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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323화 (80/2,000)
  • # 323

    323화. 손님이 찾아들다

    주위를 살펴 아무도 없자 한립이 즉시 영수대 속에서 삼색 서금충 한 마리를 풀어 놓았다. 그가 간신히 마지막 의식을 빌어 명을 내리자 딱정벌레 한 마리가 날개를 파닥거리며 건물 안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가 막 모퉁이를 돌아 건물에서 완전히 멀어 졌을 때 돌연 봉 가의 처절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일단 봉 가와 원수를 졌으니 법력과 의식이 회복된 틈에 깨끗이 처리를 해두는 편이 좋았다.

    그가 다시 거처로 돌아오기도 전에 미량의 법력은 완전히 사라졌고 동시에 의식 역시 통제할 수 없었다.

    “…….”

    아쉬운 마음에 고개를 저으며 방으로 들어간 그의 눈에 잠들어 있는 매응의 모습이 들어왔다.

    여인과의 입맞춤이 생각나며 몸이 조금 뜨거워졌지만 추운 듯 몸을 웅크리는 모습에 그냥 요수 가죽을 가지고 와 덮어 주었다.

    매응이 잠결에 요수 가죽을 말고 돌아눕는 것이 꽤나 깊이 잠든 모양이었다. 한립은 그 모습에 웃음이 났다.

    아무리 일반인과 다른 수도자의 몸이라 해도 법력을 잃은 여인이 견디기에는 피곤한 하루가 분명했다. 아마 한립이 돌아오기도 전에 잠든 것도 피곤을 이기지 못해 그리된 것일 터였다.

    * *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매응이 점차 잠에서 깨려는 기미가 보이자 눈을 뜨기도 전에 청년의 차분한 음성이 들려왔다.

    “준비해야 할 것이 있으니 잠에서 깨었으면 이만 일어나시오.”

    그 말에 매응이 민망한 기색으로 몸을 일으키니 자동으로 요수 가죽이 미끄러져 내렸다.

    한립은 의자에 앉아 꽤나 큼지막한 요수 가죽을 정리하다가 그런 그녀를 보며 미소 지었다.

    “매 소저가 바느질에 소질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불 속성을 띠는 고계 요수의 가죽이니 옷으로 만들어 입을 수 있다면 음풍에서 버티는데 도움이 될 게요.”

    “바늘과 실만 있다면 한 번 해볼게요.”

    한립이 어제 입을 맞춘 일을 전혀 언급하지 않자 그녀의 어색한 얼굴이 한결 편해 졌지만 알게 모르게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그가 남색의 기다란 침을 그녀에게 건넸다.

    “가죽이 두꺼워 법기를 이용해야 겨우 뚫을 수 있을 것이오. 거기에 요수의 힘줄을 실 삼아 단단하게 연결하기만 하면 바람을 막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것 같소.”

    바늘은 최상급 법기 중 하나라 더없이 날카로웠다. 물론 그의 손에 당한 다른 선사에게서 얻은 물건이었는데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가 필요할 것 같아 꺼내둔 참이었다.

    “최선을 다해 볼게요.”

    그가 고개를 끄덕이려는데 문 밖에서 노인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한 선사 계십니까?”

    “누구십니까?”

    물어 놓고 생각해 보니 목소리가 낯익은 것이 뜻밖에도 오룡해 출신 수도자라 소개한 노인이었다.

    “허허, 어제 탑 위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던 이입니다.”

    상대가 이리 찾아 왔는데 문전박대 할 수야 없었다. 성큼성큼 문으로 다가가며 한립은 상대의 방문 의도가 무엇일까 생각했다.

    문 밖에는 역시 노인이 다른 두 명의 노인과 함께 서있었는데 한 명은 얼굴이 붉었고 다른 한 명은 허리가 굽고 음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한립은 그들이 어찌 찾아 왔는지 묻지도 않고 일단 안으로 청했다.

    “세분 모두 일단 안으로 드시지요!”

    세 노인이 매응을 보더니 조금 놀란 기색을 보이다 곧 담담한 얼굴로 예를 취했다.

    “매 선사시군요!”

    매응 또한 함께 예를 올리고는 한립 옆에 서서 말을 아끼니 한 눈에 보아도 그의 뜻을 따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세 노인이 의자에 앉자 그제야 한립이 낯선 두 사람을 보며 물었다.

    “두 분은…….”

    “이 두 분은 저처럼 대진국에서 함께 온 선사들로 한 분은 천부문(天符門)의 운 선사시고, 다른 한번은 사해진원(四海眞院)의 금 선사십니다.”

