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351화 (108/2,000)

# 351

351화. 뿌리

노호성과 여러 법보들이 충돌하는 격렬한 폭음이 오가며 가지각색의 빛들이 현란하게 터져나갔다. 이를 보곤 한 쪽에서 기다리던 한립도 때가 되었음을 직감했다.

늑대 머리 옥패에 영력을 불어 넣자 순식간에 그의 몸에 노란 빛이 번지며 토둔술을 이용해 땅 속을 통과한 것이다.

다들 강적을 상대하는데 온 신경을 집중하느라 땅 속에서 영안수의 뿌리 쪽으로 접근하는 그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했다.

그 결과 한립은 영안수 아래에 도착했고 그 앞에 은은한 금색의 보호막이 나타났다. 이에 한립이 눈을 번뜩이며 두 손을 펼치니 열 손가락에서 푸른빛이 뿜어져 나와 소리 없이 보호막에 닿았다.

금빛과 푸른빛이 잠시 엎치락뒤치락하자 보호막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평소 같으면 보호막을 지키는 수사가 있어 이런 변화를 알아차렸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얼마 후 한립이 더욱 영력을 키워 맹렬히 두 손을 양쪽으로 벌리자 보호막에 균열이 가며 작은 입구가 생겨났다.

슉!

한립의 몸이 기이하게 길어지는 듯싶더니 그 입구를 통해 결계 안에 침입했고 동시에 보호막이 소리 없이 닫혔다.

드디어 눈앞에 영안수의 뿌리가 나타났다. 그 모습을 본 한립의 얼굴에 오랜만에 즐거운 기색이 스쳤다.

영안수의 줄기는 말라 비틀어져 보통의 나무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뿌리는 아주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다만 색깔이 비취색이라는 것이 조금 특이할 뿐.

거대한 폭발음이 땅 위에서 들려왔다. 암석이 터져 나가고 땅이 흔들리는 소리로 보아 아무래도 누군가 위력이 상당한 절초를 쓴 듯 했다.

부 노인이 약이 바싹 올라 소리쳤다.

“어서 쫓읍시다! 이대로 달아나게 두면 안 돼요!”

허공을 갈라 날아가는 소리가 들리고 난 뒤에는 천살 진군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남 수사, 노부의 자라현공의 위력이 어떠합니까?  직접 펼친 것은 아니지만 이 육체의 정혈을 아낌없이 뽑아 시전 하는 것이니 아무리 동자라도 잠시 동안은 어쩔 수 없을 겁니다.”

“천살 마두, 문하의 제자의 생명도 고려치 않고 이리 나오다니. 그렇게 하면 그 녀석은 살아남아도 수행의 대부분을 잃을 것인데!”

맑은 목소리였지만 한립은 은은히 묻어나는 노기를 감지했다.

“문하의 제자라?  아까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니 자기를 천살종 제자라 여기지도 않던데요?  그런 녀석을 내가 왜 고려하겠습니까. 이런, 귀신같은 늙은이가 어딜 가려 그러시오?”

태연하게 이야기를 하던 천살 진군이 돌연 안색이 변해 소리쳤다.

“흥! 노부는 여기서 빙의 된 몸에 발을 묶일 생각이 없다. 저 버러지 같은 마도 놈들이 순액을 가지고 운몽산을 떠나게 둘 것 같더냐?”

“쉽게 보내 줄 순 없지!”

동굴 밖에서 전해지는 소리에 천살 진군이 낮게 포효하며 뒤 따른 듯 했다. 별안간 이곳에는 한립만 남았고 한립은 완전히 마음을 놓았다.

그는 더 이상 시간을 끌지 않고 손가락을 튕겨내자 수 촌 길이의 푸른빛이 손끝에서 뿜어 나와 번쩍였다. 푸른빛이 번뜩이자 뿌리 조각이 가볍게 잘려 나갔고 그 부위에서 하얀 우윳빛 액체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동시에 맑은 향기가 공중에 진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한립은 즉시 몸을 둘러싼 노란 빛을 크게 키워 영안수의 뿌리를 들고 땅 위로 튀어 나왔다. 둘러보니 동굴 안에 수 장 규모의 새로운 굴이 뚫려 있었고 주위로 산산이 부서진 바위 조각들이 가득했다.

보아하니 천살 군주의 일격이 만들어낸 조화인 듯 했다. 결계가 쳐져 있어 강철 보다 단단한 종유석 동굴을 이 지경을 내놓다니 대단한 힘이었다.

‘그러니 두동 등이 달아날 수 있었겠지.’

한립이 망설이지 않고 저물대를 스쳐 옥을 깎아 만든 함을 꺼내 영안수의 뿌리를 챙겨 넣었다.

그는 목표한 바를 이루어 아주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그는 바로 산발 머리 노인 등을 쫓을 수 있을지 가늠했다. 영안수의 뿌리는 얻었다지만 명청영수나 정령단을 제련할 비방을 구하지 못했으니 기회가 있을지 살펴야 했다.

