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8
318화. 높은 담의 촌락
한립이 백여 장 정도 걸어가자 물고기들은 완전히 사라졌고 부드러운 검은 모래가 덮인 지면이 나타났다. 한립이 횃불을 발아래에 비추자 희미하게 여러 발자국들이 보였다.
방금 물고기를 주워 사라진 이들이 남긴 족적 같았다. 바짝 붙어 쫓아오던 여인이 부주의하게 한립의 등에 이마를 찧고는 중얼거렸다.
“왜요? 무슨 일 있어요?”
그는 아무 말 없이 한족 무릎을 꺾어 모래의 냄새를 맡았다.
“짙은 혈향이오. 평범한 곳이 아니군.”
무표정하게 말을 마친 그가 다시 발자국들을 따라 걸어갔다. 여인은 그 말을 듣고 한립 곁에 더 바짝 붙었다.
두 사람은 한참을 걷다가 멀리서 희미한 푸른 불빛을 발견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남색 빛을 뿜어내는 입구가 떠있었는데 한 사람이 드나들기에 충분한 크기였다.
둘은 빠르게 문으로 다가가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한립이 머리를 들이민 순간 하얀 빛이 반짝이며 8개의 새하얀 도검들이 그의 목으로 쇄도했다.
귓가엔 탁한 목소리가 울렸다.
“너흰 누구지? 설마 새로 온 녀석들인가?”
주위에는 스무 명이 넘는 청년남녀들이 그들을 포위하고 있었는데 이전에 본 무리와 동일한 녹색 의복을 걸치고 있었다.
한립이 코를 긁적이며 쓴웃음을 지었다.
“내 생각에 아마 우리가 당신들이 말하는 새로 온 녀석들 같습니다. 이곳에 외부인들이 종종 들어오나 보군요?”
중년인은 한립의 대답에 얼굴이 한결 편해졌지만 여전히 냉랭히 말했다.
“말하지 않아도 그 이상한 의복을 보니 알겠구나. 외부인이나 그렇게 입고 있지. 그래도 우리를 만난 것은 운이 좋았다. 대부분이 이곳이 어딘지도 모른 채 음지 요수의 밥이 되어 버리곤 하니까.”
이어 그가 손을 휘젓자 모두가 한립의 목을 위협하던 칼날을 거둬들였다. 한립은 멀어지는 병기를 살피며 의아해했다.
방금 피부에 닿았을 때 칼날들에서 놀라운 열기를 감지했기 때문이다. 마치 방금 불에 달군 강철 같았다. 그가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살피자 그들은 작은 산의 중턱에 위치해 있었고 멀리 끝 모를 노란 사막이 펼쳐져 있었다.
이번엔 하늘로 고개를 들자 그가 깜짝 놀랐다.
거무튀튀한 것이 엄청난 먹구름 속에서 번개처럼 번쩍였는데 한 번도 본 적 없는 요사스런 색이었다.
그가 주변 풍경을 모두 파악하기도 전에 마른 중년인이 물었다.
“그럼 다른 이들을 보지는 못했더냐? 우리의 일행이 밖에 있다.”
“몇 명을 보았는데 어떤 괴수에 쫓겨 다른 방향으로 달아나는 듯 했습니다.”
“괴수라니? 어떤 괴수 말이더냐?”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들으니 무슨 화린수라 했던 듯 했습니다.”
“화린수라면 다행이군. 아호 등이 상대할 만 해. 그래도 안전을 위해 범력 네가 몇 명을 데리고 가까운 출구로 가거라.”
빼빼 마른 중년인의 명에 새까만 장한이 남녀 몇몇을 데리고 바삐 사라졌다.
마른 중년인이 고개를 돌려 한립과 여인을 보았다.
“너희가 운이 좋다 해야 할 지 없다 해야 할지 모르겠다. 백 년에 한번 있는 절령지기(絶靈之氣)가 분출할 때 들어오다니. 공간의 균열도 어느 때보다 크고 그것에 닿은 이들은 아무리 강한 능력을 갖고 있어도 달아날 수 없게 되지.
하지만 그 때문에 평소 근처에 밀집해 있던 음지의 요수들이 모두 흩어져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뜯어 먹히는 사태는 면했군.”
한립은 그의 말에 조금 놀랐지만 차분히 물었다.
“이곳이 어디인지 자세히 알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상당히 위험한 곳인 듯 한데요.”
“헤헤, 단지 위험이란 두 글자로 표현할 만한 곳이 아니지. 너희가 밖에서 어떤 신분이었는지는 모르나 이곳 음명(陰冥)의 땅에서 일하지 않고 먹고 지낼 수 있는 놈은 없다. 스스로 움직여야만 음명수들의 먹이가 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지.”
