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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340화 (97/2,000)
  • # 340

    340화. 명청영수(明淸靈水)

    한립도 처음 듣는 이야기라 관심이 갔다.

    “선발전에서 탈락을 해도 법기를 보상으로 받을 수 있다니 보통 대회는 아닌가 봅니다. 왕 사형께서 상세히 설명해 주실 수 있는지요.”

    “당연히 그럼세. 이번 검술대회는 사실 우리 운몽산(雲夢山)의 세 개 종파가 새로 입문한 제자들을 위해 준비하는 성대한 잔치나 마찬가지네.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30세 미만의 축기기 이하 제자들은 모두 참가할 수 있지. 한 사제도 보아하니 스물대여섯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데 조건에 해당하겠군.”

    한립이 턱을 매만지며 유유히 물었다.

    “그러합니까. 참가하려는 제자가 많은 데는 이유가 따로 있겠군요.”

    “맞네. 이번 검술대회는 세 개의 종파가 공동으로 관리하는 성스러운 나무와 연관되어 있거든.”

    성스러운 나무란 소리에 한립이 대번에 영안의 나무, 영안수(靈眼樹)를 떠올렸다.

    “검술대회가 그 영물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검술대회는 그 성스러운 나무에서 진액, 즉 순액(純液)이 흘러나오기 전에 거행되어 낙운종(落雲宗), 고검문(古劍門), 백교원(百巧院)이 순액을 나눠 갖는 전통적인 방식이라고 할 수 있거든.

    이 대회에서 다른 두 파를 압도하는 종문이 순액의 절반을 독차지 하고 나머지 두 종파가 남은 것을 나누어 갖는 형식으로 진행돼. 그러니 말로만 신입들의 대회지 세 문파의 고위층도 상당히 신경을 쓰네. 만일 이런 대회에서 공을 세우면 사문 어른들의 관심을 받게 되고 앞으로 전도가 유망해 지는 건 일도 아닌 게야.”

    왕 사형의 이어진 말에는 선망과 원망이 섞여 있었다.

    “이런 나중의 일까진 말할 것도 없고. 당장 검술 대회에서 다른 제자들을 압도해 우수한 성적을 내면 최후에 얻게 될 보상 또한 후하기가 이를 데가 없지.

    순위권에 들면 최상급 법기를 배분 받고 우승을 차지한 이는 거기에 정령단한 알까지 받게 되는데, 이 단약이 비록 우리 같은 저계 제자들에게는 이렇다 할 효용이 없지만 결단기 고인들에게 넘기면 최상급 법기 서너 개를 받을 수 있으니 대단한 것이네.

    그저 우승자는 본 종이 운몽산을 근거지로 삼은 이래 줄곧 고검문에서만 배출 되었다 하더군. 고검문은 검술에 특화된 문파인데다 보유한 공법이나 법기 역시 강력해서 다른 종문의 동급 수사들도 상대하기가 상당히 고달프다 하네.”

    한립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 대회는 연기기 제자와 축기기 제자가 한데 어우러져 경합을 한단 말입니까?”

    “그렇지. 연기기 제자나 축기기 제자나 어떤 구별도 없이 동시에 비무를 진행한다네.”

    “그렇게 되면 연기기 제자들에게는 너무 불공평한 일이 아닐 지요.”

    믿기지 않는다는 그의 표정에 왕 사형이 슬쩍 웃으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검술대회란 것이 본래 각 종파의 축기기 제자들의 수행을 겨뤄보는 자리니 연기기 제자는 부차적인 요소일 뿐이야. 하지만 저계 제자들 뿐 아니라 외문 제자들까지 수련에 열을 올릴 기회를 주지. 게다가 대회가 개최된 이래 연기기 제자가 승리를 한 적은 없더라도 축기기 제자들을 줄줄이 이기고 10위 권 안에 든 사례도 여러 번 있었고 말이야.”

    완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 소리는 아니었다.

    “연기기 제자가 10위권 안에 들었다면 위력이 강한 법기의 힘에 기대서겠군요.”

    이번엔 규한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헤헤, 단번에 그것을 파악하다니 한 사제는 역시 머리가 좋다니까. 세 종파의 결단기 선배님들 중 후계가 있거나 친인척 등 아끼는 저계 수사가 있는 경우엔 대단한 법기를 내주어 힘을 실어 주곤 하지! 이렇게 되면 아무리 축기기 수사라 한들 제대로 된 법기를 지니지 못하면 패하는 게 이상한 일도 아니잖아?”

    이야기를 들을수록 한립의 미심쩍은 마음이 짙어졌다.

    “그렇게까지 해서 저계 수사들조차 순위권에 들려 한다면 분명 겨우 법기를 얻기 위해서는 아닐 듯 한데요.”

    왕 사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검술대회 입상의 가장 중요한 혜택에 대해 말했다.

