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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315화 (72/2,000)
  • # 315

    315화. 팔문금광경(八門金光鏡)

    어두워진 얼굴의 한립이 수결을 맺으며 거검을 움직이려 해보았으나 필사적인 법보의 반항에도 허상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양손에 붉은 빛이 돌더니 불길이 치솟으며 검을 녹여 버리려 했다.

    그제야 온천인이 고개를 쳐들고 광소했다.

    “흐하하하핫! 이미 진마의 손에 붙잡힌 법보를 되찾을 수 있을 성 싶으냐!”

    그의 손짓을 따라 나머지 다섯 허상이 종적을 감추었다가 한립의 보호막 앞에서 돌연 나타났다.

    온천인은 이미 이긴 것처럼 의기양양한 얼굴로 한립을 멸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육극진마의 여섯 개 허상이 연합해 공격을 가하면 원영 초기 선사라 해도 빠져나갈 수 없을 거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육극진마공이 난성해 제일의 마공으로 이름을 날릴 수 있었겠는가?

    그때 한립의 두 손에서 사발 굵기의 금빛 뇌전이 방출돼 가장 앞선 두 개의 허상에 떨어져 내렸다.

    쿠콰쾅!

    그 모습을 본 온천인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두 개의 허상이 뇌전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고통스럽게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회색빛을 번뜩이며 사라진 것이다.

    “어?”

    순간 어안이 벙벙해진 온천인의 두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쿠콰콰쾅!

    파측!

    다시 한 번 벽사신뢰가 분출되어 다른 두 허상을 멸하자 이번에는 온천인이 정신을 번쩍 차리고 거의 몸부림에 가까운 동작으로 손을 뻗어 회색빛의 마지막 남은 허상을 불러들이려 했다.

    여섯 진마의 환영은 주변 영력을 끌어 모아 완성된 것이긴 했지만 그래도 각각이 그의 영력을 품고 있어 하나하나가 사라질 때마다 수행이 퇴보했다. 돌아가 수련을 하면 회복할 수 있겠지만 당장의 전투가 문제였다.

    그러나 은색빛이 한립 가까이 다가가기도 전에 온천인의 머리 위에서 천둥소리 같이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놀란 그가 서둘러 고개를 들어보니 거검을 쥐고 있던 환영 역시 푸른 연기를 토하며 사라지고 있었다. 자유로워진 푸른 검은 수직으로 하강하기 시작했고 그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붉은 빛으로 변해 자취를 감추었다.

    두 거검이 교차해 허공을 가름과 동시에 파랗게 질린 온천인은 수십여 장 밖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두 발에는 어느새 푸른 빛을 품은 화염이 생겨나 있었다.

    그러나 한립은 거검을 움직여 상대를 추격하게 할 상황이 아니었다. 온천인이 쏘아 보낸 은색 빛이 거대한 종으로 변해 그를 덮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대한 종을 올려다 본 한립이 바구니 고보를 불러들이자 하얀 빛이 쏜살같이 그의 머리 위로 솟아올랐다.

    댕!

    그러자 거대한 종은 종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울림은 크지 않았지만 바로 밑에 있던 한립은 머리가 울려 잠시 몸을 가누지 못할 뻔 했다. 그가 가장 싫어하는 음공 종류의 공격이었다.

    짜증이 났지만 그는 어찌할 도리가 없이 바구니 고보에 더욱 영력을 쏟아 부었다. 바구니가 하얀 빛을 뿜어내 은색 종을 휘감아 끌어당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은색 종 역시 만만치 않아 눈부신 빛을 뿜으며 처음과 같은 종소리를 퍼트렸으나 바구니의 하얀 빛에 휩싸인 터라 그저 조금 불쾌한 느낌을 줄 뿐이었다.

    그제야 한립은 머리 위에서 서로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고보들을 놓아두고 상대를 돌아보았다.

    이미 안정을 찾은 온천인이 방금 진마의 화신들을 없앤 금빛 뇌전을 떠올리며 무언가를 알아챘다.

    “벽사신뢰야. 네 놈이 금뢰죽으로 만든 법보를 지니고 있는 게로구나!”

    마공과 사술의 천적이라는 전설 속의 벽사신뢰를 제외하고 그런 위력을 내는 뇌전을 들어본 일이 없었다. 오래전 난성해에 피바람을 몰고 왔다가 종적을 감춘 금뢰죽으로 법보를 제련해 갖고 다니는 자가 나타나다니 경악할 만한 소식이었다.

