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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320화 (77/2,000)
  • # 320

    320화. 석부(石符)와 음명수의 수정

    한립이 길게 한숨을 토해내며 물었다.

    “줄곧 이곳이 음명의 땅이라 하시는데 혹시 죽은 자가 간다는 명계와 연관된 곳입니까?  또한 법력을 제한하는 금제는 어떻게 풀 수 있는지요?  그리고 이곳에서 나가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노인 역시 고개를 저으며 탄식했다.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이라, 그렇게 간단한 일이었다면 우리가 이곳에 남아 하루하루 목숨만 연명하며 살고 있겠습니까?  대부분이 이곳에서 태어나 살아가는 사람들이지만 우리와 같이 귀무에 휩쓸려 들어온 이들도 어쩔 수 없이 정을 붙이고 살 뿐 모두 외부에 가족들과 기반이 있습니다.”

    맞는 말이었기에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다만 이곳이 어딘지 혹은 명계와 관련되어 있는지는 누가 알겠습니까?  우리보다 훨씬 먼저 이곳에 도착한 선배들의 연구와 추측에 따르면 이곳이 인간계와 명계를 잇는 공간의 균열이라 이렇게 음기가 진하며 음명수를 탄생시킨다고 합니다.

    또 전해져오는 말에 따르면 이곳이 전설 속의 마수의 나후의 뱃속이라고 하더군요. 나후는 하늘의 태양과 달을 삼키고 공간을 가를 수 있다 하니 이곳저곳에서 불규칙하게 나타나는 귀무의 행태를 설명하기에 적합합니다. 나후라는 마수는 심해 속에서 숨어 살다가 한 번씩 먹이를 찾아 올라온다고 합니다.”

    노인의 가설에 한립의 안색이 변했다.

    “나후라는 마수라니 말도 안 됩니다. 어떻게 그런 요수가 존재할 수 있단 말입니까?”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저도 같은 반응이었습니다. 물론 황당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사실일 수도 있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겠네요.

    공간 균열이 있을 때마다 흡수되어 들어온 이들은 완전히 다른 해역 출신일 뿐 아니라 아예 알지도 못할 정도로 먼 거리에 거주하던 이들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저는 대진(大晋) 황조의 만남주(灣南州)에 위치한 작은 섬에서 왔는데 또 다른 이들은 오룡해(五龍海)나 천사(天沙) 대륙의 해안 아니면 난성해에서 왔다고 하더군요.”

    한립은 어안이 벙벙해 졌다. 천남 지방에 있을 때 초대형 제국인 대진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었던 것이다.

    “대진 황조라면 선사께서는 진국 출신이란 말입니까?”

    “설마 선사 역시 대진 황조에서 온 것입니까?”

    노인의 밝아진 눈을 보며 한립이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아니고 그저 초대형 국가인 진국의 명성을 들어 알고 있었을 뿐입니다. 다만 거리가 워낙 멀어 직접 가보지는 못했지요.”

    “그랬군요. 아쉽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노부도 다시 한 번 돌아가 보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고향 이야기가 나오니 노인의 얼굴에서 한결 혈색이 돌았다.

    “선사께서도 우리 대진에 가보셔야 진정한 수도계가 무엇인지 아실 수 있을 겁니다. 세계에 수많은 수도자들의 근거지가 있다지만 우리 대진과 비교하면 규모에서나 그 융성함에서 비할 바가 아닙니다. 수사들의 성지라 불리기에도 모자람이 없지요.”

    한립은 그저 코를 긁적이며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주었지만 점점 쓴웃음을 띨 수밖에 없었다.

    “허허! 이 노인네가 잠시 딴 길로 새었습니다. 하지만 방금 선사가 물은 법력을 회복할 방법은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음명의 땅에 머물며 법력을 회복해 원래의 능력을 발휘할 생각은 접으시는 게 좋습니다.

    이곳은 음명의 힘이나 우리가 절령의 기운이라 부르는 것을 제외하면 어떤 영력도 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절령의 기운은 깊은 곳에서 일정 기간마다 퍼져 나와 모두의 법력을 상실시키는데 이번에는 공간의 균열과 겹쳐져 절령의 기운이 바깥세상에까지 나간 듯 합니다.”

    명쾌한 노인의 설명에도 한립의 답답함은 깊어져 갔다.

    ‘운도 더럽게 없지, 하필 그냥 귀무도 아니고 절령의 기운을 품은 귀무를 만나 이곳에 떨어질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

    “그럼 나갈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다는 말입니까?  믿기지 않습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방법이 있는 것입니까?”

    옆에서 가만히 노인과 한립의 대화를 듣고 있던 매응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것이…….”

    “말씀해 주시기 어려운 일입니까?”

    잠시 매응과 한립의 얼굴을 살피며 눈을 가늘게 뜬 노인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숨길만한 이야기는 아니니 오해는 마세요. 촌락에 수도자가 늘면 기쁜 일이기는 하나 결코 두 분을 강제로 잡아둘 마음은 없으니까요. 다만 괜히 방법을 일러주어 아까운 목숨을 잃게 만들까 걱정이 되어 그러합니다.”

