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9
339화. 다시 돌아오다
“그럼 이제…….”
“앗, 영력이 소진되어서 더는 못 버티겠어요!”
한립의 말을 끊은 그녀가 은빛을 흩날리며 작게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다시 보송보송한 하얀 여우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런 여우의 목덜미를 잡고 한립이 차분히 말을 마쳤다.
“잠시 후 당신을 데리고 나가 낙운종 제자들에게 넘길 테니 일단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기로 합시다. 겨우 연기기 제자들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터. 돌아가는 길에서 기다리겠소.”
백호의 의식이 한립에게 전음으로 답했다.
“알겠어요. 한 형의 말대로 할게요. 그런데 저 시소는 어떻게 처리할 거예요?”
한립의 시선이 온몸이 짙은 녹색 털로 뒤덮인 강시에게 닿았다 떨어졌다.
“일단 서금충이 갉아먹을 수 있는지 시험해 보고 안 되면 어쩔 수 없겠지. 저런 괴물이야 알아서 죽든 말든 상관도 없고. 내가 혼백이 담긴 옥갑을 수거해 가니 풀려난다 해도 이전과 같이 수도계에 파랑을 일으킬 순 없을 거요.”
손이 허리춤을 스치자 영수대가 허공에 떠오르더니 무수히 많은 서금충들이 쏟아져 나와 수장의 삼색 구름을 만들며 시소에게 덤벼들었다.
웽웽웽.
무언가를 갉아대는 섬뜩한 소리가 한참을 들려오는가 싶더니 서금충들이 하나둘 몸을 뒤집고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본래 세 가지 색이었던 서금충의 껍데기가 암녹색으로 변색되어 있었다.
“대단한 위력의 극독이군.”
그가 주술을 외자 날벌레들이 다시금 허공으로 날아올라 영수대 안으로 돌아왔다. 옆에서 동그란 눈동자를 굴리던 여우가 말했다.
“시소의 몸에 있는 시독(尸毒)이 천하 십대 극독 정도는 아니라도 상당히 강력하네요.”
한립이 냉랭한 눈빛으로 시소를 보았다. 아무래도 저 극악한 강시의 몸은 고계 요족 독교(毒蛟)보다 강인한 듯했다.
한참 갉아먹었는데 겨우 살 꺼풀 정도가 벗겨져 있었으니 이런 속도면 삼색 서금충 열에 여덟은 죽어야 겨우 저 괴물을 멸할 수 있을 것이다.
“가지.”
“그럴 수밖에 없겠어요. 남겨두면 나중에 쓸데가 있을지도 모르고요!”
여우가 귀엽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몸에서 빛을 발하며 황색 늑대를 불러냈다.
작은 늑대가 바로 한립과 여우를 향해 입을 벌려 노란 막으로 감싸니 둘은 순식간에 석실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 * *
절벽 바깥에서 왕 사형과 규환 등이 초조한 기색으로 오가고 있었다. 토둔술을 못하니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규환이 인내심이 다했는지 왕 사형을 향해 물었다.
“사형, 한 사제가 설운호를 잡아 올 수 있을까요?”
다른 두 사형들도 둘의 대화에 곧바로 관심을 보였다. 왕 사형의 판단력을 꽤나 신뢰하고 있었던 것이다. 왕 사형이 뜸을 들이다 쓰게 웃었다.
“확신할 수는 없어. 연기기 10성의 한 사제가 그 요물을 잡는다는 게 쉽지는 않겠지만 신묘한 법기가 많아 보이니 그저 기다려 볼 수밖에.”
규환 등 세 명이 서로 시선을 마주했다.
짜리 몽땅 청년이 자신의 다친 손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쉬는데 돌연 노란 빛이 번뜩이며 작은 여우를 손에 쥔 한립이 나타났다.
“한 사제!”
“정말 잡아왔군!”
경사라도 난 듯 네 수사가 그를 둘러싸고 떠들어댔다. 한립이 담담히 웃으며 하얀 여우를 규환 쪽으로 건넸다.
“요수가 교활하여 절벽 속에서도 잘 도망치더군요. 마지막에 녀석의 영력이 떨어지지 않았으면 못 잡을 뻔 했습니다.”
규환이 기쁘게 설운호를 받아 들자 짜리 몽땅 청년이 옆에 서서 서둘러 그에게 당부했다.
“규 사제! 조심해. 다시 도망칠 수도 있어.”
“걱정 마세요. 다 수가 있으니까요!”
그리고는 자신의 저물대를 뒤적여 꺼낸 청록색의 가죽 주머니에 여우를 넣었다.
“헤헤! 이 벽운대(碧雲袋) 속에서 도망 갈 수 있나 보자!”
한립이 힐끗 보니 저계 법기에 불과했다. 왕 사형이 이미 법기에 갇힌 여우를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한립을 향해 진심을 다해 말했다.
