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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341화 (98/2,000)

# 341

341화. 두동

저 멀리서 붉은 빛이 그가 날아가는 쪽으로 다가왔다. 붉은 빛 속에 고운 용모로 냉랭하게 서있는 여인은 바로 그를 약재원에 안배한 ‘모 사숙’이었다.

여인이 허공에 멈춰 한립을 보는데 이 만남이 조금 의외인 듯 했다.

“너도 연락을 박고 천천봉으로 가는 것이더냐?”

“예, 모 사숙! 무슨 일이 생겼기에 봉주께서 제자들을 소집하셨는지 아십니까?”

“모른다. 아마 검술대회에 대한 일일지도.”

짤막히 답한 그녀가 한립이 밟고 선 비검 법보를 보곤 불현듯 말했다.

“상급 법기이기는 하나 비행용으로 특화된 것은 아니구나. 시간도 아낄 겸 내가 데려가 주마.”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의 법기에서 붉은 빛이 퍼지며 한립을 한 데 감싸 버렸다. 그녀가 다시 속도를 높이며 무표정한 얼굴로 한립에게 시선을 주었다.

“내가 준 현빙결을 수련하고 있느냐?  비록 기초공법에 큰 도움은 되지 않더라도 소성이라도 한다면 상당한 위력의 물 속성 법술 몇 가지는 부릴 수 있게 된다. 축기에 성공하면 주로 쓰는 공법이 될 수도 있으니 조금 더 시간을 내어 익히거라.”

이렇게 물으니 한립은 그냥 어느 정도 성취를 보이고 있다 고했다. 어차피 상대가 시험해 보고자 한다면 그의 수행으로 저계 물 속성 법술 몇 가지를 흉내 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여인은 별 생각 없이 한 말인지 깊게 파고들지 않았다. 모 사숙이 그를 데리고 천천봉으로 향하는 동안 한립은 그녀에게서 그윽한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은월 역시 지금은 무어라 떠들 때가 아니라 판단했는지 머릿속도 조용했다. 두 사람이 거의 천천봉에 이렀을 때 한립이 무심코 아래를 살폈다.

그 결과 아래쪽에서 녹색 빛이 솟아올라 모 가 여인의 앞을 막아섰다.

“모 사매, 오랜 만이오. 요즘 어찌 그리 바쁜지 모르겠군. 내 수차례 전음부를 보냈으나 회답이 없으니?”

한립이 입문을 하던 날 노골적으로 허드렛일을 할 제자를 달라며 허튼 수작을 부리던 언 가 성의 수사였다. 여인의 서늘한 얼굴이 그 앞에서 더욱 딱딱해졌다.

“봉주의 명에 따라 소집에 응하는 길입니다. 감히 내 앞을 가로 막는 것입니까?”

“히히, 모 사매 어찌 그리 정색을 하오. 그냥 사매의 안부를 물을 겸 또 집안 어른들에게 연락을 받았는지 확인하러 온 것인데. 이미 집안끼리 우리 두 사람의 혼사를 결정했으니 언제가 길일일지 상의를 해야 하지 않겠소?”

사람 좋은 척 희희낙락하는 얼굴과 달리 눈빛은 그녀의 몸을 끈적하게 훑고 있었다.

하지만 곧이어 여인 뒤에 서 있던 한립을 보는 시선에는 음산한 빛이 스쳤다. 그의 생각을 눈치 챈 여인이 서늘히 외쳤다.

“또 무슨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거죠?  한 사질은 사부의 명을 받아 내가 맡아 지도하는 수사입니다. 또한 집안에서 정한 혼사를 거부할 수는 없겠으나 언제 당신과 함께 할지는 내 뜻이 아니겠습니까.

