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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338화 (95/2,000)

# 338

338화. 은월랑(銀月狼)족

하얀 빛이 가시며 다시 발가벗은 여인의 형상이 나타났는데 암담한 녹색 눈 대신 초롱초롱한 검은 눈동자로 변한 것을 제외하면 몸을 빼앗기 전과 같은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요수가 일단 인간의 모습으로 변화면 그 후로는 외모를 바뀔 수는 없는 것 같았다. 한립이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여인이 가슴과 하반신을 가리며 머뭇머뭇 물었다.

“이런 상태로는 좀 그런데. 남는 의복 없어요?”

목소리와 얼굴이 붉어지는 것이 부끄러움을 타는 것이 분명했다. 한립도 슬쩍 민망해져 바로 저물대에서 예비로 갖고 다니는 의복을 던져 주었다.

“고마워요!”

그녀의 동작 하나하나가 우이한 기품이 풍기는 것이 마치 대갓집 규수 같았다. 기령이 되기 이전, 생전에 늑대 요수였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이리 저리 기다란 소매를 접어 구색을 갖추고는 그녀가 맑은 얼굴로 합립을 돌아보았다.

“앞으로 은월(銀月)이라고 불러주세요. 다만 내 정체에 대해서는 말 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정말 몰라요. 나도 자세한 건 기억이 안 나니까요. 당신도 알다시피 요수의 혼백은 일단 제련이 되어 기령이 되면 이지를 상실하고 오직 주인의 명만 들어요.

난 어느 순간부터 알 수 없는 이유로 생전의 기억이 모호하게나마 떠오르기 시작했지만요. 그래서 약간이긴 해도 자유롭게 행동 할 수도 있게 됐고요.

드문드문 기억나는 바에 따르면 살아있을 때는 은월랑(銀月狼)족의 일원이었던 것 같아요. 은월이라는 이름도 그래서 스스로 정한 거예요. 원래 이름은 기억 못해요.”

말을 하며 그녀는 가볍게 걸어보더니 슬슬 인간의 몸에도 적응을 하는 듯 했다.

“은월랑족이라?  그런 종족은 들어 본 적이 없소.”

“정확한 기억이 아니니 내가 잘못 기억하고 있는지도 모르죠.”

한립이 낮게 읊조렸다.

“은월 소저가 제대로 기억 하고 있다고 치더라도 법보에 의탁한 혼백의 몸으로 다른 육체를 탈취한 것은 어떻게 설명 할 건가요. 모든 기령이 이런 황당무계한 일을 할 수 있단 말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그랬다면 이미 수도계는 엄청난 혼란에 휩싸였을 테니.”

은월이 서늘히 웃으며 반문했다.

“나라고 아무 육체나 마구 들어 갈 수 있는 줄 아나 봐요?”

“무슨 뜻이오?”

“내가 방금 펼친 술법은 엄격히 말해 일반적인 탈취와는 달라요. 그것보다는 은월 일족의 태생적인 능력인 영혼을 삼키는 능력에 가깝죠. 스스로 원신의 형태로 빠져나와 다른 사람의 원신 즉 혼백을 공격하는 거예요.

물론 혼백이 사라진 육체를 일시적으로 장악할 수 있는 것은 맞지만 시간이 길어지면 원신이 그 육체에 완전히 동화되어 빠져나올 수 없게 되죠. 이런 술법은 양날의 검이라고 볼 수 있어요. 은월랑족의 의식이 다른 요족에 비해 강하지 않으면 반대로 목숨이 달아나는 건 술법을 시전 하는 쪽이 되거든요. 뭐, 그래도 저처럼 원래 육체가 없는 경우는 두려울 게 없겠죠?”

여인이 한립의 표정을 살펴 무엇을 물을 지 알아차리고 이어 말했다.

“아, 나도 모르니까 어떻게 영혼을 삼킨 건지 자세한 건 묻지 말아줘요. 아마 태어날 때부터 가능한 능력인 것 같은데 엄청 제한 사항이 많은 술법이니 당신은 걱정할 것도 없으니까요. 아무 때나 쓸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이번에도 만일 우연히 사안(四眼)의 령호(靈狐)족을 마주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거예요. 안 그랬으면 지금까지 옥패 속에 남아 있었겠어요?  기억에 따르면 우리 은월랑족이 사안의 령호족의 천적인데다가 이미 한번 시소의 분신에게 몸을 빼앗겨 저항력이 턱없이 낮았기에 가능했던 거라고요.”

상대의 아름다운 눈동자에서는 일반 설운호와 다른 점을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한립이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사안의 령호라니! 평범한 설운호가 아니란 말인가?”

“여우 요수가 수행을 통해 대성을 하면 사안의 령호가 되는 거죠. 여우 요족 특유의 마안(魔眼)이라는 능력은 어떤 면에서는 은월랑 족의 영혼을 삼키는 능력보다 더 무섭다고도 볼 수 있어요.

여우의 웃음에 홀린 찰나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저계 요수인 설운호와 다를 것 없어 보여요. 공법을 시전하자마자 안타깝게도 내게 걸리다니 상대가 운이 나빴죠 뭐.”

