.

    “은월, 저 여인에게 관심이 많구나.”

    멈칫 하던 은월이 쓴웃음을 지었다.

    “관심이라기보다는 그녀의 성정이 제게 익숙한 느낌을 줍니다. 마치 예전에 아주 가까웠던 누군가와 닮은 듯한데. 그러다 보니 약간의 호감이 가는 것 같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한립이 더는 묻지 않았다.

    이후 은월은 다시 모패령의 일을 언급하지 않았고 한립과 건람빙염에 관해 논하기 시작했다. 어쨌든 이것이야 말로 한립의 가장 큰 관심사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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