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1
321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빠른 걸음으로 낡은 창고로 향하던 한립은 촌민 몇 명과 마주쳤으나 그들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을 뿐 먼저 다가와 말을 걸지는 않았다. 곧 목적지에 당도했다.
다른 건물들처럼 새까만 돌로 지어진 오래된 건물을 바라보던 그가 살짝 돌문을 밀어보았으나 꿈쩍하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두 팔에 맹렬히 힘을 모으자 아주 천천히 돌문이 밀리기 시작했다.
기쁜 마음에 자세히 문을 관찰하니 다른 돌문에 비해 두 배나 되는 두께였다. 그의 몸이 번뜩이며 방 안으로 들어서려는데 탁하고 음기가 가득한 기운이 밀려들어 호흡을 멈추게 만들었다.
잠시 후 외부의 공기가 들어오고서야 가볍게 숨을 내쉰 한립이 차분히 건물 안을 둘러보았다.
허름한 내부는 크기가 비슷한 여러 비석들을 제외하면 방 한가운데 있는 초라한 돌 탁자가 전부였다. 그리고 그 탁자 위에도 서책이나 두루마리 등은 보이지 않았고 이미 영성을 잃고 암담해진 법기 몇 개만이 놓여있을 뿐이었다.
잠시 의아해하던 한립이 돌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실소했다.
음명의 땅에서 어떻게 종이나 두루마리를 찾을 수 있겠으며 또 옥으로 만든 서책도 영력과 의식을 사용하지 못하는 자신이 읽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탁자 위의 법기들은 주인이 저물대 안으로 넣기 전 함께 이곳으로 빨려 들어온 것들인 것이 분명했다. 일단 전체를 둘러본 그가 비석 중 하나로 다가가 내용을 살폈다.
그러나 잠시 비석을 살피던 그는 곧 흥미를 잃었다. 축기기 선사가 자신의 일생을 남긴 기록이었기에 때문이다.
건물 안의 비석은 총 스무 개가 넘었는데 여섯 번째 비석을 살필 무렵에야 그가 찾던 원영기 선사의 깨달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비석을 다 읽자 한립이 복잡한 심경을 드러내며 한숨을 내쉬었다.
“원영에 성공하는데 이렇게 금기 사항이 많았다니 이런 내용을 몰랐으면 구곡영삼이 있다 한들 성공률이 너무 낮겠어. 음명의 땅에 떨어진 것이 전화위복일 수도 있겠는걸…….”
그 비석에는 한 선사가 축기에서 결단에 이르고 다시 원영을 하기까지의 내용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었다. 원영기 선사의 깨달음을 미리 안 것만으로도 앞으로 그의 수련과 원영의 길이 한결 편해질 것이다.
한립은 완전히 내용을 습득할 때까지 비석을 여러 본 후에야 나머지 비석을 살폈다. 원래는 원하는 바를 찾았으니 이곳을 떠나려고 했으나 어차피 괴이한 곳에 떨어진 김에 좀 더 견문을 넓히려고 남은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이 별 도움이 안 되는 내용이었다. 사실 필생의 공법을 남겼다 한들 이미 현은경이 있는 그에게는 눈에 차지 않았다. 결국 마지막 비석을 남겨두게 되었는데 별 생각 없이 비석의 먼지를 털어내던 그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번에 드러난 글귀들은 아주 작은 문자들로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는데 두 개의 서로 다른 문자가 적혀 있었다. 하나는 그가 알아볼 수 있는 일반적인 고대 문자였고, 다른 하나는 일전에 몇 번이나 보았던 요족의 문자였다.
내용을 알면 알수록 한립은 흥분되는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놀랍게도 그것은 요족의 문자를 전수하는 일종의 교본이었으며 어찌나 상세하게 설명을 해주는지 요족 문자에 정통한 이가 남겨 놓은 기록이 분명했다.
비록 당장은 요족 문자를 읽는 것은 어렵겠지만 일단 교본 자체를 외워 천천히 습득해 나가다 보면 이후 요족 문자를 이해하게 될 날이 분명 올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요족 공법이 담긴 구리 동전이나 요수 가죽으로 만든 두루마리에 적힌 내용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도움이 안 되는 공법이라도 일단 요족 문자를 배워두면 훗날 큰 도움 될 수도 있었다.
어쨌든 정말 희귀한 능력이었다.
