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3
353화. 원영 (2)
“사형, 그럼 어찌 할까요? 이렇게 상대가 원영을 하게 놔둬야 합니까?”
비록 안색은 창백했어도 은발 노인이 오히려 더 침착했다.
“그렇지,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면 되네. 비록 상대가 마지막 순간에 심마에 빠져 실패할지는 모르나 우리가 간섭해서 일을 그르칠 수는 없지. 원영을 맺는 당사자는 수개월 혹은 수년의 시간이 경과한 듯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거의 순간에 불과하지 않은가? 려 사제, 설마 당시 원영을 응결하며 겪었던 심마를 벌써 잊은 겐가?”
“아이고 그걸 어찌 잊습니까? 절대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끔직한 경험을요. 심마란 것이 원래 마음속으로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 벌어지고 가장 무서운 대상이 나타나 정신을 갉아 먹지 않습니까. 원영을 맺을 때 미리 정령단 한 알을 복용하지 않았다면 고비를 넘기지 못했을 것입니다.”
중년인은 원영을 맺을 때의 심마를 생각하니 지금도 식은땀이 흘렀다.
“그러니 상대가 그 관문을 넘지 못해 원영에 실패하면 고민할 문제가 아니란 게지. 급할 것 없네! 특히 상대가 운이 따라 원영의 경지에 이른다면 막을 수도 없는 바에야 괜히 마음을 상하게 해서야 쓰겠나. 가만히 기다리다 상황을 보아 행동하세. 어쩌면 원영에 성공한 후에 교분을 다져 우리 낙운종으로 포섭할 수도 있지 않겠나!”
“사형의 뜻은 저자가 설마 산수일 거란 뜻입니까?”
“그래, 십중팔구 산수일 것이다! 만일 가문이나 문파에 속한 수사였다면 어찌 위험을 무릅쓰고 우리 운몽산에 왔겠는가. 게다가 아무리 상황이 여의치 않아도 대량의 고계 수사들을 불러 호법이라도 세워놓았어야지. 우리 둘이 원영을 맺을 때 종 내에서 어떤 지원을 해주었는지 기억은 하는 겐가?”
“기억하죠. 원영을 시도하는 수개월 내내 마치 전쟁이라도 임박한 듯 종 내의 경계를 삼엄히 하고 강력한 진법이란 진법은 죄다 발동하지 않았습니까. 정말 저 자는 산수가 맞겠군요.”
은발 노인이 유유히 말했다.
“정말 산수의 신분으로 원영기에 이른 것이라면 더욱더 우리 편으로 끌어들여야지, 조금이라도 실례를 해서는 안 될 것이네. 산수로 원영에 성공하는 것은 문파의 지원을 받은 이들보다 훨씬 엄청난 고행을 지나온 셈이니 일단 원영기가 되면 무시무시한 능력을 발휘하곤 하지.
게다가 문파의 구속도 없으니 우리 같은 이들보다 거리낄 것도 없고 은원에 민감하지 않은가. 천남의 수많은 거대 문파에서도 그 천한 노괴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것도 그런 이유이고 말이야.”
중년인이 조용히 수긍했다. 그때 노인이 눈을 번뜩이며 낮게 소리쳤다.
“시작했군!”
중년인도 흠칫 놀라 급히 의식을 집중했다. 같은 시각 한립의 거처 상공의 빛덩이는 점점 더 많아졌고 점차 하나의 거대한 흐름으로 뭉치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자 방원 백여 리의 하늘이 오색의 찬란한 구름으로 뒤덮였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 천둥과 번개 비바람이 내려치며 사방팔방이 구름의 가운데를 중심으로 소용돌이 쳤다.
꽈과광!
돌연 들려온 경천동지할 소리와 함께 벼락이 내려치며 돌산의 한쪽이 환하니 밝아졌다. 그 돌산에서 푸른빛의 빛기둥이 솟아올라 공중의 구름 속으로 뻗어나간 것이다.
오색의 빛 덩이들이 번쩍이며 먹구름이 짙어졌고 폭풍우는 더없이 거세게 몰아치고 있었다. 부근의 수사들이 죄다 몰려와 돌산 부근에 머물며 이 놀라운 현상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거대한 빛기둥이 얼마 지나지 않아 주먹만 한 크기의 수정과 같은 구슬로 뭉치자 거대한 영력의 파동에 다들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
펑!
수정 구슬에서 터져 나온 빛이 다채로운 빛깔로 번져나가며 아래쪽을 향해 쾌속으로 떨어진 이후 종적을 감추었다. 동시에 인근의 비 바람과 천둥번개 역시 뚝 그쳐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갔다.
모여 든 수사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어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크와와왕!
