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333화 (90/2,000)

# 333

333화. 녹종 습지

내용을 다들은 한립은 무표정하게 침묵하다가 천천히 입을 떼었다.

“뜰에 50년 이상 된 황정 두 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함부로 영초를 처분할 권한이 없습니다. 일단 영초가 부족한 것이 발각이 되면 사숙의 불호령이 떨어질 겁니다.”

냉정한 답변에 청년은 어쩔 수 없이 실망한 기색이었다.

“사제 빌려간 영초는 며칠 내로 그대로 돌려 줄 테니 걱정 하지 않아도 돼. 뿌리만 조심해서 다시 심어 놓으면 감쪽같겠지. 그리고 영초만 빌려준다면 사제의 몫도 따로 챙겨줄게.”

“그래도 이곳의 영초는 내어 드릴 수 없습니다. 다만 사형이 영석이 모자라다면 제가 빌려드릴 수는 있지요.”

점차 어두워지던 청년의 얼굴이 마지막 말에 활짝 폈다.

“정말이야?  영석을 빌릴 수 있다면 당연히 이곳 영초를 빌려갈 이유가 없지. 다만 수십 년 된 영초는 영석을 최소 30개 넘게 주어야 할 텐데 사제에게 그렇게 많은 영석이 있단 말이야?”

청년의 의아함은 당연했다. 연기기 수사에게 나름 큰 액수였기 때문이다.

“그 정도는 입문 전에 모아두었습니다. 며칠만 빌려 드리면 곧 불려주신다니 빌려드리지 않을 이유가 없고요.”

“하하! 한 사제가 그런 계산이 빠른 유형이었어. 황정만 있으면 그 설운호는 잡은 것이나 다름없으니 걱정 푹 놓고 있으라고.”

규환은 한립의 말이 진심임을 알고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미소를 머금은 한립이 바로 수중에 있던 영석 스물 몇 개를 상대에게 건네주었다.

규환이 가슴에 영석 주머니를 품고는 자신만 믿으라며 호언장담했다. 그는 몇 마디 한담을 나누고는 곧 자리를 떠났다.

점점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한립은 웃음기를 거두고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저계 영석 이, 삼십 개는 그에게 별 것도 아니었기에 그저 낙운종에서 원한을 사지 않기 위해 한 일에 불과했다.

또 상대처럼 소식이 능통하고 사람들과 교류하기 좋아하는 이를 알아두어 나쁠 것도 없었다.

* * *

3일 후 한립 앞에는 한껏 미안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규환이 서있었다.

그는 영석을 돌려주러 온 것이 아니라 그에게 함께 나가서 설운호를 잡는 것을 도와달라고 청하고 있었다.

“사형들이 모여 겨우 저계 요수 한 마리를 잡지 못한 것입니까?”

규환이 민망한 웃음을 흘리며 답했다.

“그 여우가 어찌나 교활하고 빠른지 평범한 법기는 아예 따라 잡을 수가 없더군. 그래서 내문사형 한 분을 찾아가 진법 법기를 빌렸는데 마침 소형 진을 이루는 인원 중 하나가 파견 임무를 맡아 빠지게 되어서 말이야.

다른 제자를 끌어들이면 각자에게 돌아갈 몫이 줄어들 테니 아무래도 사제가 나서주는 게 좋지 않을까 해서.”

한립이 턱을 만지작거리며 망설였다.

다른 때에 찾아 왔다면 시간을 빼앗기지 않으려 했겠지만 지금은 어차피 대연결 사성을 익히다 막혀 번민하던 차였다.

아마 수행에 어떤 한계가 왔다는 징조일 테니 이럴 때 잠시 여유를 가지고 머리를 비우는 것도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다. 어쨌든 이런 난관을 깨는 인연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나타날지 알 수 없었다.

마음을 정한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규 사형이 그리 말씀하시니 함께 가보시지요. 안 그래도 그 습지란 곳이 어디 있는지 궁금하던 차였습니다.”

말을 하면서 한립의 얼굴에 나른한 미소가 어렸다.

한립이 흔쾌히 나서주니 규환은 무척 기뻤다. 그는 장소와 시간을 일러주고는 희희낙락하며 떠나갔다.

다음날 아침 동굴의 금제를 잘 점검한 그가 약속한 곳으로 향했다. 그의 발아래에는 비검 법기가 놓여있어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속도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법기라니, 결단에 성공한 이후 이 몇 년 만인가!

