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5
325화. 폭풍산
갈기갈기 찢기고 피에 젖은 옷가지를 내려다보며 한립이 의외라는 듯 되물었다.
“이게 정말 소저의 오라비의 것이란 말이오?”
막 창고에 들어서자마자 매응이 구석에 떨어진 오라비의 유품을 찾고는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 이미 두 눈이 붉게 물든 그녀가 조금 울먹이며 중얼거렸다.
“어찌 못 알아보겠어요. 제가 직접 만들어준 옷이고, 이 저물대에 새겨진 표식도 저희 오누이만의 것인걸요.”
딱히 위로할 말이 없어 그저 가볍게 여인의 어깨를 다독여준 그가 조용히 석문을 밀고 나왔다. 이런 상황에서는 혼자 있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역시 그가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인의 흐느끼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가볍게 탄식한 한립이 아직도 낯선 하늘을 바라보며 침묵했다.
일각쯤 지나고서야 매응이 두 눈이 충혈 된 채 건물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녀가 냉정을 되찾고 담담히 입을 열었다.
“이제 가요. 어차피 오라비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면 다른 촌락을 찾을 필요도 없겠죠. 바로 폭풍산으로 가면 되겠어요.”
“폭풍산을 가긴 해야겠으나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소. 바로 음명수의 수정을 좀 모으는 것이요.”
“수정을 모아다 어디에 쓰려고요? 또 음명수는 그리 만만하지 않을 텐데요.”
“수집을 하고자 할 때는 다 생각해 둔 용도가 있지 않겠소? 아마 천하에 이곳을 제외하면 찾을 길이 없을 테니 기회가 왔을 때 충분히 취해야 할 것이오. 또한 음명수를 처리하는 것은 이 녀석이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할 것 없소.”
한립이 소매를 털어내니 녹색 빛이 떨어져 내렸다. 갑자기 나타난 어린 원숭이를 보며 매응은 정말 어리둥절했다.
“이 녀석이요?”
“그렇소.”
지금까지는 사람을 찾는 일이 우선이어서 일부러 안전한 길만을 택해 걸어왔다. 그러니 가끔 마주치는 저계 괴수를 소검으로 죽여도 수정을 얻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확실하진 않지만 음명수의 효용을 짐작하고 있는 한립으로서는 아쉬운 일이었다.
그는 매응와 제혼을 데리고 몸을 돌렸다.
홍토촌에서 하루 밤을 쉬고 내일 아침 일찍 강한 음명수들이 모이는 곳을 찾아 제혼의 위력을 시험할 계획이었다.
* * *
키가 여섯 장 되는 괴수가 유유자적하게 분지 지형 내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
돌연 그의 귀에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괴수가 흉악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자 십여 장 밖에 겨우 한 자나 될 법한 어린 원숭이가 나타난 것이다.
어린 원숭이의 두 눈이 흥분으로 반짝이며 거대한 괴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크흥?”
거대한 괴수가 원숭이를 향해 맹렬히 달려들기는 커녕 기괴한 신음을 흘리며 두려운 낯으로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다만 괴수가 움직이기도 전에 전광석화처럼 노란 빛이 쏟아져 그것을 감싸 버렸지만 말이다.
“크하하항!”
경천동지할 괴수의 비명이 울렸고 노란 빛에 빨려 나온 검은 기운이 제혼의 커다란 콧구멍 속으로 사라졌다.
작은 원숭이는 입을 오물거리며 만족스럽게 볼록 튀어나온 배를 두드리는 것이 아주 맛있는 식사를 마친 듯했다.
그때 멀리서 평안한 얼굴의 한립과 여인이 걸어 나왔다. 매응은 방금 벌어진 일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의 초롱초롱한 눈에 말라비틀어진 괴수의 시체가 들어오자 어리고 작은 원숭이가 전해 듣기만 했던 어떤 흉악한 영수임을 깨달았다. 괴수에게 다가간 한립이 소매 속에서 은빛이 찬란한 단도를 꺼냈다.
소리 없이 움직이는 단도의 칼날 아래 괴수의 머리가 수박처럼 반 토막 나더니 엄지손가락만 한 녹색 수정이 굴러 떨어졌다.
그제야 옅은 미소를 보이며 한립이 허리를 굽혔다.
“서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몇 마리가 더 있으니 한 번에 처리 합시다.”
폭풍산은 음명의 땅 동북쪽에 하늘을 뚫을 듯 솟아 있는 거산으로 산허리 중간에 운무가 덮여 있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 산은 광이 나는 검은 암석으로 이루어져 풀 한 포기 자라지 않았고 들어서자마자 불어 닥치는 음풍에 즉시 검은 고드름이 되어 쓰러질 판이었다.