은월이 씨익 웃자 고운 얼굴이 더욱 반짝였다.

“여우 요수의 수행은 기껏해야 7급으로 보이는데 대성이라니. 게다가 인간의 모습으로 변할 수 있는 화형기(化形期)라 불리는 8급에 이르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인간화 할 수 있는 거요?  소저가 몸을 차지한 뒤에도 수행이 순식간에 늘었는데 이건 또 어찌 설명을 할 거고.”

“하하, 알고 싶은 것도 참 많네요. 하지만 나도 오랜 세월 이렇다 할 대화 상대가 없었으니까. 다 말해줄게요. 아까 여우 요수가 어떻게 미리 인간화를 한 건진 나도 몰라요. 아마 시소가 상황이 어렵게 돌아가는 것을 깨닫고 순간적으로 영력을 증폭하는 특수한 술법을 펼쳤을 지도 모르죠.

이 사안의 령호 자체의 영력은 정말 그냥 저계 요수의 수준일 뿐이거든요. 내가 지금 인간의 모습을 할 수 있는 것도 비술(祕術)을 펼쳐 잠시 7, 8급 정도의 요수의 능력을 발휘하게 해서예요. 그러니 얼마안가 원래의 요수의 몸으로 돌아가야 할 테죠. 다시 한 번 인간으로 변하려면 적어도 한 달은 지나야 할 거예요.”

원하는 답을 들은 한립은 시선을 내리깔고 생각에 잠겼다. 한참이 지나서야 다시 고개를 든 그의 시선은 여전히 차가웠다.

“그것만으로 내 의문을 모두 해결 할 순 없지만 무슨 말인지는 알겠소. 그래서 이제 은월 수사는 어찌 할 생각이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묻는 한립의 의도가 뻔했는지 은월이 배시시 웃으며 물었다.

“만일 내가 한 수사 곁을 떠나 수행을 이어가고자 한다면 죽일 건가요?”

한립이 은월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오늘 소저가 보여준 공법과 신통함으로 보아, 당시 허천전(虛天殿)에서 겨우 결단기 수사인 내 손에 잡혀 준 것은 의도적이었겠군.”

그 말에 은월이 잠시 머뭇거리다 결국 눈을 곱게 접으며 웃어버렸다.

“옥패에 깃든 기령에 불과한 난 스스로 움직이는데 한계가 있었어요. 허천전을 벗어나려면 반드시 다른 수사의 힘을 빌려야 했는데 그날 당신에게 잡혀 준 건 첫째는 별로 저항할 이유가 없어서였고, 둘째는 허천정을 뚫고 나오느라 이미 상당히 기력을 소진했기 때문이에요.

거기서 최선을 다해 날뛰어 봐야 다른 원영기 수사의 손에 넘어갈 뿐인데 기왕 그럴 바에야 결단기 수사의 수중에 떨어지는 게 좋겠죠?”

“그날 결단기 수사는 나뿐이 아니었는데 어째서 나를 선택한 거요?”

“허천정을 빼앗으려고 서로 치고받고 싸우다가 죽은 오 가 청년이랑 마도공법을 다루던 수사를 말하는 건가요?”

“그렇소!”

은월이 붉은 입술을 내밀며 장난스럽게 답했다.

“하아, 그 수사들 진짜 꼴불견이었는데! 한명은 음침해서 전신에 귀기(鬼氣)가 줄줄 흐르질 않나, 다른 하나는 쭈글쭈글 끔찍하게 생겼었잖아요. 아니, 같이 다니려면 옥돌마냥 잘생기지는 못해도 눈에 거슬리지는 않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 소리엔 한립도 할 말이 없었다.

“기왕 수사가 솔직히 대답하길 원치 않으니 강요하진 않겠소.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으니까. 나를 따라 허천전을 나온 후 저물대에 머물며 지난 수년간 내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보았겠소?”

그의 목소리에 한기가 서리며 석실 내부의 분위기가 한층 싸해졌다. 은월이 웃음기를 거두며 역시 신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한 형의 공법, 법보 모든 것을 보았어요. 심지어 그 엄청난 능력을 지닌 신비한 병까지도요.”

이미 예상은 했지만 직접 듣고 있자니 한립의 표정이 한층 어두워졌다. 그의 얼음장 같은 표정에도 여인이 담담하게 미소를 보였다.

“비밀을 지키려 살인 멸구라도 할 건가요?  아마 수도계에 그런 보물의 존재가 알려지면 한 형은 죽은 목숨일 테니.”

그녀의 말에 한립의 눈빛이 칼날처럼 매서워졌다.

“은월 수사가 이리 터놓고 이야기를 하는 것은 내가 옥패를 부숴 당신을 죽이는 것을 막을 능력이라도 있다는 뜻이오?”

살기 어린 그의 얼굴에도 은월이 개의치 않고 고개를 저었다.

“한 형의 법보와 능력이라면 방금 남의 육체를 빼앗느라 기력을 소진한 나는 상대도 되지 않을 거예요. 기령으로 머물 때보다 절반의 영력도 남지 않았으니까요. 게다가 내 목숨과 같은 옥패가 당신의 손에 있는데 한 형이 마음만 먹으면 난 연기처럼 사라지겠죠.”

