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7
337화. 늑대의 반격
촤악!
원래 앙증맞던 앞발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며 거대한 여우의 발톱이 한립의 가슴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윽!”
거대한 충돌음과 함께 한립이 고함을 내질렀고 하얀 빛이 어른거리더니 설운호의 형상을 한 것이 튕겨나갔다.
작은 몸뚱이가 고깃덩어리가 되었어야 합당할 반탄력이었으나 여우는 공중에서 기민하게 몸을 꺾더니 차분히 석실의 한 구석에 착지했다.
아무 탈 없이 서 있는 한립을 바라보는 설운호의 눈은 청록색으로 물들어있었고 마치 사람처럼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한립은 완전히 찢겨나간 자신의 상의를 보니 다행히 온천인이 입었던 녹색 내갑이 번뜩이고 있었다.
‘휴우…….’
여우의 예측을 불허한 사나운 기습에도 보물은 멀쩡하기만 했다. 다시 냉정을 되찾은 한립이 음울한 기운을 풍기는 여우를 보며 물었다.
“넌 누구지? 방금 그 공격은 절대 저계 요수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동시에 옥패를 휘둘러 다시 빛의 장막으로 몸을 보호하려 했지만 놀랍게도 옥패가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한립이 이건 또 무슨 일인가 싶어 옆에 선 작은 늑대의 노란 형상에 시선을 주었다.
얼른 황색 빛으로 변해 보호막을 이뤄야할 늑대가 멀쩡하게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의 마음을 읽고 머리 위를 회전하던 비검들이 공명하며 옥패의 방어막을 대신해 푸른 검의 장막을 펼쳤다. 한립은 그제야 조금 마음을 놓고 상황을 알아볼 여유가 생겼다
그때, 설운호의 입에서 한립이 어이 없어할 만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누구냐고? 방금까지 네 녀석은 누구랑 이야기를 나누었더냐. 이리 빨리 날 잊었더냐.”
익숙한 여인의 목소리며 여우의 눈에 어린 비웃는 기색이 단번에 상대의 정체를 말해 주었다. 흑의 여인의 탈을 쓴 시소!
곧이어 여우 요수가 인간의 형상으로 진화하는 화형(化形)의 현장이 생생하게 펼쳐지기 시작했다.
하얀 여우가 뒷다리로 우뚝 서더니 숨 고를 사이도 없이 폭발적으로 몸집을 키우며 하얀 털들이 줄어들었고 곧 하얀 여우꼬리가 달린 전라의 아름다운 여인이 자리했다.
“어떠하냐? 이 요수의 겉가죽이 마음에 차느냐?”
하얗고 풍만한 두 가슴이며 설운호의 하얀 털을 연상케 하는 부드러운 신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깊게 호흡을 하며 평소의 냉랭한 어조를 되찾은 한립이 물었다.
“네가 저 괴물이라고?”
무의식중에 섬돌 위를 살피니 괴물 시소의 육체는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논리적으로 인간형으로 변신이 가능한 요수는 적어도 8급 이상의 수행을 지녀야 했다.
그런데 자신을 시소의 화신이라 칭하는 여우 요수 백호는 7급 정도의 수행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괴이하다는 얼굴을 하긴 했으나 한립은 두렵지 않았다.
그저 신중함을 잃지 않은 채 머릿속으로 고계 여우 요수에 대한 정보를 떠올렸다.
여우 요수가 일단 고계 요수가 되면 거의 모든 개체가 특유의 환술(幻術)을 펼칠 수 있게 된다. 환술에 한해서는 동급 인간 수사를 농락할 수준에 이르는 경우도 많으며 특히 실체를 감추고 자신의 모습을 변화시키는 술법에 대해서는 요수 중 최상위 수준이라 할 수 있었다.
이전에는 그런가보다 라고만 생각했는데 실제로 자신의 강대한 의식을 간단히 속여 넘기는 여우 요수를 적으로 만나니 믿겨지지 않았다.
그런데 시소의 화신인 여우가 이렇게 높은 수행을 지녔다면 왜 스스로 옥갑의 부적을 제거하지 않은 것일까?
게다가 부적을 제거하는 것이 불가능 하다해도 저계 수사를 현혹해 이곳으로 불러들이는 것 정도는 충분히 가능할 텐데. 겉으로는 무심해 보였지만 속으론 의혹이 점점 더 쌓여 가고 있었다.
눈앞의 여우는 절대 그냥 시소의 화신이라는 간단한 설명으로는 정의내리기 어려운 존재였다. 그리고 그런 확신이 생기자 한립의 눈에도 여인을 보는 시선에 살기가 담기기 시작했다.
“네가 저 시소의 화신이든 아니든 난 상관없어. 너랑 나 둘 중 하나만 살아서 이곳을 빠져나갈 테니까.”