이런 극악한 환경이 산의 주변의 음기를 더욱 끌어 모았는지 하늘 위의 뇌전은 쉼 없이 번뜩였고 살을 에이는 한기의 바람은 먼지바람을 일으켜 기괴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이런 음명의 기운이 가득한 땅이 바로 강력한 요수들의 서식지였다. 그래서 항상 흉악하기 그지없는 음명수들이 출몰하곤 했다.
체구가 큰 괴수 한 마리가 땅에 엎어져 은빛 속에서 급속히 말라비틀어져 갔다. 그리고 그렇게 빼앗긴 검은 기운은 다시 은빛에 휩싸여 어딘가로 날아갔다.
이어 열 장은 될 법한 은색의 거대 원숭이가 흉악한 얼굴을 드러냈는데 그 어깨 위에 한립과 매응이 앉아있었다.
음명수의 시체를 내려다보던 한립이 가볍게 뛰어내렸다. 이어 서늘한 빛이 번뜩이며 또 다시 괴수의 머리가 잘려 나갔다.
그러나 아무 소득도 없었다. 그의 얼굴에 조금 실망한 기색이 스쳤으나 그마저도 금방 사라졌다. 이미 백여 개가 넘는 음명석을 모은 것이다.
저계 음명수 무리 중에도 수정이 있으리란 것을 알지만 하나하나 처리할 시간이 없었다. 다음 번 균열이 시작되기 전에 폭풍산에 올라야 했다.
매응 역시 원숭이의 어깨에서 뛰어내리자 영수가 몸에서 빛을 뿜으며 한 자 크기에 작고 귀여운 모습으로 돌아왔다. 털의 빛깔이 은백색으로 변했을 뿐 이전의 제혼과 똑같은 생김새였다.
몸을 돌려 제혼수의 변화를 바라보던 한립이 웃음을 흘렸다.
단시일 내에 수많은 음명수들의 혼백을 잡아먹고는 돌연 몸을 키우는 능력이 생겨나고 털의 빛깔도 변한 것이다.
원요가 그에게 준 서책에 따르면 진정한 제혼수는 이런 변화 능력이 없을 뿐 아니라 등급이 높아지면 털의 빛깔도 칠흑 같은 검은색이 되어야 옳았다.
하지만 원래부터도 완성품이 아닌 제혼이었기에 완전히 제련을 할 수 없었고 음명의 땅에서 자라는 음명수의 혼백 역시 특이해 이런 이상한 결과가 나온 듯 했다.
이런 진화가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지 또 일반적인 제혼수보다 강할지 약할지는 모르나 그저 그 사실을 즐기고 있는 중이었다.
다시 줄어든 몸을 이끌고 은빛을 번뜩이며 한립의 소매 속으로 돌아온 아기 원숭이가 쿨쿨 잠에 빠져들었다. 그 모습에 미소 짓던 한립이 멀리 보이는 폭풍산을 바라보며 신중한 기색을 드러냈다.
폭풍산 인근의 강력한 음명수는 남김없이 처리해 방금 말라비틀어진 것이 마지막이었다. 이제 산을 오를 일만 남은 것이다.
“이번 균열을 놓치면 몇 개월을 더 기다려야 할 테니 이제 출발하겠소.”
“그래요. 얼마나 지속될지는 모르나 현지인들이 파악한 규칙에 따르면 반 개월 후 균열을 놓치면 반년은 더 허비할 테니 어서 가요.”
얼른 동의하는 매응을 보며 한립이 큰 보폭으로 거산으로 향했다. 일각 정도가 흐르자 두 사람은 산 아래에 도착할 수 있었다.
멀리서 볼 때도 남다르긴 했으나 가까이서 보니 정말 불가사의한 모습이었다. 작은 언덕조차 없이 검은 산만이 어두커니 솟아올라 있었다.
한립은 조급해 하지 않고 천천히 비교적 오르기 쉬운 곳을 탐색해 걸음을 옮겼다. 얼마 후 두 사람이 작은 점처럼 변해 점점 더 높은 곳으로 사라졌다.
비교적 낮은 고도의 천여 장 정도는 체력을 좀 소모했을 뿐 오르기 어렵지 않았으나 이후로는 뼈가 시린 음풍이 거세져 한걸음을 내딛기가 힘들어졌다.
이미 여러 벌의 불 속성 요수 가죽으로 옷을 덧대 입었으나 여전히 살이 아리고 얼굴이 창백해지는 것을 막을 길이 없었다.
범인이었다면 벌써 얼어 죽었을 것이다. 매응을 데리고 음풍 속을 걷던 한립이 미간을 좁히며 멈추었다.
그가 신중한 얼굴로 조금 고민하더니 품에서 주먹만 한 하얀 구슬을 꺼냈다. 그랬더니 은은한 빛이 번지며 두 사람을 감싸는데 미친 듯이 불던 바람이 그 빛에 닿으면 위력이 크게 줄어들었다.
