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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355화 (112/2,000)

# 355

355화. 문파의 태상장로

한립이 여우의 눈을 의미심장하게 응시하며 유유히 다음 질문을 던졌다.

“그렇군! 정보가 부족하지만 그건 그렇다 치고. 일단 건람빙염부터 해결하면 될 일이니까. 아직 허천정 속의 다른 보물은 무엇이 있는지 이야기 하지 않은 것 같은데?”

“은월이 무엇을 숨기는 것이 아닙니다. 허천정 안에는 보천단 두 알을 제외하면 사실 다른 고보가 남아 있지 않은 걸요. 그저 빈 솥일 뿐입니다. 어쨌든 허천정이 허천전에 자리한 지도 수많은 세월이 흘렀으니 한번 씩 특수한 능력이나 방법으로 건람빙염을 제어하는 수사들이 다녀갔고 그 틈을 타 고보들이 하나 둘 빠져 나갔으니까요. 저번에 주인님께서 다녀가셨을 때 달아난 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상관없다! 내 수행으로 어차피 일반적인 고보를 탐할 것은 아니니까. 허천정을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한립도 예상한 바인 듯 했다. 은월이 작게 웃었다.

“주인님 말씀이 맞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상고 시대에서 통천령보란 이름으로 불린 고보는 오륙 십 개 정도 밖에 없었답니다. 그 중 하나를 얻는 다면 필시 바다를 뒤엎고 별을 떨어뜨릴만한 힘을 얻겠지요.

솔직히 말씀 드리면 처음 주인님의 작은 병이 약초를 성장시키는 것을 보았을 때 그것도 일종의 통천령보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후에 찬찬히 생각해 보고 아닐 거라 여겼지만요.”

“흠, 왜지?  신비한 병이 통천령보에 미치지 못한다 여긴 것이더냐?”

“그럴 리가요. 다른 통천령보들이 아무리 뛰어나도 이미 존재하는 법술들을 더욱 강력하게 혹은 특별하게 발휘할 뿐일 겁니다. 그런데 약초를 키워내는 병은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는 유일무이한 능력을 발휘 합니다. 제 예상으로는 아무래도 화신기 이후의 경지에서나 이런 보물을 만들 수 있을 듯합니다.”

이번에는 한립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 말은 내가 지닌 보물이 신선의 작품이라도 된단 말이더냐?”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말에 한립이 돌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신비한 병을 꺼내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수시로 안색이 변하는 것으로 보아 많은 상념들이 오가는 듯 했다.

한참 후 천천히 신비한 병을 거두어들인 그가 다시 물었다.

“은월, 너도 낙운종 장로들의 이야기는 들었겠지?  이곳에 남는 것과 다른 곳을 찾는 것 중 네 생각에는 어떤 선택이 좋을 듯싶더냐.”

은월이 침착하게 분석했다.

“그건……. 먼저 물으시니 은월 불손한 질문을 드립니다. 주인님께서는 이후 어쩔 작정이십니까?  다른 계획이 없다면 낙운종에 남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입니다.

원영 초기의 수사가 둘이나 있고 별다른 구속을 받는 것도 아니니까요. 게다가 낙운종도 작은 문파라 보기는 어려우니 필요한 도움은 다 받을 수 있을 겁니다. 다른 계획이 있으시다면 그것도 상관없고요. 원영기의 수사가 산수의 몸으로 돌아다닌다면 그 누가 감히 쉽게 척을 지려 하겠습니까.”

“한동안은 별 다른 계획은 없다. 일단 몇 년은 원영의 경지를 안정화하는데 써야 할 것이고. 이후에는 반드시 극서 지방을 한번 다녀와야겠지. 대연결의 마지막 세 개의 경지를 익힐 수 있도록 나머지 공법을 구해야 하니까. 그리고 약속한 바가 있으니 원무국도 한 번은 들려야겠다. 그 나라의 부 가 일족을 멸해주기로 하였으니 말이야. 다만 백교원의 부 가가 그 일족과 연관이 있을지는 모르겠어.”

은월이 곰곰이 생각하고 제안했다.

“그러시다면 일단 낙운종에 머무시는 게 좋겠습니다. 산수로 돌아다니는 것 보다는 다른 원영기 수사들의 조언을 받을 수 있고 지원도 얻을 수 있을 테니까요. 주인님의 수행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래, 일리가 있어. 일단 피곤하니 물러가 있거라.”

