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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334화 (91/2,000)

# 334

334화. 여우의 등장

한 시진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규환은 법기에 서서 가만히만 있자니 좀이 쑤시는 기분이었다. 그가 왕 사형을 보고 어찌 된 일인지 상의하려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다시 반 시진이 지나 연기기 제자들의 초조함이 극에 달했을 때 법기 위에서 미동도 없던 한립의 시선이 슬그머니 인근의 관목 숲으로 향했다.

더는 참지 못하고 규환이 입을 떼려는 찰나 한립의 전음이 귓가를 울렸다.

“여우가 서쪽 관목 숲에 숨어 있으니 조용히 해야 할 것입니다.”

그 말에 뜨끔한 그가 당장 입을 다물고는 눈동자를 굴려 서쪽을 살폈다. 다른 세 사람도 한립의 전음을 들은 것이 분명했다.

모두 처음에는 놀라 같은 곳을 바라보았지만 아무런 이상을 찾을 수 없자 점점 의심스러웠다.

그렇게 일다경이 지나자 한 자 크기의 눈처럼 새하얀 여우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여우는 한 걸음을 걸을 때마다 이리 저리 고개를 돌리며 전후좌우를 살폈는데 그 모습이 너무 예뻤다.

하얀 여우가 허공의 다섯 수사를 발견하지 못했는지 점점 대담하게 움직였다. 청록색 눈을 오직 황정에 고정하고는 네 다리를 움직여 사뿐사뿐 다가간 것이다.

“……?”

하지만 황정을 십여 장 앞둔 여우가 분홍색 코를 킁킁거리더니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었다.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듯 했다.

이때 왕 사형의 외침이 들려왔다.

“지금!”

한립 등은 지체 없이 법술을 외우며 진법 법기를 투척했다. 그러자 다섯 가지 색깔이 품어져 나오며 순식간에 땅을 휘감았다. 노란 안개가 그 안에서 뿜어져 나와 오행미종진을 형성한 것이다.

안개가 뿜어져 나오자 여우도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알아챘다.

당황해 몸을 번뜩이며 안개 속으로 파고드는 것이 살길을 찾으려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허공의 왕 사형 등은 전혀 조급해 하지 않았다.

일단 환영진 속으로 들어가면 머리가 어지럽고 방향 감각을 잃어 제자리를 맴돌게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저 여우가 기진맥진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생포할 계획이었다. 다들 이번 계획이 이미 성공했다 여겼는지 화색이 돌았다.

작은 여우가 잠시 안개 속을 뛰어다니다가 머리를 땅에 떨구고는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자 규환 등이 놀라 눈치를 살피는데 옹 사형이 신중한 얼굴로 다독였다.

“지금은 진법을 풀 때가 아니야. 오행미종진은 적을 가둘 뿐 해치는 기능은 전혀 없으니 마 사제가 내려가서 어찌 된 일인지 살피고 와줘. 아마 여우가 꾀를 써서 죽은 척 하는 것일 테니.”

그 말에 안심한 세 사람 중 작고 뚱뚱한 이가 당장 아래로 내려갔다. 다만 한립은 그저 입 꼬리를 올릴 뿐 다른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마 사형은 생김새와 다르게 동작이 빨라 작은 여우 앞까지 금세 도착했다.

그가 하얀 꼬리를 잡아 몇 번 흔들어 보았는데 마치 죽은 것처럼 꼼짝 하지 않았다. 그리고 여우의 몸에 귀를 가져가더니 더욱 안절부절 못하며 위를 향해 소리쳤다.

“사형들, 어서 내려와 보시죠! 몸이 차게 식었고 심장도 뛰지 않는 것이 정말 죽은 듯 합니다.”

“그럴 리가!”

왕 사형의 표정이 달라지자 규환이 초조하게 말했다.

“어차피 우리 영력으로 진법을 오래 유지할 수 없으니 일단 결계를 해체하고 내려가 봅시다.”

누런 얼굴의 습 수사도 말은 않고 있었지만 근심스런 기색이 다분했다. 어쨌든 저계 요수는 죽으면 얼마 값을 쳐주지 않았던 것이다.

주저하던 왕 사형이 결국 동의했다.

“그럼 마 사제가 이미 요수를 잡고 있으니 결계를 풀도록 하지.”

그 말을 듣고도 한립은 턱을 문지를 뿐 반대하지 않았다.

잠시 후 모두 법결을 외우며 손가락을 뻗자 노란 안개가 걷히며 각자의 진법 법기가 수중으로 돌아왔다. 모습을 드러낸 키가 작은 청년이 마침 손가락을 여우 코에 대며 숨을 쉬는지 지켜보았다.

