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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354화 (111/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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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4화. 통천령보(通天靈寶)

    안개 속에서 한립의 담담한 목소리가 전해졌다.

    “한 모가 귀 종의 영지에서 수련을 하면서도 먼저 찾아뵙지 못하였으니 실례를 범했습니다. 곧 금제를 풀어 두 분을 안으로 청합지요.”

    은발 노인이 호탕하게 웃었다.

    “허허!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이곳에서 원영에 성공하셨다니 저희의 영광입니다. 다만 급히 오느라 축하 선물을 준비하지 못해 민망할 따름입니다.”

    한립이 평온하게 답했다.

    “선물이라니 당치 않습니다. 이곳에서 원영을 맺었으니 이미 충분한 은혜를 입었습니다.”

    말과 함께 푸른빛이 안개 속을 헤집어 두 수사 앞에 길이 트였다. 은발 노인 등이 거리낌 없이 그 통로를 따라 거대한 동굴의 입구로 향했다.

    입구에는 스물 몇으로 보이는 평범한 외모의 청년이 서 있었다. 푸른 장포를 걸친 청년은 입가에 미소를 띠고 그들을 맞이하러 걸어 나오는 중이었다.

    “드시지요!”

    “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은발 노인 등이 사양하지 않고 포권을 하며 따라 가니 바깥의 운무가 다시 요동을 치고 통로가 사라졌다. 그들도 이를 느끼지 못 한 바는 아니나 낙운종 내인데다 둘이 함께 찾았으니 크게 근심하지 않았다.

    한립이 둘을 적당한 규모의 대청 안으로 이끌었다.

    수사들이 자리를 잡자 한립은 의식을 퍼트려 거대한 원숭이 꼭두각시에게 차를 갖고 오도록 시켰다. 은발 노인이 일단 차를 마시면서 꼭두각시가 사라진 방향으로 눈길을 떼지 않았다.

    “차향이 좋습니다! 그런데, 한 수사께서 기관으로 움직이는 꼭두각시까지 다루실 줄은 몰랐습니다.”

    한립이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기본적인 수준입니다. 수사들의 눈에 들 수준은 아니지요.”

    려 가 중년인도 한립의 괴뢰술에 상당히 놀라 슬쩍 떠보려 했다.

    “허허허! 겸양이 지나치십니다. 비록 꼭두각시지만 느껴지는 영기로 보아 축기기 수사에 못지않아 보입니다 그려.”

    한립이 고개를 저의며 아무렇지 않게 꼭두각시의 허점을 일렀다.

    “아닙니다. 저 녀석이 발휘한 최고의 일격은 축기 중기 수사에 맞먹지만 행동도 굼뜨고 공격 수단도 단조롭지요. 게다가 제련이 손이 많이 가서 최상급 법기를 만드는 것만큼 재료값이 듭니다.”

    다시 은발 수사가 입을 열었다.

    “수사와 꼭두각시는 천지차이지요. 하지만 수사의 꼭두각시는 비범해 보입니다. 아마 저계 수사가 지니고 다니면 제 한 몸 지키는 데는 모자람이 없겠어요. 그런데 이런 술법은 서쪽 지역의 천죽교를 연상케 하는데 혹여 극서(極西) 지역 출신이십니까?”

    그의 괴뢰술을 칭찬하는 말 같지만 속내는 한립의 출신을 묻는 것이었다. 한립이 미소 지으며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그가 상대의 의도를 모를 수가 없었으니 변함없는 안색으로 답했다.

    “괴뢰술은 이름 모를 경전을 얻어 익힌 것이라 극서 지방에 관련된 것인지는 저도 모릅니다. 물론 그곳에 괴뢰술에 정통한 문파가 있다는 것은 들어 알고 있었기에 이후 기회가 된다면 들러 보고 싶군요.

    저는 천남 지방 사람입니다. 원래 월국에서 태어났으나 후에 마도육종의 침략으로 어쩔 수 없이 고국을 떠나왔지요.”

    려 수사가 은발 노인과 눈빛을 교환하고는 궁금해 죽겠는지 물었다.

    “월국 출신이셨군요! 그런데 이리 젊어 보이셔서 정말 놀랐습니다. 혹시 수행을 쌓은 지는 얼마나 되셨는지……. 익히는 공법에 젊음을 유지하는 비법이 있는지요?”

    원영에 든 수사들은 대부분 3, 400살인 경우가 많았다. 려 수사도 거의 400살에 이러서야 원영기에 이렀었고 말이다.

    “제가 익힌 공법은 외모와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다만 어릴 적 기연으로 정안단을 복용한 후 더 이상 늙지 않게 되었지요. 수행을 쌓은 햇수는 얼추 200년은 넘은 듯합니다.”

    “뭐라고요, 200년이요?”

