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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335화 (92/2,000)

# 335

335화. 검은 옷의 여인

영성이 높은 영리한 요수의 눈빛.

재빨리 의식을 퍼트려 상대를 훑은 한립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이곳이 선배님의 거처인 줄도 모르고 한 모가 실례를 하였습니다.”

상대의 존재는 마치 바람과 같아서 그의 의식이 그냥 투과해 버렸다. 어떤 영기의 파동도 드러나지 않았는데 이건 이보(異寶)를 이용해 수행을 숨긴 게 아니라면 본신의 경지가 까마득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의 말에 여인이 새하얀 손을 들어 올려 부드럽게 설운호를 쓰다듬었다.

“어린 나이에 벌써 결단 후기라니, 정말 드문 일이야.”

“그저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제가 선배님의 존성대명을 알 수 있을 지요?”

검은 경장 차림의 여인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들어도 모를 것을 이름은 말해 무엇 하겠나. 아마 자네 배분이라면 원영기 수사라 해도 날 아는 이는 드물 것이니.”

쓴웃음이 절로 지어지는 소리였다.

설마 오랜 세월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은거하는 노괴를 마주친 것인가. 마음은 이럴지언정 그의 얼굴은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수행의 조예가 깊어질수록 그가 장악하게 된 비술도 늘어갔고 원영기 노괴들에 대한 두려움도 그만큼 옅어졌다. 특히 익힌 지 얼마 안 된 혈영둔(血影遁)이 그의 담을 더욱 키워 주었다.

어쩔 수 없이 붙어야 한다면 적수는 못 되겠지만 혈영둔을 이용해 달아나는 것쯤은 해볼 만하다. 그렇게 했다간 몇 년간 고된 수련을 하며 비관 수련을 해야겠지만.

그런데 생각을 하다 보니 이상했다. 이런 신비한 인물이 세 종파가 잠식한 운몽산 인근에 숨어 무엇을 도모하려는 것일까?

그처럼 단지 이곳의 농후한 영력을 이용해 수련을 하려 이곳을 택한 것인가.

한립은 석실 곳곳을 의식으로 흔적 없이 훑고는 더욱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암석으로 된 산맥 가운데 이 석실만이 덩그러니 파여 있었는데 드나들 수 있는 문이나 연결된 다른 공간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이곳도 흑의 여인이 앉아있는 섬돌을 제외하면 아무 것도 없었다. 누군가가 장시간 기거할 수 없는 환경, 그 기괴한 부조화에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석실은 사방이 두꺼운 암석에 둘러쌓여 보통 다른 수사들의 동굴 거처와는 확연히 달랐다. 비검이나 혹은 다른 법기로 세심히 잘라 냈다기보다는 마치 거대한 도끼로 찍어 단번에 파낸 듯 벽면도 고르지 못했다.

그의 의혹을 눈치 챈 듯 여인이 가볍게 웃었다.

“이상하다면 석벽을 만져보게. 그럼 의문이 풀릴 것이니.”

의식을 이용해 알아본 결과 보통의 석벽과 다르지 않았으니 한립도 궁금하던 차였다.

“그리 말씀하시니 저도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그가 천천히 여인을 주시하며 왼쪽 벽으로 향했다. 한립은 석벽에 직접 손바닥을 대보았지만 이상한 점은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잠시 고민한 끝에 손가락을 뻗으니 손끝에서 푸른빛이 번뜩였다. 수 촌 길이의 푸른 검광이 솟아 오른 것이다.

쿠쿵.

그런데 푸른 검광이 벽에 닿자마자 무언가와 충돌해 나아가지 못했고 평범한 돌처럼 보이던 석벽에 어떠한 흔적도 남지 않게 되었다.

안색이 달라진 한립이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머리 위를 선회하던 비검 중 하나를 가리켰다. 그러나 청광으로 화한 비검은 석벽에 부딪혀 청량한 소리를 내며 튕겨 돌아왔다.

“……!”

그 결과 가느다랗게 남은 검 날의 흔적이 다시 천천히 채워지며 원상 복구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한립이 급히 고개를 돌려 물었다.

“벽이 스스로 복원 되다니! 선배님께서 펼쳐 놓은 금제의 위력인지요?”

“내가 펼쳐 놓은 금제라. 날 너무 추켜세우는 구나! 그것은 청금석(靑金石) 혹은 흡영석(吸靈石)이라고 부르는 굉장히 희소한 일종의 연기 재료네. 거대한 완력이 아니고서는 법술이나 법보의 영력으로는 파괴할 수 없는 암석이지.”

미간이 좁아진 한립이 석벽에서 물러나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청금석이라니 처음 들어보는 재료입니다.”

“하하, 모를 수밖에! 이런 암석은 만황(蠻荒) 시대에나 있던 것이고 그때도 드문 물질이었으니 지금도 아는 이는 손에 꼽힐 게야.”

