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6
336화. 시소(尸魈)
드디어 한립이 옥갑을 꺼내자 여인이 격해진 심기를 숨기지 못하고 재촉했다.
“한 수사, 어서 그 부적을 찢어 버리고 옥갑을 내게 건네면 되네!”
부적을 뜯을 요량으로 움직이던 손이 그녀의 흔들리는 목소리에 멈춰 섰다.
이 기묘한 불안감. 주저하던 그가 아예 손을 거두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그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상대의 두 눈이 혼탁한 청록색으로 번들거리며 얼굴 역시 기괴하게 왜곡되어 사악한 기운을 풍겼던 것이다. 좀 전까지 비범한 풍모를 지닌 원영기의 수사는 온 데 간 데 없었다.
그녀는 한립의 시선에 흠칫 놀라며 즉시 꺼림칙한 기운과 흉악한 표정을 거두어 들였다.
“뭐하는 겐가. 어서 부적을 뜯어 주게. 영안옥 같은 귀한 보물을 내어 준 은인을 위해 이 정도는 해줘야 하지 않겠는가?”
한립이 침착한 얼굴로 흑의 여인을 응시하다가 고개를 숙여 금색부적에 꽁꽁 싸인 옥갑을 보았다. 그가 한 마디 대답도 없이 그대로 여인을 향해 천천히 다가섰다.
“자, 잠깐! 오지 말게! 한 수사!”
평온을 가장하던 얼굴은 공포와 당황스러움으로 일그러지고 있었다.
흑의 여인의 표정 변화가 격해 질수록 한립의 얼굴도 동시에 음침해져갔다.
거짓이 분명한 상대의 헛소리를 더 들을 것도 없었다. 그는 홱 하고 손에 들고 있던 옥갑을 그녀에게 던져버렸다.
그는 왜 부적 한 장에 저렇게 쩔쩔매는 것인지 알지 못했으나 이왕 상대가 다른 꿍꿍이를 품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으니 봐줄 이유가 없었다.
팟.
흑의 여인이 당장 허둥지둥 한 손으로 섬돌을 박차고 달아나려했다. 그러나 이런 그녀가 채 일어서기도 전에 금제가 발동돼 전신이 붉은 빛으로 감싸이며 고통스러운 얼굴로 제자리로 끌려왔다.
옥갑이 바로 그녀 앞까지 도착하자 갑자기 청아한 울음소리 같은 것이 퍼지며 순식간에 여인의 머리 꼭대기로 향했다.
이어 옥갑 위의 금색 부적에서 금빛이 퍼지며 금색의 주술이 흘러나와 여인의 몸 위로 떨어져 내렸다.
“안 돼!”
그녀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아는 듯, 하나 남은 팔을 들어 올려 얼굴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절망에 찬 절규와 함께 수려했던 얼굴도 형편없이 망가졌다.
부적에서 쏟아져 내린 주술이 그녀의 어깨에 닿는 순간 금빛을 내며 녹색 연기가 치솟았다.
치익.
끼하아아악!
도저히 인간이 내는 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는 귀를 찌르는 날카로운 괴성이 들려왔다. 안색이 급변한 한립도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잠시 후 섬돌 주위는 완전히 뿌연 암녹색 연기로 자욱해졌고 간혹 그 안에서 금빛이 번득이는 것을 제외하면 여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참혹한 비명은 잠시도 쉬지 않고 거칠고 사납게 석실을 쩌렁쩌렁 울려댔다.
마치 여인이 무수히 많은 존재로 변화하는 것처럼 들려, 듣는 이의 모골을 송연하게 만들었다.
“……!”
한립이 혀로 입술을 적시며 호흡을 멈추었다. 암녹색 연기가 석실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는데 비린내가 나는 것을 한 모금 들이마시자 머리가 핑 돌았던 것이다. 자욱한 연기는 극독을 품고 있었다.
파사삭.
연기 속에서 갑자기 기이한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소리의 정체를 알 수 없어 한립이 주저하는 사이 쉑! 하는 파공음과 함께 청록색 날카로운 발톱이 안개 속에서 날아들었다.
놀란 한립이 옥패를 꽉 쥐고 법술을 펼치려는데 기괴한 발톱 위의 은색 기운이 쇠사슬의 모습으로 변해 맹렬히 수축했다. 그리고 상반된 두 힘 사이에 불똥이 튀다가 숨 막히는 비린내가 치솟아 올랐다.
끼아하하학!
안개 속 깊은 곳에서 처절한 비명이 이어지며 발톱이 빠르게 다시 끌려 들어갔다. 입술을 꾹 다문 한립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독무 속을 주시했다.
더욱더 뒤로 물러나 청금석 벽에 등을 대고 선 그는 옥패에도 충분한 영기를 쏟아 부어 만반의 대비를 하고 있었다. 동시에 몸을 두르고 있던 붉고 노란 장막 역시 눈에 띄게 짙어졌다.
