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9
319화. 음명의 땅
대청 안 중심부에 자리한 의자에는 뚱뚱한 노인이 인자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앉으시지요. 이왕 우리가 모두 같은 인간이라면 서로 돕고 살아야겠지요. 하지만 이곳과 바깥의 사정이 다르니 일단 소개를 해주십시오. 그럼 이곳의 상황을 이야기해 드리겠습니다.”
노인 옆에는 여러 사람이 연달아 앉아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위협적인 표정을 지어보였다. 대청 밖에서 한립을 시선으로 훑었던 이였다.
그는 눈에서 불이라도 뿜을 듯 한립을 살피다가 뒤에 있는 매응을 보고 말을 잃고 침을 삼켰다.
한립은 그저 미소를 지으며 담담히 답했다.
“바다에서 우연히 귀무를 만나 휩쓸려 들어왔다는 것 밖에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이전에 무슨 신분이었든 이곳에서는 아무 소용도 없는데 말해서 무엇 하겠습니까?”
“두 분은 수도자겠군요. 굳이 숨기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가 한립의 허리에 걸린 저물대를 보았다. 안색이 변하긴 했으나 한립은 말을 아꼈다.
“비록 그 수가 많지는 않으나 여러분이 이곳에 처음 온 수도자들은 아니니 걱정 마십시오. 사실 보통 사람에 비해 저희 촌락에서는 수도자들을 환영합니다. 물론 아시다시피 음명의 땅에서는 영력이나 법력 등은 통하지 않고 유일하게 음명의 힘과 무공만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음명의 힘이 무엇입니까.”
“뭐, 법력과 비슷한 일종의 외부의 힘이지요. 법력처럼 직접 법술을 펼치지는 못해도 수도자들은 음지의 요수의 체내에서 얻은 수정으로 소형 진법을 설치할 수 있더군요. 수도자들은 진법에 능통할 뿐 아니라 체력도 일반인과 달리 좋아서 촌락에 많은 도움이 되지요.”
한립이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물었다.
“수도자들에 대해 잘 아시는 것 같은데 이 촌락에도 그들이 있는 것입니까?”
“물론 있지요. 대여섯 명이나 되는데다 부끄럽지만 이 늙은이가 그 중 하나입니다. 귀무에 끌려 이곳에 오기 전에는 축기에 성공한 선사였지요.”
슬그머니 웃는 노인의 얼굴을 마주한 한립이 다시 입을 열려는 찰나 대청이 흔들렸다.
쿵, 쿵, 쿵…….
엄청난 진동이 연달아 들리는 것이 덩치가 큰 무언가가 촌락을 향해 달려드는 소리 같았다. 대청 안 사람들이 모두 안색이 변해 밖으로 뛰쳐나갔다.
한립 역시 지체 없이 건물 밖으로 향했다.
나와 보니 촌락의 장로들이 심각한 얼굴로 수백 명의 청년 남녀를 지휘했고 그들은 모두 화살과 장창 등을 들고 석벽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모두 긴장한 얼굴이긴 했으나 전혀 당황하지 않은 것이 이미 여러 번 이런 일을 겪어본 듯 했다.
멀리서 엄청난 굉음이 났으나 석벽이 시야를 가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잠시 턱을 문지르던 한립이 주위를 살피고는 성큼성큼 걸어 발끝으로 땅을 박찼다. 가볍게 높은 건물의 꼭대기에 오른 것이다.
이제야 먼 곳까지 시야가 트였다.
촌락에서 조금만 멀어져도 검은 색의 괴이한 바람 속에서 모래와 돌들이 미친 듯이 소용돌이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고 바닥에는 검은 서리 같은 것이 응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괴이한 바람은 촌락에서 백여 장 떨어진 곳을 넘어오지 못하고 소실되었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경계가 존재하는 듯했다.
그 바람을 뚫고 무거운 발소리가 계속 가까워지고 있었는데 엄청난 기세가 은은히 드러나며 거대한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검은 그림자를 제대로 살피고는 한립도 급히 숨을 들이마셨다.
원래 크기의 열댓 배는 될 듯한 거대 회색 원숭이가 검은 나무 몽둥이를 쥔 채 맹렬히 촌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네 개의 눈은 붉은 빛을 방출하며 충만한 살기를 들어내고 있었다.
다들 그것을 발견했는지 누군가 큰 소리로 외쳤다.
