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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326화 (83/2,000)
  • # 326

    326화. 음양륜회결(陰陽輪回決)

    이제 한립의 눈빛이 안개 속의 다른 인물에게 향했다.

    가녀린 신영이 어른거리더니 하얀 의복을 걸친 절색의 소녀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소녀가 한립을 향해 빙그레 웃으며 기쁨을 토로했다.

    “한 형! 이곳에서 또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자령 소저.”

    한립의 목소리는 담담했으나 그의 손에 들고 있던 또 다른 검은 이미 소매 속으로 회수한지 오래였다.

    그날 금빛 화염 속에서 온천인과 자령의 대화를 들었기에 용모가 확연히 달라진 소녀가 자령 선자임을 알고 있었다.

    그저 외모로만 따지면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매력을 가진 원요 조차 한 수 접어줘야 할 그런 가인이었다. 이때 그녀가 시체를 향해 눈길을 주며 탄식했다.

    “스스로 결단기 선사 중 제일이라 외치던 온 소주가 이런 식으로 당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아마 누군가에게 말한다 해도 믿어주지 않을 것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일단 이곳에서 내 눈에 띄었으니 놓아줄 수야 없지요.”

    차분히 말을 마친 그가 온천인에게 다가가 거침없이 허리춤의 저물대를 거두었다. 동시에 호기심 어린 눈길로 푸른 하늘색의 허리띠를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사상반룡대(四象蟠龍帶)입니다. 바람, 불, 물, 먼지 등을 막아주는 기능을 하는 구슬들이 박혀있고 동시에 정신을 맑게 해주고 귀신을 쫓는 효험이 있어 대단한 보물이라 할 수 있지요. 이 허리띠가 있었기에 지금까지 무사히 산을 오를 수 있었습니다.”

    “확실히 이곳에서 유용한 물건이군요.”

    잠시 주저하던 한립이 허리를 굽혀 허리띠마저 수중에 넣었다. 이후 시체를 샅샅이 뒤져 방금 공격을 막았던 내갑과 다른 보물 몇 개를 더 찾아냈다.

    자령이 맑은 눈동자를 매응에게 돌리며 물었다.

    “한 형, 이분은…….”

    “나와 함께 이곳으로 전송된 매 소저입니다.”

    “매 소저였군요.”

    “매응이 자령 선사를 뵙니다!”

    조금 안절부절 못하던 매응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절색의 소녀를 살펴보았다.

    미인으로 유명한 자령 선자를 모를 리 없었으니 그녀 역시 한참 넋을 잃고 바라보던 차였다. 그런 그녀가 한립과 아는 사이인 것을 보니 암암리에 둘의 사이를 추측해 볼 수밖에 없었다.

    자령이 호의를 담아 그런 매응에게 미소를 보이고는 다시 한립을 바라보았다.

    “선사께서는 자령이 일전에 힘을 합쳐 온 소주를 상대하지 않은 것을 탓하지 않으십니까?  사실 당시…….”

    소녀가 해명을 하려 했으나 한립이 손을 내저었다.

    “굳이 설명할 필요 없습니다. 어째서 육도의 후계자와 함께 있었는지는 모르나 한눈에 보기에도 원해서 그런 것이 아니란 것을 알았습니다. 게다가 온천인이 나를 위협하기 위해 섬에 남아 있던 선사를 잡아오라 했을 때 자령 소저가 따르지 않았던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가 전혀 화난 기색이 없자 자령도 마음이 편해져 방긋 웃었다.

    “소녀의 고충을 알아주시니 더는 말씀 드리지 않겠습니다. 다만 자령이 한 형과 매 소저를 따라 함께 움직일 수 있을지요?”

    “그러시지요. 아직 운무가 한참 남았고 그 이후도 편한 길은 아닐 테니 서두르시죠.”

    “그럼 함께 하겠습니다.”

    자령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자 마치 등이 켜진 듯 주위가 환해지는 느낌이었다.

    얼마 후 세 사람은 다시 짙은 안개 속으로 사라졌고 오직 온천인의 시체만이 남아 차갑게 얼어가고 있었다.

    그때 음명의 땅 어느 동굴 안에서 무척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고혹적인 여인이 검은 기운이 뭉친 가느다란 귀신의 형상과 함께 가부좌를 틀고 앉아 마주보고 있었던 것이다.

    낯선 여인의 목소리가 우울하게 울렸다.

    “사매, 정말 나와 함께 음양륜회결을 익힐 생각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선택이 아니야.”

    “연 사저도 알다시피 난 환혼술을 펼치느라 금단이 이미 망가져 수도자로서의 전도가 막혔잖아. 게다가 그런 대가를 치르고서도 사저를 살리지 못하고 귀무에 의해 술법이 중단되었지.