여우의 말이 끝나자 한립은 확답하지 않고 몸을 돌려 침실로 향했다. 그 모습을 보던 하얀 여우가 잠시 생각을 하다 역시 대청을 걸어 나갔다.

* * *

한립은 돌침대 위에 누워 지긋이 지붕을 쳐다보고 있었다. 잠에 빠져 들기에는 심사가 복잡했다.

원영을 응결할 당시 겉보기에는 간단했어도 위험한 순간이 많았다.

단전이 쪼그라들 때는 전신의 경맥이 뒤틀려 죽는 듯한 고통이 엄습했지만 다른 수사들에 비해 높은 법력으로 간신히 버틸 수 있었다. 그 중에는 구곡영삼으로 만든 단약의 효과가 제일 컸다. 구곡영삼 단약을 미리 복용하지 않았다면 중간에 기절해 버렸을 것이다.

원래는 양혼목 파라주 등 심신을 안정시키는데 특효인 보물들 그리고 이번을 위해 전문적으로 구비해둔 정령단까지 있어 심마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가볍게 촛불 끄듯 지나가리라 여기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다른 이들보다는 훨씬 수월하게 끝나겠지 했던 것이다.

그런데 심마의 위력과 괴이함이 상상을 초월했다.

그가 겪었거나 상상했던 모든 일들 중 가장 두렵고 무서운 것들을 꺼내드는데 자기도 모르던 잠재의식 속의 약점들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갑자기 고향의 작은 마을을 강도들이 덮쳐 부모와 어린 누이가 잔인하게 살해당하거나, 수도를 하는 길이 완전히 막히고 수행도 잃어 다시 범인으로 돌아간다거나 심지어 신비한 병의 비밀이 만천하에 공개되어 수도계의 추살령이 떨어지는 등. 조금이라도 그가 꺼릴 만한 일은 죄다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도무지 꿈과 현실을 가릴 수 없었고 깊이 빠져 들어 법력도 무용지물이었다.

평소 차분하고 냉철한 그조차 분노와 공포 속에 침잠할 뻔한 순간이 몇 번이나 되었다.

그래도 정령단과 다른 보물들이 완전 무용지물은 아니라서 가장 위급한 순간에 그의 머리를 맑게 해주어 겨우 모든 환상을 헤치고 현실로 복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전신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가 안정을 되찾자마자 심마의 공격이 또 이어졌다.

이번에는 행복한 환상이 시작된 것이다.

다시 한 번 부모님과 누이가 함께 모여 단란하게 살았던 유년 시절도 돌아갔다가 훌쩍 남궁완과 혼례를 올리고 함께 살아가는 장면에 이르기도 했다. 최후에는 문 씨 자매나 진교천 등의 여인들이 함께 시중을 들기도 했고 말이다.

수도계에서 대성이 천남 수도계를 제패하고 승천을 해서 신선계의 선인이 되어 영생을 누리는 장면들이 연달아 지나갔다.

그 속에서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누리다보니 몇 해가 지나갔는지도 까마득했다. 마지막에 마치 몇 대에 걸쳐 누릴 복을 모두 겪은 후에 무엇인지 모를 원인에 돌연 정신을 차리고 깨어나 원영의 형태를 얻을 수 있었다.

한립이 묵묵히 회상하며 원영이 처음 몸을 빠져 나오던 상황을 떠올렸다.

원영이 막 생성되어 두개골을 뚫고 나올 때 분명 원영이 자신이고 자신이 또 원영이라고 느꼈었다. 그러나 어떻게해도 통제가 되지 않아 그저 두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의 머리카락 위에서 웃고 놀고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마치 아주 어린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그 순간 한립은 모든 근심과 집착을 잊고 마치 자연으로 돌아간 듯 평온해졌다.

한립이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원영기에 처음 이르러 아직 마음과 뜻을 하나로 합치지 못한 탓에 벌어진 일이었다. 수행이 나아지면 달라질 일이다.

원영 응결 과정을 곱씹던 그가 슬그머니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아주 달콤한 꿈을 꾸었다. 어린 시절로 돌아가 형과 누이와 한데 모여 뛰어 놀다 집에 돌아가니 밥을 먹을 시간이 아닌가. 어머니 아버지의 따뜻한 웃음소리와 형제들이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얼마나 아름다운 꿈인가!

* * *

3일 후, 은발 노인 등이 찾아오자 한립은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낙운종에 귀의하는 일을 결정지었다.

낙운종 두 장로가 대답을 듣고는 희색이 만연했다.