“교쟁수(狡狰獸)다. 교쟁수가 달려든다. 어서 방패를!”
동시에 많은 부녀자와 어린 아이들 그리고 노인들이 나타나 각양각색의 방패를 성벽 위로 올려주고는 황급히 다시 돌아왔다.
이때 요수는 이미 석벽과 백 장 거리 내로 진입했는데 벽이 무너질 정도로 엄청난 진동이 일었다.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거대 원숭이가 삼십 장 거리로 다가왔을 때 돌연 바닥에서 보라색 안개가 피어올라 거대한 촉수로 변하더니 거대 요수의 두 다리를 단단히 붙들었다.
요수가 달려오던 속력을 이기지 못해 바닥에 엎어지자 성벽 위의 사람들도 그 충격에 비틀거렸다.
움찔한 한립이 무의식중에 탑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역시 그곳에 네 사람이 가부좌를 하고 있었는데 모두 전신에 보라색 기운을 뿜으며 술법을 시전하고 있었다.
‘이게 바로 음명의 힘? ’
“공격!”
조밀한 장창과 화살이 쓰러진 요수의 몸 위로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후호후호오!”
거대 요수도 상황이 좋지 못하다 느꼈는지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입에서 한랭한 음지의 바람을 뿜어냈다.
후두두둑.
바람을 맞은 화살들이 이리저리 튀겨나가며 요수의 몸에 닫기도 전에 떨어져 내렸다. 다만 무거운 장창 등의 무기는 요수의 몸에 닿아 가벼운 상처를 냈다.
요수가 자잘한 상처로 더욱 날뛰자 붉은 4개의 눈에서 핏빛이 요동치며 머리끝에서 두꺼운 털들이 일어나 공포스런 형상을 띠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 털들은 무수히 많은 검은 빛으로 변해 석벽으로 쇄도했다. 석벽 위의 사람들은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긴장한 얼굴이었으나 손에든 각양각색의 방패를 이용해 공격을 막으려 했다.
파파파밧!
방패에 무언가가 박히는 소리가 무시무시했다.
검은 빛은 방패를 수 촌 가까이 파고 들었으나 대다수가 성공적으로 공격을 막아냈다. 다만 일부가 미처 온 몸을 가리지 못하고 검은 빛이 박혀 쓰러졌는데 생사는 알 수 없었다.
다른 이들은 쓰러진 이들을 신경 쓸 틈도 없이 또 한 번의 우렁찬 명령과 함께 화살과 장창 등을 비처럼 쏟아내며 대다수가 음명수를 막는 일을 반복했다.
하지만 음명수는 머리끝에서 날린 털이 공격 수단의 전부였는지 계속 끔직한 울부짖음을 내며 발버둥 칠 뿐 다른 공격을 가하지는 못했다.
보라색 안개가 변한 촉수가 여전히 그것을 꽉 붙들고 절대 놓아주지 않았다.
이렇게 대여섯 번을 원거리 공격만으로 버텨내자 거대 요수의 입에서 불어 나오던 한랭한 바람도 처음만 못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성벽 위의 공격은 더욱 거세져서 요수는 이미 화상을 입고 온 몸에 장창이 박혔다. 가벼운 외상에 불과했지만 거대 원숭이는 손에 든 방망이를 미친 듯이 휘두르며 주변에 구덩이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번에는 체격이 유달리 크고 힘이 좋아 보이는 사내들이 날듯이 석벽 위로 올라섰다. 사내들은 성벽에 오르자마자 거리를 가늠한 뒤 거대 요수의 몸을 향해 장창을 투척했다.
쉑, 쉑.
하늘을 가르는 창이 연달아 내는 소리에 한립도 안색이 조금 달라졌다. 그들 모두가 적지 않은 내공의 소유자로 커다란 창을 풀잎 다루듯 한 것이다.
동시에 요수의 몸에 핏빛 구멍이 뚫리며 모든 창들이 꽂혔고 난폭하기 그지없던 거대 원숭이가 산채로 바닥에 박혀버렸다.
“우와아아!”
석벽 위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고 모두 기뻐하는 사이 거대 요수를 붙잡아 두던 보라색 안개도 흩어졌다.
흥분 속에서 그들은 서둘러 석벽의 문을 열고 나갔고 일부는 남아 부상당한 동료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후호오!
그러나 그들이 문을 완전히 열기도 전에 고개를 땅에 처박고 있던 요수가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손에 들고 있던 거대한 방망이를 맹렬히 던져버렸다.