어차피 천살 진군은 산발 머리 노인의 몸에 빌붙은 처지이니 오래 대법을 유지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는 사내아이의 손을 피해 멀리 도망가지 못했을 것이다.

한립이 보호막을 뚫고 나가려다가 갑자기 눈썹을 꿈틀했다. 그가 미간을 좁힌 채 바로 몸을 돌려 영안수 뒤쪽으로 향했다.

“이건…….”

노란 방석과 네모난 돌 탁자가 보였고 그 위에 은은한 녹색 빛을 뿜는 서책이 있었다.

옥으로 만든 서책을 훑어 일단 숨겨진 금제가 없는지를 확인한 한립이 손바닥에서 푸른빛을 분출해 녹색 빛의 옥간(玉簡)을 끌어왔다.

신중한 얼굴로 옥간을 보던 한립이 꼼짝도 않고 서서 의식을 불어넣었다. 한참 후 한립이 얼떨떨한 얼굴로 의식을 회수했다.

서책에는 위 노인이 남긴 기록이 담겨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가 익힌 공법과 단약에 대한 깨달음 그리고 정령단과 명청영수 제조법까지 적어 놓았던 것이다.

위 노인은 자신에게 닥칠 일을 알았던지 누군가에게 이것들을 남기려 한 듯 했다. 아무 보호막이나 금제도 없이 영안수 뒤에 둔 것은 낙운종 수사에게 남겼을 가능성이 높았다.

‘왜 이렇게 했을까.’

한립이 잠시 서책을 들고 고심하다 저물대에서 텅 빈 옥간을 꺼내 내용을 복제했다.

한립이 서책을 제자리에 두고 보호막 쪽으로 다가갔다. 언제라도 누군가 돌아올 수 있으니 되도록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한립이 전신의 영력을 끌어 올리자 푸른빛이 번쩍이며 청원검기에 의해 보호막이 크게 벌어졌고 그는 그 틈에 재빨리 푸른 빛줄기로 변해 빠져나왔다.

* * *

한립이 석실 안으로 돌아왔을 때 저계 제자들이 여전히 이리 저리 쓰러져 나뒹굴고 있었다.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지금과 같은 난리에 누가 그들을 챙길 여력이 있겠는가?

여우가 한립으로 변해 기절한 척하고 있다가 그를 보고 다시 여우의 모습으로 돌아가 소매 안으로 뛰어들었다. 은월이 소매 속에서 작게 웃었다.

“손에 넣었어요?  여긴 아무도 안 다녀갔어요. 공연한 걱정이었나 봐요!”

“손에 넣었다. 신분을 노출하는 것 보다는 조심하는 게 낫지.”

“그런데 살아난 이유를 어떻게 설명하려고요?”

한립은 전혀 걱정 없다는 듯 담담히 답했다.

“어찌 설명하기는 사실 대로 말하면 되지.”

“사실 대로요?”

“천금을 주고 구입한 환술용 고계 부적으로 간신히 살아남았다 하면 그만이다. 어차피 환술이라는 것이 묘해서 수행이 아무리 높은 수사라도 방심하면 한 순간은 속아 넘어 갈 수도 있는 것이니까.”

“좋은 핑계인데요?  간단하면서도 믿을만하고요.”

이후의 상황은 순조로웠다. 거의 반나절이 지나서야 황의 수사가 음울한 얼굴로 석실로 들어왔다.

그가 기절한 제자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더니 두 손으로 법결을 맺어 가볍게 열 손가락을 튕기자 하얀 빛들이 뿜어져 나와 수사들의 몸 안으로 들어갔다.

두동이 쓴 법술이 대단한 비술은 아니어서 제자들이 하나둘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두동 등은 사라지고 황의 수사만 있는 것을 보고는 위기를 벗어났음을 깨닫고 안심했다.

물론 멀쩡하게 그들과 섞여 있는 한립을 보고는 몇몇이 헉 하고 숨을 들이마셨으나 곧 그가 스스로 제작한 환술용 부적을 꺼내 미리 준비한 변명을 하자 다들 수긍하는 눈치였다.

황의 수사도 한립에 대한 시선이 달라졌을 뿐 세세히 캐묻지는 않았다. 다만 손화와 모 여인의 얼굴에 의아하다는 기색이 어렸다.

어쨌든 두동이 처음부터 한립을 향해 이상한 말을 지껄이는 것을 듣기도 했고 제 모습을 찾자마자 악랄하게 그를 처리한 것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 본 터였다.

한립도 두 사람의 생각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아무런 증거도 없이 심증만으로 허튼 소리를 떠들 수도 없는데다 두동이 다짜고짜 자신에게 살수를 펼쳤는데 최소한 같은 편은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순액도 사라졌지 명청영수 제조를 맡은 산발 노인도 생사를 알 수 없게 되었으니 이번 10위권 입상자들의 보상도 물 건너갔다.