그때 돌산 중턱에서 마치 용의 울부짖음 같은 소리가 들려오며 하늘 높이 백 여 장 크기의 사람 형상이 나타났다.
빛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사람의 형상은 너무 눈부시게 번뜩여 아무도 그의 진짜 얼굴을 보지 못했고 마치 빛줄기 같은 그의 시선이 모두를 훑으니 모두 숨을 멈추었다.
쿵.
거대한 충돌음과 함께 수사의 태산과 같은 몸이 땅에 무릎을 꿇고 앉더니 전혀 움직임이 없었다.
수행이 높은 이들은 그 충격에 종아리가 후들거렸고 수행이 낮은 이들은 감당할 수 없는 힘에 전신이 부들부들 떨려 꼼짝도 못했다.
거대한 인간의 형상이 돌연 피식 웃더니 공중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모여 있던 이들은 무슨 일이 일어난 지도 모른 채 그저 멍하니 허공만 보고 있었다.
* * *
돌산 속 밀실 안, 한립이 정좌를 하고 앉아 두 눈을 감고 있었다. 달라진 점은 정수리 위에 1촌 가량의 정말 딱 새끼 손가락만한 아기가 그의 머리카락을 만지며 놀고 있다는 것 뿐.
젖먹이 아기는 푸른빛의 피부가 곱고 부들부들했고 한립과 꼭 닮아 있었다. 물론 줄곧 신이나 까르륵 웃어대는 것이 항상 진중하고 과묵한 그와는 달랐다. 아이가 놀고 있는 한립의 몸은 혈색이 좋고 평안해 보이는 것이 깊이 잠에 빠진 듯 했다.
잠시 후 노는 것도 지쳤는지 하품을 한 아이가 푸른빛을 반짝이더니 그의 두개골 부근에서 체내로 흡수되어 사라졌다. 그리고는 한립의 얼굴빛이 달라지며 눈꺼풀이 꿈틀거리더니 어렵게 눈을 떴다. 그의 눈동자가 따스하게 빛나며 더없이 투명했다.
깨어난 후에도 바로 일어나지 않고 멍하니 앉아 손바닥을 펼쳐 눈앞에서 쥐었다 폈다 해보더니 이번에는 자신의 정수리를 만져보았다.
장장 일다경이 지난 후에야 그의 얼굴에 불가사의하다는 기색이 떠올랐다.
오랜 만에 석실 내부를 좀 돌아보고 일어나 기지개를 편 그가 한 손가락을 튕겨 푸른빛을 돌문으로 쏘았다. 그러자 밀실의 돌이 빛나며 소리 없이 들렸다.
“원영을 맺으심을 축하드립니다, 주인님!”
그곳에는 은월이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하고서 고개를 깊이 숙여 예를 올리고 있었다. 그 생소한 칭호와 태도에 한립은 턱을 쓸었다.
“주인님? 알고 보니 은월 수사가 지금까지는 내게 진정으로 승복한 것이 아니었군. 그도 그럴 것이 생전의 수행이 내 밑이 아니었으니 원영을 응결하기 전에는 주인으로 모시기 어려웠겠지.”
은월이 아름다운 얼굴로 공손히 답했다.
“맞는 말씀입니다. 이제 주인님께서 원영을 맺는데 성공하셨으니 수도계에서 최상위의 수준에 드셨습니다. 수명도 천년으로 늘어나셨지요. 겨우 200세의 연령에 이런 성취라면 이후 화신기에 드는 것도 결코 불가능은 아니라 보옵니다.”
한립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화신기를 논할 때가 아니다. 수많은 원영기 수사들이 초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면 요원한 일이지.”
“저는 주인님이 꼭 성공할 거라 믿습니다.”
은월이 붉은 입술을 내밀며 웃으니 그렇게 매혹적일 수가 없었다.
* * *
돌산 바깥에 모인 이들이 이미 수천이었다. 그들은 가지각색의 법기를 타고 공중에 떠서는 웅성거렸다.
비록 방금 전의 기상이변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신기한 구경에 모두 흥분한 기색이 다분했다. 한립이 맡고 있던 약재원도 많은 이들의 주의를 끌어 벌써 몇몇은 금제로 다가가기도 했다.
하지만 안에는 평범한 약초밭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모 가 여인이 복잡한 기색으로 무리 속에 섞여 있었다.
그녀는 우연히 이 모든 것을 가까이에서 보았으니 더욱 마음이 어지러웠고 한립과 무슨 연관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여러 개의 각기 다른 빛줄기가 빠르게 도착했다. 빛이 사라지고 대여섯 명의 결단기 수사들이 엄숙한 얼굴로 나타난 것이다.
잔잔한 물처럼 차분한 얼굴의 풍 가 노인을 선두로 붉은 장삼을 걸친 노인과 절색의 송 가 여인 그리고 처음 보는 수사들이었다.