    잠시 멍해졌던 한립이 가볍게 미소 지었다.

    “걱정 마십시오. 제가 겉모습은 젊어 보이나 수도자로서 긴 삶을 살아왔습니다. 만일 불가능한 경우라면 아무렇게나 목숨을 버리지는 않을 것이니 방법을 말해 주시지요.”

    “그리 말씀 하시니 숨김 없이 이야기해 드리겠습니다…….”

    * * *

    한참 후 무표정하게 대청을 걸어 나온 한립이 문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겼다. 매응이 그 옆에서 붉은 입술을 깨물며 창백한 얼굴로 물어왔다.

    “한 형, 어찌 해야 할까요?  정말 폭풍산(暴風山)을 올라야 할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도전은 한번 해봐야겠소.”

    그때 누군가 두 사람에게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새까만 피부를 가진 열대여섯 살의 소년이었다.

    “새로 오신 분들이지요. 장로님의 명을 받아 제가 거처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새로 오신 분들은 처음 3일 간만 공짜로 식량이 제공되지만 이후에도 임무에 나가지 않으면 촌락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알겠소. 길을 안내해 주시오.”

    소년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촌락의 한쪽으로 둘을 안내했다. 잠시 후 소년은 검은 돌로 만든 건물 하나 앞에 섰다. 침상을 확인한 매응이 얼굴을 붉혔다.

    “침상이 하나인가요?”

    “남녀가 함께 지내면 한 침상을 사용하지 않습니까?”

    당황한 매응이 더욱 얼굴이 빨개져 무언가 말을 하려는데 한립이 차분히 입을 열었다.

    “우리는 따로 잘 것이니 침상을 하나 더 가져다주시오.”

    입을 비죽거린 소년은 약간 귀찮은 기색이었으나 알겠다고 말하고는 방을 나섰다.

    “그럼 쉬고 있으시오. 나는 촌락을 좀 둘러보고 올 테니.”

    한립의 말에 매응이 조금 지체하다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즉시 방을 나선 한립이 사방을 둘러보며 촌락 중앙의 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음명의 힘을 조종하는 법에 대해 꽤나 흥미가 생긴 것이다. 석탑의 사면에는 따로 지키는 사람이 없었기에 가까이 다가가기 어렵지 않았다.

    상당히 높았고 올라가는 계단의 경사도 험했지만 잠시 주위를 살피던 한립은 가볍게 오르기 시작했다.

    한립은 아무도 없는 탑의 꼭대기에서 기이하게 생긴 원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원판은 한 장 길이에 평평한 돌로 기괴한 문양과 주술이 새겨져 있었다. 지금은 아무도 술법을 펼치고 있지 않지만 그곳에서 여전히 보라색 운무가 서서히 뿜어져 나와 촌락 위의 보라색 구름과 하나가 되었다.

    진법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던 한립은 눈을 가늘게 뜨고 돌로 만든 원판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사께선 무언가 깨달음이 있으십니까?”

    “…….”

    속으로 꽤나 놀란 한립은 스스로를 책망했다. 누군가 바로 등 뒤에 다가설 때까지 알아채지 못하다니 위험한 상황이었다면 어쩔 뻔 했는가?

    하지만 완전히 그의 탓만은 아니었다.

    본래 의식을 통해 주위를 속속들이 파악했는데 이제와 신체의 감각기관으로 주변을 경계하는 것이 익숙할 리 없었던 것이다.

    무표정한 얼굴의 한립이 조심스레 몸을 돌렸다. 그러자 백발이 성성하고 주름이 가득한 노인이 그를 살피고 있었다.

    “당신도 수도자입니까?”

    “노부는 오룡해의 포환자라 합니다. 선사께서 새로 오신 선사 중 한분이겠군요.”

    ‘오룡해? ’

    즉시 대장로가 그런 지역을 언급했던 것이 떠올라 흥미가 생겼다. 한립은 온화하게 답했다.

    “포환자 선사셨군요. 저는 한 씨 성을 지닌 난성해의 산수입니다.”

    “난성해요?  이전에 난성해에서 온 선사께서 계셨으나 안타깝게도 강력한 음명수를 만나 목숨을 잃었지요. 수도자 중에도 부적에 관해 잘 아는 이가 많지 않은데 석부를 연구하는 모습을 보니 이 방면에 꽤나 정통해 보입니다.”

    “석부라면…….”

    한립은 의아한 기색을 드러냈다.

    “하하! 선사께서 모르시는 것도 당연합니다. 돌로 만든 부적이나 옥으로 만든 부적 등은 이미 많은 지역에서 실전되었지요. 저 역시 오룡해의 어떤 종파에서 이런 고대의 부적을 배우는 방법을 익히게 되어 아는 것이니까요.”

    노인의 목소리에서 자부심이 드러났다. 한립이 그런 노인을 바라보며 미간을 좁혔다.

    “확실히 돌이나 옥으로 부적을 만드는 방법이 있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습니다. 하지만 부적에 대해서는 연구한지 꽤 되어 원판을 보고 놀란 차였는데 선사의 말씀을 들으니 의문이 많이 해결되는군요. 이 석부라는 것에서 결계의 특징이 다분히 느껴지는데 제가 잘못 본 것입니까?”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노인이 조금 놀란 듯하다가 박장대소했다.