모두 걱정스런 얼굴로 여우를 향해 내려갔으나 한립은 그대로 허공에 떠서는 묘한 눈길로 여우를 주시하고 있었다.

왕 사형 등이 내려서기도 전에 짜리몽땅 청년이 여우 코에서 손가락을 떼곤 소리쳤다.

“제길, 숨을 안 쉽니다. 진짜 죽었나봅니다. 헛고생했네요!”

그가 내려오는 3명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며 무어라 말하려는 찰나, 왕사형의 안색이 급변했다.

“조심하게!”

“여우가 살아있어!”

“죽은 척하고 있었어!”

“……!”

짜리몽땅 마 사형이 기민하게 한 손에서 빛을 뿜었다. 그러자 손가락 끝에서 하얀 부적이 등장해 재빨리 여우에게 날아갔다.

하지만 부적이 도달하기도 전에 여우를 잡고 있던 손바닥에서 찢어질 듯한 통증이 전해졌다.

“아악!”

갑작스런 고통에 그가 손에 힘을 풀어버리자 여우는 스르륵 땅에 착지했다. 귀엽게만 보였던 설운호의 꼬리털이 긴 바늘처럼 변해 솟구쳐 마 사형의 손을 찔러 버린 것이다.

“잇!”

내려오던 다른 세 명의 수사들은 분노해 곧바로 요수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겨우 자유를 찾은 설운호는 순식간에 펄쩍 뛰어 올라 하얀 그림자로 변해 십여 장 밖으로 도망쳤다.

펄쩍! 펄쩍!

설운호는 그렇게 몇 번을 도약하고는 관목 더미로 뛰어들었다. 왕 사형 등은 상황이 급박해지자 민첩한 동작으로 바람처럼 관목 더미를 에워싸 각각 법기를 꺼내 수색에 들어갔다.

결과적으로 그들이 발견한 것은 관목 숲 안의 돌무더기뿐이었지만 말이다. 규환이 먼저 정신을 차리고 하늘 위를 살피더니 놀라 물었다.

“어?  한 사제는 어딜 간 거지?”

다른 사람들도 그제야 한립이 법기를 타고 쾌속으로 날아가고 있음을 발견했다. 다들 어안이 벙벙한 가운데 한립의 전음이 들려왔다.

“요수가 땅 속에 숨어 달아나는 것을 보고 쫓는 중입니다. 놈이 땅 위로 올라오기만 하면 바로 포획하겠습니다.”

목소리가 멀어지며 한립의 모습도 습지 외곽 쪽으로 점차 사라졌다. 왕 사형이 한립의 말에 희색을 보이며 얼른 다른 사형들을 불러 급히 그 뒤를 따랐다.

한립을 따라가며 왕 사형이 잊지 않고 마 사형에게 물었다.

“마 사제, 손은 괜찮은가?”

“다행이 털에 독은 없어 외상을 입었을 뿐이라 괜찮습니다.”

자신의 실수로 다 잡은 설운호를 놓쳤으니 면목이 없어진 그는 부끄러운 낯빛으로 웅얼웅얼 답했다.

“괜찮다니 안심이네. 그럼 어서 서두르지! 한 사제가 어떤 법기를 이용해 땅 속에 숨어든 요물을 추적하는지는 모르나 어서 합류해야해.”

왕 사형이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하니 규환도 고개를 돌려 위로하듯 말했다

“진화한 설운호의 영성이 대단합니다! 마 사형이 죽은 척하는 것을 못 알아챌 정도라니 정말 아까는 깜짝 놀랐습니다.”

사제의 말에 마 사형이 오히려 화르륵 얼굴을 붉혔다. 왕 사형이 적시에 그를 대신해 입을 연 것이 다행이었다.

“마 사제 탓으로만은 볼 수 없네. 나였어도 그런 상황에서는 속수무책이었을 거야. 설운호가 너무 교활한 탓이지.”

세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오직 한립의 뒤를 쫓는 데만 열중하던 누런 얼굴의 습 씨 청년이 마치 이상한 것이라도 본 듯한 얼굴로 소리쳤다.

“모두 보십시오! 하, 한 사제가 석벽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이제…… 이제 어쩌죠?”

다들 그 말을 듣고는 놀라 앞쪽을 주시했다.

그들은 이미 수백 장 거리를 날아 습지 외곽에 이르렀는데 갑자기 꼭대기가 보이지 않을 거대한 산이 우뚝 버티고 나타난 것이다. 칼날처럼 날카로운 검은 절벽이 바로 앞을 막고 있었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도 보이던 한립이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그를 따라오던 4명의 사제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절벽 앞에 멈춰 서 있었다.

* * *

그때 한립은 습 씨 청년의 말대로 정말 절벽 속에 있었다.