미간을 좁힌 한립이 다시 입을 열려는 순간 그가 손을 휘저으며 막았다.
“지금은 이런 이야기를 할 시간이 아니다. 곧 대량의 음명수들이 소굴로 돌아올 터이니 일단은 촌락으로 돌아가 다시 이야기 하지.”
이어 그는 주변의 인물들에게 명했다.
“어서 저 비밀 출구를 단단히 막아 다음에 이용할 수 있게 하거라.”
동시에 모두가 인근의 돌 등을 옮겨 서둘러 입구를 막아버렸다. 마른 사내가 하늘의 검은 구름들을 보며 얼굴이 어두워졌다.
“이제 가지. 일이 생기지 않았다면 아호 등도 중간에 합류할 터이니. 음풍(陰風)이 불기 시작하면 돌아갈 수 없어.”
모두가 그의 명에 따라 바삐 걷기 시작하는데 뜻밖에도 누구 하나 한립과 여인에게 신경 쓰는 이가 없었다. 고운 얼굴의 여인이 점점 멀어지는 그들을 보며 불안한 듯 물었다.
“따라가야 할까요?”
법력을 사용할 수 없는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몰라 시종일관 침착함을 유지하는 한립을 의지했다. 한립이 고개를 들어 냉랭히 무리의 뒷모습을 보더니 주저 하지 않고 큰 걸음으로 그 뒤를 쫓았다.
“안갈 이유가 무엇이오? 일단 저들의 촌락으로 가 상황을 파악하고 법력을 회복할 방법을 찾읍시다. 그러고 보니 서로 성도 알지 못하는군. 나는 한 가로 산수요.”
“저는 매응이라 합니다. 분명 오라비와 함께 끌려왔는데 귀무 속에서 흩어져 행방을 모르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여인은 바로 매 씨 오누이 중 동생 누이였다. 그녀는 잃어버린 오라비를 생각하며 은근히 근심을 드러냈다.
“검은 벼락에 임의로 생물체를 전송하는 기능이 있는 것 같소. 수많은 선사들이 있었으나 우리 둘만 이곳에 떨어진 것이 그 증거이니 천천히 찾다 보면 만나게 될게요.”
작은 위로에 여인은 마음이 한결 편해졌고 한립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났다. 그의 얼굴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에 다른 곳에서 섬으로 진입한 이가 아닐까 추측했다.
여인은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아직 가까운 사이가 아닌지라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망설이는 동안 둘은 벌써 앞선 무리를 따라잡았다. 비록 법력은 운용할 수 없어도 세수를 마친 수도자의 육체는 범인에 비할 수 없었다.
마른 사내가 둘의 모습에 이채를 띄었으나 별 말 없이 속도를 높였고 젊은 청년남녀들의 걸음도 빨라졌다.
한립은 그들의 걸음을 보며 조금 놀랐는데 절대 일반 사람의 것은 아니었다. 심후한 내공을 지닌 것은 아니나 얕게나마 외문 무공을 익힌 이들의 보법이었다.
그러나 생각하면 할수록 이번 귀무에 의혹이 깊어졌다.
경전에서 본 귀무는 두려운 재난이긴 했으나 달아날 기회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놀랍게도 귀무에 휩싸이기도 전에 법력을 상실해 끌려 들어가다니 너무 이상했다.
이런 귀무라면 원영기 선사라 해도 달아나지 못 했을 것이다. 그러나 방금 마른 사내가 절령지기가 분출되었다는 말을 해서 그의 의혹을 많이 풀어주었다.
아마 그것이 법력의 상실과 큰 연관이 있을 것이다. 보아하니 정말 운 나쁘게도 그 특이한 귀무에 모두가 말려 들었고 다른 선사들은 다른 곳에 떨어져 있을 가능성이 컸다.
저 멀리 사막에 먼지 구름이 용처럼 피어나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앳된 얼굴의 청년이 무리를 알아보고 반갑게 소리쳤다.
“돌아옵니다.”
마른 중년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안도를 표하다가 그대로 얼굴을 굳혔다. 먼지 뒤로 무언가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뒤따랐던 것이다.
“모두 가서 돕는다. 음지의 요수에게 쫓기고 있어!”
그는 크게 소리치며 허리춤의 하얀 장도를 뽑아 날듯이 뛰어갔다. 다른 이들도 그제야 위급한 상황임을 알아채고는 역시 도검을 뽑고 달렸다.
한립은 그저 그 자리에 서서 멀리서 솟아오르는 먼지를 바라볼 뿐이었다.
청년 남녀들이 순식간에 그 안으로 진입하자 요수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더욱 커졌고 진한 안개 속에서 청년들의 고함과 섞여 들었다.
일다경이 지나서야 모든 것이 안정을 되찾았다.