    “안 그래도 그것에 대해 말해 주려는 참이었네. 많은 제자들이 검술대회에 목을 매는 것은 보상으로 주어지는 화려한 법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10위 안에 들면 영험한 물로 눈을 씻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이지!

    성수에서 흘러나오는 순액 중 첫 번째 방울을 받아 다른 진귀한 재료와 섞어 배합하면 전설 속의 명청영수(明淸靈水)가 된다고 하는데 이것으로 두 눈을 씻어내면 비록 법력이 늘어나는 것은 아니나 그 후로 안개나 암석을 꿰뚫어 볼 정도로 맑은 눈을 갖게 된다는군.

    자세히 알려진 바는 없지만 상상을 뛰어 넘는 신통한 효과가 있다고들 하고 말이야. 그래서 이 대회에 모두 사활을 걸고 덤벼드는 거네. 어쨌든 정령단이 아무리 귀해도 단지 우승자에게 한 알이 주어질 뿐이니까.”

    “명청영수!”

    한립의 두 눈썹이 솟아올랐다.

    이전에 많은 경전에서 언급된 것을 보기만 했지 운몽산 3대 종파에서 이것을 제조할 수 있을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다.

    뜻밖의 소식에 그의 마음이 흔들렸다. 규환이 짐짓 몽롱한 눈빛으로 끼어들었다.

    “하아, 성스러운 나무에서 흘러나온 진액 뿐 아니라 함께 배합하는 재료들도 전부 희귀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라네. 듣기로는 천년 넘게 길러낸 영초가 몇 가지나 들어간다니 명청영수의 효과에 대해서 의심할 여지가 없겠지! 다행스럽게도 이런 효과가 연기기나 축기기의 저계 제자에게만 통해서 상부에서 내주는 것이지 안 그랬으면 우리에게 기회나 돌아왔겠어?”

    여기까지 들으니 검술대회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대략 이해할 수 있지만 나머지 세부적인 사항은 직접 알아보아야 할 듯 했다. 이번 대회에 정령단에 명청영수까지 걸려 있다니 그라도 쉽게 지나칠 기회는 아니었다.

    이후 왕 사형과 낙운종 사형들이 대회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다 떠났다. 멀어져 가는 비행 법기들을 보는 한립의 얼굴에 진중한 기색이 어렸다.

    그가 바로 동굴 거처로 돌아가지 않고 약재원 밖에서 생각에 잠겨 있자, 돌연 소매 속에서 여우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한 형도 참가하려고요?  한 형의 마음을 끄는 것이 정령단인지 아니면 명청영수인지 모르겠네요.”

    “둘 다 원한다면?”

    그러고는 한립이 소매를 털어내자 작은 여우가 튀어 나와 원래의 크기로 돌아갔다. 여우가 우아하게 몸을 늘어뜨리며 물었다.

    “하하, 너무 욕심 부리는 거 아니에요?  뭐 정령단이든 명청영수든 굉장히 쓸모가 있는 것들이니 이번 기회에 손에 넣으면 나쁠 건 없겠네요.”

    “내게 생각이 있으니 당신이 관여할 일이 아니오. 일단 돌아가지. 검술대회보다는 당신을 어찌 처리할 지가 관건이니.”

    냉랭히 말한 그가 몸을 돌려 거처로 향했다. 여우가 그런 그를 보며 슬그머니 웃더니 따라붙었다.

    석산 내부의 동굴로 돌아와서 한립은 즉시 월령을 자신의 기령으로 제련하는 일에 착수했다. 그의 본명법기인 청죽봉운검에 기령을 깃들게 한다면 자연히 위력이 크게 증가할 것이다.

    그리고 원래 법보에 기령을 깃들게 하는 일은 성공률이 극히 낮았는데 그 이유는 강력한 요수의 혼백이 격렬히 저항을 해서였다. 그런데 거대한 은색 늑대 요수의 혼백인 은월은 자신이 스스로 그의 기령이 되기를 자처하니 그럴 걱정은 없었다. 그리고 여우가 혼백을 옮기는 것을 자신이 알아서 하겠다고 호언장담 해대니 한립으로서는 반가울 따름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여우의 뜻에 따라 조용한 석실을 마련해 그 안에 괴상한 진법을 그려주고는 옥패와 그녀를 두고 유유히 빠져 나왔다.

    굳게 문이 닫힌 석실은 소리를 차단하는 방음결계까지 처서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한립은 몰래 염탐할 마음도 없었다.

    옥패 법보에서 나오지 못한다면 스스로가 어찌 될지, 상대가 가장 잘 알고 있을 것 아닌가. 그동안 한립은 여우의 석실과 맞붙은 석실에서 기령 제련을 위한 준비를 이어나갔다.

    반나절 후, 해야 할 일들을 마친 그가 거침없이 여우가 있는 석실의 석문을 열었다.