부 노인 등 세 개 종파의 고위층은 급히 좋은 법기를 준비해 하나씩 나누어 주며 일을 무마했고 제자들은 자신의 문파로 돌아갔다.

저계 제자들은 명청영수로 눈을 씻을 기회를 날린 것이 억울했지만 고분고분 자신의 문파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한립 등은 낙운종에 돌아오자마자 종 내의 고위층에게 불려가 금지에서 발생한 일을 보고 해야 했다. 이야기를 들은 장로들은 표정이 완전히 구겨져서는 그들에게 함구령을 내렸다.

나중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이번에야말로 종문 내의 첩자들을 샅샅이 색출해 처단하려던 운몽산 삼 파의 계획이 철저하게 실패했던 것이다.

두동 등이 천살종 종주가 깃든 몸의 보호를 받으며 무사히 순액을 들고 정마 양 도로 귀환했을 뿐 아니라 백 문사를 제외한 첩자 전원이 계국 밖으로 탈출했다. 백 문사의 경우 한 순간의 실수로 부 노인 등에게 현장에서 사살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천살종 종주의 대법이 효력을 다한 산발 노인의 육체는 화룡동자에 의해 낙운종으로 끌려왔다. 하지만 죽었는지 어딘가에 갇혔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낙운종의 원영기 장로 둘과 세 문파에서 모인 결단기 수사들이 그 날 마도 천환종과 천살종의 대규모 매복에 당했다. 결단기 수사 중에서 사상자가 나왔을 뿐 아니라 원영기의 정 장로가 동급의 여러 수사의 협공을 받아 중상을 입고 후퇴하니 생명에만 지장이 없을 뿐 원기가 크게 상하고 말았다.

이 일로 세 문파가 요동치고 있었다.

그들은 천도맹을 통해 정마 양 도에 압력을 넣으려 했지만 정마 쌍방이 모두 이 일을 부인하니 엄청난 수모를 겪고 아직까지도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천도맹이 정도와 마도에 심어 놓은 첩자들을 통해 알아낸 바, 가져간 순액의 양이 너무 소량이었는지 상대도 현천선등(玄天仙藤)을 소생시키는 데 실패했다고 한다. 등나무가 여전히 말라붙어서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것이다.

이 소식에 그나마 운몽산 삼 파와 천도맹 고위층이 한숨을 돌렸다.

그러나 그 후로 각 문파들은 더욱 경계심을 갖고 방비를 철저히 하기 시작했고 언제 충돌이 발생할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 * *

한립은 고위층에게 일의 정황을 보고한 직후 바로 자신의 거처로 돌아왔다.

작은 돌산 내의 거처에 도착한 그는 구곡영삼과 멀지 않은 곳에 영안수의 뿌리를 심어두었다. 둘 다 영물이었으니 가까이 두면 서로의 성장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검술대회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어떤 깨달음이 있었는지 줄곧 지지부진 했던 대연결이 불현듯 성취를 보여 뜻밖에도 하루가 다르게 실력이 나아졌다.

이런 상황 속에 한립은 대연결과 청원검결을 동시에 수련해나갔다.

한립이 생각할 때 대연결이 이처럼 순조롭게 익혀지는 이유 중 태반은 목에 걸고 있는 양혼목으로 만든 나무구슬의 효과일 가능성이 컸다.

목에 이것을 찬 후 즉각적인 효과는 미미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의식이 단련된 것이다. 양혼목이 고비를 넘긴 대연결 수련의 속도를 더욱 높이고 있었다.

게다가 대연결을 수련할 때면 언제나 양혼목 구슬에서 미세한 기운이 원신 속으로 스며들곤 했다. 그러면서 한립은 며칠 간격으로 녹색 액체를 이용해 영안수의 뿌리를 키우기 시작했다.

그 결과 겨우 수개월 만에 뿌리에서 영안수의 새싹이 올라왔다. 보아하니 완전히 자라 운몽산 금지 속에서 보았던 영안수처럼 자라는 것도 시간문제일 듯 했다.

물론 그래도 대략 스무 해 정도는 온 정성을 다해 키워야겠지만 급할 것도 없었다. 어차피 원영에 성공하는데도 그 정도 시간은 필요하니까. 이미 정령단도 한 알 가지고 있어서 조급할 이유가 없었다.

귀한 영단을 흑의 청년의 저물대를 뒤져 손쉽게 얻은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났다.

이제  가장 중요한 일은 아무래도 명청영수의 제조였다.

두 눈이 명청영수의 기운으로 명청령안이 되면 그가 강력한 의식을 지녀 동급의 수사와 싸울 때 우위를 선점하는 것처럼 법술을 써서 싸울 때에도 유리해진다.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