냉랭히 말을 마친 한립이 거침없이 비검의 무리를 향해 손가락을 들자 푸른 검의 장막이 부풀어 올라 푸른 기운으로 변하더니 석실 한쪽의 여우 요수를 향해 달려들었다.
여인은 비검들의 매서운 공격을 보며 놀라기 보다는 오히려 반기는 기색이 역력했다. 분홍빛 혀가 낼름 입술을 훑더니 간사한 미소와 함께 하얀 빛으로 변해 사라진 것이다.
푸른 기운이 허공을 덮치고 청금석 벽에 튕기며 귀를 자극하는 날카로운 고음을 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한립은 즉시 의식을 퍼트려 요수의 흔적을 쫓았지만 여우의 행적은 묘연했다. 정말 몸을 숨기는 기술이 상상 이상이었다.
그러나 한립은 미동도 하지 않고 냉소한 후 저물대에서 은색 종을 꺼내들었다.
“가라.”
작은 종이 은색의 빛을 번뜩이고 사라지더니 한립의 머리 위에서 다시 나타났다. 한립이 한 손으로 법결을 맺으며 입을 벌리자 푸른 기운이 분출되어 종에 흡수되었다.
동시에 종형 고보(古寶)에서 은광이 뿜어져 나와 곳곳으로 뻗어 나갔다. 봉인된 좁은 공간에서 은색 종의 음파 공격은 더없이 위력적이었다.
사방이 청금석으로 막힌 실내가 동시에 웅웅거리더니 한립과 대여섯 장 떨어진 허공에서 기이한 파동이 느껴졌다. 분명 아무 것도 없던 공간에 하얀 빛이 울렁이더니 발가벗은 여인이 유유히 나타난 것이다.
다시 모습을 드러낸 여우를 보며 한립은 반가우면서도 의심스러웠다.
‘기운이 보통의 7급 요수보다 약한데, 시소 본체가 치명상을 입어서 그런 것인가? ’
그의 손짓에 따라 다섯 개의 푸른 검기가 일순 쏘아져 나갔다. 그리고 수 척 길이의 푸른 검기들이 여인의 몸을 파고들었다.
퍼퍼퍼퍼퍽.
여인은 비명을 내지르며 그대로 땅에 떨어져 내렸고 검에 꿰뚫린 하얀 살결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와 바닥을 적셨다.
너무 쉽게 상대가 당하자 오히려 한립은 멈칫했다.
경계심을 높이며 상황을 지켜보는 데 손에 들고 있던 옥패가 돌연 뜨거워지며 그의 몸 주위에서 붉은 빛이 크게 치솟아 순식간에 무언가를 막아섰다.
그리고 동시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여겨졌던 방향에서 날카로운 파공음이 들리더니 붉은 방어막과 충돌한 것이다!
“아!”
“칫!”
남녀의 놀란 소리가 교차되며 들려왔다. 한립은 놀란 와중에도 바로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입을 벌려 푸른빛을 뿜어내 방금 은사가 날아든 곳으로 날려 보냈다.
허공에서 사람의 혼을 쏙 빼앗을 듯한 귀기 어린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하얀 빛을 번뜩이며 전라의 여인이 다시 석실 한 곳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한립이 난색을 표하며 방금 칼에 난도질당해 떨어진 여인의 시체가 있었던 곳을 보았다. 역시나 텅텅 비어있었다.
“환술!”
피식 웃은 여인은 한립의 의문에 답하기 보단 시선을 그의 옆에 선 황색 늑대에게 옮겼다. 한립 역시 그녀의 시선을 따라 늑대를 보곤 다시 자신의 옥패를 보았다.
방금 여우 요수의 일격을 막은 불의 속성 방어막은 옥패가 스스로 구동한 것이다. 저 늑대, 법보의 령이 스스로의 의지를 가지고 법술을 펼쳤다?
붉고 노란 두 마리 늑대가 합해져 나타났던 은색 거랑(巨狼)의 신묘한 힘을 떠올리니 마음이 불안해졌다.
여인이 가느다란 허리를 비틀며 무어라 입을 열려는 찰나 한립의 손에 있던 옥패가 다시 빛을 발하더니 붉은 빛이 쏘아져 나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황색 늑대도 그 빛을 따라 소리 없이 뛰어오르더니 역시 노란 빛으로 변해 뒤를 따랐다.
한립은 알 수 없는 현상에 놀랐지만 일단 경솔하게 움직이지 않고 상황을 살펴보기로 했다. 역시 그의 예상대로 붉고 노란 빛이 하나로 합쳐지며 폭발하듯 은색의 빛 무리를 형성했다.
그 은빛 무리 안에서 나타난 한 마리의 거대한 늑대는 흥분한 얼굴로 여우 요수를 응시하고 있었다.