잠시 후 다시 모습을 드러낸 이들은 모두 핏물을 뒤집어썼는데 요수의 피인지 부상을 당한 것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하지만 왠지 모를 웃음기가 감도는 것이 뜻밖의 수확이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은 한립과 매응을 보며 의아해했다.
다만 곧 마른 사내가 낮은 목소리로 무어라 하자 곧 그런 기색이 사라졌다.
모두가 모여 더욱 속도를 높이자 한 시진 후에 드디어 황량한 사막을 벗어나 거무튀튀한 돌무지가 눈에 들어왔다.
사막처럼 끝이 보이지 않아 규모를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괴이한 생김새의 새까만 돌들이 음산한 느낌을 주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오히려 한숨 놓았다는 얼굴로 크게 안심하는 눈치였다.
그때 하늘 위 먹구름이 불안정해지며 남색 번개의 활동이 더욱 빈번해진 후였다. 심지어 그들 가까운 지면에서 벼락이 한두 번 내려치며 크고 작은 구덩이를 생성해 냈다.
한립과 매응은 화들짝 놀랐으나 다른 이들은 이미 익숙하다는 듯 걸음을 재촉했다. 마른 중년인이 소리쳤다.
“모두 서두르지! 촌락이 곧 문을 봉할 터이니 바깥에 갇히지 말자고.”
이어 그가 먼저 전방을 향해 나서자 나머지도 죽어라 달리기 시작했다. 한립과 매응도 방금 저 소리를 듣고 뒤쳐질 마음은 없었다.
그들을 따라 돌무지 위에서 동쪽으로 서쪽으로 꺾으며 한참을 가자 눈앞이 돌연 밝아지며 거대한 석벽이 드러났다. 돌로 만든 높다란 담은 커다란 암석을 켜켜이 쌓아 만든 삼십 여 장 높이의 벽이었다.
양 끝은 족히 천여 장은 될 듯 했고 날카로운 나무를 깎아 박아놔 삼엄한 느낌을 주었다. 한립 등이 향하는 방향에는 거대한 나무문이 나있었고 그 옆으로 열댓 명의 사내들이 하얀 장창을 들고 경계를 서고 있었다.
그들이 마른 사내 무리를 확인하고 흥분해 소리치니 문이 열리며 귀환을 환영했다.
경비병들은 낯선 한립과 매응의 모습에도 그저 시선을 한 번 주었을 뿐 따로 말을 걸지는 않았다. 그들은 그저 돌아온 이들과 뒤섞여 떠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체구 좋은 사내들이 주머니에서 물고기 등을 쏟아 내자 뛸 듯이 기뻐했다.
냉랭한 눈으로 상황을 지켜보던 한립이 한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그들의 모습을 보니 물고기 등 어류가 귀해서 기뻐한다기보다는 식량 자체가 부족한 듯 했다. 이어 한립의 시선이 촌락을 훑었다.
촌락 전체가 높은 석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모든 건축물들은 밖에서 보았던 새까만 돌들로 엉성하게 쌓여 있었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촌락 중심의 석탑이었다.
석탑은 다른 곳보다 몇 배는 높아 높이가 네 장은 될 것 같았는데 그 꼭대기에서 은은한 보라색 안개가 방출되어 촌락의 상공을 감쌌다. 하늘에서 남색 벼락이 내려칠 때 마다 보라색 안개에 흡수되어 사라졌다.
보라색 안개는 분명 진법이나 금제 등이 분명했는데 영기는커녕 오히려 알 수 없는 음산한 기운만이 배회하고 있었다. 의식은 사라졌지만 그래도 영기는 민감하게 느낄 수 있었다.
한립의 의혹은 더욱 커졌다.
그 높은 석탑 주변에는 큰 대청이 위치해 있었는데 그곳에서 여러 사람이 나와 마른 사내 무리와 이야기를 나누며 간혹 한립과 매응에게도 시선을 주었다.
한립은 움찔했다. 이곳에서 처음 만나는 높은 내공을 지닌 자였다. 만일 밖이었다면 손가락 하나로 눌러 죽일 수 있었겠지만 이곳에서는 주의를 기울여야 할 능력이었다.
이때 마른 사내가 먼저 그들에게 다가가 한립과 매응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한립은 아무 말 없이 어떤 기색도 드러내지 않았으나 옆에 있던 매응은 그들이 자신들을 어찌 하려는 것인지 불안해했다. 마른 사내가 한립 등을 향해 손짓했다.
“이리로 와 보거라. 촌락의 장로님들께서 물어볼 것이 있다 하신다.”
차분한 얼굴의 한립이 매응을 데리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들은 몸을 돌려 대청 안으로 들어갔고 한립도 그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