    “선사께서 진법에 정통하신 줄은 예상치 못했습니다. 맞습니다, 이 단운(檀云) 석부는 진정한 석부는 아닙니다. 음명의 힘을 빌려 운용하기 위해 진법의 방식을 빌려와 개조한 것이지요. 이렇게 하면 부적과 진법의 특징을 고루 갖추는 대신 효력이 크게 줄게 됩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석판을 내려다보던 한립이 또 물었다.

    “대장로님의 말에 따르면 이곳에서는 오직 음명의 힘만 이용할 수 있기에 음명수의 수정과 진법의 효능을 결합해 술법을 펼친다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 석부에는 수정이 박혀있지 않은데 어찌 된 것입니까?”

    “그건 다 사정이 있습니다. 오늘 쟁교수와 싸우는 것을 보셨다시피 촌락의 장정들이 무공을 익혀 보통 사람들보다 강하다 해도 그런 거대한 음명수의 상대가 되지 않지요.

    음명수를 쓰러트린다 해도 촌락 사람들 중 많은 사상자가 나오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음명의 힘을 이용해 펼치는 술법이 이곳 사람들에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지요.

    그리고 이런 술법에 필요한 음명수의 수정을 얼마나 보유하고 있는지가 촌락의 강대함의 기준이 됩니다.”

    미소를 지은 노인이 잠시 뜸을 들이다 말을 이었다.

    “하지만 수정을 찾는 일이 어디 쉽습니까?  원칙대로라면 강한 음명수일수록 머리에 수정을 품고 있을 가능성이 큰 것은 사실이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허다합니다. 반대로 어제처럼 체구가 작고 비교적 약한 화린수 몇 마리를 잡고 수정을 찾아내기도 합니다.

    솔직히 일상생활에서 촌락을 보호하는 술법을 펼치는 것만으로도 필요한 수정이 상당합니다. 하지만 1년 내내 1개 정도를 수집하는 것이 보통이니 그 귀한 것을 아무렇게나 방치할 리 없지요.

    평소엔 촌락의 장로들이 수정을 보관하고 어제처럼 필요한 때에 수도자들이 이용하게 해주고는 전투가 끝나면 즉시 회수해 가곤 합니다. 다만 이 석부는 며칠간 필요한 힘을 미리 주입해 두고 사용하는 방식이라 수정이 꽂혀 있지 않은 것입니다.”

    백발의 노인은 이런 방식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말투였지만 한립은 그저 미소를 유지한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눈앞의 노인은 수도의 길이 꺾이자 범인들처럼 이곳에서 이권 다툼에 뛰어든 것 같았다.

    한립은 그저 탄식했다.

    노인이 한립의 피동적인 모습에 조금 실망한 듯 했으나 금방 웃는 낯으로 돌아와 일상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이 이상한 곳은 몇 만 년 동안이나 존재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비록 끌려 들어오는 수도자의 수가 극히 드물지만 적어도 천 명 이상은 되리라 보여 집니다. 듣기로는 원영기 선사조차 이곳에 갇혀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더군요.”

    “원영기 선사도 이곳에 끌려 들어온 적이 있습니까?”

    “그러합니다. 비록 그분은 이곳에 온 뒤로 이 촌락에서 평생을 보냈다더군요. 아마 두 선사 분들처럼 절령의 기운이 분출했을 때 그리 된 듯합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그렇게 강한 의식과 법력을 가지고 귀무에 휩쓸릴 리 없었겠지요.”

    한립의 얼굴에 쓴웃음이 어렸다.

    “정말 절령의 기운이란 것이 대단하긴 하더군요. 전설 속의 화신기(化神期) 선사나 되어야 그 영향에 휩쓸리지 않을 듯 합니다.”

    “화신기 선사라니 별 생각을 다하십니다. 다만 그 원영기 선배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서책을 몇 권 남겼다 하는데 그 중 하나가 수련을 하며 쌓은 경험을 적은 것이었습니다. 그런 물건이 외부 세상에 있었다면 진귀하기 짝이 없었을 것인데 이곳에서야 뭐, 허허…….”

    “수련에 관한 깨달음을 남긴 것이로군요! 듣기만 해도 흥미가 생기는데 어디에 가면 그것을 찾아 볼 수 있겠습니까?”

    한립은 진심으로 마음이 동했다. 원영기 선사가 남긴 심득이라니 어떤 내용이 적혀 있을 지 꽤나 궁금했다.

    “허허! 저도 처음 그 서책에 대해 들었을 때 흥미로운 일이라 생각했지요. 하지만 오랜 세월 이곳에 머물다 보니 그런 마음도 차츰 사라지더군요. 법력을 사용할 수 없지만 관심이 간다면 한번 직접 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그 서책은 다른 선사들이 남긴 유품들과 함께 창고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노인이 몸을 돌려 촌락의 한 지점을 가리켰는데 그 손끝이 무척 낡은 건물을 향해 있었다. 기쁜 마음을 억누르며 한립은 차분히 노인을 향해 감사를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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