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2
322화. 통령의 기운
매응은 한립의 말을 전혀 믿지 않는다는 듯 두 눈이 붉어졌다.
“저를 속이려 하시는 것입니까? 장로의 말을 들었을 때부터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다는 자신이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설마 소녀가 거치적거릴까 봐 홀로 가시려는 것입니까?”
그녀의 말에 한립은 그저 얼굴을 찌푸릴 뿐 말이 없었다. 그러나 잠시 후 그가 곧 다시 평안한 얼굴로 답했다.
“우리가 함께 이곳에 오게 되었으니 매 소저에게 솔직히 말하겠소. 폭풍산이란 곳에 음풍이 불고 환각 안개가 있으며 비행 음풍수들이 서식한다 해도 등반에 성공할 자신이 어느 정도 있는 것이 사실이오.
하지만 그것은 나홀로 움직일 때의 이야기요. 만일 누군가를 데려간다면 안전하게 보호할 자신은 없소. 매 소저는 젊으니 이곳에 머물며 이후 또 다른 기회가 생기기를 기다리는 것이 나을 것이오.”
매응은 한립의 말에 안색이 창백해지더니 붉은 입술을 앙 다물고 한 동안 답이 없었다. 한립 역시 그런 그녀를 보며 작게 탄식하고는 다시 두 눈을 감아버렸다.
사실 능력만 된다면 그녀를 돕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정말 자신이 어찌 될지 모르는 판에 모르는 여인을 위해 위험을 감수할 성품은 아니었다.
어차피 음명의 땅에 남는다 해도 그녀가 죽는 것도 아니고 그저 수도자로서 삶을 살지 못할 뿐이었다.
방 안에는 침묵이 내려앉았고 시간이 흘러 한립이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매응의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그럼 약간의 법력이라도 회복할 방법이 있다면 저를 데리고 나가 주실 수 있는지요?”
“뭐라 하셨소?”
즉시 한립의 눈이 뜨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침상 위에서 무릎을 감싸 안고 있었다.
“한 형의 법력을 단 시간 동안 회복시켜줄 수 있다는 말입니다. 비록 단 한번뿐이지만 이곳을 빠져나가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만일 거래를 원하신다면 저를 함께 데리고 나가주시는 것 외에 조건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매응은 말을 하면서도 어딘지 불편해보였다.
“매 소저의 말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원영기 선사도 이곳에서는 법력을 회복하지 못했다 들었는데 어찌 그것이 가능하단 말이오.”
의심을 하고 있긴 했으나 한립도 조금 기대감을 갖고 있었다. 만일 정말 법력을 회복한다면 본래 오성 정도의 탈출 확률이 팔, 구성으로 올라갈 것이다.
아무리 적은 양의 법력이라도 영수대나 저물대를 열기에는 충분했다. 저물대 안에는 영력으로 발동하지 않아도 효능을 발휘하는 보물들이 있었으니 당연히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영수대 안의 서금충이나 혈옥지주는 의식을 이용해 통제를 해야 해서 적과 싸우게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으나 제혼은 명혼주를 몸에 품고 있어 어느 정도는 명을 따르게 할 수 있었다.
음명수가 혼귀는 아니지만 그래도 음명의 힘이 응결되어 탄생한 요수라면 분명 제혼의 상대가 되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아무리 덩치가 크고 강력한 음명수라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여인이 잠시 주저하다가 말을 이었다.
“소녀 비록 천령근이나 이령근의 자질을 타고 나지는 못 했지만 통옥풍수(通玉風髓)의 몸을 지니고 있습니다. 아마 한 형께서도 이게 무엇을 뜻하는지 아시겠지요. 이런 체질을 타고난 이는 비술을 펼쳐 자신의 통령의 기운을 다른 이에게 불어 넣을 수 있습니다. 통령의 기운은 아무리 절령의 기운이라 해도 즉시 속박할 수 없을 테니 흩어지기 전 단시간 동안은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통옥풍수의 몸을 지녔다니!”
놀란 한립이 그녀를 훑어보았다. 매응의 얼굴이 점차 붉어졌지만 차분하게 말했다.
“그러합니다. 믿지 못하시겠다면 직접 살펴보시지요.”
