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2
342화. 낙운종의 초식
청동 솥에서 향이 타오르자 전각 내의 제자들의 눈빛이 형형해졌다. 향이 절반 정도 탈 때까지 한립이 아무 소리도 없자 참다못한 은월이 먼저 물었다.
“한 형 참가할 건가요?”
“참가하지 않을 이유가 있나? 다른 제자들의 눈빛을 보니 내가 참가하지 않고 포기하는 것이 오히려 주의를 끌겠구나.”
은월이 다시 침묵했다. 향이 거의 다 타서 사라질 무렵에야 눈을 감고 있던 중년인이 두 눈을 부릅떴다.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 자. 시합에 참가하지 않을 자. 세심전을 떠나거라.”
“존명!”
대부분 제자들이 깊이 허리를 숙이곤 천천히 대전을 빠져나갔다. 이제 일부 축기기 수사들과 한립과 두동을 포함한 3, 40명의 연기기 제자들만 남았다.
백의의 중년 수사가 그들을 한번 휙 둘러보고는 흡족하다는 어투로 말했다.
“좋다! 조건에 부합하는 제자들은 거의 다 남은 것 같구나. 선발되지 못 한다 해도 다른 봉의 사문 사형제들과 실력을 견주어보며 견문을 넓힐 수 있는 자리이니 앞으로의 수행에 큰 도움이 될 게야. 그럼 이후의 자세한 이야기는 너희 대사형에게 듣도록 하고 나와 어 사조는 다른 일이 있어 이만 일어나겠다.”
말을 마친 신 가 중년인이 몸을 일으켜 전각 뒤쪽으로 나갔고 우 노인 역시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봉주님께서 내게 설명을 맡기셨으니 사질들은 잘 듣고 따르도록. 이번 선발전은 종파 내부의 행사이니 반드시 지켜야할 수칙이 있다.”
병색이 완연한 묘 가 청년이 기침을 몇 번 하더니 한립 등 연기기 수사들을 향해 이야기를 이어갔다.
“일단, 상대의 생명을 앗아가거나 치명상을 입힐 법기나 공법은 사용할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사문에서 쫓겨나거나 법력이 폐해지는 벌을 받을 것이고…….”
* * *
일각 후, 대전을 떠나는 제자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한립이 다른 이들이 신나 하는 것을 보며 잠시 고개를 젓다가 그 역시 법기에 몸을 실어 천천봉을 벗어났다.
순조롭게 동굴 거처로 돌아온 그는 다음 달에 있을 종파 내의 선발대회를 대비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실력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24위 안에 들어 검술대회에 선발되려면 수년간 거들떠도 보지 않았던 저급 부적과 법기의 힘을 빌려야 한다.
최상급 법기는 물론이고 그의 손에 명을 달리한 여러 결단기 수사의 저물대 속에서 찾아낸 기상천외한 법기들이 열댓 개는 되었지만 다른 사람의 이목을 끌지 않기 위해서는 지극히 평범한 것으로 정성을 다해 골라둘 필요가 있었다.
특히 이번 낙운종 선발전에서는 법기 보다는 대량의 초급 중계 부적을 제련해 상대할 전략이었다.
혹시 부적만으로 역부족일 경우를 대비해 오래 전 월국 형왕부에서 얻은 농염결(弄焰決)도 한 번 더 익히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고계 수사에게는 별다른 소용이 없는 조잡한 수법이더라도 연기기나 축기기 제자들의 눈과 귀를 속이는 데는 쓸모가 있을 것이다.
농염결은 손에 넣은 이래 틈날 때 마다 익히며 많은 영감을 받았던 공법이었다. 다만 결단 후기에 이른 지금 이런 자잘한 수법은 필요가 없어 잊고 지내다 다시금 익힐 기회가 온 것이다.
화염의 형태를 자유자재로 변화시키는 수법은 물론이고 본래의 구결을 넘어서는 깨달음까지! 남은 시간에는 한립은 각종 부적을 제련하는데 힘썼다.
그 기간 동안 금은색 서금충이 드디어 서로를 잡아먹기 시작했다.
이 사실을 발견한 한립은 크게 기뻐했는데 이번 진화로 완전히 성충이 되리라 예상하진 않았지만 어떤 것도 갉아먹지 못하는 것이 없다는 전설 속의 능력에 가까워지는 것만은 분명했다.
반대로 아직도 석실 안에서 깨어날 생각을 않는 제혼 때문에 신경에 쓰이기는 했지만 체내의 명혼주 덕에 제혼에게 큰 문제가 없음을 느끼고 있었기에 크게 근심하진 않았다.
* * *
1달 후 낙운종 주봉 입구가 유달리 소란스러웠다. 수많은 수사들이 모여들었고 그 중 구경꾼들만도 수천에 달했다.
직접 비무를 하지 않더라도 다른 이들이 법기와 법술로 겨루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주봉으로 통해있는 입구, 거대한 공터에는 백여 장에 이를 법한 진법이 세 개나 설치되어 있었고 반원형의 결계가 대회장을 덮어 참가자가 강력한 법술을 사용해도 관람객은 다치지 않도록 되어 있었다.