대수롭지 않다는 듯 이야기하는 여인의 말을 듣고 한립이 무언가 걸려 물으려는데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수사는 원영기를 바라보는 경지에 이르렀지만 내 보기엔 자질이 좋지 않군. 아니지, 좋고 좋지 않고를 따질 필요도 없이 형편없어.

아무리 고된 수련을 해도 축기도 하기 어려운 자질이네. 하지만 여기까지 온 것은 필시 기이한 인연이 있었던 것이겠지. 그리고 나를 만난 것도 인연이 있는 자라는 뜻 일터. 만약 거절하지 않겠다면 노부가 보물 하나를 내주겠네.”

“제게 보물을 내어 주신다고요?”

그의 의심스런 얼굴을 보며 여인이 조금 냉랭한 어투로 말했다.

“물론 조건이 있네. 일단 물건은 빌려 주는 것이니 후에 돌려놓아야 하네. 그리고 보물을 가져가는 대신 이 늙은이를 위해 한 가지 일을 해줘야해. 보물을 빌리는 대가라고 할 수 있지.”

그녀가 품에서 네모난 옥으로 된 함을 꺼내들었다. 주먹만 한 옥갑(玉匣)은 거무튀튀한 것이 아주 오래된 물건이 틀림없었다.

여인의 얼굴과 검은 옥갑을 번갈아 본 한립이 아직 거절의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얼굴이 어두워졌다.

“일단 보물에 대해 이야기 해주시면 듣고 제가 고려 해봄이 어떠하겠습니까.”

뜸을 들이며 대답을 주저하는 그의 모습에 여인의 얼굴에 일순 조급한 기색이 드러났다 재빨리 사라졌다.

“영안석(靈眼石)은 알겠지. 이 안에는 그 중에서도 가장 높은 수준의 보물이 들어있네. 바로 영안옥(靈眼玉)! 이게 내뿜는 영기라면 적어도 수사가 원영에 이르기 전, 결단 후기의 경지를 견고하게 할 수 있을 게야. 원영을 이룰 때의 부담도 상당히 줄어들겠지.”

말을 하면서 검은 옥갑을 꽉 쥐는 것이 남에게 내주기 아쉬워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영안옥!”

영안의 돌도 아니고 영안의 옥이라면 그가 원영을 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3할은 줄여줄 것이다.

그는 원래 하려던 거절의 말을 그대로 삼키며 탄식하듯 물었다.

“어떤 일을 해주기를 바라십니까. 선배님이 할 수 없는 일을 제 수행으로 할 수 있을까 염려됩니다.”

“남을 해하라는 것은 아니니 걱정 말거라. 아무리 수행이 높다한들 난 이 석실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는 처지이니 내 대신 어떤 이에게 서신을 전해주기만 하면 된다.”

“서신을 전해준다고요?”

“그럼, 내가 네게 정말 흉악무도한 일이라도 시킬까 근심이라도 한 것이냐?”

흑의 여인의 붉은 입술이 슬쩍 올라가며 조소했다.

한립이 미미하게 얼굴을 붉혔다. 이렇게 간단한 부탁을 거절하기에는 보상이 더없이 진귀했다.

“그것뿐이라면 그리하겠습니다.”

여인이 화색이 돌아 두말 할 것 없이 녹색 기운에 쌓인 검은 옥갑을 한립 쪽으로 보내주었다. 옥갑이 손에 들어오자마자 의식으로 살펴보니 영기가 충만한 것이 진짜 영안옥이 들어있는 듯 했다

신중한 성격의 한립이 직접 눈으로 내용물을 확인하지 않을 리 없었다. 옥갑이 열리며 청량한 기운과 함께 하얀 빛이 석실을 가득 채웠다.

‘응? ’

부드러운 하얀 빛 속에는 과연 수 촌 크기의 새하얀 옥석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 반투명한 옥석 속에 뜻밖에도 엄지손가락 크기의 푸른 소가 푸르르 머리를 흔들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놀란 그를 본 여인이 가볍게 미소 지었다.

“그게 바로 영안의 옥이란 것이지. 거의 형태를 갖춰 화형(化形)에 이르기 직전까지 배양을 한 보배 중에 보배야. 보통의 영안석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효과를 발휘할 테니 자네의 수련도 배는 빨라 질것이네.”

잠시 영안옥을 바라보던 한립이 다시 옥갑을 여미고 침착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그가 이상한 기운을 느끼고 쫓던 설운호 역시 영안옥의 영기를 받아 요수로 진화한 듯 했다.

한립의 차분한 모습에 흑의여인이 잠시 멈칫 했지만 곧 얼굴을 가린 천을 매만지며 평안하게 말했다.