호 노인이 많은 저계 제자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는 인상을 굳혔다.
“제자들은 들으라. 이 산을 중심으로 10 리를 금지로 정하니. 함부로 침입하는 자, 문규를 어긴 것으로 여겨 엄벌한다!”
저계 제자들은 무슨 일이 생긴 건지 궁금해도 지엄한 사조의 명에 떠날 수밖에 없었다. 곧 주위가 다시 한산해져갔다.
“모 사질은 남게.”
평범한 얼굴의 결단기 수사와 호 노인이 전음으로 무어라 주고받더니 자리를 뜨려던 그녀를 부른 것이다. 여인이 즉시 날아올라 결단기 수사들 앞에 공손히 예를 올렸다.
“제자 사백들을 뵙습니다.”
풍 노인이 평온히 물었다.
“모 사질, 듣자니 이곳이 네 담당이라고.”
“예! 이 약제원은 본 봉의 제자인 연기기 제자 ‘한립’이 관리하던 곳입니다.”
“연기기? 그 자는 지금 어디 있는가?”
모 여인이 잠시 머뭇거리다 답했다.
“그것은, 모르겠습니다. 방금 다른 사형들 몇몇이 약재원을 둘러봤는데 아무도 없었다고 합니다.”
붉은 장삼의 노인이 생각나는 바가 있는지 물었다.
“한립? 20여 년 전에 검술 대회에서 입상했던 그 외문 제자 아니더냐?”
“단 사백님의 말씀대로 바로 그 제자입니다.”
“외문 제자가 입상을 하다니 분명 이상한 일이구나. 설마 방금 원영의 징조를 보인 것이 그 자란 말인가?”
풍 노인이 속산을 보며 중얼 거리자 다른 결단기 수사들의 표정도 엄숙해졌다. 송 여인이 눈을 반짝이며 침묵했다.
‘영원의 징조라니! 방금 누군가 원영을 맺는데 성공한 것인가!’
다른 결단기 수사들이야 알고 왔지만 모 가 여인은 믿을 수 없는 소식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풍 노인이 망설이다 결정을 내렸다.
“상대가 이미 원영기에 이르렀다면 우리 결단기 수사들이 나설 일이 아닙니다. 아마 두 분 사숙들께서 처리하실 것이니, 절대 상대의 심기를 건드리지 맙시다. 음! 사숙들께서 벌써 당도하셨군요.”
그의 결정에 안심하던 이들이 급히 고개를 들자 하늘 끝에서 빛이 번쩍이더니 어느새 하얀 빛 줄기와 노란 빛 줄기가 코앞에 도착해 있었다.
풍 노인 등이 바로 양편으로 갈라서 공간을 내주었다. 원영기의 은발 노인과 려 수사가 나타난 것이다.
“이곳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너희는 그만 가보거라.”
풍 노인 등이 즉시 답하고는 분분히 자리를 피해주었다.
그 중에는 모 여인도 있었는데 깊이 허리를 숙이고 법기를 이용해 날아오르려는 찰나 자기도 모르게 시선이 약재원으로 향했다.
‘설마 원영기에 든 고인이 그 ‘한립’이란 말인가? ’
* * *
동굴 거처 내 대청에서 은월과 대화를 나누던 한립이 바깥에서 들려온 노인의 목소리를 들었다.
“낙운종 정천곤이라 합니다. 원영을 맺는데 성공한 것을 감축 드립니다. 노부와 제 사제가 잠시 들러 인사를 나누어도 될 런지요.”
전음을 들은 한립의 미간이 슬쩍 좁아졌다가는 다시 펴졌다.
“은월, 금제를 개방해. 어차피 언젠가는 이야기를 나눠야할 상대들이니 일단 낙운종 장로들을 들어오라 해라. 다만 금제를 푼 이후에는 나서지 마. 아무리 여우 요괴의 은신술과 환술이 절정이라 해도 원영기 수사의 눈을 속이기는 어려우니.”
“예, 주인님!”
은월이 공손히 답하고 사뿐사뿐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바깥에서 기다리던 두 장로는 눈앞에서 풍경이 뒤바뀌며 평범하게만 보이던 돌산이 금세 푸른 안개에 뒤덮이는 것을 목격했다. 그 짙은 안개 속에서 사기가 충만하고 주술들이 요동치는 것이 한눈에 보아도 위력이 강력한 금제였다.
은발 노인과 려 수사가 서로 시선을 주고받으며 쓰게 웃었다.
상대가 낙운종 내에 버젓이 동굴 거처를 마련하고 이렇게 강력한 진법을 설치해 놓는 동안 아무런 눈치도 채지 못하다니 얼마나 낯 뜨거운 일인가. 한동안 벗들에게 놀림 받을 것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