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1
331화. 귀속
노인이 우람한 청년을 가리키자 그가 멍해지더니 의외라는 얼굴을 하였다. 또 다른 중년인이 즉시 반박했다.
“흥! 저번 은검봉으로 간 제자 중 둘이 이령근을 지닌 제자들임은 어찌 빼먹으십니까? 오랜만에 특수 영근을 지닌 제자가 들어왔으니 당연히 우리 화운봉(火云峰)에 배정이 되는 것이 맞습니다.”
“불 속성 공법을 위주로 하는 화운봉에서 금속성 공법에 적합한 단금지체의 수사를 욕심내시다니! 양 사제 이치가 맞는 일입니까?”
회백색 머리의 노인이 싱긋 웃으며 고개를 저으니 중년인이 전혀 물러서지 않았다.
“은검봉에 금속성 공법이 있다지만 우리 화운봉 이사백의 금련결(金煉決)은 계국 전체에 명성이 자자합니다.”
“그게 지금…….”
위일명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두 사람의 언쟁을 끊었다.
“두 수사의 뜻은 알겠으니 그만 하시게.”
뜻밖에 추 사형도 가볍게 웃으며 만류했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언쟁을 한다고 무슨 결론이 나는 것도 아니니 장문 사형의 결정을 기다리시지요. 어쨌든 모두가 우리 낙운종의 제자가 될 것인데 다툴 것이 무엇입니까.”
그 말에 창백한 인상의 중년인 보다 노인이 먼저 선수를 쳤다.
“추 사제의 말이 맞네. 당연히 장문 사형이 결정할 일이지. 우리 은검봉은 아무 이견도 없네.”
중년인도 주저하긴 했으나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표정이 조금 온화해진 낙운종 장문이 생각을 하다가 인자한 얼굴로 한립 등 7인을 바라보았다.
“일단 특수한 자질을 지닌 제자는 나중에 처리하고 나머지의 귀속을 정하지. 어쨌든 여섯 개나 되는 봉우리 중 신입을 원치 않는 곳은 없으니 말이야.”
* * *
한 시진 후 한립과 구레나룻 거한은 거대한 사발에 올라 유 가 청년을 따라 천천봉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남색 저계 제자의 복식으로 갈아입은 그들은 천천봉에 배정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탐내던 우람한 청년은 환석봉(幻石峰)으로 가게 되었다. 비록 회백발 노인과 은검봉 중년인은 불만족스러워 했지만 결과에 승복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그들이 말하던 내문 제자를 둘이나 데려 갔으니 빈손으로 돌아간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청년은 한립과 구레나룻 거한이 천천봉 제자가 되어서 인지 한결 온화한 말투로 주의 사항을 일러주었다.
“비록 너희 둘이 외문제자로 입문하긴 했으나 우리 천천봉으로 배정된 것은 운이 좋았다. 너희의 사조 되시는 내 사부님께서는 항상 어질고 너그러운 분으로 외문제자도 함부로 대하지 않으시지.
주어진 임무는 정해진 시간 내에 완수해야겠지만 나머지 시간은 자유다. 내문제자와 대우는 다르겠으나 만일 문종에 큰 공을 세우면 사부님께서 축기단을 내리실 수도 있고 말이야.”
그 말을 그대로 믿지는 않았으나 한립은 표면적으로는 공손히 예를 취했다.
“유 사숙의 가르침을 받들겠습니다.”
다만 구레나룻 거한은 입만 달싹거리는 것이 이런 인사치레에 익숙하지 않은 순박한 인물 같아 보였다. 이미 그의 신분에 의문을 느끼고 있는 한립으로서는 할 말이 없었다.
거한의 연기가 대단한 것인지 아니면 근본적으로 자신의 상황을 모르는 것인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더욱 마음이 쓰이는 것은 일전에 보인 묘 사형의 행동이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겨우 축기 후기 선사가 거한의 기운을 느꼈을 리가 없었다. 무언가 숨겨진 내막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유 가 청년이 한립과 거한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몇 가지를 더 일러주고는 천천봉 산허리의 어느 누각 앞으로 내려섰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소년, 소녀가 청년을 보자마자 말을 멈추고는 다가왔다. 인형같이 생긴 열대여섯 살의 소녀가 청년을 향해 미소 지었다.
“유 사숙, 사조님을 뵈러 오신 거예요?”
소녀의 편안한 태도에 수도계의 엄격한 분위기에 익숙한 한립은 조금 놀라고 말았다. 유 청년은 소녀와 잘 아는 사이인지 역시 미소로 화답했다.