전라의 여인은 은색 늑대의 등장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아 몸이 바르르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여인은 재빨리 엄청난 양의 분홍색 안개를 분출시켜 그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한립은 분홍빛 안개의 정체는 알지 못했으나 이대로 당할 생각은 없었다. 여우 요수의 은닉술이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수천수만 마리의 서금충을 풀어 놓는다면 잡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가 영수대 안의 서금충을 불러내려는데 허공에 부유하던 은색 늑대가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늑대가 거대한 아가리를 벌리자 수많은 은색 빛이 분출해 분홍 안개 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한립이 놀라 서금충 소환을 잠시 멈추자 안개 속에서 터지는 소리가 폭죽처럼 울려댔다. 전라 여인의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를 질러댔다.
“뭐, 뭐 하려는 거야! 아, 아니야! 이건 말도 안…….”
공포에 질린 여인의 목소리를 끝으로 다시 처절한 절규가 이어졌다. 한립은 눈을 가늘게 뜨고 묵묵히 안개 속의 현상이 드러나기를 기다렸다.
그러자 곧 분홍 운무가 영기를 잃은 듯 사라져갔다.
전라 여인이 몸을 바르르 떨며 바닥에 쓰러져 있었는데 분홍 기운과 은색 기운이 그녀의 몸을 반씩 차지하고 치열하게 겨루고 있었다.
“몸을 빼앗고 있어.”
한립이 기현상에 무어라 중얼거리든 말든 이미 은색 기운이 승기를 잡고 분홍 기운을 몰아내고 있었다.
“안 돼!”
여인이 고통스런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구르더니 곧 하얀 빛과 함께 수축하며 다시 귀엽고 앙증맞은 하얀 여우의 몸으로 돌아갔다.
은색 빛이 분홍 기운을 여우의 꼬리까지 밀어 붙여 잡아 먹으니 여우 요수의 놀라운 수행이 순식간에 사라지며 다시 저계 요수의 기운만을 풍겼다.
여우는 마치 전력을 다했다는 듯 바닥에 엎어져 꼼짝을 안 했지만 전신의 은색 빛은 더욱 짙어져갔다. 옥패를 쥔 한립은 고민스런 얼굴로 그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은색 늑대가 저 몸을 빼앗으면 자신이 제어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한참을 고뇌하던 한립이 결국에는 길게 탄식하며 상황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어쨌든 다른 육체를 빼앗은 원신은 얼마간 힘을 쓰지 못한다.
게다가 방금 자신을 기습하던 시소 화신의 일격을 대신 막아 준 것으로 보아 은색 늑대가 자신에게 악의를 가졌을 가능성은 낮았다.
한립이 복잡한 심경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동안 하얀 여우의 몸에서 은빛이 사라지더니 몸을 일으켰다. 마치 아직 이 육체에 적응하지 못한 듯 채 두 걸음을 떼기도 전에 엎어지고 말았다.
한립도 그 모습에는 작게 실소했다.
“뭐가 웃겨요? 이제 막 들어온 몸인데 이 정도 적응했으면 대단하거지.”
담담한 여인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실소하던 한립이 그대로 굳으며 중얼거렸다.
“또…… 여인이란 말이지.”
“여인은 무슨, 암컷이겠죠!”
여우의 형상을 한 여인의 음성에 한립이 쓴웃음을 지으며 머리 위를 떠돌던 비검을 회수했다.
“여인이든 사내든 상관없다. 정체를 밝혀.”
하얀 여우가 바닥에 편하니 앉아서는 담담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정체요? 전 당신 고보에 깃든 혼백, 기령(器靈)이잖아요.”
“기령인 것은 알지. 하지만 기령이 요수의 몸을 탈취할 수 있다는 건 금시초문인데?”
한립이 서늘한 목소리로 묻자 작은 여우가 입을 비죽거렸다.
“견문이 좁아서겠죠.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특이하기로는 당신도 만만치 않잖아요.”
한립이 침묵했다. 잠시 후 그가 아직 손에 들고 있던 옥패 고보를 들어 올리자 여우가 긴장을 하며 소리쳤다.
“뭐 하려고요?”
한립이 예를 갖추며 공손히 물었다.
“글쎄요. 이미 여우 요수의 육체를 장악한 소저가 아직도 옥패가 필요 한지 궁금해지는군요. 만일 내가 이것을 부숴버린다면 당신은 어찌 될까…….”
말투와 달리 한층 음산해진 말투에 여우의 안색이 급변해서는 그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곧 그녀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다시 원래의 무덤덤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괜히 떠보지 말아요! 그 옥패를 파괴하면 고보에 깃든 혼백에 불과한 나는 사라져버릴 거라고요. 기령이 그런 거 아니겠어요?”
곧이어 은색 빛이 번뜩이며 다시 한 번 강력한 기운이 여우의 몸을 맴돌았다. 한립이 즉시 경계 태세를 갖추었다.
“걱정 마요. 이대로는 대화하기 불편하니 인간의 모습을 하려는 거니까요.”
그 말에 약간 안심한 그가 눈을 찌를 듯 요동을 치는 은색 빛에 뒤로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