    정안단 이야기를 들을 때 까지도 ‘그럼 그렇지’하고 있던 려 수사가 한립이 자신의 나이를 말하자 안색이 시퍼레졌다. 심정적으로야 사제와 다를 바 없었지만 은발 수사가 여전히 온화하게 입을 중얼거렸다.

    “겨우 200여년의 세월이라…….”

    상대의 말에 따르면 겨우 200여 년 만에 원영을 맺는데 성공한 것이다. 천남 지역 역사상 이런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나 극소수였다. 대부분이 불세출의 자질을 지녀 이후 말 그대로 경천동지할 어마어마한 큰 인물이 되었다.

    그 중에는 원영 후기에 홀연히 사라져 또 다른 세상으로 갔다는 전설도 있었다. 눈앞의 젊은 수사가 스스로 200살이라 말하니 결코 경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찌, 제가 200년 만에 원영을 맺은 것이 이상한 일입니까?”

    한립도 그들의 반응에 눈에 이채가 스쳤다.

    물론 다른 수사들에 비해 빠르게 성장해 온 것은 사실이나 이렇게 놀라는 것은 또 다른 의미가 있을 터였다.

    어쨌든 원영기에 대해서 그가 아는 바는 단편적이었다. 적으로나 마주쳐 봤지 제대로 교류한 적이 없으니 당연했다. 은발 노인이 숨을 고르고는 선망하는 눈빛을 보였다.

    “이상하기는요. 이리 젊은 나이에 원영기에 들었다는 이야기에 저희 둘이 조금 놀랐을 따름입니다. 앞으로 전도가 창창하겠습니다.”

    말을 하며 은발 노인은 굳게 다짐했다. 상대를 잘 구슬려야한다! 가장 좋은 것은 낙운종에 몸담게 하는 것이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악연을 맺는 불상사만은 피해야 할 터!

    옆에 앉은 려 씨 성의 중년인도 복잡한 표정을 지우고 입을 달싹이며 은발 노인과 짧게 전음을 주고받더니 더욱 표정이 신중해졌다. 둘이 어떤 결론을 내렸는지 은발 노인이 갑자기 말을 꺼냈다.

    “기왕 한 형제가 산수라 하시니 무례를 무릅쓰고 묻겠습니다. 이미 원영기에 들었는데 앞으로의 행보를 어찌할 생각이십니까?”

    한립이 일부러 어두운 기색을 비추었다.

    “앞으로 어찌 할 지는 아직 결정 내린 바가 없습니다. 월국은 현재 마도의 천하인데 일찍이 귀령문 수사와 척을 져 돌아 갈수가 없고. 다른 곳이야…….”

    은발 노인이 정중하게 그리고 아주 조심스레 말했다.

    “만일 보잘 것 없는 저희 낙운종이라도 괜찮으시다면 본 종에 귀의하시는 것은 어떨지요. 세력으로는 고검문에 비할 바 못하고 백교원에 비해서도 처지는 것이 사실이나. 본 종은 전문적인 술법과 공법을 고집하는 대신 수많은 공법의 장점을 취합해 우리의 것으로 만들며 발전해온 종파입니다.

    만일 본 종에 귀의하신다면 이후 저희 형제와 동등한 공경을 받으며 절대 남이라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귀 종의 장로가 되라는 겁니까?”

    한립이 주저하는 기색을 비추었다.

    단박에 거절하지 않는 한립을 본 은발 노인이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더욱 진심을 담아 말했다.

    “걱정 마시지요. 저희 낙운종에서 태상 장로 직위에 오르면 실질적으로 맡는 직무는 전무합니다. 아무 번잡한 직무 없이 그저 전심을 다해 수행에만 집중하시면 됩니다. 게다가 매년 제자들이 수련에 쓰십사, 수 천 개의 영석을 바치니 필요한 영약이며 재료도 제자들을 시켜 구해오라하면 되는 것이지요.

    솔직히 저희 낙운종 태상 장로의 대우는 다른 종파에 결코 뒤지지 않습니다.”

    려 수사도 잔잔히 동조했다.

    “사형의 말씀이 맞습니다. 게다가 한 형제가 비록 원영을 맺는 데는 성공했지만 막 원영기에 접어들어 앞으로 어찌 수행을 해나갈지 막막하지 않으신지요?

    저희 사형제가 비록 수백 년간 원영 초기에서 나아가지는 못하고 있으나 나름 깨달은 바가 있습니다. 만일 수사가 본 종에 남겠다 결정한다면 한 형제가 굽이굽이 돌아갈 길을 많이 단축시켜줄 수 있을 겁니다.”