보기 드문 바람을 막는 기능을 가진 피풍주(避風珠) 덕에 여전히 춥기는 했으나 근근이 버틸만했다.
두 사람은 다시 천천히 앞으로 향했다. 한참을 더 걸어가자 이제는 곳곳이 다 얼어붙어 발밑이 미끄러워 움직임이 더욱 조심스러워졌다.
두 사람이 숨을 내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새어 나왔고 호흡마저 점점 곤란해 졌다.
힘든 한걸음 한걸음을 쉼 없이 디디자 수정처럼 완전히 얼어붙은 강에 도착했다. 산세는 더욱 험악해져 조금만 발을 헛디디면 절벽 아래로 떨어질 기세였다.
한립이 한숨을 내쉬며 이미 안색이 창백해진 매응에게 휴식을 제안했다.
“저 암석 아래에서 잠깐 쉬었다 가겠소. 기력을 조금 회복한 뒤 다시 움직입시다.”
매응이 그 말에 간신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가리킨 곳에는 거대한 암석이 바람을 막아주어 쉬기에 적합해 보였다.
* * *
이틀 후 폭풍산 중간의 짙은 안개 속으로 한립과 매응이 들어서고 있었다.
두 사람은 긴장한 얼굴로 각자의 손목에 푸른 빛이 나는 작은 구슬을 매달고 있었다. 푸른 빛은 두 사람을 감싸 안개가 용솟음쳐 그들을 덮치려 할 때마다 빛을 뿜어 막아주었다.
회색 안개가 힘을 쓰지 못하는 모습에 매응이 조금 긴장을 풀었다.
“한 형의 파라주(婆羅珠)가 아니었다면 음풍을 통과하고도 이 안개에서 물러서야 했을 거예요.”
웃음을 띠며 답하려던 한립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그 모습에 움찔한 매응 역시 즉시 입을 다물었다.
“조심 하시오. 귀무 속에 누군가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으니.”
동시에 푸른 빛이 번지며 소매 속에서 나타난 소검을 단단히 쥐었다. 한립이 말없이 한 방향을 주시하자 매응으로서는 두어 걸음 물러나 같은 방향을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매응도 걸음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고운 얼굴의 여인이 불안한 눈빛으로 한립을 바라보자 담담한 얼굴의 한립이 그런 그녀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
당황한 매응은 먼저 붉어진 고개를 숙이며 그의 시선을 피했는데 가슴이 뛰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이제 걸음 소리와 함께 가쁘게 들이쉬는 숨소리까지 귓가에 들려왔다.
조금 의외였던 것은 기척으로 보아 한 사람이 아닌 둘이 앞뒤로 걸어오는 듯했다. 한립의 미간이 얼핏 좁혀지며 흉흉한 기색이 어리기 시작했다.
농염한 안개를 헤치고 나타난 젊은 청년은 머리에 관을 쓰고 있었고 사내의 허리띠에서는 은은하게 빛이 나오고 있었다.
그가 한립을 발견하고는 안색이 변해 소리쳤다.
“너는!”
바로 육도의 후계자인 온천인이 경악한 얼굴로 한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나다. 알았으면 이제 가거라!”
ㅤㅅㅙㄱ.
동시에 무표정한 한립의 손에서 푸른 빛이 번뜩이며 작은 검이 쏘아져 나갔다.
탕!
검이 마치 철판에 부딪힌 듯한 소리를 내며 가볍게 튕겨 나가자 찢겨 나간 의복 안으로 은은히 녹색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내갑(內甲)? ’
그러나 공격이 실패로 돌아간 것도 개의치 않고 한립은 다른 손에서 푸른 빛을 내뿜었다. 이번에는 정확히 상대의 목을 노린 것이다.
“……읏!”
하지만 온천인이 가만히 서서 당해줄 리 없었다. 그의 신영이 번뜩이더니 푸른 빛을 피하고는 두 다리에 힘을 주어 뒤쪽의 안개 속으로 피했다.
꽤나 힘 있는 움직임이었다.
또 한 번 공격이 실패로 돌아갔는데도 서늘히 온천인을 바라보는 한립의 얼굴은 그리 어두워 보이지 않았다.
서둘러 물러서면서도 한립의 표정을 살피던 온천인이 슬쩍 올라간 상대의 입 꼬리를 보고는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했다. 그가 절박하게 몸을 비틀었지만 이미 날카로운 무언가가 목 뒤를 뚫고 나온 것이다.
작은 검의 손잡이에는 반투명한 요수의 힘줄이 팽팽하게 걸려 있었다. 결국 시체가 된 온천인이 웅덩이 위에 엎어졌다.
아직도 두 눈을 부릅뜨고 있는 것이 도저히 이런 곳에서 죽는 것이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한립이 손목을 튕기자 힘줄에 묶인 검이 고분고분 그의 소매 속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