그들은 당장 성대한 회합을 열어 다른 문파의 고계 수사들을 초청하고 한립이 낙운종에 입문하는 의식을 치르자고 제안했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한립이 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모든 것을 간소화하고 운몽산 다른 두 개의 문파에 통지를 하면 그뿐 다른 원영기 장로들과는 어차피 만날 일이 있을 거라 뜻을 전했다. 한립은 다른 사람들의 주목을 끌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은발 노인 등이 부적합한 처사라 생각했으나 한립이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는 성품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수긍했다.

이어 한립은 그들을 따라 주봉의 대전으로 가 결단기 제자들의 인사를 받았다. 그 중 절반은 한립이 연기기 신분일 때 얼굴을 본 적 있는 이들이었다.

그들도 소문으로 3일 후 원영기 수사 한분이 낙운종에 귀의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신분을 대강 눈치 챈 뒤였다.

한립을 만나자 속으로는 어찌 생각하든 겉으로야 모두 극진한 것이 아무런 흠을 잡을 수 없었다.

자신이 원래 ‘사조’라 부르던 붉은 장삼의 노인과 천천봉 봉주, 부봉주 등이 자신을 ‘한 사숙’이라 부르며 고개를 숙였다.

그의 시선이 무리 중 송 가 여인에게 이르자 그녀가 복잡한 심경을 드러냈다. 예전에 한립의 마음을 읽으려 했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었던 일을 떠올린 것이다.

물론 한립의 지금 수행으로 그녀의 이런 마음을 신경 쓸 이유는 없었다.

결단기 수사들과의 만남을 마치고 은발 노인이 거처 문제를 논했다. 운몽산 동쪽 산맥이면 어디든 골라 거처로 삼을 수 있는데 꼭 종 내의 몇몇 봉우리에 위치할 필요는 없었다.

이어 하루 동안 한립은 적당한 곳을 물색했고 중간 정도 높이의 산봉우리를 골랐다.

비록 높고 험악한 산봉우리는 아니었지만 영기가 충만했고 그 곁으로 약간 낮은 봉우리들이 세 개 정도 솟아 있어 진법을 설치하기에도 최적이었다.

거처로 삼을 만한 동굴을 뚫는 일은 한립에게 간단한 일이었다. 지금까지의 거처 중 가장 규모가 큰 동굴이었지만 반나절이 채 걸리지 않았다.

일을 마치자 한립은 거처를 둘러싼 다른 세 개의 봉우리에 자신이 지닌 강력한 진법을 임시로 설치해 두었다. 동시에 짙은 운무가 수십 리로 퍼져 그의 거처를 보호했다.

그리고 다시 낙운종 약재원으로 돌아갔다. 이전 동굴에서 옮길 것들이 꽤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돌산 아래 약재원에서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인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려한 자태와 아름다운 얼굴을 지닌 인물이 한립을 보자마자 깊이 허리를 숙이며 청했다.

“제자 모패령 일전에는 한 선배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실례를 범하였습니다. 용서하여 주십시오. 다만 오늘 함부로 이곳을 찾은 까닭은 청이 있어서입니다. 소녀를 문하에 들여 주십시오. 평생 최선을 다해 선배님을 모시며 절대 배반하지 않을 것입니다.”

평소에는 자신감에 차있던 냉랭한 그녀의 눈에 긴장한 기색이 넘쳐났다.

한립이 갑자기 나타난 여인을 살피고는 냉랭히 답했다.

“내 문하로 들여 달라?  난 제자를 받지 않는다. 게다가 일개 축기기 여 수사를 들여 무엇 하겠느냐. 이전의 인연이 있기에 죄를 묻지는 않겠으나 앞으로는 자중하게.”

“선배님! 저, 저는…….”

모 여인이 한립의 말에 당황하며 무어라 하려했다. 하지만 한립이 바로 소매를 펄럭이니 광풍이 불어 본래 하려던 말을 집어 삼킬 수밖에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몸을 바로 하였을 때는 이미 한립은 보이지 않았다.

여인이 크게 상심한 얼굴로 그 자리에 서서는 한동안 떠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모패령에게 돌연 나타난 ‘한 선배’라는 존재는 실낱같은 희망이었다.

이때 한립은 벌써 돌산 거처로 들어가 영수의 밀실 앞에 있었는데 그곳에는 이제 만 마리에 달하는 금색 서금충들이 모여 있었다. 지난 20여 년 동안 진화에 성공한 새로 부화한 서금충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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