“이번에 이 녀석을 잡느라 한 사제가 고생을 많았으니 이렇게 하세. 설운호를 팔아 값을 받으면 한 사제가 삼분의 일을 갖고 나머지를 우리 넷이 나누지.”
그 말에 한립이 그저 가볍게 웃었다. 자신의 실력을 보고 상대가 진심으로 교분을 쌓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모두 왕 형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다른 이들이야 아까워도 어쩔 수 없었다. 한립이 나서지 않았다면 어차피 빈손으로 돌아갔어야 할 것 아닌가.
이어 한립은 낙운종 사형들과 잠시 한담을 주고받다 일이 있다는 구실을 대고 그들과 헤어졌고, 왕 사형 일행은 나온 김에 운몽산 중간에 있는 방시에 들려 매매를 성사시키고 돌아오기로 했다.
그곳을 찾는 세 종파의 제자들이 상당히 많아 설운호를 적당한 가격에 넘길 수 있을 것이다.
한립은 그들과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산 속에 내려서서는, 눈에 띄는 암석 위에 앉아 운기를 하기 시작했다.
옥패가 그의 손에 있었으니 여우가 자신의 위치를 찾는 일은 문제가 아니었다. 반 시진 정도가 흘렀을까 그의 눈이 뜨였다.
그리고 암석 앞쪽에서 노란 빛이 비추며 여우가 솟아올랐다.
“동작 한번 빠르네.”
여우가 웃음을 흘렸다.
“내 동작이 빠른 게 아니라 저 수사들 법기 수준이 너무 떨어지는 거죠. 날 무시해도 유분수지. 아직 내가 사라진 줄도 모를 걸요?”
“낙운종 제자들을 허탕 치게 했으니 기회를 보아 작은 보상을 해야겠군.”
“저들로서는 전화위복이나 다름없겠어요.”
“됐고, 돌아가야 하니 몸을 줄여 소매 속으로 들어오시오.”
여우가 바로 신속히 은빛으로 몸을 감싸 작게 변하더니 전광석화처럼 그의 소매 안에 숨어들었다. 어차피 여우의 몸에 금제를 걸어두어 암습을 당하거나 놓칠 걱정이 전혀 없었다.
한립은 바로 자신의 동굴 거처로 돌아가지 않고 여우를 데리고 낙운종 최고봉 아래로 향했다.
기령을 제련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특수한 재료와 법기의 보조가 필요했고 이 산봉우리 아래에 위치한 종파 내부 방시에서 그것들을 구할 생각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자신을 은월이라 칭하는 혼백을 처리해야 발을 뻗고 잘 수 있을 듯 했다.
마음을 먹은 김에 원료를 파는 상점에 들려 필요한 물건을 모두 구매한 그가 재료와 여우를 데리고 만족스럽게 약재원으로 날아 돌아왔다.
그가 막 약재원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결계 밖에서 익숙한 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끊임없이 한숨을 내쉬고 있는 규환과 왕 사형이었다.
한립이 그 둘을 보고 몰래 탄식했다.
두 사람도 곧 그를 발견하고는 민망한 듯 먼저 입을 열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한립이 먼저 그들 앞으로 나아가 물었다.
“두 분께서 이리 빨리 돌아오신 것을 보니 설운호가 벌써 팔렸나 봅니다.”
왕 사형이 주저주저하다 씁쓸하게 입을 열었다.
“그…… 나와 다른 사제들이 한 사제에게 면목이 없게 되었네.”
“왜 설운호에 무슨 문제라도 생겼습니까?”
한립이 무심히 한 말에 두 사람이 화들짝 놀랐다.
“한 사제 그걸 어떻게 알았나?”
규환의 의문 어린 물음에 한립이 잔잔히 웃었다.
“저와 사형들이 그 여우 요수 이야기를 제외하면 달리 나눌 이야기가 있었던 가요?”
그 말을 들으니 규환도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옆에 서 있던 왕 사형이 먼저 나섰다.
“한 사제는 역시 총명하구만. 확실히 바로 그 설운호에게 문제가 생겼네. 우리가 방시에 도착해 여우를 팔려고 확인해보니 어느새 사라지고 없더군. 규 사제의 벽운대 안을 아무리 찾아봐도 나오지 않았어.”
그도 도통 이해가 안 가는 눈치였다. 규환도 답답한지 믿어달라는 듯 거들었다.
“아니, 그 여우가 대체 어떻게 사라진 건지 모르겠다니까! 진짜 괴이한 일이야.”
한립이 미간을 좁히며 침묵하자 왕 사형이 그걸 보곤 난처한 얼굴을 했다. 비록 한립의 수행은 높지 않았지만 부적을 제련하는 법을 익힌데다 몇 가지 좋은 법기를 가져 솜씨도 나쁘지 않았기에 이참에 잘 지내보려 다짐했었던 것이다. 그런데 생각지 못하게 이런 일이 생겼으니 난감할 밖에.