“그래, 이 둘이 이번에 새로 들어온 외문제자이니 일단 사조님께 인사를 시키고 어느 사형의 문하에 들일지 봐야겠지.”
소녀의 시선이 한립과 거한에 닿더니 싱그럽게 웃었다.
“새로운 제자들이었구나! 이후 기회가 되면 나와 신 사제에게 바깥 이야기를 좀 해줘.”
옆에 서있던 까만 피부의 소년이 얌전히 중얼거렸다.
“사저가 듣고 싶은 거면서 저는 어찌 끌어들입니까? 저는 수련하기도 바쁩니다.”
“수련은 언제든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속세에서 새로운 제자가 천천봉에 들어오는 것은 드문 일이니 당연히 이야기를 듣는 것이 우선이지!”
여리고 작은 소녀가 마치 나이든 사람을 흉내 내듯 소년을 훈계하니 웃음이 났다. 유 가 청년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젓다가 더는 말을 섞지 않고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마 사매와 신 사제는 비록 아직 어리고 배분도 너희와 같지만 사실 사조께서 속세에서 들이신 이들이다. 아직 정식 제자로 맞으시진 않았지만 시간문제일 뿐이니 무례하게 굴지 않도록 주의하거라. 만일 문제를 일으켜 사조께서 죄를 물으신다면 아무도 너희를 보호해 줄 수 없을 게다.”
청년이 걸아 가며 해주는 이야기에 한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한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미소를 짓는 것이 무어라 할지 모르는 듯 했다.
“신 사제는 얌전해서 별 일 없겠지만 마 사매는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와 짓궂은 면이 남아 있을 뿐 악의는 없으니 조금만 조심하면 될 게야.”
이야기를 하는 동안 그들은 이미 몇 개의 정원을 지나 한적한 곁채 앞에 도착했다. 막 곁채에 다가가자마자 그들의 귓가에 사내의 목소리가 울렸다.
“군이더냐?”
유군이 그 소리를 듣자마자 걸음을 멈추었다.
“제자, 사부님을 뵙습니다!”
“네 셋째 사형과 다섯째 사저도 와있으니 그 둘을 데리고 어서 들거라.”
“예!”
한립과 거한을 데리고 유군이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우아하게 꾸며진 대청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화초의 화분들과 흑단으로 만든 나무 탁자가 놓여 있었다. 그 옆에 앉은 문인 차림의 중년인은 검은 머리카락과 수염을 흩날리는 것이 마치 신선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그 옆에는 사내와 여인이 서있었다.
사내는 긴 백발에 주름이 가득한 것이 나이가 지긋한 노인이었고 여인은 백옥 같은 피부에 용모가 준수한 것이 스물 예닐곱 살 정도로 보였다.
유군이 서둘러 앞으로 나가 허리를 굽혔다.
“사부님을 뵙습니다! 삼 사형, 무 사저.”
“되었으니 일어나거라. 이들이 천천봉에 새로 들어온 제자로구나!”
중년인이 소매를 펄럭이며 청년을 일으켜 세우더니 자못 흥미롭다는 시선으로 한립과 거한을 바라보았다.
한 눈에 보아도 결단 중기의 수사에게 한립은 억지 미소를 띠며 ‘사조’라 인사를 올렸다. 사조라는 이가 거한의 이상한 상태를 눈치 채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한립의 수행 역시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중년인이 한립과 거한의 이름을 묻더니 옆에 서있던 남녀 제자를 향해 온화하게 분부했다.
“어차피 너희 둘이 이곳에 있으니 다른 이들을 성가시게 할 것 없겠어. 한 명은 부적을 다른 한 명은 단약에 관해 익히고 있으니 아마 일손이 부족하겠지. 새로 들어온 제자들을 한 명씩 데리고 가 그 김에 공법에 대해 지도해 주거라. 아무리 외문제자라 한들 우리 천천봉 동문이 남들의 비웃음을 사서는 안 될 것이야.”
백발노인이 만면에 미소를 띠고 응했다.
“예, 사부님 저와 사매가 한 명씩 맡겠습니다.”
스물 몇 살의 여인은 조금 냉랭하지만 아름다운 얼굴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왕 사매도 동의했으니 제가 먼저 고르겠습니다. 내가 두동 사질을 데리고 갈 테니 사매는 한 사질을 데리고 가지!”
“예.”
여인은 작게 답했을 뿐 한립을 향해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중년인이 그 모습을 보고는 한립과 거한을 향해 다시 시선을 돌렸다.
“너희 사숙들과 이야기할 것이 있으니 둘은 먼저 나가 있거라.”