    사저의 혼백은 상당히 굳건해 졌지만 이제 다시는 육체를 얻을 희망이 사라졌어! 하지만 다행히 이곳은 농염한 음기 덕에 귀신을 다루는 술법을 익히기에는 최적의 장소이고 음양륜회결은 사람과 혼백이 함께 수련할 수 있는 희귀한 술법이니 당연히 익힐 거야.

    사저에게 도움이 될 뿐 아니라 다시 결단기로, 아니 심지어 원영기에 이를 수도 있는 일인걸.”

    고혹적인 미녀는 이곳으로 빨려 들어온 원요였다.

    “그렇게 마음을 먹었다니 더는 말리지 않을게. 하지만 이 공법을 익히면 이곳의 음기 덕에 빠르게 성장하겠지만 대성한 후엔 부작용이 상당할 거야.

    아예 윤회의 길로 돌아갈 자격을 잃는 것이니 다시 한 번 잘 생각해 봐……. 청양문에 그렇게 오래도록 이 공법이 있었지만 아무도 익히지 않았던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거라고.”

    “사저가 뭐라고 설득해도 난 이미 결정했어.”

    숙연한 원요의 얼굴에 길게 탄식한 검은 그림자의 연려가 검은 기운을 품은 두 손을 뻗었다.

    “그래. 사매가 두렵지 않다면 사저인 내가 물러설 수는 없겠지. 함께 음양륜회결을 수행해 보자꾸나.”

    원요가 주저 없이 자신의 두 손을 그림자와 맞대고는 두 눈을 감았다. 드디어 말로만 듣던 공법을 수련하기 시작한 것이다.

    “후호후호오!”

    폭풍산 정상에 다가가자 평평한 암석 위에서 거구의 은색 원숭이가 가슴을 두드리며 포효했다.

    그 앞에 선 한립의 일행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할 말을 잃었다.

    천 마리가 넘는 근육질의 괴조들이 산 정상을 맴돌고 있었던 것이다. 큰 것은 오륙 장부터 작은 것은 한 자 길이 밖에 안 되는 것까지 있었지만 하나같이 흉악한 모습에 엄청난 기세를 내뿜고 있었다.

    음명수들의 피를 갈구하는 눈빛을 보건대 저들의 공습이 시작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한립은 속으로 폭풍산의 정보를 알려 주었던 뚱뚱한 노인을 욕하고 있었다. 물론 안개를 통과하면 정상에 조류형 음명수들이 있다고는 했지만 이렇게 많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막 짙은 안개를 지난 이들이 잠시 숨을 돌리려는 찰나 즉시 날짐승 괴수 떼에게 발각되어 포위되었고 어쩔 수 없이 제혼을 불러내 지금까지 버틴 참이었다.

    날짐승들은 제혼을 두려워해 달려들지 않았으나 또 달아나지도 않았기에 대치하고 있었다. 이에 한립의 마음은 전혀 편하지 않았다.

    물론 제혼이 음명수들의 천적이란 것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수가 천 단위로 늘었으니 얼마나 먹어 치울 수 있을지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상황이 이리 되었으니 이제 모험을 해보아야 한다.

    생각을 마친 그가 고개를 돌려 자령과 매응에게 낮은 목소리로 계획을 알려주고 품에서 붉은 화살과 요수 가죽을 여러 겹 덧대어 만든 방패를 각각 나눠주었다. 그리고 자신은 소매에서 열 개의 작은 검들을 꺼내 지면에 늘어놓았다.

    각각에 가느다란 요수의 힘줄이 묶여 한립의 열 손가락에 연결되어 있었다. 한립도 한 번에 열 개를 다루는 것은 처음이었다. 한립이 준비를 마치자 하늘 위의 음명수들도 인내심이 다한 듯했다.

    꾸아악!

    가장 몸집이 큰 머리 셋 달린 괴조가 돌연 괴성을 지르자 한립 일행과 가장 가까이 있던 열댓 마리 음명수들이 동시에 방향을 틀어 날아들었다.

    제혼의 위협에도 드디어 대전이 벌어진 것이다!

    후호후호!

    제혼이 즉시 커다란 콧김을 흥 불어내 커다란 은색 빛을 방출해 내 한 번에 아홉 마리를 감싸버렸고 그 속의 괴조들이 비명을 지르며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몸집이 작은 두 마리가 은빛을 피해 날렵하게 비행했고 오로지 한립 등을 노리고 기습을 해왔다. 그 중 하나는 거대 제혼의 주먹에 맞아 수 장 밖으로 나가떨어졌다.

    하지만 흰머리 독수리의 형상을 한 음명수는 한립의 머리 위까지 날아오는데 성공해 거침없이 날카로운 발톱을 휘둘렀다.

    제자리에서 그것을 지켜보던 한립의 손가락이 현란하게 움직였다. 열 개의 작은 검들이 튕기듯 솟구쳐 푸른 빛을 산산이 흩날리며 음명수에게 달려든 것이다.

    또 한 번 참혹한 괴성이 터져 나왔다.

