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7
317화. 암흑 속의 조우
자령은 다시 냉랭한 얼굴로 돌아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온천인이 그것을 보고는 음산하게 소리쳤다.
“본 공자의 수행이 낮아져 이기지 못할까 그러더냐? 아니면 반역이라도 하려고? 본 맹은 이미 난성해 대부분을 점령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너 같은 결단 초기 선사가 도망갈 곳은 없다는 것을 잊지 말거라! 지금이라도 얌전히 내 명에 따르면 방금 항명한 것은 눈감아 주겠다.”
상대의 협박에 이번에는 자령도 마음이 흔들렸다.
그녀가 어떤 선택을 내리기도 전에 멀리서 마차들을 호위하던 시녀들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온천인은 크게 기뻐했으나 자령은 씁쓸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축기기 여선사들은 원래 큰 도움이 안 될 싸움이었으나 지금의 상황이라면 달랐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쓴웃음은 금세 사라졌다.
시녀들과 다른 방향에서 열댓 명의 선사들이 출현한 것이다.
몇몇이 자신의 시녀들에게 음흉한 시선을 보내자 온천인의 얼굴에 악랄한 기색이 스쳤으나 금세 표정이 달라져 섬의 다른 방향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러자 다른 이들도 모두 그곳을 쳐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일이…….”
먼 해수면 위를 뒤덮은 암흑이 쾌속으로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의 떨리는 음성으로 소리쳤다.
“귀무가 아닌가!”
말을 한 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뒤돌아 날아가기 시작했고 암흑이 사실은 농염한 검은 귀무라는 것을 깨달은 다른 선사들도 앞다퉈 미친 듯 달아났다.
온천인과 자령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어 자령이 주저 없이 발을 굴러 붉은 빛 줄기로 변해 허공을 가르려 했다.
온천인 역시 긴장한 기색으로 귀무와 발밑의 금빛 화염을 바라보다가 이를 악물고 한 움큼 피를 토했다.
순간 화염의 크기가 한층 커졌고 그 틈을 빌어 그 역시 금빛 빛줄기로 변해 자리를 뜨려 했다. 그의 시녀들이 신속히 그 뒤를 쫓았음은 당연했다.
그러나 동시에 불가사의한 현상이 벌어졌다.
먼저 출발한 선사들의 무리가 섬을 벗어나기도 전에 고꾸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화살처럼 떨어져 내리는 그들의 모습을 확인한 온천인 등도 몸을 가누지 못하다 그 뒤를 따랐다.
모두의 비행 법기가 영성을 상실한 것이다.
자령과 온천인은 결단기 수행 덕분인지 아주 조금 더 버텼지만 결국 빛을 잃고 심해로 낙하했다.
동시에 한립을 둘러싼 금빛 결계와 화염 역시 깜빡 거리다 사라졌고 여덟 개의 작은 거울들이 원형을 드러냈다.
“……!”
회색 보호막마저 사라지고 놀란 얼굴의 한립이 등장 했을 때는 그 역시 조금의 법력도 운용할 수 없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한립이 허공에서 맹렬히 떨어져 내려 돌 더미 위에 처박히려던 찰나 그의 몸이 맹렬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허리가 기이한 각도로 꺾이고 두 발이 교차하더니 허공에서 경로를 바꿔 근처의 거대한 나무 꼭대기에 얌전히 내려선 것이다.
그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다행히 무공인 라연보를 익혀두어 법력을 전혀 운용하지 않고도 살아남았지만 섬에 떨어진 다른 축기기 선사들은 자신처럼 운이 좋을 리 없었다.
그가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기도 전에 멀리서 무시무시한 소리가 들려왔다. 놀란 그가 서둘러 주위를 둘러보니 아직 체내로 불러들이지 못한 청죽봉운검 두 벌이 땅에 떨어져 있었고 그 옆에는 금빛 거울 8개와 바구니 고보 그리고 은색 종이 놓여 있었다.
모두 영기를 잃은 듯 어두침침해 전혀 법보로 보이지 않았다. 흠칫 놀란 그가 즉시 의식을 퍼트려 법보들을 불러들이려다 가슴이 서늘해졌다.
그의 강한 의식이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체내에서 퍼져나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립은 심호흡을 하며 생각했다. 이제 법력에 이어 의식까지 운용할 수 없다면 일개 범인과 다를 바가 없어진 것이다.
이렇게 되면 법력을 운용해 법보나 법술을 쓰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저물대를 열어 물건을 꺼내거나 영수대 속 영수들을 부리는 것도 불가능해진다.
고개를 돌려 무서운 기세로 다가오는 검은 안개를 살핀 그가 안색이 하얗게 질려갔다.