“이미 줄 것은 주었으니 잘 간수하게. 내가 앉아 있는 섬돌 뒤를 보면 또 다른 옥갑이 있을 것이야. 옥갑을 봉인한 부적을 꺼내 내게 건네주게. 그 안에 서신과 함께 갖고 가야 할 신물(信物)이 있으니.”

“그걸 제가 가져다 드려야 합니까?”

“흥! 아직도 내가 널 해칠까 저어하는 게냐?  노부가 직접 그리할 수 있었다면 어찌 도움을 구할까!”

한립이 즉시 의심스런 기색을 드러내자 여인이 가부좌를 튼 치마를 들어 올렸다. 분명 통통한 종아리가 있어야할 무릎 아래에는 장작처럼 말라비틀어진 종아리가 드러났다.

피와 살을 찾아 볼 수 없는 말라붙은 피부가 공포스러웠다. 더욱 잔혹한 것은 폐물이 된 다리를 뚫고 칭칭 감은 은백색 쇠사슬이 여인이 앉은 바위 속으로 이어져 있다는 점이었다.

긴장감에 혀로 입술을 축인 한립이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딱히 무어라 묻지는 않았다. 그러나 잠시 후 치맛자락을 내려놓은 그녀가 담담하게 말했다.

“암석 속에 청금석 석실을 마련하고 두 다리를 이 사슬로 묶어 봉한 것은 스스로를 가두기 위해서였지.”

‘스스로를!’

“내가 수련했던 유살결(幽殺決)은 일반 공법과 달리 기이할 정도로 빠른 수련 속도와 위력을 지녔었네. 그러나 이 공법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지. 일정 성취에 이르면 이지를 상실하고 피에 굶주린 짐승처럼 살육을 일삼게 된다네.

당시 뜻밖의 인연으로 동급 수사들을 초월하는 강력한 의식을 지니게 되었던 나는 그만 교만했던 거야. 다른 수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 공법을 수련해 대성했고 원영기에 들자마자 제어할 수 없는 살심에 물들어 수도계에 피바람을 몰고 다녔어.

그 결과 적지 않은 원한을 사게 되었고 원영기 수사 여럿의 공격을 받아 중상을 입고 한 팔을 잃었네.”

그녀의 시선이 힐끗 한 팔로 향했다.

“그날 이후 오랜 숙고 끝에 결단을 내렸네. 이렇게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다면 척살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 그래서 독한 마음을 먹고 친우에게 천화신련(天火神鍊)이라는 쇠사슬과 이 청금석 석실을 만들어 달라 청해 스스로를 이곳에 산채로 묻어버린 게야.

혹여 스스로 적막을 이기지 못해 사슬을 풀고 달아날까 천화신련의 열쇠를 가장 가까운 벗에게 맡겼는데 일정 기간마다 내 상황을 보러 찾아와 상태가 호전되면 풀어주기로 약조를 했다네.

그런데 그 벗은 몇 번 다녀간 이후로는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네. 그에게 어떤 변고가 생긴 지는 알 수 없으나 그렇게 난 산 채로 여태껏 이곳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었어!

석실은 청금석으로 제련되어 원영 중기에 이른 나조차도 멀리까지는 의식을 퍼트릴 수 없어 도움을 청할 길이 요원했네. 그리고 이 천화신련이란 사슬 또한 기이한 심법으로 제련되어 내 원신과 불가분의 관계가 되어버렸지.

이곳에서 수련하는 동안 수행에 정진이 있어 이제는 진화(眞火)를 이용해 사슬을 끊어낼 수는 있겠으나 그러면 내 숨도 동시에 끊어지는 게야.

수사가 이곳까지 와서 나를 찾은 것도 인연이라 할 수 있으니, 하늘이 주신 기회에 벅차지 않을 수 없군.”

흑의 여인이 단숨에 자신의 내력을 털어 놓자 한립도 아연하기만 했다. 사정을 헤아려보던 그가 그래도 주저하듯 물었다.

“뜻은 알겠으나 세월이 이리 흘렀으니 그 벗께서 세상을 떠났을 가능성이 너무 큽니다.”

“서신을 전하는 까닭이 천화신련의 열쇠의 행방을 묻기 위함이니 상대가 이미 세상을 떴다 해도 걱정할 것 없네. 미리 약조하길 만일의 상황이 생기면 후손에게 열쇠를 남겨 보관한다 했으니 그의 후손을 찾으면 될게야.”

이야기를 듣고 곰곰이 생각해 보아도 말이 앞뒤가 어긋남이 없었다.

결심이 선 그는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바로 섬돌 뒤로 돌아 옥갑을 꺼내 들었다. 고색창연한 누런 옥갑에는 기괴한 모습으로 화염 속에서 하늘을 향해 포효하는 사람의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그 위에 붙어 있는 금빛 찬란한 부적의 기운이 한립의 마음을 어딘지 모르게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 미간을 좁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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