당신이 나와 비슷한 수준의 수행을 갖춘다면 그때 가서 고려는 하겠으나 그러지 못 한다면 이번 생이 끝나기 전까지 내 머리카락 한 올 건드릴 생각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녀의 도발적인 언사에 언 가의 얼굴도 일그러졌다. 언 가가 무어라 입을 열려는 찰나, 모 가 여인이 이미 인내심이 바닥났다는 듯 영력을 법기에 불어넣었다.

붉은 빛이 크게 퍼지며 법기를 탄 두 사람이 쏜살 같이 언 가의 머리 위를 스쳐갔다. 한립이 힐긋 뒤를 돌아보니 붉으락푸르락한 그 자의 얼굴에 독기가 어려 안 그래도 추한 생김새가 아주 가관이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한립이 입을 열었다.

“모 사숙님, 저 분과 혼약이 있으신 겁니까?”

언 가는 겨우 축기 초기였고 모 가 여인은 축기 중기에 이른 수사였다. 거기에 두 사람의 용모가 이렇게 천양지차인데 여인의 가문에서 이런 혼담을 받아들였다는 것이 불가사의였다.

물론 한립은 굳이 그 내막을 캐묻고 싶지 않았지만 이런 상황에서 같은 봉에 소속된 사질이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것도 이상했다. 그래서 분명 열 받은 여인에게 핀잔을 들을 것을 알면서도 이 같은 질문을 한 것이다.

“사질이 관여할 일이 아니네!”

그의 예상대로 질문을 꺼내자마자 여인의 눈이 서늘해지며 단칼에 선을 그었다. 한립은 민망한 기색을 꾸며내며 즉시 입을 다물었다.

천천봉은 그리 멀지 않아 잠시 후 모가 여인과 한립이 산 중턱에 도착했다.

돌로 길을 닦은 공터 끝에는 산세에 기대어 지어진 커다란 전당이 세월의 흔적을 드러내고 서 있었는데 은색의 거대한 편액에 ‘세심전(洗心殿)’이라고 적혀있었다.

거대한 검은색 나무문이 굳게 닫힌 그곳이 바로 천천봉 제자들이 모여 일을 논하는 곳이었다.

세심전 밖에는 이미 오륙백 명은 되어 보이는 남녀 제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머리를 맞대고 무언가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모 가 여인이 유유히 법기를 움직여 대전 앞에 내려섰다. 모 사숙을 향해 주변의 저계 수사들이 공손히 예를 올리며 안부를 물었지만 그녀가 손을 저으며 주저 없이 대전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한립이 그녀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군중 속으로 섞여 들어가려는데 주변에 모여 있던 제자들은 물론이고 꽤나 멀리 떨어져 있던 이들까지 모두 괴이하다는 눈빛으로 무어라 떠들어 댔다.

한립이 조용히 의식을 퍼트리니 그들의 속삭임이 생생하게 들려왔다.

“누구지?”

“처음 보는 얼굴인데 새로 입문한 제자인가?”

“모 사숙이 왜 저런 녀석과 함께 온 걸까요?”

“모 사숙의 친척이 아닐까. 다른 남자 수사들과 동행하는 걸 본적이 없었는데 말이야.”

궁금증과 질투가 담긴 말소리이었다. 한립은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했지만 속으로는 작게 탄식하며 대전 앞에서 물러나 무리 속으로 스며들었다.

잠시 후 갑자기 호방하고 힘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사제, 그날 헤어지고 오늘에서야 다시 볼 줄은 몰랐습니다!”

한립이 고개를 돌려 상대를 확인하니 그는 큰 체구를 가진 ‘두동’이란 자였다. 두동은 만면에 미소를 지어 그를 향해 아는 체를 했다. 속으로는 고개를 저었으나 한립이 바로 두동을 향해 미소를 보이며 포권을 했다.

“두 사형이셨군요. 그날 장 사백님을 따라 가시더니 잘 지내셨는지요.”

한립이 말하는 장 사백은 입문하던 날 상대를 데려갔던 백발의 노인을 칭하는 것이었다.

“그럼요, 아주 잘 지냈지요!”