지닌 재물이 충분하면 약속한 금액을 내주고 좋은 인상을 남기면 좋으련만 그나 함께 일을 도모한 다른 사제들이나 형편이 궁색해 영석을 내줄 상황이 못 되었다.
고민을 하던 왕 사형이 의기소침한 기색을 지우고 씩씩하게 대안을 제시했다.
“믿기 어려운 일이 정말 벌어졌다네. 그러나 어찌 되었든 한 사제가 우리에게 요수를 넘겼고 그 이후로 사라졌으니 약속한 금액은 치러야겠지. 사제에게 빌린 영석은 황정을 다시 팔아 바로 갚으면 되겠는데 약속한 보수는…….우리가 나눠서 영석이 생기는 대로 주겠네.”
왕 사형의 말에 규환이 황급히 말렸다.
“사형! 그건 우리 같은 수사들에게 적은 액수가 아닙니다. 버는 족족 갚아도 2, 3년은 걸릴 텐데. 그동안 영석이나 단약 없이 수행은 어찌 합니까.”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왕 사형이 설득을 해보려는데 한립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실 것 없습니다. 그 설운호는 둔갑술에 능통했으니 가죽 주머니 법기 속에서 달아난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안 그래도 아까 규 형에게 당부를 하려다가 말았는데 결국 일이 이렇게 되었군요. 그러니 제 몫의 영석은 됐습니다. 그냥 황정을 구입하려 빌려 가신 영석만 돌려주시면 됩니다.”
잔잔히 미소까지 보인 한립의 대범한 처사에 규환이 즉시 펄쩍 뛰며 기뻐했다.
“사제가 이렇게 통이 큰 사람인 줄 진작 알아봤어야 하는데! 이번 일은 진짜 우리의 실수네만 영석이 없으니 미안하게 됐어. 그래도 사제는 그 정도 영석에 연연하지 않아도 될 형편이지 않은가. 앞으로 이 규환은 한 사제의 벗이니 편히 대하라고.”
규환과 다르게 왕 사형은 한립이 겉으로는 예의를 차리나 속으로 진짜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완곡하게 정말 그리해도 되겠는지를 물으며 한립의 표정을 자세히 관찰했다. 물론 한결같은 한립이 얼굴에서는 어떤 감정도 읽어낼 수 없었지만 말이다.
함께 약재 밭으로 돌아가 이야기를 나누던 둘은 다시 법기를 타고 나가 설운호의 미끼로 구입했던 황정을 팔아왔다. 한립이 영석이 든 주머니를 받으며 의식을 풀어 수량을 확인하고는 별다른 말없이 품에 넣었다.
왕 사형이 그것을 보고 돌아가려다 번뜩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그를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한 사제의 법기가 꽤나 신통하던데. 반 년 후의 검술대회에는 참가할 생각인가?”
“검술대회요?”
“설마 모르지는 않겠지?”
왕 사형 뿐 아니라 영석을 돌려주려고 함께 온 나머지 사형들도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립은 속으로 조금 뜨끔했으나 겉으론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
“네, 모릅니다. 이상한 일입니까?”
규환이 눈을 깜빡이다가 무언가를 떠올리고는 대신 해명했다.
“이상한 일은 맞는데. 한 사제가 겨우 1년 전에 입문한데다 줄곧 이 안에서만 생활했으니 소식을 못 들은 것 같습니다.”
다들 그 말에 납득하는 눈치였는데 왕 사형만이 이상하다는 기색이 스치곤 설명을 해주었다.
“한 사제가 검술대회를 모른다고 해서 깜짝 놀랐네. 어쨌든 대회가 얼마 남지 않아 종 내의 내문제자와 외문제자를 가리지 않고 모두 모이기만 하면 이 일에 대해 떠들어대고 있으니까. 어떤 이들은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 벌써부터 벼르고 있고 말이야.”
짜리 몽땅 청년이 부럽다는 듯 덧붙였다.
“종파 내에서도 공법이 신통한 젊은 수사들이 꽤나 나간다고. 우리 은검봉(隱劍峯)의 고 사숙, 입문한지 얼마 안 되어 축기에 성공한 화운봉(火雲峰)의 손화. 그리고 사제가 있는 천천봉(天泉峰) 모 사숙 같은 수사들은 활약을 할 인재들이라 모두들 기대하고 있어!
안타깝게도 우리 같은 외문 제자들은 종 내의 선발전에 참가할 순 있어도 진짜 선발된 적이 없네. 본 종을 대표해 검술대회에 나가기는커녕, 그냥 선발전에서 우수한 성적을 내기도 힘들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