귀무의 속도를 보니 범인의 몸으로 달아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는 일단 나무에서 뛰어내려 땅에 흩어진 보물들을 죄다 잡아챘다. 다행히 각각의 크기가 작아서 모두 품에 넣을 수 있었다.
그가 막 모든 보물들을 주워 담았을 때 검은 안개도 섬에 상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몸이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귀무 방향으로 끌려가기 시작했다. 몸을 비틀고 라연보를 펼쳐 힘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 했으나 전혀 소용이 없었다.
잠시 후 그는 검은 뇌전이 튀기는 거무튀튀한 안개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그리고 그는 물론이고 귀무 자체도 곧 모습을 감추었다.
* * *
웅웅.
어딘가로 끌려온 한립은 두 귀가 먹먹할 정도로 밀어 닥치는 알 수 없는 소음들에 머리가 울렸고, 눈앞은 암흑으로 천지를 분간할 수 없었다.
돌연 그의 몸이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서 추락했다.
펑.
그러나 그가 떨어져 내린 곳은 땅이 아니었다. 순간 짙은 비린내가 그의 코에 감지됐는데 몸을 더듬어 보니 무언가 끈적끈적한 액체 같은 것이 묻어있었다.
어둠 속을 한참동안 바라보니 그의 주위에 있는 것은 수많은 어류들이었다. 그것들은 아직도 펄쩍펄쩍 날뛰고 있었다. 그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극심한 두통과 구토증상이 몰려왔고 사지가 풀려 다시 쓰러졌다.
법력의 보호 없이 강제로 전송된 결과인 듯 했다. 아마 잠시 동안은 몸을 가눌 수 없을 것이다. 이왕 이렇게 된 것 한립은 아예 편하게 생선 더미 위에 누워버렸다.
잠시 휴식을 취해 체력을 보충하고 손발에 힘이 들어갈 때까지 기다리기로 한 것이다.
이때 그의 머리 위에서 검은 뇌전 같은 것이 번뜩였다. 그 빛에 의지에 주위를 둘러보니 곳곳에 종유석 같은 것이 매달려 있는 것이 어떤 동굴 안인 것 같았다.
방금 나타난 검은 빛 덩이에 무언가가 들어있었다. 순간 검은 빛이 반짝이며 사라지자 그 안의 물체가 곧장 한립에게로 떨어져 내렸다.
화들짝 놀란 그는 피하려는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아직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피하지 못했다.
“악!”
그 결과 여인의 작은 비명 소리와 풍만하고 부드러운 육체가 그를 덮쳐왔다. 뜻밖에도 그와 함께 전송된 인물이 있었던 것이다.
그녀 역시 감각을 잃고 너무 당황한 나머지 몸을 일으키려 몸부림치다가 한립의 머리카락을 잡아챘다.
갑작스런 통증에 한립의 입에서도 어쩔 수 없이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하아. 누구죠?”
그녀는 그제야 자신이 낯선 사내를 깔아뭉개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너무 놀라 바로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그대로 다시 곤두박질 쳤다.
그 결과 한립과 완전히 포개진 꼴이 된 그녀의 눈이 한립의 두 눈과 마주쳤다. 어두컴컴해 자세히 보이지 않아도 젊은 여인이 분명했다.
“누구시죠?”
“모르는 사내요!”
듣기 좋은 음성이었으나 분명 처음 듣는 낯선 이의 음색이었기에 한립은 잠시 농을 건넨 것이었다.
그 말에 여인이 부끄럽고 어이가 없어 한립을 노려보았다. 이후 손발을 휘적거리며 어떻게든 한립의 얼굴에서 떨어지려 했으나 아무 소용도 없었다.
이렇게 여인이 숨을 내뱉으며 완전히 밀착한 몸을 꿈틀거리자 한립도 자연히 불편해 지기 시작했다.
“……뭐 하는 거예요?”
여인이 한립의 몸에서 느껴지는 변화에 당황하며 그를 노려보았으나 그 모습이 왠지 귀여워 보였다.
그는 어떨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내가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정상적인 사내로서 당연한 반응인 게요. 이미 법력과 의식을 상실했는데 성인군자가 아닌 다음에야 어찌하겠소?”
“허!”
분명 어이없다는 반응이었으나 그녀도 한립의 해명을 수긍하는 눈치였다. 자신도 꼼짝할 수 없는데 뭘 어쩌겠는가?
잠시 어둠 속에서 남녀의 심장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기이한 경험이었다. 무수히 많은 생선 더미 위에서 낯선 여인과 누워있다니!
잠시 침묵하던 여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먼저 섬으로 진입했던 선사들 중 하나인가요?”
