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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350화 (107/2,000)
  • # 350

    350화. 역습

    원영기 수사를 선두로 나머지 결단기 수사들이 동굴 땅 속에 숨어 서서히 포위망을 좁혀가고 있었다.

    한립 또한 기척 없이 동굴 속으로 들어가 그들과 멀리 떨어진 구석에 숨어 상황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지하에 잠복한 이들은 모두 옅은 개나리 색의 보호막으로 자신의 영력을 숨기고 있었는데 눈에 익은 기운이었다. 바로 지금 바깥에서 한창 적과 공방을 벌이고 있어야 할 남 씨 성의 동자가 펼친 술법이었다.

    그랬기에 지상에 있는 세 인물은 아직까지 이 매복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한립이 의식을 이용해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니 땅 위에는 위 가, 두동, 백 수사 셋 뿐만 아니라 뜻밖의 인물들이 둘이나 더 있었다.

    둘은 백교원 부 노인과 문사의 반려인 백의 여인이었는데, 특히 백의 여인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의식을 잃은 호 노인을 붙들고 있었다.

    한립은 아직도 끊임없이 결계가 공격받자 깜짝 놀랐다. 아니 다들 이곳에 와 있으면 도대체 결계를 공격하는 이는 누구요 지키는 이는 또 누구란 말인가?

    모든 것이 첩자를 색출하기 위한 함정에 불과했던 것인가. 그때 금빛의 보호막 속에서 위 가의 담담한 답변이 들려왔다.

    “저도 정마 양측이 모란 초원 인근에서 상고 시대의 현천선등(玄天仙藤)을 발견한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 신성한 등나무가 비록 오래 전에 시들어 버렸으나 만일 영안수의 순액을 부어준다면 다시 회생할 가능성이 높겠지요.

    그 때문에 저와 같은 제자들이 오랜 세월 이곳에 침투해 있었던 것이고 두 수사 역시 천환종 소주란 귀한 신분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직접 나선 것이 아닙니까.”

    문사차림의 백 수사가 비꼬며 말했다.

    “어찌, 위 형은 백여 해 동안 머물더니 이곳에 정이라도 붙은 것입니까?”

    보호막 속에 선 노인이 무표정하게 답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면 거짓이겠지요. 사람으로 태어나 돌덩이가 아닌 바에야 아예 무정(無情)할 수야 없는 것 아니겠소. 게다가 낙운종 장로가 날 친자식처럼 아껴주며 일신의 공법을 전수해 준데다 몇 번이나 내 목숨을 구해준 일이 있습니다.

    또한 많은 제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나를 낙운종 고위층에 들게 해주려 노력했고요. 이런 은혜를 입고 모른 척 할 수 없으니 영안수는 두 분에게 내어드리지 못하겠습니다.”

    아까 거한으로 변했던 두동이 노기어린 웃음을 터트렸다. 그가 음산한 목소리로 상대를 겁박했다.

    “하하, 아주 좋소! 위 형이 낙운종의 진짜 장로가 되겠다면야 어쩔 수 없겠죠. 하지만 잊지 마시오. 우리가 당신의 진짜 신분을 노출하는 순간 천살종 첩자의 말로가 어떻게 될지!”

    “잘 알고 있는 바입니다. 두 분 수사께서는 내가 어찌 성지를 지키는 임무를 택해 옥살이와 다름없는 생활을 하는지 아십니까. 진작 본 종 사숙들의 의심을 사, 권력의 길에서 밀려났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명확한 증거만 있었어도 이리 쉽게 끝날 일이 아니었지요. 물론 위 모가 천살종에서 입은 은혜도 크니 종주의 증표를 들고 도와 달라 찾아온 두 수사의 뜻을 완전히 외면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니 영안수는 내주지 못하더라도 순액은 나누어 드리겠소. 이로서 당년 천살종에 진 빚을 갚는 셈으로 하지요.”

    “뭐라고요?  순액밖에 내주지 못…….”

    “그러시오. 순액만 내주시면 됩니다. 어차피 지금 급한 것은 순액이지 영안수가 아니니까요. 우리 마도와 정도맹 역시 세상천지 보물이라면 수없이 손에 넣었습니다. 영안의 나무가 아니라도 샘이나 돌 같은 물건은 차고 넘칩니다.”

    문사가 무어라 말하려는 것을 두동이 막았다. 문사가 그 말에 잠시 두동의 기색을 살피더니 생각 끝에 입을 다물었다.

    어쨌든 자신은 모든 것을 천환종 소주의 분부에 따르라는 명을 받고 오지 않았던가. 정도맹이 언제부터 마도 육종과 이리 가까워졌는지는 모르나 상대가 알아서 결정하게 두어도 무방할 것 같았다.