이 상계 법기가 한립이 어렵게 저물대를 뒤적여 찾은 가장 별 볼일 없는 물건이었다. 더 질 나쁜 물건을 찾으려 해도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반각 정도 날아가 작은 산의 정상에서 내려섰는데 약속 시간보다 일찍 나온 탓에 아무도 없었다.

바로 깨끗한 암석을 찾아 자리를 잡은 그가 운기조식을 하며 천지 영기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한 시진이 지나고 붉은 태양이 모습을 드러낼 쯤 몇 개의 검은 점들이 천천히 다가왔다.

“흠…….”

그들의 비행 속도에 한립은 한참이나 쓴웃음을 지었다. 한립의 눈에는 달팽이가 기어가는 것 마냥 답답한 속도였다. 결국 그들이 정상에 도착했다.

“한 사제! 이렇게 일찍 나와 기다리다니 세심하네.”

규환이 싱글벙글하며 소리치는 와중에 발밑을 보니 낙운종에서 배급되는 저계 제자용 원판 법기를 타고 있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한립이 다른 세 명을 둘러보았다.

“저도 막 도착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곳에 모인 분들이 전부입니까?”

“헤헤, 설운호를 잡는데 다섯이서 오행미종진(五行迷踪陣)을 설치하면 충분하지 뭐. 사람이 많아질수록 각자 받을 영석이 줄어든다고. 여기는 마 사형, 습 사형 그리고 왕 사형이셔.”

규환이 만면에 웃음을 띠고는 한 명 한 명 소개해 주었다.

그 중 서른 대여섯 살 먹은 왕 사형이 가장 연장자로 하얀 의복을 휘날리며 의젓하고 품위 있는 모습을 보였다. 수행 역시 가장 높은 연기기 십일성이었고 말이다.

다른 두 청년은 하나는 작고 뚱뚱했으나 다른 하나는 누런 얼굴로 연기기 십 성 수행의 수도자였다. 왕 사형이 역시 기개가 있게 먼저 한립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한 사제에 대해서는 다른 사제들에게 들었는데 도움을 주어 고맙다. 한 사제가 영석을 빌려 주지 않았다면 설운호를 잡을 방법이 없었을 거야.”

다른 두 명도 호의적인 시선인 것이 영석도 빌려주고 여기까지 와준 것에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저 영석을 조금 벌어보려 빌려드린 것 뿐인 걸요.”

왕 수사가 고개를 저의며 진심을 담아 말했다.

“축기기 수사에게는 별 것 아닌 액수지만 우리 같은 연기기 제자들에게 많은 양인 것을 왜 모르겠어. 앞으로 사제를 벗으로 생각할게, 잘 지내자.”

한립은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도도 좋고 수행도 나쁘지 않은데 됨됨이까지 바르니 어디를 가든 무리의 우두머리 역할을 할 상이었다.

그때 규환이 끼어들어 모두를 일깨웠다.

“황 사형, 한 사제 가면서 이야기 하시죠. 우리 속도로 더욱 지체하다가는 설운호를 잡을 시간이 얼마 없을 거예요. 다들 종문을 오래 비울 수 없으니까요.”

“규 사제 말대로 시간이 없으니 모두 일단 출발하지. 한 사제와는 또 이야기 할 기회가 있을 테니 말이야.”

모두 각자의 법기를 타고 날아올랐다. 막 허공으로 뜨자마자 규환이 한립의 비검을 보고는 놀라 날아가며 눈길을 떼지 못했다.

“어?  사제 스스로 중계 이상의 법기를 사다니 어느 가문 출신이었던 거야?”

중계 법기라 해도 연기기 제자들에게는 구하기 어려운 물건이었다. 왕 사형도 말을 안 했으나 이상하다는 눈빛이었고 짜리몽땅한 뚱보와 누런 얼굴의 수사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이런 일을 예상한 한립은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

“수도 가문이라니요, 다만 부적 제련을 배워두어 산수 시절 재산을 모아 둔 덕에 규 사형에게 빌려줄 영석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 말에 모두가 선망 어린 눈초리를 보냈다. 작고 뚱뚱한 마 사형은 호기심을 그대로 드러냈다.

“부적으로 재산을 모을 정도면 수준이 상당하다는 뜻인데 사제는 어떤 부적을 제작할 수 있는지 모르겠군?”

“주로 초급 하계 영부를 제작하는데 초급 중계 부적도 두 종류 제련은 가능하나 성공 확률이 너무 떨어집니다.”

이번에는 왕 사형도 그를 보는 눈이 달라졌다.

“정말 중계 부적을 제련할 수 있단 말인가?”

“뇌화부(雷火符)와 금강부(金剛符)를 제련할 수 있는데 대여섯 번 시도해야 한번 정도 성공해서 재료값을 제하면 남는 것이 없습니다.”