한립이 별 반응이 없자 여인이 이어 말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한 형은 지금까지 내게 살수를 쓰지 않았어요. 당신이 성인군자는 아니어도 은원(恩怨)에는 확실한 사람이라는 게 분명해졌네요. 내가 만일 아까 그 요수의 일격을 막아주지 않았더라면 해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을 테고요.”

“기회를 주었다하나 날 설득시키지 못하면 손을 쓸 수밖에 없소. 병의 비밀에 대해 아는 자를 살려둘 수 없으니.”

“좋아요. 그게 바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였어요. 만일 수사가 그런 결단력이 없었다면 이렇게 오래 수도계에서 살아남을 수도 없었을 거예요. 내가 방금 당신을 도운 이유는 주인으로 삼을 수사를 죽게 놔둘 수 없어서였어요.”

한립이 어이없다는 듯 냉소했다.

“주인으로 삼는다?  내가 그런 입바른 소리에 소저를 살려줄 것 같소?”

“당연히 입으로만 떠드는 소리를 믿을 수 없겠죠! 당신의 청죽봉운검에 아직 기령이 없는 것으로 알아요. 내가 원신을 옥패 고보에서 빼내 잠시 동안 수사의 비검에 들어가도록 할게요.

이렇게 되면 한 형의 본명 법보인 청죽봉운검의 위력은 대폭 강력해지고 내 생사도 당신의 손아귀에 달린 셈이니까. 그럼 안심이 되겠어요?  어쨌든 당신의 기령이 되어서 딴 마음을 품는다면 바로 들키고 말테니까요.

게다가 여우 요수의 육체를 장악했다 해도 당신에게서 멀리 벗어날 수 없으니 달아날까 노심초사할 걱정도 없고요.”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단숨에 쏟아낸 말에 한립은 눈썹을 치켜떴다.

“기령이 깃든 법기나 법보를 떠나 스스로 다른 곳으로 원신을 옮길 수 있단 말이오?  가능하다 해도 수사는 어째서 내 기령이 되려는 거지?  내가 허천전에서 꺼내 준 보은을 하려한다는 허튼 소리는 말고.”

“다른 기령이야 의식도 없이 멍하니 살아가는데 어떻게 깃들어 있는 기물(器物)을 스스로 빠져나가겠어요. 하지만 난 다르죠. 내가 마음만 먹고 수사의 도움이 있으면 가능해요. 당연히 원래의 옥패를 떠나는 게 엄청 힘들겠지만 어쩔 수 없으니까요. 이렇게 하려는 목적은 영원히 자유를 얻기 위해서예요. 내 말이 이해가 안 되겠지만 당신의 기령이 되어야 앞으로 진정한 자유를 찾을 가능성이 생기거든요.”

생각지 못한 이야기에 한립도 흥미가 생겼다.

“자세히 설명해 줄 수 있겠소?”

“기억에 따르면, 내가 다시 육체를 얻어 모종의 비술을 수련한 후에 기물의 주인이 전설의 경지라는 화신기(化神期)에 이르면 자유를 되찾을 수 있대요.

그 전까지는 잠자코 한 형의 뜻에 따라 움직이다가 안타깝게도 당신이 그 경지에 이르지 못하고 죽으면 다른 주인을 찾아 봐야겠죠.

그래도 신비한 병과 같은 보물이 있는 당신이 내 소망을 들어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내가 수사의 본명법보에 깃들고 싶어 하는 건 당연한 거죠.”

모든 이야기를 들은 그가 오랜 고민 끝에 결국에는 얼굴을 풀었다.

“방금 한 말이 전부 사실이든 아니든 그것 외에는 당신을 통제할 방법이 없겠소. 이왕 주종관계를 맺고 내 기령이 되고 싶다니 말리지는 않겠지만 일단 임시로 금제를 걸어두고 나중을 기약하기로 합시다. 청죽봉운검에 기령을 심는 일이 서두른다고 될 일은 아니니. 육체를 얻은 당신은 기물에서 얼마나 멀어질 수 있소?”

한립이 자신의 청을 들어주자 은월의 눈에 기쁨의 빛이 넘실거렸다.

“지금은 한 형 부근 백 리 안에서만 활동 할 수 있어요. 그래도 이 요수 요괴의 수행이 점차 차오르면 활동 범위는 자연히 넓어지겠죠.”

“만일 그 범위를 벗어난다면?”

“만일 그 범위를 벗어난다면, 원신이 소환을 받아 자동으로 법보 속으로 돌아오게 돼요. 아, 여우 육신을 데리고 다니기 불편할 거란 걱정은 말아요. 잠시나마 영수대 속에 육신을 봉인하는 비술을 알고 있으니까요. 여우 요수로서 시킬 일이 있으면 영수대에서 여우 요수를 불러내면 되고, 적을 상대할 때는 기령이 되어 청죽봉운검 기령으로 부리면 되는 거예요!”

그녀의 명쾌한 답에 한립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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