    두 노인이 웃는 낯으로 한립을 살펴보았다.

    “세 분께서 함께 찾아주시다니 중요한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그 말에 수염을 길게 기른 백발의 노인이 먼저 헛기침을 하고는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아실지 모르겠으나 본 촌락에서 무공 교습을 맡고 있던 봉 장로가 어제 갑자기 괴이한 곤충에 의해 산채로 뜯어 먹혀 죽었습니다. 듣기로는 깊이 잠들어 있다가 화를 당해 아주 처참하게 죽었다더군요.”

    “아,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어떤 기이한 곤충인지 무서운 일입니다.”

    한립이 전혀 감정을 드러내지 않자 노인들은 그가 관련된 일인지 아닌지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어떤 곤충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봉 장로는 이미 숨을 거두었고 사건을 목격한 몇몇 촌민들이 말하기를 상처 속에서 날벌레 한 마리가 날아올라 사라졌는데 피범벅을 한 탓에 분명히 보지 못했다더군요. 여러 사람이 병기를 가지고 공격했지만 단단하기 그지없어 그대로 놓쳤다 합니다.”

    백발노인이 설명을 하는 동안에도 다른 두 노인의 눈은 한립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한립이 차분한 얼굴로 등을 의자에 기대며 유유히 물었다.

    “설마 세 분께서는 그 일이 저와 관련 있다 여기셔서 찾아오신 것입니까?”

    “그럴 리가요! 저희는 절대 한 선사가 그런 일을 저질렀다 여기지 않습니다. 게다가 정말 선사가 그리했다 한들 저희 입장에서는 기뻐할 일이고요. 봉 가 놈은 알량한 무공을 믿고 수도자들을 업신여기던 터라 아주 잘 죽었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웃음 짓는 노인을 가만히 바라보던 한립은 그저 듣고만 있을 뿐 바로 무어라 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백발노인이 눈을 굴리며 그를 떠보려 했다.

    “그런데 어제 봉 장로가 선사의 거처를 방문하고는 아주 의기소침하여 돌아갔다고 하던데요. 시신을 검사할 때에도 이미 팔 한쪽이 잘려 있었고요. 한 형은 법력을 잃고도 사용할 수 있는 다른 강력한 도구를 지니고 있나 봅니다.”

    상대방의 말에 한립의 두 눈썹이 치솟았다.

    노인들도 촌락에서 어느 정도 세력을 지니고 있는지 봉 가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저를 찾아 주신 목적을 말씀해 주시지요. 돌려 말하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성정이라서요.”

    “그것이…….”

    그가 이리 직설적으로 나오자 노인들이 서로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한립은 그들에게 오래 시간을 낭비할 마음이 없었다.

    “하실 말씀이 없으시다면 이만 돌아가 주시지요.”

    그 말에 허리가 굽은 음산한 노인이 갑자기 말을 꺼냈다.

    “한 선사가 우리와 함께 이 촌락을 통치할 마음이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렇게 묻기는 했으나 상대의 의도는 뻔했다. 곧이어 백발노인이 거리낌 없이 부연 설명을 시작했다.

    “같은 수도자끼리니 편하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보셔서 아시겠지만 대장로가 우리의 지지를 받아 실권을 차지한 것을 제외하면 이곳에서는 다른 수도자들의 지위가 범인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똑같이 식량을 배분 받고 심지어 음명수를 죽이는 임무에까지 뽑혀 나가야 하지요. 거기다 술법을 펼치기 위해 필요한 음명수의 수정 역시 범인들의 수중에 있습니다.

    마치 무슨 도적을 대비하듯이 우리를 경계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수모를 당하며 사느니 아예 힘을 모아 촌락을 장악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권력을 잡고 싶으시다고요.”

    “그렇습니다. 수도자가 범인들의 통치를 받는다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  이곳에서는 장로라는 자리가 전부지만 그것이라도 우리가 차지해야 합니다.

    축기기 선사인 내가 겨우 범인들의 명을 따라야 하다니 치가 떨립니다. 이전에는 수도자들의 수가 너무 부족해 경거망동하지 못했으나 이제 두 분이 합류하였으니 거사를 치를 적기라 봅니다.”

    한립의 눈길이 세 노인을 훑었다.

    “그런 것에는 전혀 관심 없으니 이만 돌아가 주시지요. 지금 하신 말씀은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이 억지로나마 미소를 유지하며 그를 설득해보려 했다.

    “선사는 누군가의 명을 받는 삶이 괜찮은 것입니까?  일단 촌락의 장로가 되면 아무리 극악한 환경에서라도 편히 살 수 있습니다.”