또한 세 명의 축기 후기 수사들이 심판으로 참관해 혹시나 있을 사고에 대비했다.
대회는 어느 덧 셋째 날이 되어 상당수의 제자들이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서른 미만의 축기기 수사들은 수가 굉장히 적어 세 네 명에 불과했기에 처음부터 대회에 참석할 필요 없이 마지막에 남은 연기기 제자들과 겨뤄 이기기만 하면 바로 선발권을 얻을 수 있었다.
봉주들이 선정한 선발 인원에는 들지 못했지만 그래도 서른 살 전에 축기에 성공했다는 것만으로도 각각이 발군의 실력이나 천부적 자질을 갖춘 것이 당연했다.
지금 한립은 묵묵히 천천봉 참가자들 사이에 섞여 보호 결계 내에서 싸우고 있는 천천봉 수사와 백봉봉 수사를 지켜보고 있었다.
백봉봉은 낙운종 6대 봉우리 중 나름 특수한 존재였다. 봉주와 부봉주가 모두 결단기의 여수사였고 문하의 제자들 역시 여 제자 위주였다. 그래서 매 비무마다 더욱 주목을 받았다.
지금 백봉봉 여 수사와 대전을 벌이고 있는 천천봉 제자는 겉늙어 보이지만 실제 연령은 스물일곱 밖에 안 된 원 씨 성의 사내였다.
그는 외문제자였지만 계국에서 나름 이름난 수도명가 출신이라 상당한 위력의 상계 법기인 백금과(白金戈) 창으로 수사를 몰아치고 있었다.
한립 곁의 다른 천천봉 수사들은 아무래도 지금 출전한 사내와 아는 사이인지 흥분한 기색으로 응원을 해댔다.
거의 승기를 잡은 분위기 속에 원 가 청년의 창형 법기가 하얀 빛으로 변해 그녀를 향해 날아들었는데, 여인의 한 손에서 푸른빛이 튀어 나가 상대의 공격을 막고는 빛과 함께 종적을 감추었다.
원 가 청년이 그것을 보고 황급히 은닉술을 펼친 그녀를 찾으려 했지만 그의 뒤에서 붉은 빛이 번뜩이더니 그를 휘감았다.
투앙.
굉장한 소리와 함께 천천봉 제자의 몸이 허공에서 떨어져 땅에 꽂혔다.
“백봉봉 금용, 승!”
허공에서 시합을 주관하던 마른 수사가 결과를 선포했다.
금용이라 불린 여인이 허공에서나마 심판에게 예를 취하고는 저물대에서 작은 병을 꺼내 의식을 잃은 원 가 청년의 코 밑에 대주었다.
그 향을 맡은 원가 청년이 퍼뜩 의식을 되찾고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깨닫자 당장 얼굴이 벌게져서는 회장을 박차고 나갔다.
승리한 여인은 뿌듯한 얼굴로 당당히 날아올라 진법을 벗어났고 그녀 주위에 다른 백봉봉 여수사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니 남자 수사들의 시선이 떠날 줄 몰랐다.
마른 수사가 무표정한 얼굴로 또렷하게 안내했다.
“다음, 천천봉 한립 대 화운봉 순통!”
한립이 살며시 미소 지으며 무리를 빠져나와 결계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아 한쪽에서 영준한 생김새의 백의를 걸친 청년이 나타나자 구경꾼들 사이에 한차례 동요가 일었다.
“저 수사가 입문한지 몇 년 안 된 순 사제인가!”
“듣자니 천양화맥(天陽火脈)을 타고 났다는데 정말일까요?”
“순 씨 가문라면 우리 계국에 명성이 자자한 수도가문인데! 엄청난 위력의 법기가 가득하겠군.”
“저 한립이라는 녀석은 운도 없지, 쯧쯧.”
손속을 겨루기도 전에 사람들의 말소리가 보호 결계 안에 있던 한립의 귓가에도 그대로 들려왔다.
‘천양화맥? ’
한립도 미미하게 안색이 변해 흥미롭다는 듯 상대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영준한 외모에 수행도 나쁘지 않아 연기기 12성 쯤 되어 보였다.
마주선 백의 청년도 상대를 살폈는데, 한립의 눈에 띄지 않는 외모와 연기기 10성의 성취를 보고는 그를 우습게 여겼다.
순통이 겉으로는 그런 티를 내지 않고 자연스럽게 예를 취했으나 한립이 입 꼬리를 슬쩍 올리며 그저 공수를 해 대충 인사를 받아 주었다.
백의 청년이 기분이 상해 얼굴이 굳어 가는데 허공에 있던 수사가 다시 한 번 담담히 외쳤다.
“시합을 시작한다!”
수사의 말이 떨어지자 백의 청년이 수결을 맺으니 온몸에 불꽃과 같은 것이 타올라 불길의 수정이 그를 보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손을 펼쳐 붉은 구술을 맺었다.