공손히 예를 취한 한립과 거한은 밖으로 물러났다. 거한은 나오자마자 제자리에서 꼼짝 않고 하늘만 바라보았는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나른한 얼굴의 한립은 강대한 의식을 통해 방 안의 대화를 전부 듣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여전했으나 눈빛이 시시각각 달라졌다.
잠시 후 문이 열리더니 유군과 백발노인 그리고 냉미녀가 차례로 걸어 나왔다. 노인은 바로 기다란 법기를 꺼내 여인과 유군에게 짧게 인사를 하고는 거한을 데리고 날아올랐다.
이제야 여인이 무표정한 시선으로 한립을 보았다.
“나와 거처로 돌아가자꾸나.”
한립의 입 꼬리가 미세하게 꺾였으나 금세 원래대로 돌아갔다. 붉은 빛이 반짝이더니 그를 뒤덮었다.
* * *
두 시진 후 한립은 백여 장 크기의 낯선 약제 정원 안에 서 있었다. 녹음이 푸르른 약초밭과 정원을 중간에 둔 세 채의 오두막과 인근의 산을 보고 있으니 얼굴에 잔잔하게 미소가 떠올랐다.
무표정한 축기 중기의 모패령이라는 사숙은 동굴 거처로 돌아가자마자 그가 약초밭을 관리할 것인지 아니면 단약을 제련하는 기술을 배울 것인지 물었다.
그가 답을 하기도 전에 여인은 냉랭한 말투로 설명을 이어갔는데 약초밭을 관리하는 일은 매년 일정량의 약초를 상납하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일이라 공법을 수련할 시간이 많다고 했다.
한립은 크게 기뻐하며 오래 고민할 것도 없이 전자를 택했다. 바로 그가 원하던 임무였던 것이다.
안 그래도 복잡한 종파의 임무에서 벗어나 오로지 수련에 매진할 방법을 강구할 작정이었는데 일이 잘 풀렸다.
또한 약초밭을 관리하는 일에 인연이 있다는 생각도 지울 수 없었다. 여인은 한립이 이 임무를 선택한 것에 놀란 것 같지 않았다.
그녀는 이곳에서 원래 일하던 여제자를 데려가며 물 속성 공법인 현빙결(玄氷訣)과 한립을 남겨두고 떠났다. 이제 이곳이 한립이 머물 곳이 된 것이다.
여인이 붉은 빛이 되어 다시 사라지기를 기다린 한립은 사숙이 주고 간 물건들을 살펴보았다.
서책 2권과 노란색 영패였는데 녹색으로 된 서책은 약초 관리에 대해 적혀있었고, 나머지 서책은 현빙결 공법이었다. 당연히 최상급 공법이 아님은 물론이고 위력이 굉장히 약했다. 유일한 장점은 익히기 쉽다는 점이었다.
아마 외문제자로 들어온 이의 자질이 좋지 못함을 알고는 일부러 이런 공법을 택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마지막 노란 영패는 정원을 둘러싼 어설픈 진법을 통제하는 용도로 쓰였다.
물건을 잘 챙겨 넣고 유유히 오두막 안을 살펴본 그가 다시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의 시선이 정원 뒤편의 낮은 돌산으로 향했다.
일단 의식을 퍼트려 수십 리 내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한립이 거침없이 두 팔을 펼쳤다. 맑은 소리와 함께 그의 소매 속에서 뻗어나간 열댓 개의 푸른빛이 돌산으로 향했다.
이후 몇 번 비검들이 휘적거리자 순식간에 뚝딱 동굴이 만들어졌다.
한립의 시선을 따라 각각의 비검들이 바삐 움직이니 동굴 안에 석실들이 파이기 시작했다. 각 방은 크기도 다르고 모양도 달랐지만 이미 거처를 만드는 것에 숙련된 그의 움직임은 머뭇거림이 없었다.
몇 시진 후 동굴 거처 하나가 쥐도 새도 모르게 완성되었다.
거처를 보던 한립이 만족스러운 듯 바로 몇 개의 진법 법기를 꺼내 들었다. 그가 돌산 주위를 돌며 이동하자 은닉용 고계 진법의 설치가 끝났다. 비록 원영기 수사의 눈을 피할 정도는 못돼도 결단기 수사는 발견하지 못할 정도는 되었다.
이 정도로 일단은 충분했다.
고계 수사가 뜬금없이 이런 초라한 약초밭에 올 일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 진법들은 임시 조치였고 그가 구령법진을 익히면 바로 구령진을 설치할 예정이었으니 그 때가 되면 원영기 수사가 와도 걱정할 것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