그러자 하늘 높이 날아오른 방망이는 촌락의 한 가운데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고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때 누군가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며 떨어져 내리는 나무 방망이를 향해 손을 날려 공격했다. 그러자 거대한 방망이는 방향을 바꿔 아무도 없는 빈 땅에 떨어졌다.
그리고 그가 천천히 땅에 내려섰는데 촌민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그에게 다가가 감사를 표했다. 하지만 그는 손을 휘저으며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한립은 매섭고 하얀 얼굴의 중년인이 찰나의 순간 자신을 향해 서늘한 시선을 보냈다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나 그를 상당히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듯 했다.
한립이 미간을 좁히는 동안 나무문이 개방되고 중상을 입은 요수를 향해 수십 명의 건장한 청년들이 뛰쳐나갔다.
그들 중 하나가 하얀 장도를 이용해 요수의 머리를 가르고 그 안을 뒤적거렸다.
“이야앗!”
“우와!”
그가 피로 젖은 두 손에 엄지 손가락만한 녹색 수정을 꺼내 보이자 모두가 환호성을 내지르며 소동이 일었다.
한립이 눈을 깜빡이며 그 녹색 돌을 보는데 무언가 익숙한 것이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물건 같았다.
차분히 생각해 보니 당시 허천전 내전에서 각 층을 지키던 꼭두각시 병사의 잔해에서 녹색 수정을 주운 적이 있었는데 바로 그것과 똑같아 보였다.
한립은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조용히 지붕에서 내려와 장로 등을 따라 대청으로 들어갔다. 매응도 한립이 다시 대청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는 고개를 숙인 채 그 뒤를 따랐다.
한립과 매응이 들어갔을 때는 이미 모두 각자의 자리에 앉은 후였다.
뚱뚱한 노인이 웃으며 입을 떼려는 찰나 건장한 장한이 빠른 걸음으로 들어와 두 손에 든 녹색 돌을 바쳤다.
“대장로님, 쟁교수의 머리에서 찾아낸 수정입니다.”
“모두 수고했구나. 절령의 기운이 분출되는 틈을 타 신석 등이 많은 물고기를 회수해 왔으니 더 많은 양을 분배하겠다.”
“감사합니다.”
장한은 무척 기쁜 얼굴로 돌아나갔다. 노인이 수정을 조심스레 품 안으로 챙겨 넣고는 진지한 얼굴로 다시 한립 등을 바라보았다.
“방금 이곳 요수인 쟁교수를 보고 놀라셨겠지요. 이곳 음명의 땅은 겨우 방원 백여 리 밖에 안되지만 요수와 인간 그리고 각양각색의 음명수들이 살아갑니다.”
“요수도 있단 말입니까?”
“공간의 균열이 생기면 선사든 요수든 가릴 것 없이 끌려 들어오니까요.”
노인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요수도 이곳에서 영력을 이용한 술법을 부리지는 못하지만 강력한 신체 능력을 갖고 있어 인간이나 음명수가 상대할만한 적은 아니지요.
불행 중 다행인 것은 그들은 일정 지역을 근거지 삼아 음명수를 잡아먹고 잘 돌아다니지 않습니다. 하지만 음명수들은 이곳의 기운을 받아 탄생하는데다 천성적으로 인육을 좋아해 정기적으로 인간의 촌락을 습격하곤 하지요.
물론 대부분은 촌락 사람들이 힘을 합쳐 물리칩니다만 일부 약소 촌락은 전멸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성공한다 하더라도 다시 이곳의 기운이 응결해 음명수가 출현하니 끝이 없는 전쟁과 마찬가지입니다.”
잠자코 듣고만 있던 한립이 입을 열었다.
“이곳 외에도 다른 촌락들이 더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비록 많지는 않아도 일고여덟 개의 인간 촌락이 음명의 땅 전역에 퍼져 있습니다. 다만 식량이 항상 모자라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곳은 음기가 너무 강해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식량을 재배할 수 있는 땅이 거의 없는데다 음명수는 극독을 지녀 요수들의 식량은 될 수 있어도 인간이 먹으면 즉시 죽게 됩니다.
그러니 이곳 사람들은 모두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일을 찾아서 해야 합니다.그렇지 않으면 촌락에서 쫓겨나 죽게 됩니다.”
노인의 목소리가 끝으로 갈수록 서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