일다경이 지나도 녹색 독무 속의 괴성은 잦아들지 않았는데 옥갑의 금색 부적은 점점 암담해져갔다.
‘금색 부적이 저 괴물에게 치명적이긴 하지만 만일 영력이 바닥나 버린다면 더 이상 괴물을 압도할 수 없어.’
참혹한 비명이 사라지고 안개 속이 쥐죽은 듯 고요해졌지만 아직도 부적은 은은히 잔광을 흩날리고 있었다. 한립은 공중의 부적을 바라보면서도 섣불리 다가서지 않았다.
얼마간 더 기다리다 금색 부적과 옥갑이 힘을 잃은 듯 녹색 안개 속으로 떨어져 내린 후에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법결을 맺으며 주술을 읊자 그의 앞에 순식간에 달걀 크기만 한 붉은 빛덩이가 만들어졌다. 그것을 보던 한립은 더 이상 기다릴 것도 없다는 듯 손짓을 해 짙은 독무 속으로 날려 보냈다.
“터져라!”
펑!
굉음이 귓가를 울리고는 독무 역시 광풍에 휩쓸리듯 즉시 흩어져 종적을 감추었다. 동시에 아주 맹렬한 열기가 작은 석실을 가득 매웠다.
사악한 기운이나 독무를 상대하는 데는 역시 불 속성의 공법만한 게 없었다. 뜨거운 열기가 쏟아지는데도 한립은 그 자리에 꼼짝 앉고 서서 다시 모습을 드러낸 섬돌 주위를 주시했다.
그러나 그는 깜짝 놀라 마른 침을 삼켰다. 섬돌 위에 여전히 사람의 형상을 한 무언가가 엎어져 있었던 것이다.
온 몸이 빽빽하게 진녹색 털로 뒤덮인 그것은 지독한 악취를 풍겨댔다. 정체는 알 수 없었으나 결단코 사람은 아니었다.
괴물은 환술로 만들어 냈던 흑의 여인과 마찬가지로 팔이 한 짝 뿐이었다. 그리고 그 끝에 길게 늘어진 칠흑 같은 손톱은 아까 한립을 공격했던 발톱의 정체인 듯 했다.
한립이 오래 고민하지 않고 머리 위를 선회하던 열댓 개의 비검들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동시에 비검들이 푸른빛으로 변해 괴물을 난도질하러 달려들었다.
퍼퍼펑.
둔탁한 충돌음이 이어졌지만 녹색 털을 지닌 괴물은 그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입꼬리가 비틀리며 쓴 웃음이 절로 나왔지만 이상하다 여겨지진 않았다.
이런 엄청난 속박 속에 공들여 봉인해 놓은 요물이 평범할 리 없었다. 도리어 단번에 비검에 의해 목이 날아갔다면 더욱 의심스러웠을 것이다. 한립이 비검 법보를 회수하며 몇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가 휘두른 소매에서 푸른 광채가 쏟아져 나오더니 괴물을 감아 소리 없이 뒤집었다.
드디어 녹색 털 괴물의 진면목이 드러났다.
피골이 상접한 얼굴은 생기가 사그라져 잿빛으로 변해 있었고 얼굴의 절반은 커다란 아가리에 날카로운 송곳니들이 삐져나와 흉측하기 그지없었다.
“이건?”
괴물의 모습이 어딘가 익숙했다.
‘어떤 경전에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한립이 잠시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겼다.
“시소(尸魈)!”
맹렬히 고개를 든 그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만황시대에 명성이 자자했던 흉악한 령(靈).
시소는 강시의 일종이라 볼 수 있었지만 일반적으로 수사들이 제련하는 강시와는 전혀 달랐다. 이것을 만드는 조건이 극도로 까다로웠기 때문이다.
아직 시소를 제작하는 제련법은 알려지진 않았지만 일단 생전에 두 가지 조건을 갖춘 시체가 필요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첫째는 생전에 최소한 원영의 경지에 오른 수사여야만 하고, 둘째는 반드시 나무나 흙의 속성의 영근을 타고난 수사의 시체나 아니면 천영근(天靈根)을 지닌 자여야만 했다.
이것 외에도 시소가 될 시체의 주인은 엄청난 원한을 품고 죽어야만 했다. 그래야 죽자마자 윤회의 길에 오르지 못하고 악령으로 남게 될 테니 말이다.
이런 여러 가지 희박한 조건이 맞아야 시소를 제련할 기본 준비가 끝난다.
보통 요귀나 강시들의 치명적인 약점이 되는 빛에 대한 공포가 없을 뿐 아니라 생전의 기억을 가지고 생전에 익힌 공법을 수련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시소는 반인반시(半人半尸)라고도 볼 수 있고, 반시반귀(半尸半鬼)라고도 볼 수 있었다.