“그럼 잠시 실례 하겠소.”
즉시 한립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다가갔다. 이런 중요한 일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했다. 곧바로 매응이 소매를 걷어 옥같이 새하얀 팔을 내보였고 거기에는 선홍색의 점이 찍혀 있었다.
한립이 보는 앞에서 새끼손가락을 깨문 여인이 그 위에 피를 떨어뜨리자 점이 사라지며 은색의 봉황 무늬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드러났다.
“정말 통옥풍수의 체질을 타고난 것이로군.”
”이제 믿어 주시는 것이지요?”
붉어진 얼굴로 재빨리 소매를 내린 매응을 보며 한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통옥풍수는 오직 여인에게서만 나타나는 체질이었다.
다른 특수 영근과 비교해 그리 특이한 일은 아니었지만 수도자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이 자질은 일단 축기에 성공하면 체내에 정순하기 그지없는 통령의 기운을 품었다. 이 기운은 세간에서 일곱 가지 정순한 영력 중 하나라 불리며 본인이 아닌 다른 사내에게 넘겨주었을 때 수행의 큰 진전을 돕게 된다.
물론 고계 수사에게 그리 큰 혜택은 아니었으나 웬만한 진귀한 단약보다는 훨씬 값진 보물이라 할 수 있었다.
다만 통령의 기운은 여인이 원할 때에만 사내에게 넘겨 줄 수 있고 강제로 흡수하거나 채취할 수는 없었다.
또한 통옥풍수의 체질을 타고난 여인은 일생동안 단 한 번 오직 혼인을 하지 않은 순결한 상태에서만 통령의 기운을 사내에게 넘겨 줄 수 있었다.
한립은 깊이 생각한 끝에 통령의 기운이라면 일순간이나마 영수대와 저물대를 열기에 충분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한립이 고개를 들어 고운 여인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매 소저의 조건을 들어 보지요.”
“간단합니다. 일단 제 오라버니를 찾은 이후 함께 이곳을 나가게 해주세요.”
한립은 잠시 고민을 해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거라면 조건부로 응할 수밖에 없겠소.”
“조건부로요?”
“나도 나름 사정이 있어 음명의 땅에 오래 머물 형편이 아니오. 그러니 3개월 동안은 최선을 다해 매 소저의 오라비를 찾는 것을 돕겠으나 기일이 지나면 즉시 이곳을 떠날 것이오.”
잠시 주저하던 매응이 한립이 더 이상 양보하지 않으리라 생각해 고개를 끄덕였다.
“3개월이면 충분하겠지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호방한 그녀의 수락에 한립이 미소를 지었다. 그런 그를 향해 매응이 다시 입을 열었다.
“선사를 오래 봐오진 못했으나 어떤 성품이신지 알겠습니다. 함부로 약속을 어길 분이 아니란 것을 믿으니 아무 때나 원하실 때에 통령의 기운을 넘겨드리겠습니다.”
한립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음명의 땅은 위험한 일이 빈번하니 한시라도 빨리 법력을 회복하는 것이 낫겠소. 일단 법력을 회복해 보물들을 지니게 되면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대응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오.”
그 말에 매응이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볼이 불그스름해졌다.
“통령의 기운은 법력이 있을 때에는 손바닥을 대는 정도로 간단히 넘겨 드릴 수 있지만 지금은…… 그저, 입을 맞대어 행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그녀는 아예 고개를 숙이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한립도 부끄러움을 타는 여인의 모습에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매응의 태도로 보아 한립이 이런 일이 능하지 않더라도 자신이 먼저 나서야 한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판단을 마친 그가 몸을 일으켜 단숨에 그녀 옆으로 다가가 앉았다.
매응이 무의식중에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허리에 힘이 들어가기도 전에 한립이 그녀를 끌어당겼다. 여인은 한립과 얼굴을 마주하자 더욱 부끄러워 다시 고개를 숙였다.
한립이 한 손을 들어 그녀의 고운 뺨을 잡자 매응은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기분이었다. 먼저 그녀의 은은한 향을 들이 마신 한립이 천천히 고개를 숙여 부드러운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따뜻하고 달콤한 기분에 사로잡히는 순간이었다.