    “무언가 착각하시는 듯한데 저희 둘은 이곳에 남는다 말씀 드린 적이 없습니다. 이틀이 지나면 떠날 것이니 아무리 좋은 조건을 제시한다 해도 함께할 도리가 없는 것이지요.”

    “이곳이 마음에 차지 않아 다른 촌락을 둘러볼 생각인 겝니까?  모르시나 본데 이곳이 인간 촌락 중에서는 손에 꼽히는 규모라 다른 곳의 상황은 더욱 좋지 않습니다.”

    한립이 담담하게 웃으며 그저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등이 굽은 노인이 그의 뜻을 알아챘다.

    “설마 폭풍산을 등반하려는…….”

    “어찌 그러십니까?  저희가 이곳에 오래 머물고 싶지 않아하는 것이 이상하십니까?”

    한립이 웃음기를 거두고 묻자 이번에는 얼굴이 불그스름한 노인이 난색을 표했다.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폭풍산이 어떤 곳인지 알고 하는 이야기인지 걱정이 되어 그러합니다.”

    “비록 자세히는 모르나 대장로에게 충분한 정보를 얻었다 생각합니다.”

    등이 굽은 노인이 혀를 찼다.

    “대장로는 그저 폭풍산에 대해 누군가에게 들어 알 뿐 얼마나 위험한지 결코 모를 것입니다. 정말 폭풍산을 체험한 저나 운 선사만 하겠습니까?

    법력을 잃은 이가 결코 통과할 수 없는 관문입니다. 다른 것은 제쳐두더라도 폭풍산을 배회하는 음명수는 이곳에서 가장 강력한 것들이라 일단 발각되면 죽은 목숨이고 운이 좋아 음명수들을 마주치지 않는다 해도 음풍과 환각을 불러일으키는 안개 또한 치명적입니다.

    게다가 정상에 이르면 공간의 틈이 열렸을 때 탈출할 수 있다는 이야기도 그저 전해 내려오는 풍문일 뿐 누구 하나 증명한 이가 없습니다.”

    이제야 한립의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의 시작이었다.

    “두 분께서 직접 폭풍산에 올라 보셨다고요?  그때의 일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한 선사가 묻지 않아도 말해주려던 참이었습니다. 나와 금 선사 역시 막 이곳에 도착했을 때는 이곳에서 늙어 죽을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거의 반년을 준비한 끝에 촌락의 다른 세 선사와 무리를 이루어 폭풍산으로 향했지요.

    그 결과 한 명은 산에 도달하기도 전에 음명수에게 걸려 그곳에 묻혔고 어렵사리 폭풍산에 이른 무리 중 나머지 둘도 4분의 1도 오르지 못해 음풍에 얼어 죽었습니다.

    나와 금 선사는 몸에 화염석(火焰石)을 지녔기에 간신히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지만 고도가 높아질수록 바람도 세차져서 결국에는 돌풍을 이기지 못하고 걸음을 돌렸습니다.

    운이 좋아 목숨을 잃지는 않았지만 촌락에 돌아와서도 뼈 속을 스며드는 음풍의 기운에 몇 달을 앓아야 했지요. 그 후 폭풍산을 오르겠다는 마음을 접게 되었습니다.”

    “무서운 곳이군요.”

    그가 반응을 보이자 백발노인이 슬쩍 다시 원래의 화제로 돌아왔다.

    “그냥 무섭다는 말로 표현할 곳이 아닙니다. 두 분도 폭풍산에 대해서는 잊고 지내는 것이 좋습니다. 아무리 바깥세상이 좋다 한들 살아 있어야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게 아닙니까?  게다가 두 분은 아직 살날이 창창하니 우리 같은 노인들이 물러나면 촌락 전부를 장악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유혹에 흔들리진 않았지만 그들에게 원한을 사고 싶지도 않았기에 한립의 말투가 한결 온화해졌다

    “더는 권하지 말아주십시오. 저는 직접 도전해 보지 않고서는 포기할 생각이 없습니다. 만일 정말 폭풍산에 오르는 것을 실패한다면 당연히 세 분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고려해 보겠습니다.”

    그 말에 세 노인이 또 무어라 말을 이었지만 한립의 결심을 바꿀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이번에는 목표를 매응으로 바꾸었으나 그녀가 단호히 한 형과 함께할 것이라 선언하니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일단 한립이 완전히 그들의 제안을 거절한 것도 아니었고 폭풍산 등반이 실패하면 다시 기회가 있기에 그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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