    아무리 법력을 주입하지 않았더라도 청죽봉운검의 날카로움은 일반적인 병기를 훨씬 뛰어넘었기에 괴조가 순식간에 조각나 흩날렸다.

    그러나 하늘에는 또 한 무리가 몰려오고 있었다.

    이번에는 열댓 마리 정도가 아니라 족히 스무 마리가 넘는 괴수들이 사방에서 쏟아져 내렸고 그 뒤의 음명수들도 당장이라도 달려들고 싶어 안달이 났다.

    긴장을 늦추지 않으며 한립이 두 손을 휘젓자 요수의 힘줄로 인해 팽팽히 당겨진 작은 검들이 푸른 검기의 그물을 형성해 매응과 자령을 감쌌다.

    그리고 은빛과 푸른 검기 그리고 괴성이 섞여 상황은 호전되기 시작하였다.

    * * *

    작열하는 태양이 혼탁한 누런 해수면을 비추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봐도 아무런 생물체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해수면이 용솟음치더니 해저에서 검은 안개 같은 것이 뿜어져 나왔다. 먹을 풀어 놓은 듯 검은 안개가 커지며 눈 깜짝 할 사이에 백여 장을 덮은 것이다.

    꽈과광!

    그 안에는 벼락이 치는 소리가 들려왔고 눈을 찌를 듯한 은빛을 내었다. 그리고 잠시 후 커다란 그림자가 나타났는데 마치 무언가가 은색 날개를 활짝 펼친 모양새였다.

    그림자 속의 인물이 누군지 확실히 드러나기도 전에 다시 한 번 은빛이 번뜩이더니 다른 곳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콰광! 꽈과광! 쿠쿵!

    연달아 천둥번개 소리가 작렬하며 은색이 번뜩이더니 은빛이 저 멀리로 사라지고 있었다. 마치 아주 다급하게 무언가로부터 달아나는 것 같았다.

    그러나 해수면은 여전히 고요했고 이제 검은 안개만이 남아 규모를 키웠는데 어느 사이엔가 검은 번개가 소리 없이 번뜩이고 있었다.

    * * *

    검은 안개와 천 리를 떨어진 후에야 은빛이 번뜩이기를 멈추었고 거대한 그림자는 자령과 매응을 안은 한립이었다. 세 사람은 꼭 붙어 있어 무척 친밀하게 보였다.

    한립은 양 팔에 미인을 품고도 그저 평소와 같은 얼굴이었으나 안긴 여인들은 은은히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그가 사방을 둘러보고 조금 긴장을 풀며 두 여인을 품에서 풀어주었다.

    “귀무가 이곳까지는 미치지 못하겠지요. 드디어 그 괴상한 곳에서 벗어났습니다.”

    “모두 한 서사의 덕입니다. 신묘한 비행술이 아니었다면 아직도 음명의 땅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거예요.”

    “자령 언니 말이 맞아요. 정말 한 형이 민첩하게 도와주어서 망정이지 다시 빨려 들어갈 뻔 했다니까요.”

    며칠 전 제혼의 엄청난 활약으로 수많은 위기를 이겨내고 모든 음명수를 사살한 그들은 겨우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이후 정상에서 공간의 균열을 기다리는 동안 두 여인이 의자매를 맺어 서로 언니 동생 하는 사이가 되었다.

    한립은 조금 의외라 생각했지만 말이다.

    정상에서 며칠이 지나고 드디어 허공에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동시에 외부의 영기가 대량으로 쏟아져 들어와 법력을 회복한 이들은 흥분 속에 각자의 비행술법을 펼쳐 날아올랐다.

    하지만 균열이 커질수록 음명의 땅에서 발생하는 흡입력도 커져 모두가 꼼짝하지 못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빨려 들어갈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다행히 한립이 재빨리 풍뢰시를 펼쳐 두 여인을 낚아채 미친 듯이 날아오른 덕에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그러니 두 여인이 한립에게 고마운 마음을 품는 것은 당연했다.

    이미 얼굴의 홍조가 가신 자령이 차분히 주변을 살피며 이마를 찌푸렸다.

    “이상한 곳이네요. 너무 조용해요.”

    “자령 언니 말대로 뭔가 이상해요. 어떻게 바람조차 안 불 수 있죠?”

    별다른 대답 없이 한립이 의식을 퍼뜨려 주변을 탐색했다. 잠시 후 그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어렸다.

    “……!”

    역시 의식을 퍼뜨려 주변을 살피던 자령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떤 곳이길래 이렇게 하나 같이 흉악할까요?  거기다 요수 종류도 아닌 듯한데요.”

    “흠…….”

    길게 한숨을 내쉬며 한립이 손끝을 튕기니 수 장 길이의 푸른 검이 출현해 발밑의 해수면을 향해 파고들었다.

    그러자 잠시 후 이상한 모양의 어류의 시체가 해수면 위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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