왕 사형이 탄식했다.

“한 사제가 너무 겸손하구만. 내 알기로는 중계 부적을 제련할 수 있는 외문제자는 화운봉에서도 몇 명 없다 들었는데 앞으로 사제는 영석 걱정을 할 일은 없겠어. 우리처럼 영석을 벌 방법이 거의 없는 이들하고는 차원이 다르지.”

그 말에 다른 이들도 얼굴이 어두워졌다.

“저는 고계 부적을 제련하는 것도 아니고 언제 팔릴지 모르는 하계 부적을 가지고 푼돈이나 모으는 형편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사형들의 설운호 거래가 오히려 괜찮은 돈벌이인것 같은데요?”

모두 쓴웃음을 흘리는 와중에 왕 사형이 먼저 입을 열었다.

“설운호를 잡아 파는 것도 아마 이번이 마지막일 것이야.”

“어째서 입니까?”

규환이 나서서 설명했다.

“이미 습지 주변 설운호들을 거의 잡아서 몇 마리 남지 않았고 또 그저 애완동물로 여우를 원하는 여제자들도 별로 남지 않았거든. 수행이 높은 사저들은 진짜 요수를 데려다가 영수를 삼고 싶어 하니까.”

“그렇다면 사형들은 앞으로 다른 방법을 찾아보아야겠습니다.”

한립의 동정 어린 시선과 함께 말을 잃은 무리가 낙운종 금제 범위를 빠져 나와 운몽산 중간을 향해 날아갔다.

도중에 왕 사형이 돌연 작은 녹색 병을 한립에게 주었다.

“한 사제, 녹종 습지는 마침 우리 낙운종과 고검문 경계에 위치해 있는데 워낙 외지고 습지에 독무가 있어 아무도 찾지 않는 곳이지. 일단 안으로 들어가면 일정 시간마다 이 약을 복용해줘야 구토와 설사를 막을 수 있어.”

“감사합니다.”

거절하지 않고 약병을 챙긴 그였으나 결단 후기의 수행으로 습지에 고이는 독무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수 시진을 날아간 그들을 거대한 산봉우리를 넘어 녹음이 울창한 분지 지형에 도달했다.

“모두 조심해서 내려가자고!”

왕 사형이 경고를 한 후 먼저 안개 속으로 하강했다.

차분히 내려온 그는 같이 온 이들이 서둘러 독을 쫓는 단약을 복용하는 것을 보며 웃음을 흘렸다. 그는 결단을 하면서 체질이 달라져 자연적으로 형성된 독무 정도는 호흡 한번으로 흩어버릴 수 있었다.

이제 지면에서 십여 장 높이에 이러 저공비행을 시작한 무리가 분지 중앙으로 향했다. 왕 사형이 계획을 설명했다.

“여우가 아주 영악해서 한 번에 잡지 못하면 실패야. 달아날 곳이 마땅치 않은 넓은 지형에 진법을 설치해야 하는데 저 쪽에 땅이 비교적 단단한 곳이 있으니 가지.”

모두 그의 뜻에 따라 이견을 나타내지 않았다. 잠시 후 다섯 수사가 낮은 관목으로 둘러쌓인 푸른 평지에 도착했다.

왕 사형의 지시에 따라 초지를 살핀 이들은 중앙에 구덩이를 파고 준비한 황정을 조심스레 심었다. 그러자 은은한 약초의 향이 바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만족스럽게 손을 털며 일어선 규환이 바로 저물대에서 하얀 진법 깃발을 꺼내 한립에게 주었다.

“됐다! 설운호는 후각이 민감하니 분명 감지할 거야. 이 진법 법기는 잘 가지고 있고.”

담담한 얼굴로 한립이 깃발을 받아 드는데 왕 사형이 모두에게 당부했다.

“모두 허공에서 숨어 있다가 여우가 나타나면 신호와 함께 깃발을 투척하는 거다. 초지 전체를 잠시 진법이 봉쇄할 테니 이제 막 요수가 된 여우가 달아나지 못할 거야.”

진지한 얼굴을 마주보며 무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한 번 법기를 탄 이들이 허공에서 은닉술을 펼치고 숨을 죽였다.

큰 액수가 걸린 일에 규환 등은 모두 긴장한 눈빛으로 눈도 깜빡이지 않았고 왕 사형도 눈빛이 강렬했지만 한립은 평안했다.

사실 방원 수백 장 범위에서 풀잎이 나부끼는 것도 파악하고 있었으니 긴장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고요 속에서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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