“뭐 그런 셈이오.”
이 질문을 통해 한립은 여인이 귀무가 덮치기 전 보았던 축기기 선사 무리와 함께 온 것이라 생각했다.
“흥, 뭐가 그런 셈이란 말이에요?”
그가 미소 지으며 대충 얼버무리려는 데 멀리서 불꽃이 어른거리며 여러 인기척이 들려왔다.
한립은 흠칫 놀랐다.
이곳에 뜻밖에도 다른 인물들이 있었지만 자신들처럼 운무에 휩쓸려온 이들은 아닌 듯 했다. 그들은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왔다.
드디어 횃불을 들고 나타난 이들은 다섯 명의 건장한 사내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한립보다 머리 하나 정도는 컸고 삼사십 대로 보였다.
녹색 의복을 입고 한 손에는 하얀 도를 쥔 사내들이 거대한 가죽 주머니를 둘러매고는 서둘러 달려오고 있었다.
그가 놀라 그들의 정체를 추측하고 있을 때 검은 머리카락이 시야를 가렸다. 품에 안겨 있던 여인도 고개를 돌려 달려오는 이들을 확인하고는 몸을 떨며 불안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움직임에 손가락과 발가락을 움직여본 한립은 곧 몸이 정상으로 돌아올 것이라 예상했다.
결국엔 횃불을 든 무리가 그들 앞까지 당도했다. 횃불이 다가오자 이제 조금 먼 곳까지 시야가 트였다.
한립의 주변은 희끄무레한 물고기들이 가득했고 그 위에는 그와 소녀가 있었다. 하지만 먼 곳은 여전히 어두워서 넓은 공간이 있으리란 추측을 할 뿐이었다.
사내들은 한립을 삼십 여 장 남기고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서둘러 등에 맨 가죽 주머니를 풀어 미친 듯이 물고기 등을 주워 담기 시작했다.
뜻밖의 행동이었다.
아직 그의 품에 있던 여인도 숨을 들이마셨는데 아주 작은 소리라 아직 사내들에게는 발각되지 않았다. 한립도 그제야 여인에게 고개를 돌렸다.
희미한 붉은 빛 속에서 고운 얼굴이 드러났다.
여인은 한립이 뚫어져라 보는 것을 느꼈는지 양 볼을 붉히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이제 다시 어둠 속에 가려진 얼굴에서 두 눈만이 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때 망을 보던 사내가 돌연 고개를 돌려 나머지 사람들에게 낮게 외쳤다.
“됐으니 어서 돌아가시죠! 화린수(火麟獸)가 옵니다.”
바삐 일하던 다른 이들이 즉시 주머니를 둘러매고 또 다른 방향을 향해 달려갔다. 그곳에는 그들이 미처 챙기지 못한 두 개의 횃불만이 남아있었다.
잠시 후, 먼 어둠 속에서 긴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일장 높이의 새빨간 몸이 어둠 속에서 지나가 사라졌다.
그 짧은 시간에 한립은 그들이 화린수가 부른 것의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표범의 머리를 하고 붉은 비늘로 뒤덮인 흉악하게 생긴 괴수는 입 안 가득 날카로운 이빨들이 자라나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다시 고요가 찾아왔다. 한립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괴수가 자신들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른 후 천천히 주먹을 쥐어본 그가 품에 안긴 여인의 허리를 안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드디어 몸이 정상으로 돌아온 것이다.
여인이 당황해 낮게 중얼거렸다.
“어, 어서 놔줘요. 나도 곧 괜찮아 질 거라고요.”
“계속 물고기 더미 위에 있고 싶다면 그렇게 해주겠소.”
담담한 한립의 말에 그녀가 잠시 주저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한립은 가볍게 그녀를 안아 올려 물고기 더미에서 뛰어 내린 후 불빛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이곳이 어딘지는 모르나 불빛이 없으면 돌아다니기 어려울 것이다.
허리를 굽혀 횃불 하나를 주어 올린 그가 사방을 둘러보며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품에 있던 여인이 부끄러워하는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이제 정말 움직일 수 있어요. 내려주세요.”
한립이 그녀를 가볍게 내려 주자 잠시 치마를 정리한 여인도 횃불을 주워 들고 주변을 살폈다. 한립이 돌연 사내들이 몰려왔던 방향으로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딜 가려고요?”
“방금 그 괴수가 돌아올 수도 있으니 일단 안전한 곳을 찾으려 하오.”
여인의 불안한 음성에도 그는 고개도 돌리지 않으며 답했다. 괴수가 돌아올 수 있다는 말에 두려운 기색을 드러낸 여인이 잠시 망설이다가 서둘러 그를 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