그는 뛰어난 기억력에 힘입어 비석 양면에 적힌 수많은 글자를 그대로 암기했다. 그리고는 탁자 위의 법기는 눈길도 주지 않고 바로 석실을 나서 촌락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건축 양식이 나타나면 자세히 살피기도 하며 가끔은 촌락 주민들에게 몇 마디를 걸기도 했다. 촌민들은 비교적 순박해서 낯선 사람에게 엄청 친절하다 할 수는 없어도 성의껏 질문에 답해 주었다.
한립으로서는 낯선 음명의 땅에 대한 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기회였다.
예를 들어 이곳에는 광산이 없어 몇몇 특수한 음명수의 뼈를 이용해 병기를 제작한다는 이야기 등이었다.
물론 음명수의 뼈를 바로 재료로 사용할 수는 없었고 특수한 액체에 담가 놓았다 이용해야 더욱 단단해 지고 음화(陰火)의 힘을 품어 살상력이 커진다는 것이었다.
이런 음화의 힘은 영구적인 것이 아니라 각자의 병기를 일정 시일마다 침수(沉水)에 담가 보충해야 한다고 했다.
유용한 정보를 얻으며 한립은 자신에게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던 하얀 얼굴의 중년인의 신분도 물어보았다.
들어보니 그도 몇 해 전 이곳으로 흘러 들어온 이로 봉 씨 성을 지닌 사내라 했다.
그가 바깥세상에서 무슨 일을 하던 자인지는 모르나 놀라운 무공 실력을 보유해 몇 번이나 강력한 음명수를 사살했고 촌락에 큰 공을 세워 젊은 나이에 장로로 활동하고 있었다. 또한 전문적으로 촌락 내 젊은이들의 무공 지도를 맡고 있어 나름 이곳에서 명망이 있는 이였다.
겨우 이런 이야기에 두려워할 한립은 아니었으나 성가신 인물이라는 인상은 지울 수 없었다. 촌락을 둘러볼 만큼 보고 필요한 정보도 수집한 그는 유유히 발걸음을 거처로 돌렸다.
막 문 앞에 이른 그의 귓가에 어떤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진심을 표한 것이니 답을 주시지요. 매 소저가 내게 시집을 오기만 한다면 먹을 걱정을 할 일은 절대 없을 것이며 번번이 위험한 임무를 맡아 촌락 밖을 떠돌지 않게 해주겠소.”
뜻밖에도 그는 봉 씨 성의 중년인이었다.
그 소리를 들은 한립은 잠시 어안이 벙벙해졌다가 곧 쓴웃음을 지었다. 드디어 자신에게 줄곧 불만을 표출하던 중년인의 목적을 알게 된 것이다. 그는 매응에게 반해 그녀와 함께 이곳에 온 자신을 견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곳 여인들은 못생기지는 않았으나 피부가 거칠고 까매 이목구비가 여간 아름답지 않고서는 그다지 미인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그러니 봉 장로라는 이가 매응을 보고 한 눈에 반한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매응이 원요나 자령처럼 경국지색이라 불릴 정도는 아니지만 꽤 고운 것도 사실이었다.
자신과 함께 있을 때는 드러나지 않던 의연한 목소리로 매응이 냉랭히 답했다.
“방금 하신 말씀은 못 들은 것으로 하지요. 수도자가 어찌 범인의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만 돌아가 주시지요.”
“흥! 매 소저께서 아직 상황 파악을 못 하시는군요. 이곳 음명의 땅에서 수도자는 그저 별 볼일 없는 허약한 자일 뿐입니다. 함께 온 그 사내가 이 자리에 있다 해도 내게 반항할 힘이 있긴 합니까? 서극해(西極海)를 종횡무진 하던 이 봉 모의 무공으로 당장 그를 죽인다 해도 촌락의 누구도 말릴 수 없을 거외다.”
봉 가 중년인이 그녀의 거절에 분노했는지 음산한 목소리로 협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매응은 범인이 자신을 위협하자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목소리가 다 떨려왔다.
“감히 나를 위협하는 것입니까?”
“못할 것이 또 무엇이지?”
“지금 뭐하는!”
어떤 상황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매응의 날카로운 고함이 들려왔다. 한립은 그저 코를 긁적이며 난감한 얼굴이 되었다. 비록 그녀와 상관없었지만 이곳에 함께온 수도자로서 저대로 두는 것은 너무 매정했다.
쿵!
그가 바로 방문을 발로 차고 안으로 들어섰다.
막 여인을 방구석으로 몰아넣고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던 중년인이 큰 소리에 즉시 몸을 돌렸다.
중년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창백한 얼굴의 매응이 한립이 들어 온 것을 보더니 즉시 몸을 빼 그의 뒤로 숨었다.