크게 웃음 짓는 모습이 겉으로 보기에는 순박하고 우직해 보였다.

상대의 말에 따르면 백발노인이 부적 제련에 대한 그의 자질을 알아보고는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다고 했다.

한립은 백발노인의 안목 없음을 동정했다. 노년에 힘써 가르치고 있는 제가가 정체를 숨기고 잠입한 놈이라니!

분명 언젠가 후환이 따를 것이다. 물론 그가 나서서 장 사백에게 알려줄 생각은 없었다. 갑자기 두동이 조심스레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한 사제를 맡은 모 사숙님은 우리 천천봉 제일의 미녀라고 들었습니다. 낙운종 전체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가인이라는데. 오늘 모 사숙과 함께 등장해 다른 제자들의 부러움을 샀으니 앞으로 고생 꽤나 하겠어요.”

한립이 쓴웃음을 지으며 주변을 돌아본 후 어쩔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럴 듯합니다.”

“오면서 모 사숙과 이번 대회에 관련된 이야기는 좀 하셨습니까?”

“글쎄요. 전혀요?  두 사형이 대회에 대해 무언가 아는 바가 있는 모양입니다?  아는 바가 있으면 사제에게도 들려주시지요.”

장한이 한립의 기이한 눈빛에 흠칫 놀랐지만 순박함을 가장하며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평범하게만 생각했던 상대가 자신을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을 보내자 이상하게도 가슴이 서늘해진 것이다.

한립이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리니 그런 기이한 분위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지만 이미 경계심이 생긴 두동은 더는 한립과 대화를 나누지 않고 억지로 웃는 낯을 유지한 채 다른 무리로 돌아가 버렸다.

한립이 멀어지는 그를 보며 조소하는데 머릿속에서 은월의 목소리가 울렸다.

“일부러 상대를 겁줘 쫓아내다니 앞으로 의심을 살 텐데요?”

“저자의 신분은 알 수 없으나 낙운종에 섞여 들어온 데는 분명 꿍꿍이가 있을 터. 저런 자와 가까이 지내고 싶지 않으니 내쫓을 수 밖에. 만일 무슨 사단이 벌어져도 엮이고 싶지 않거든.

게다가 기껏해야 거슬리면 암습하는 정도일 텐데. 저 정도 인물을 내가 걱정해야 하나?  어차피 나도 상대의 계획을 막을 생각이 없으니 각자의 길을 갈 수밖에 없어.”

은월은 그의 말이 일리 있다고 여기는지 다 듣고도 말이 없었다.

두동이 낙운종에서 어떤 간계를 꾸미는 줄은 모르지만 일이 발각되면 그와 가까이 지내던 사형제들은 모두 고위층의 의심과 경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어차피 자신이 상관할 일도 아니었고 한립은 혼자 남아 다른 저계 제자들을 둘러보았다. 남녀노소가 섞여 있었지만 나이가 많다고 수행이 높은 것도 아니었고 나이가 적다고 수행이 낮은 것도 아니었다.

그 중에는 눈에 띄는 젊은 여인들도 몇 있었는데 많은 수사들이 그들을 주목했다. 다른 문파와 마찬가지로 낙운종도 미색의 젊은 여수사들은 추종자들이 상당한 듯 했다.

한립이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드디어 대전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이어 안에서 들려온 위엄 있는 목소리에 모두 몸가짐을 바로 하고 섰다.

“천천봉 제자들은 들어 오거라!”

담담한 사내의 음성은 천천봉 봉주의 것으로 한립과 일면식이 있는 결단기의 신 수사였다. 문 밖의 제자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이며 외쳤다.

“사조의 명을 받듭니다!”