주술을 읊는 소리만 들리는 것으로 보아 구술 법기를 발동해 한립을 공격할 작정인 듯 했다. 한립이 상대를 참 고루하다 여기며 침묵했다.
물론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는 대회장 바깥은 다시금 소란스러워졌다.
“순 사제가 천양화맥을 타고 났다더니 부적도 이용하지 않고 순식간에 불 속성의 방어막을 형성했어!”
“저 손에 들고 있는 게 그 유명한 순 가의 화랑주인 걸 모르겠나? 승패가 이미 갈렸구만.”
* * *
한립의 표정 없는 얼굴에 잠시 비웃는 기색이 번뜩이더니 전혀 서두르지 않고 저물대 안의 엄청난 양의 부적들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고개를 들어 상대를 보니 백의 청년은 법기를 구동할 주술을 외느라 이쪽으로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아무래도 저 타오르는 듯한 불 속성 보호막에 자신감이 상당한 듯 했다.
‘기왕 그렇다면, 이열치열이지!’
한립이 부적을 한 주먹 집어서는 그대로 뿌려버렸다.
그러자 붉은 빛이 한차례 번뜩이는가 싶더니 마흔 개는 될 법한 주먹만 한 불꽃들이 벌떼처럼 뿜어져 나갔다.
“아?”
“헉!”
군중의 놀란 소리가 대회장에 울려 퍼졌다.
이제 막 화랑주가 손에서 떠오르기 시작해 안심하던 백의 청년이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이게 무슨……!”
수십 개의 불꽃들이 그의 보호막에 앞 다투어 들이닥쳐 진풍경을 만들어낸 것이다.
쿠콰콰콰캉!
연달아 들리는 굉음과 화려한 불길에 청년은 순간적으로 시력을 상실했다. 그가 단단히 믿던 불의 수정 보호막이 곧 부서져 나갈 기세였다.
천양화맥의 자질을 타고난 천재라지만, 가문 어르신들의 정성어린 보살핌을 받으며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랐으니 어디 가서 이런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어 보았겠는가.
당황한 그가 소리를 내지르며 허둥지둥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알 수 없는 힘이 그의 목을 잡아채 허공으로 끌어 올렸고 그가 있던 자리를 엄청난 화염의 파동이 때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혼비백산한 백의 청년이 황급히 고개를 돌려 보니 심판인 마른 수사가 그의 옷깃을 잡아채 구해낸 것이었다.
마른 수사가 단호히 선언했다.
“천천봉 한립, 승!”
불 속성 법술을 다루는 그가 비무 시작과 동시에 졌을 뿐 아니라 가장 하급의 불 속성 부적들에 된통 당한 것이다!
청년의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구경하던 수사들은 다른 의미로 놀라 분분히 속삭이기 시작했다. 아무리 불 속성의 간단한 초급 하계 부적이더라도 적어도 영석 한 개는 주어야 살 수 있었다.
그런 것을 비무 한 번에 서른 장 아니 마흔 장 가까이 던져버리다니 영석 마흔 개를 그냥 버리는 꼴이었다.
‘저 정도 영석이면 괜찮은 하계 법기를 구입해 영구적으로 사용할 터인데 저 자는 종파 내 선발전에서 이기기 위해 가산이라도 탕진할 셈인가? ’ 하는 것이 구경꾼들의 의문이었다.
별 이상한 놈을 다보겠다는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한립은 비무 주관자에게 예를 취하고는 보호 결계를 걸어 나왔고, 순통은 분하다는 표정이 역력했지만 심판의 싸늘한 눈길을 받고 대회장을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미 자신의 경기를 치렀으니 더 머물 이유가 없어 한립도 바로 처소로 돌아왔다.
1회전은 이후 이틀 뒤 막을 내렸다.
그 중에는 상당히 격렬하거나 화려한 시합이 많아 제자들은 모이기만 하면 온통 선발전 이야기뿐이었다.
한립이 부적을 수십 장 뿌려 단번에 시합에서 승리했다는 황당한 이야기도 점점 제자들 사이에 부러움을 불러 일으켰다. 그들은 한립이 제법 큰 가문 출신의 제자로 재력이 상당하다 여긴 것이다.
결과적으로 한립이라는 이름이 저계 수사들 사이에서 꽤나 알려지게 되었다.
2회전 시합, 한립의 출전일은 첫날이었다.
그가 여전히 표정 없는 얼굴로 대회장에 나타나자 이전에 그의 경기를 관람했던 이들이 수군거렸다.
“천천봉 저 수사가 이틀 전 부적 수십 장을 뿌려댔다는 그 자인가?”
“말이 됩니까 그게? 보기에는 별 볼일 없어 뵈는데. 아깝지도 않은가 봅니다.”
“우리 계국에 한 씨라는 거대 수도가문은 들어본 적이 없다네. 다른 나라의 수도자가 본 종에 입문한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