그의 출현에 그녀가 경고했다.
“한 선사 조심하세요!”
“걱정마시오.”
봉 장로가 냉랭히 한립을 바라보며 불쾌하게 물었다.
“언제 돌아온 거지? 내가 알아채지 못할 리 없을 텐데.”
내공이 깊이 십여 장 내의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까지 놓치지 않는다 자신하는 그로서는 소리 소문 없이 나타난 한립의 행동이 거슬렸던 것이다.
한립은 그의 물음에 답할 생각 없이 유유자적하게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보아하니 무공에 대단히 자신이 있나 본데 나를 상대로 그것을 뽐내려는 것은 멍청한 생각이오.”
“멍청해? 그런 말을 하는 것이 네가 멍청하다는 증거일 게다. 일단 네 놈의 팔을 잘라 벌을 주지!”
말을 마친 중년인이 몸을 튕겨 화살처럼 쏘아져 나왔고 오른손이 맹렬히 한립의 어깨를 잡아채려 했다. 당장이라도 한립의 어깨가 두 동강날 기세였다.
무표정하게 상대를 지켜보던 한립의 몸이 좌우로 번뜩이더니 세 개의 동일한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중년인은 흠칫 놀라더니 횡으로 반원을 그리며 그림자 모두를 낚아채려 했다. 하지만 손에 잡히는 것이 없었다.
“그렇다면…….”
당황한 중년인이 상황을 파악하려 할때 그의 등 뒤에서 푸른 검이 번뜩이며 소리 없이 목에 닿았다.
목 줄기에 닿은 서늘한 느낌에 그는 온 몸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한립의 감정 없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움직이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살인을 해서 촌락에서 쫓겨나는 상황은 바라지 않으나 굳이 그것을 원한다면 이루어 드릴 테니 말입니다.”
봉 가 중년인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목에 닿은 검의 날카로움으로 봐서 상대가 손가락을 조금만 움직여도 목을 그어버리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지금 그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립이 뒤에서 다가오는 기척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내 한 팔을 잘라간다 했으니 그 말에 보답하는 의미로 똑같이 해드리지요.”
한립은 상대의 반응을 기다리지 않고 번개 같은 손놀림으로 작은 검을 휘둘렀다.
스걱.
불가사의한 각도로 움직이는 칼날을 따라 중년인의 한 팔이 너무나도 간단하게 몸에서 분리되었다.
“윽!”
비범한 인내심을 지녔는지 중년인은 팔이 잘리는 극심한 고통에도 비명을 삼켰다. 이마에 굵은 땀방울이 맺혀 흘러내릴 뿐 고집스레 입을 벌리지 않은 것이다.
한립은 살기를 갈무리하며 몸을 돌려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기억 하시오. 다시 한 번 이곳에 드나들었다가는 팔이 아니라 목이 달아날 것이란 것을!”
라연보를 이용해 상대를 제압할 수 있다면 죽이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많은 이가 중년인이 이곳으로 오는 것을 보았기에 함부로 행동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후일 화근이 될 것을 알면서도 이 정도로 마무리 지은 것이다. 물론 기회가 된다면 쥐도 새도 모르게 중년인을 처리할 마음도 있었다.
“제가 보는 눈이 없었습니다. 이런 고수인 줄도 모르고 실례를 했습니다.”
봉 가 중년인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이 말을 남기더니 어깨를 지혈하며 방을 나가버렸다.
매응이 그가 떠나는 것을 보며 숨을 돌리더니 조금 붉어진 얼굴로 한립을 향해 예를 올렸다.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정말 저 자에게 마음이 없다면 앞으로는 피해 다니시오. 다만 매 소저가 이곳에 오래 머물 생각이라면 저 자의 말대로 하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닐 것이오.”
“그럴 리가요! 저의 오라버니와 함께 수도계에 발을 들여 놓은 순간부터 고계 수사가 아니면 혼인하지 않겠다 맹세했습니다. 그런데 어찌 영근도 없는 범인에게 마음을 주겠습니까?”
한립은 딱히 할 말이 없어 그저 의자에 앉아 두 눈을 감았다. 매응은 만면에 기대감을 품고 물어왔다.
“한 선사, 이곳에서 탈출할 방법이 정말 없겠습니까?”
천천히 눈을 뜬 한립이 그녀를 바라보며 차분히 입을 열었다.
“탈출할 방법은 매 소저도 들은 것으로 압니다. 나도 그 외에 다른 방법은 없소.”
매응은 한립의 말을 전혀 믿지 않는다는 듯 두 눈이 붉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