이후 모여 있던 수사들이 순서대로 줄지어 들어가니 가장 늦게 입문한 한립은 두동과 같이 가장 마지막 줄에 서서 세심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대전 안은 상당히 넓어서 족히 사백 장은 되어 보였지만 수십 개의 커다란 기둥이 지붕을 받히고 있는 것을 제외하면 안쪽의 의자 두 개를 제외하고는 공간이 텅텅 비어 있었다. 그러나 기둥들에 박혀 있는 월광석 덕에 분위기는 상당히 좋았다.

두 개의 의자에는 점잖은 얼굴의 하얀 의복을 걸친 수사와 긴 머리를 아무렇게나 풀어헤친 약간 험상궂게 생긴 노인이 자리했다.

그들 앞에는 축기 수사 열댓이 두 줄로 나뉘어 서 있었다.

모 가 여인은 한립이 입문할 당시 안내를 해주었던 유 가 청년과 같은 줄에 서 있었고, 당시 문심부(問心符)를 이용해 신입들을 시험하던 묘 가 청년은 여전히 병색이 깊고 허약한 얼굴로 다른 줄에서 그들을 마주보고 있었다.

제자들이 바로 허리를 굽혀 예를 행했다.

“신 사조, 우 사조 두 분 사조님들을 뵈옵니다!”

“됐으니, 일어들 나거라!”

정 중앙에 앉은 백의 중년인이 웃음을 머금고 팔을 내저었다.

저계 제자들도 일사분란하게 움직여 대전의 양 쪽으로 갈라섰는데 한립과 두동은 문에서 가장 가까운 바깥쪽에 위치했다.

한립이 의식을 이용해 험상궂은 인상의 노인을 살피니 겨우 결단 초기였다. 이 노인은 일찍이 이름은 들었지만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천천봉 부봉주 ‘우 사숙’일 것이다.

한립의 눈길이 잠시 머물다가 더는 신경 쓰지 않고 의식을 회수했다. 곧 천천봉 봉주, 신 사조가 하얀 의복 소매를 펄럭이며 입을 열었다.

“사제들을 부른 이유를 모두 예상 했을 것이다. 그렇다, 어제 고검문에서 연통이 오기를 이번 검술대회는 반년 후에 거행하기로 결정이 났다!

저번 대회가 본 종에서 진행되었으니 이번에는 형제와도 같은 백교원에서 진행되겠지. 이에 우리와 고검문에서 참가를 희망하는 제자들은 운몽산 서쪽 산맥으로 가서 대회를 치를 것이다.

관례에 따라 이번 대회 역시 각 문종은 30명씩 인원을 추려 본 대회에 출전하도록 하고 10위 안에 드는 제자에게는 큰 상을 수여할 것이다! 그러니 우선 종 내에서 선발전을 열어 검술대회 참가 인원을 결정할 것이다.”

잠시 말을 멈추고 장내를 둘러본 백의 중년인이 말을 이었다.

“그 중 여섯은 6대 봉주들이 한 명 씩 추천하여 결정하고 나머지 스물네 명은 참가 자격에 맞는 이들 중에서 비무를 통해 선발한다!

최종적으로 참가자격을 얻은 제자들은 남은 시간 동안 본 종 장로들의 지도를 받을 수 있게 되지. 어제 봉주들이 모여 장문인과 논의한 결과 종 내의 선발전은 한 달 후에 거행하기로 하였다.

검술대회는 서른 살이 넘었거나 수행이 연기기 10성에 이르지 못한 제자를 제외하고 모든 저계 제자들이 참가할 수 있다. 그렇지, 이번에 우리 천천봉에서 경합 없이 바로 선발된 제자는 나와 어 사조가 한마음으로 선정한 너희의 모 사숙이다.

이쯤하면 되었다. 군아, 향을 피우거라!”

“존명!”

군이라 불린, 유 가 청년이 바로 앞으로 나와 신속하게 저물대에서 청동 솥을 꺼내 대전 중앙으로 가져갔다. 그가 솥 위에 향을 꼽고 불을 피우자 푸른 연기가 하늘하늘 허공으로 나부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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