늑대머리옥패를 손에 쥔 그는 전신에서 은은한 노란 빛을 뿜었고 수 척 크기의 황색 늑대가 토둔술(土遁術)을 펼치며 길을 열었다.

옥패의 기운이 화한 늑대의 영성이 미치는 암석은 즉시 무형으로 변했다. 그 뒤를 태연히 따르고 있는 한립은 아주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의식은 수십 장 아래쪽에서 죽어라 달아나고 있는 하얀 빛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방금 달아난 여우 요수였다.

설운호의 죽음을 가장한 연기나 관목 숲 사이의 가느다란 암맥(巖脈)을 타고 토둔술을 이용해 달아나는 수법으로는 강력한 의식을 가진 한립의 눈을 속일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신경을 끈 것은 설운호가 본색을 드러낸 후 나타난 기묘한 기운이었다. 요수의 몸에서 익숙한 영기의 파동이 느껴졌다!

놀란 한립은 곰곰이 기억을 더듬은 끝에 여우의 몸에서 은은하게 화곡영삼의 화신이었던 흰토끼와 동일한 청량한 영기가 느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의식을 이용해 철저히 설운호의 몸을 꿰뚫어 보니 의혹은 더욱 커졌다.

요수의 청량한 기운은 너무 미미해서 구곡영삼의 화신과 비교했을 때 하늘과 땅차이었을 뿐 아니라 아무리 살펴도 피와 살로 이루어진 육신을 가진 존재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환상과 같은 화신을 겨우 오행미종진(五行迷踪陣) 따위가 가둘 수는 없었다. 비록 작은 요수가 천지영물의 기운이 변한 화신 같은 것은 아니었지만 한립은 호기심이 발동했다.

평범한 짐승이 요수로 진화한 것은 이 청량한 기운과 관계가 있을 터였다. 자초지종을 알아보기 위해 그는 설운호가 규환 등을 속이는 동안 가만히 기다리다 그 뒤를 쫓아온 것이다.

이 절벽을 발견한 설운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하얀 빛으로 변해 안으로 스며들었다. 몰래 그 뒤를 쫓던 한립도 망설임 없이 늑대머리옥패를 꺼내 고보의 흙 속성을 이용해 따라붙었다.

비검을 이용해 절벽을 깎아 들어가는 짓은 요수의 경계심을 자극할 뿐이었다.

거대한 산은 보이는 대로 역시 규모가 꽤 커 수백 장 거리를 은밀히 쫓은 후에야 하얀 빛이 깜박이며 폐쇄된 석실 같은 공간으로 뛰쳐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한립은 입꼬리를 올리며 옥패의 늑대를 재촉해 속도를 높였다. 그리고 먼저 의식을 퍼트려 석실 안을 면밀히 살필 계획이었다. 그러나 의식이 석실에 접근하자마자 기이한 반탄력에 의해 튕겨져나와 버렸다.

‘뭐야.’

한립이 속도를 줄이며 경계심을 키웠다. 순간 몸이 경직되며 태산과 같은 압력과 잔잔한 목소리가 전해졌다.

“기왕 왔으면 우물쭈물하지 말게. 아니면 내가 친히 마중이라도 하길 기다리는 겐가?”

목소리가 들려오자마자 동시에 한립이 노란 빛을 뿜으며 거대한 힘에 의해 떠밀려 석실 안으로 들어와 버렸다.

경악한 한립이 옥패를 맹렬히 휘두르자 붉고 노란 빛의 장막이 온 몸을 휘감았고 입에선 십여 개의 푸른빛이 뿜어져 나와 그의 주위를 쏜살같이 배회했다.

최소한의 대비를 해놓고서야 사방을 주시할 수 있었다.

한립이 힘들여 찾지 않아도 목소리의 주인은 십여 장 앞의 섬돌 위에 앉아 있었다. 놀랍게도 수수한 나무 비녀로 머리를 말아 올린 흑의 경장 차림의 젊은 여인이었다.

고운 외모를 지녔지만 안색이 창백해보였고 얼굴의 반절은 비단 천으로 가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끈 것은 얼굴이 아니라 한 쪽 소매가 텅 비어버린 것이었다. 여인은 한 팔이 없었다.

한립이 입을 열기도 전에 여인이 그의 비검 법보를 보곤 흥미롭다는 눈빛을 보냈다.

“연기기 수사가 아니라 결단기 수사였구나. 쯧쯧, 기를 숨기는 수법이 기이하여 노부(老婦)조차 속아 넘어갈 뻔 했어.”

가부좌를 튼 그녀의 무릎 위에는 방금까지 쫓기던 설운호가 편안한 얼굴로 올라 앉아 그를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살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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