한 번도 다른 사내와 이런 접촉이 없었던 매응은 자기도 모르게 그를 밀어내려 했으나 이미 흥이 동한 한립의 손에 붙들려 빠져 나올 수 없었다.
점차 힘이 빠진 매응은 완전히 사내의 품에 안겨 어찌할 바를 몰라 통령의 기운을 넘겨주어야 한다는 사실조차 까먹고 있었다. 하지만 한립처럼 이성적인 인물이 순간의 분위기에 그런 중요한 사실을 잊을 리 없었다.
그의 입술이 잠시 떨어지며 여인의 귓가에 작게 웃음을 흘렸다.
“매 소저, 남녀 간의 일에 어두운 것은 알겠으나 통령의 기운을 넘기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즉시 매응이 깜짝 놀라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졌다.
다시 한립의 입술이 부드러운 것에 닿았을 때는 드디어 서늘한 무언가가 입 안을 통과해 몸으로 흡수되었다. 그는 즉시 침상에 자리를 잡고 가부좌를 한 뒤 그 기운을 받아들이는데 집중했다.
옆에 앉은 매응이 정신을 차리며 의복을 정돈하는 등 부산을 떨었으나 아직도 붉어진 얼굴은 제 빛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겨우 안정을 찾은 그녀는 한립이 앉아 있던 의자로 걸어가 자리를 잡은 뒤 복잡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운기조식을 하는 한립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흘러 눈을 뜬 그가 생각에 잠긴 그녀를 발견했다.
동시에 매응이 당황해 손발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자 한립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미소와 함께 손으로 저물대를 스쳤고 연달아 여러 물건들이 빛을 내며 한립의 옆에 쌓여갔다. 매응은 자신의 통령의 기운을 믿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정말 한립이 저물대를 열자 기쁨에 소리쳤다.
“법력이 돌아왔군요!”
“양이 적어 술법을 펼칠 정도는 아니지만 저물대를 여는 것은 가능하오.”
필요한 물건을 잔뜩 꺼낸 그는 품속에 넣어 두었던 바구니 고보 등을 다시 저물대에 잘 담아두었다. 눈을 빛내며 그를 바라보던 매응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한 형, 물어본다는 것을 깜빡하고 있었는데 축기기 선사가 맞지요?”
“당연히 아니오. 나는 결단기 선사요.”
“예?”
쌓여 가는 진귀한 보물에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직접 들으니 놀란 것이다. 그저 빙그레 웃은 한립이 이번에는 영수대로 시선을 옮겼다.
동시에 빛이 쏟아지며 작은 원숭이가 튀어나오니 바로 제혼이었다.
평소 나태하게만 보이던 영수가 이곳에서는 정신이 번쩍 들어서는 큰 코를 쉼 없이 킁킁거리며 흥분해 사방을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매응은 그것이 수도계에서 명성이 자자한 제혼수라는 것은 알아보지 못했기에 그저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낼 뿐이었다.
“매 소저, 법력을 회복한 김에 처리할 일이 있으니 이곳에서 잠시 기다리시오.”
“처리할 일이요?”
고운 눈이 깜박거렸다. 한립은 별 다른 설명 없이 쌓인 물건 중 몇 가지를 품에 품고는 바로 문을 열고 바깥을 살폈다.
이곳에 밤낮의 구분이 없다는 것은 알았으나 활동하는 이들이 극히 드문 것으로 보아 휴식을 취하는 시간인 듯 했다.
그가 어린 원숭이를 가리키자 영수가 펄쩍 뛰어올라 그의 소매 속으로 들어왔다. 마지막으로 매응에게 미소를 남긴 한립이 거침없이 밖으로 나갔다.
그는 아주 조심스런 움직임으로 남들의 이목을 피해 어느 큰 건물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사방을 살핀 그가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가더니 잠시 후 만족스런 얼굴로 걸어 나왔다.
침수라는 이곳 특유의 액체를 저물대 속에 있는 병에 가득 담아가지고 나왔기 때문이다. 다시 걸음을 옮기던 그가 독특한 양식의 건물 앞에서 다시 한 번 멈춰 섰다.
그의 기억대로라면 이곳은 바로 봉 장로의 거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