    “두 분이 동의한다니 미리 준비해둔 순액을 금제 바깥으로 보내겠습니다. 미리 말해두지만 만약 금제가 개방된 찰나 습격을 감행할 생각이라면 제가 어찌 나와도 언짢게 여기지 마십시오.”

    두동의 눈을 빛내며 장담했다.

    “헤헤! 걱정 마시오. 현천선등(玄天仙藤)에 관한 일이 더 중하니 우리 둘도 일을 그르치지 않을 것입니다.”

    산발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곤 바로 저물대에서 하얀 자기 병을 꺼냈다.

    “그럼 받을 준비…….”

    “준비는 무슨! 우리 삼파의 보물을 그리 내줄 셈이더냐?”

    노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붉은 빛이 번뜩였고, 열댓 개의 흐릿한 칼날이 땅에서 솟아올라 그를 단단히 가두어버렸다.

    동시에 동굴 입구에서도 노란 빛과 함께 부 가 노인 등이 퇴로를 차단했다. 문사와 두동이 그 광경에 대경실색했다. 사내아이가 그 둘을 보며 얼굴을 굳혔다.

    “그래, 이 늙은이가 진작 알아보았다! 정마 양 도에서 우리 삼파에 적지 않은 첩자를 심어 둔 것을 알았기에 너희 몇을 의심한 적은 있으나 명확한 증좌가 나오지 않았지.

    어쨌든 이미 결단을 한 수사를 의심만으로 죽였다가는 본 종의 큰 손실이 될 테니까. 그런데 오늘 스스로 정체를 밝혀주니 노부가 고민할 것도 없구나!”

    백 문사는 너무 놀라 혀가 다 얼어붙은 것 같았다. 하지만 두동이 안색은 파리해도 간신히 미소를 유지하며 물었다.

    “나, 남 선배님이 어찌 여기에…….”

    “네 생각에는 분 노괴와 금경서 두 놈이면 우리를 붙들어 둘 수 있을 줄 알았더냐?  지금쯤 그들은 낙운종에서 나온 두 수사들에게 포위되었을 것이다.

    밖에서 들리는 소리는 내 제자들을 시켜 꾸며낸 것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어찌 너희들이 얌전히 정체를 드러냈을까. 정마가 공모해 우리 천도맹을 분탕질하니 이참에 문내의 첩자들을 싹 정리할 것이다!”

    간신히 안색을 유지하던 백 수사가 이제 거의 기겁을 하고 있었다.

    “바깥에서 그런 일이…….”

    백의 여인이 자신의 반려인 백 수사를 보며 떨리는 목소리를 주체 못하고 물었다.

    “백 사형……. 저, 정말 정도맹의 첩자였던 겁니까?”

    그녀의 말에 문사가 씁쓸한 표정을 보였다. 입을 달싹이며 무어라 말하는 듯 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동자가 입술을 비틀며 최후 통첩했다.

    “투항 하거라. 그렇지 않는다면 노부가 오랜만에 힘을 좀 써야겠구나.”

    두동 등의 안색이 변한 순간 석실 바깥에서 하얀 빛줄기가 들어왔다. 빛이 가시고 땀에 흠뻑 젖은 강 노인이 나타나서는 즉시 동자 앞으로 나아갔다.

    “남 사숙님 큰일 났습니다. 낙운종 정 선배님의 전음부를 받았사온데 무리를 이끌고 오다 마도 천살종과 천환종의 매복을 만나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합니다. 급히 지원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그 말에 석실 내의 삼 파 수사들이 웅성거렸다. 우리 쪽에서 상대를 치려 매복을 한 것이 아니라 거꾸로 당하고 있다고?

    “이 버러지 같은 것들이 감히 나를 가지고 노는 구나. 노부가 살려두지 않겠다!”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동자가 입을 벌리니 엄청난 붉은 빛이 무지개처럼 뻗어 나갔다. 당장 눈앞의 조무래기들을 죽이고 삼 파 연합을 구하러 갈 생각인 듯 했다.

    크아아악!

    그 찰나, 보호막 안에 있던 산발 수사가 맹렬히 고함을 질렀다. 그의 팔이 폭발적으로 길어져 검붉은 보랏빛을 분출하며 사내아이를 잡아채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사내아이의 얼굴에 순간 당황스런 기색이 나타났다. 이미 법보를 쏘아 보냈는데 갑작스레 습격이라니!

    산발 수사의 요사스런 손을 막으려면 어쩔 수 없었기에 아이의 배가 홀쭉해지며 뺨이 부풀더니 다시 한 번 지옥불을 입에서 분출했다. 살을 지지는 듯한 냄새가 퍼지자 그를 향해 날아들던 손도 속도가 줄었다.

    그 틈에 사내아이가 순식간에 붉은 빛의 보호막을 형성했다.

    “천살(天煞) 진군(眞君)!”