    한립이 두 사람의 말을 듣고 려 수사의 조건에 마음이 흔들렸다. 막 원영기에 든 수사가 이미 수백 년 원영기 수사로 지내온 이들의 지도나 조언을 듣는다면 수백 년을 아낄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야 원영 응결만을 목표로 달려왔으니 생각해 보지 않았지만 일단 상대가 이리 청하니 아무래도 신중히 고려를 해봐야 할 것 같았다.

    계속 산수로 자유롭게 살 것인지 흐름에 몸을 맡겨 낙운종 장로를 할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아예 더 적당한 다른 문파를 찾아 귀의할 것인지!

    침묵으로 일관하던 한립이 차분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두 분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다만 제가 막 원영을 응결해 안정되지 않은 상태로 이런 중대한 일을 결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심사숙고할 말미를 주신다면 3일 후에 답을 드리지요.”

    한립의 말에 은발 노인 등이 서로 눈짓으로 의견을 주고받더니 미안한 기색을 담아 응했다.

    “너무 성급했던 것 같아 부끄럽습니다. 당연히 충분히 고려할 시일을 드려야지요. 이렇게 하시지요. 다른 제자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명을 내려놓을 테니 편히 쉬고 계시면 3일 후에 다시 거처를 찾겠습니다.”

    두 수사는 중요한 이야기를 끝내고 사사로운 이야기를 조금 더 나누다 떠났다. 예를 다해 그들을 거처 밖까지 배웅한 한립이 다시 대청에 돌아와 생각에 잠겼다.

    어느새 대청 안에 하얀 빛이 반짝이더니 은월이 본래의 하얀 여우의 모습으로 우아하게 나타났다. 한립이 그것을 보고 이상해 물었다.

    “어찌 몸을 유지하기에 영력이 부족하더냐?”

    “예, 주인님! 기령의 신법에 여우 체내의 영력을 더해 인간으로 변하면 겨우 이 정도 밖에는 못 버팁니다. 다음번에 변신을 하려면 한 달은 기다려야 합니다.”

    여우가 요염하게 고개를 저으며 투덜대는 것을 보고 한립이 담담히 말했다.

    “8급 영수가 되면 영원히 인간의 형상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니 조급해 할 것 없다.”

    “그건 그렇습니다. 하긴 허천정 내에서 그 오랜 세월도 버텼는데 이쯤이야 금방이지요. 게다가 주인님이 주신 단약의 보조로 예상한 시일보다 훨씬 빨리 가능할 것 같습니다.”

    한립이 가만히 듣다가 떠오르는 바가 있어 낮게 읊조렸다.

    “흠, 이전에는 수행이 낮아 따로 묻지 않았는데. 이제 원영기에 이렀으니 허천정에 관해서도 알아두어야겠다. 네가 그리 오래 솥 안에 있었으니 아무 것도 모를 수야 없겠지. 보천단 말고 또 어떤 보물이 들어있을지 아주 궁금하구나?”

    은월이 머뭇거리다 뜻밖에도 한숨을 내쉬었다.

    “허천정을 열 방법을 알기는 합니다만 주인님이 실망하실까 걱정입니다.”

    “지금 내 수행으로도 열 수 없다는 건가?”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다.

    “주인님께서 모르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때 저와 다른 고보들이 허천정에서 나올 수 있었던 것은 통천령보의 구속에서 대항할 힘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솥의 건람빙염과 당시 내부에 있던 수사들이 힘겨루기를 한 틈을 타 겨우 빠져나온 것이지요.”

    “통천령보라니 그게 뭐지?  허천정은 고보 아닌가?  네 말을 들으니 허천정을 여는 것과 건람빙염이 큰 관련이 있겠군.”

    “사실 통천령보도 고보입니다. 상고 시대의 수사들이 부르던 칭호이지요. 다만 고보 중에서도 특수한 능력을 가지 것들을 가려 부를 때 사용했습니다.

    허천정도 통천령보 중 하나로 저도 어떤 특별한 능력을 가졌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보통의 고보의 위력을 훌쩍 넘어선다는 것은 압니다. 건람빙염의 경우 주인님의 말씀대로 허천정을 여는데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허천정을 통제하는데 필요한 첫 번째 요소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한립은 아쉬운 기색 없이 오히려 일말의 희색을 띠었다.

    “통천령보! 상고 시대 수사들이 그리 부를 정도면 정말 대단한 보물이겠어. 첫 번째 요소가 있다면 다음은 무엇이지?  알고 있다면 다 이야기 해 보거라.”

    가치가 있는 것은 그만큼 얻기 어려운 법이다. 아무리 까다로운 조건이라도 허천정을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노력해볼 만했다.

    은월이 고개를 내저었다.

    “이후 어떤 것이 필요한 지는 저도 모릅니다. 제가 아는 것은 주인님께서 건람빙염을 다룰 수 있게 되면 그 다음 단계는 자연히 알게 되리라는 것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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