    옥패와 여우는 여전히 석실 내에 그려둔 진법 안에 있었다. 그저 옥패의 빛이 상당히 어두워졌고 여우 역시 땀에 젖어 축 늘어져 있었을 뿐. 그녀는 마치 반나절 동안 흠씬 두들겨 맞기라도 한 듯 기력이 쇠해 보였다.

    한립이 이전보다는 온화한 목소리로 물었다.

    “순조롭게 진행 되고 있소?”

    “아파서 죽는 줄 알았지만 참을 만 했어요. 한 형도 준비가 된 거죠?  깃들 곳 없이 이렇게 빠져나온 상태로는 여우의 몸에서도 오래 못 버텨요. 당장 수사의 법보와 하나가 되어야지 안 그랬다가는 혼백이 흩어질 거라고요.”

    목소리는 힘이 하나도 없었지만 그녀의 정신은 또렷했다. 한립이 수긍하고는 여우를 가볍게 안아 원래 그가 있던 석실로 돌아갔다.

    석문이 닫히고 다시금 정적이 찾아 왔다.

    * * *

    3일 후, 약재원 결계 바깥에서 전음부의 붉은 빛이 날아들었다.

    붉은 빛이 짙은 안개 속으로 사라져 종적을 감춘 후 장장 한 시진이 지나서야 한립이 푸른 빛줄기로 변해 나타났다. 전음부 속의 명에 따라 비검 법기를 타고 천천봉 방향으로 향한 것이다.

    한립의 머릿속에 은월의 맑은 목소리가 울렸다.

    “한 형, 거의 모든 천천봉 제자들이 소집됐나 봐요. 검술대회 때문일까요?”

    “알 수 없지. 하지만 나 같이 약재 밭이나 돌보는 제자까지 봉주(峰主)가 친히 불러들이는 것으로 보아 중요한 일인 것은 확실하겠어.”

    이제 한립은 의식만으로도 법보에 깃든 은월과 소통할 수 있었고 그녀를 대하는 어투도 훨씬 편해졌다.

    “겨우 저계 제자들의 대회에 참가하는 것이니 신분을 들키지 않고 우승하는 것도 어렵지 않겠지만 그래도 고계 수사들의 의심을 살 텐데요. 원영기 수사들의 주목이라도 받으면 득보단 실이 많을 수도 있어요.”

    “내가 언제 우승한다 했지?  대회에 참가 한다 해도 절대 그렇게 눈에 띄는 짓은 하지 않을 거야. 원영 응결에 성공하기 전에는 아무도 날 의심하지 못 할 테니.”

    “은월이 괜한 걱정을 했네요. 하긴 한 형처럼 온갖 풍파를 겪으며 살아온 수사가 이런 사소한 걱정을 빼먹었을 리 없죠!”

    그저 목소리일 뿐이었지만 은월이 웃음을 흘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 전해졌다. 한립은 속으로 나마 한숨을 내쉬었다.

    은월은 청죽봉운검의 기령이 된 후, 이제 한립이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을 것을 알고는 자유롭게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마치 그간 옥패 속에 갇혀 답답하고 적막하게 지냈던 세월을 보상받겠다는 듯! 그것을 그대로 듣고 있어야 하는 한립은 골치가 아파왔다.

    처음 그녀에게 묻어나던 기품은 대체 어디로 간 건가!

    한립이 은월의 말에 답을 하지 않고 있는데 그녀가 또 물었다.

    “그런데 명청영수는 축기기 이상의 수사에게 아무런 효과가 없다면서요. 한 형은 왜 그걸 얻고 싶은 거예요?”

    그의 입 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은검봉의 제자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게 있다. 그 명청영수는 고계 수사에게 전혀 효과가 없는 게 아니야. 고계 수사들은 이미 어느 정도 운무를 꿰뚫어 보는 능력을 지니고 있기에 잠깐 동안 눈을 씻어 내는 거로는 이렇다 할 효과를 보지 못할 뿐이지.

    어차피 순액 한 방울을 고계 수사 한 사람이 다 차지한다 해도 크게 효과가 없으니 그럴 바에야 장래가 유망한 저계 수사 여럿이 득을 보게 한 것이다.”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난성해에서 본 고서에 적혀 있던 내용이니, 아마 맞겠지.”

    “그럼 한 형의 진정한 목표는?”

    “그래, 이번 기회를 빌려 영안수에 접근해 뿌리를 취할 생각이다. 그리고 신비의 병을 이용해 키워내면 명청영수나 정령단 따위야 원하는 대로 얻을 수 있는 게지. 물론 제련법에 대해서라면 다 얻을 방책이 있고.”

    “우와! 그러면 10위에만 들면 되겠네요! 갑자기 주목을 받긴 하겠지만 우승을 차지하는 것보다는 있을 법한 일이고요.”

    한립이 슬쩍 웃고는 더는 답하지 않고는 시선이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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