    아이가 음울한 목소리로 천살종 종주의 법호를 중얼거리며 한 팔을 들자 엄청난 기세로 날아가던 붉은 빛이 선회해 돌아왔다. 그리고는 그의 법보가 검붉은 구렁이의 형상을 하고는 이빨을 드러냈다.

    “헤헤! 남 수사가 이리 빨리 알아챌 줄은 몰랐습니다. 본 종주 역시 화룡동자(火龍童子)의 위명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빌린 몸만 아니면 실력을 겨뤄보면 좋을 것을 아쉽게 되었군요.”

    산발 노인은 고개가 아래로 푹 꺾인 것이 기절한 것 같았지만 입으로는 나른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 괴이한 장면을 보고 한립은 불현듯 극음 노괴가 이전에 펼쳤던 부신대법(附身大法)을 떠올렸다. 비록 완전히 똑같지는 않겠으나 비슷한 종류의 마도 공법이었다.

    이런 공법은 빙의 대상에게 미리 복잡한 작업을 해두어야 했으니, 천살종 종주로서는 산발 노인을 낙운종에 잠입시키기 전에 배신할 가능성을 배제한 것과 같았다.

    재빨리 머리를 굴리던 한립이 퍼뜩 드는 생각이 있어 소매 안의 여우에게 신중히 전음을 보냈다.

    “은월, 바로 석실로 돌아가. 나로 변해 중상을 당한 척하며 내가 석실을 떠난 걸 아무도 모르게 해야 한다. 죽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적당히 둘러 대면 되고. 내 진짜 신분과 수행만 밝혀지지 않으면 되니 서둘러.”

    은월이 한립의 말에 일이 상당히 긴박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깨닫고는 조용히 소매에서 나와 땅속으로 사라졌다.

    보호막 안의 천살 진군이 손을 저어 들고 있던 하얀 자기 병을 두동과 백 수사에게 던져주었다. 그가 다소 아쉽다는 듯 영안수를 슬쩍 보며 말했다.

    “가지고 돌아가거라. 화룡동자는 내가 막아 볼 테지만 오래 시간을 벌수는 없을 것이다.”

    말을 마친 천살 진군이 교활하게 웃으며 과감히 땅을 박차곤 눈 깜빡할 사이에 강 노인을 덮쳤다.

    “감히!”

    빙의 된 몸이 강 수사를 죽이려 하자  사내아이가 눈을 매섭게 떴다. 동시에 수정처럼 반짝이는 붉은 실이 무수히 쏘아져나갔다.

    강 노인도 안색이 급변해 황급히 입에서 노란 색의 비검을 뱉어 앞을 막았고 두 다리를 빠르게 놀려 뒤로 물러났다. 한 문파의 종주가 날린 일격을 그대로 맞아줄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천살 진군이 괴이한 미소를 흘리더니 순식간에 방향을 틀어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백의 여인 근처에서 나타났다.

    “아!”

    안 그래도 반려였던 문사의 배신으로 얼이 빠져 있던 백의 여인이 갑작스런 습격에 얼굴을 굳혔다. 오래 고민할 것도 없이 기다란 얼굴의 노인을 한 쪽으로 던져 놓고 두 손으로 수결을 맺어 소매 속에서 푸른빛을 뿜어냈다.

    그러나 또 한 번 들려온 웃음소리와 함께 천살 진군의 신형이 흔들렸고 거대한 손을 지면으로 내리쳐 그 반동으로 그대로 붉은 실의 공격을 막았다.

    펑!

    비록 마두가 빙의한 몸이 두 걸음 정도 물러나긴 했지만 그가 시간을 번 덕분에 기다란 얼굴의 노인은 훌쩍 날아올라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진군,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흥! 인원이 부족해 일을 그르칠 걱정이 없었다면 내 어찌 너 같은 정도 녀석을 구했겠더냐. 여기서 살아 나갈 수 있을 지는 이제 네 실력에 달렸구나.”

    천살 진군이 냉랭히 말하곤 다시 사내아이를 향해 쇄도했다. 이번에는 정말 상대와 몇 수를 주고받으며 두동 등이 달아날 시간을 벌어주고자 함이었다.

    “갑시다! 바깥 금제에 손을 써 두어 위력이 평소의 십분의 일밖에 되지 않소!”

    기다란 얼굴의 노인이 과감히 두동 등을 향해 외치고는 먼저 석문 쪽의 부 노인 등을 향해 쏘아져나갔다.

    두동과 문사가 그 말을 듣고 살았다 싶었는지 한 명은 하얀 비검 두 자루를,  다른 한 명은 온 몸을 뒤덮을 검은 보호막을 뿜어내며 세 수사가 한데 뭉쳐 나아갔다.

    이에 부가 노인이 그들을 놓칠 수 없어 당장 법보 등을 방출해 상대하기 시작했다. 결국 동굴 내의 수사들이 둘로 나뉘어 전투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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