게다가 원한을 품고 죽었기에 시소로 회생한 거의 모든 시체들이 살육을 즐기며 수사를 죽이면 혼백을 잡아다 뱃속에서 천천히 고문하며 제련하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는 구절도 있었다.
오래 전 수도계에선 누구나 이름만 들어도 안색이 변했던 그런 불길한 존재, 그 시소가 나타난 것이다.
시소는 온 몸이 금강석처럼 단단해 파괴하기 어렵고 오직 진화(眞火)를 일으켜 천천히 제련하거나 추혼술(抽魂術)을 이용해 봉인해야한다는 문헌이 생각나 한립은 머리가 아파왔다.
“흠…….”
눈앞의 시소는 정말 숨이 끊긴 것이 아니라 단지 이름 모를 금색 부적에 의해 잠시 제압당했을 뿐이었다. 아마 다시 원기를 회복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시소를 바라보던 그의 시선이 한쪽에 떨어져 있는 옥갑으로 향했다. 시소가 이것에 의해 제압당했지만 완전히 재가 되어 사라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추혼술을 이용한 봉인술의 일종으로 보였다.
흑의 여인으로 변한 시소가 옥갑을 얻어내려 수작을 부렸던 것이나 강력한 방법으로 봉인되어 있는 것을 보면 옥갑 안에 시소의 혼백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혼백이 없는 시소의 육신이 어떻게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대화까지 나눌 수 있단 말인가?
‘추혼술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혼백의 잔재가 체내에 남은 것일까? ’
게다가 시소의 육신이 영안옥이라는 어마어마한 보물을 지닌 채 이곳에 속박되어 있는 것도 이상했다. 의혹이 꼬리를 물자 구겨진 한립의 얼굴은 펴질 줄 몰랐다.
머리를 굴려 봐도 당장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이런 만황시대의 강시를 진화로 제련해 없애려면 적어도 원영기 이상의 수사여야 했고 그런 수사가 나선다 해도 수개월은 걸릴 일이었다.
설사 그가 능력이 된다 해도 시간과 영력을 낭비해 가며 세상의 평화를 위해 악귀를 제거하고 마(魔)를 ㅤㅉㅗㅈ아버릴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는 그저 어서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이후 또 어떤 운 없는 놈이 이곳에 들어와 흑의 여인의 탈을 쓴 강시에게 속는다면? 그게 그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때 가서 시소가 풀려나면 또 여러 문파의 고인들이 나서서 해결을 하겠지. 이제 어떻게 빠져 나갈까 주위를 살펴보던 한립이 다시 옥갑을 쳐다보았다.
그는 잠시 시간을 끌긴 했지만 결국엔 술법으로 옥갑을 끌어당겨 저물대 속에 넣어 두었다. 굉장히 특수한 작용을 하는 금색 부적이 붙어 있으니 시간을 들여 찬찬히 연구를 해 볼만 했다.
옥갑을 열어 보는 것은 원영에 성공해 일정 경지에 이렀을 때로 미루면 그만이었다. 아무리 옥갑 안에 강한 악령이 봉인되어 있다 해도 그때가 되면 그런 것들과 상극을 이루는 벽사신뢰와 제혼을 지닌 그가 두려워할 까닭이 없었다.
한립이 옥패에 영력을 불어 넣자 그를 감싸던 빛의 장막이 별안간 소실되고 누런 늑대 한 마리가 튀어 나왔다. 토둔술을 펼쳐 석실을 빠져나갈 준비를 한 것이다.
아무리 청금석이 강력하다고는 하나 어쨌든 돌이었고 그는 쇠사슬에 묶여 있지도 않으니 토둔술로 빠져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막 법보의 령인 작은 늑대를 부리려던 한립이 갑자기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가 시소의 육체 앞으로 다가가 역겨운 녹색 털 강시를 밀어내자 섬돌 내부의 움푹 파인 곳에 새하얀 털을 지닌 설운호가 가련한 눈빛으로 검은 눈을 깜빡이며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하아…… 영리하긴 하구나. 이 와중에도 살 길을 찾아 이 안에 숨다니.”
기척의 주인이 여우였다는 것을 깨달은 한립이 웃으며 푸른 기운을 방출해 여우를 감싸 끌어왔다.
설운호는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채고 내빼려했으나 한립의 푸른 기운이 내는 속도를 이길 수는 없었다.
한 손으로 설운호의 뒷덜미를 잡고 돌아가려던 한립이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했다.
“쪼그만 녀석이 운도 좋지. 독무 속에서도 살아남고 말이야. 게다가 시소와 함께 어울리며 지금까지 살아 남았다고……?”
그가 자리에 우뚝 서더니 안색이 대번에 어두워져 여우를 벽면 쪽으로 맹렬히 내던졌다. 그 순간, 여우의 검은 두 눈에도 독한 기색이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