    상대의 입에서 벽사신뢰라는 이름이 나오자 한립의 안색이 미미하게 달라졌지만 그저 냉소로 화답할 뿐이었다.

    그 모습에서 자신의 예상이 맞았음을 깨달은 온천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마도 후계자답게 벽사신뢰에 대한 이해나 두려움이 남달랐던 것이다.

    게다가 눈앞에서 육극진마공이 파괴되는 것을 보았으니 벽사신뢰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한 번 확인한 셈이었다. 이제 그의 얼굴에도 약간의 불안감이 맴돌았다.

    한립을 바라보는 온천인의 얼굴에 비장한 기운이 어리는 순간이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던 저 놈을 살려두어선 안 돼. 금뢰죽으로 제련한 법보는 오직 내 손에 있어야만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다.’

    지금까지 멀리서 한립과 온천인을 지켜보던 소녀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소녀는 이미 서금충이 등장했을 때 한립의 신분을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이다.

    못본지 겨우 수십 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결단 초기였던 그가 후기에 이른 것에 크게 놀란 것이다. 하지만 허천정을 갖고 달아났다는 소문을 떠올리며 겨우 의문을 가라앉히는 중이었다.

    처음 둘의 싸움이 시작될때만 해도 그녀는 한립에게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 잠시 버티다가 달아날 것이라 생각했던 그가 우위를 점하다가 결국 금빛 뇌전을 뿜자 놀라 머릿속이 텅 비는 기분이 들었다.

    벽사신뢰!

    그녀는 온천명이 입 밖으로 말을 꺼내기 훨씬 전에 금빛 뇌전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겨우 천여 년 된 천뢰죽 밑동을 한립에게 친히 건네준 이가 바로 그녀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몇 십 년 만에 만년이나 된 금뢰죽으로 자라났다 생각지 못한 소녀는 한립이 다른 경로를 통해 구한 것은 아닐까 추측했을 뿐이었다.

    절색의 소녀는 바로 허천전에서 마지막으로 고별한 자령 선자였던 것이다. 그녀는 이 싸움이 생각보다 오래 지속될 것임을 느끼고 있었다.

    이때 한립의 바구니 고보 속으로 자신의 은색 종이 빨려 들어가려는 것을 발견한 온천인이 최후의 일격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의 미간 사이의 금광이 형태를 이루기 시작하더니 정교한 작은 뿔이 생겨난 것이다. 금빛 뿔 전체에는 심오한 부호와 고어가 빼곡하게 새겨져 있을 뿐 마기는커녕 순수한 천지영기의 기운이 충만했다.

    요사스런 뿔의 등장에 한립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가 아직 허공에 떠있던 푸른 거검을 향해 손을 뻗어 법결을 날려 보냈다.

    푸른 거검이 그의 명에 따라 다시 스물네 개의 비검으로 돌아오더니 검영분광술 법결에 의해 세 개의 검기를 더 불러내고는 한립의 곁으로 돌아왔다. 아흔 여섯 개의 비검들이 그의 도처를 돌며 또 하나의 보호막을 형성한 것이다.

    온천인이 담담히 소리쳤다.

    “원영기 노괴들이 아니고서는 결단기 선사 중에 적수가 없다 장담하던 내가 너무 오만했구나. 하지만 오늘 너를 본 것이 내게는 행운일 것이다. 만일 네 놈이 원영기에 이르러 만났다면 죽이기 얼마나 어려웠겠느냐!”

    이마에 금색 뿔이 솟은 뒤 다시 자신감을 회복했는지 이전의 당혹감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한립은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의식을 퍼트려 상대의 몸을 탐색했다. 딱히 수행이 증폭되었다거나 기이한 기운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럴수록 한립의 경계심은 더욱 커졌다. 상대가 이 상황에서 말장난을 하는 것은 아닐 테니 금색 뿔에 신묘한 기능이 있을 것이다.

    한립이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상대의 소매에서 금색 화염 여덟 개가 분사되었다. 금색 화염은 주먹만 한 주제에 엄청난 빛을 뿜어내며 온천인의 주변을 선회했다.

    또 다른 수단의 등장에 한립은 속으로 나마 길게 탄식했다.

    그도 지니고 있는 보물이 적은 편은 아니었으나 상대는 역성맹 소주이자 마도 제1인의 후계자로 무수히 많은 비술과 보물을 남겨두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한 개씩 보물들을 꺼내 비교해 보는 방식으로 가다가는 결국엔 자신이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다.

    한립은 몰랐으나 온천인의 머릿속에도 똑같은 생각이 스치고 있었다. 한립이 끊임없이 대단한 술법과 보물들을 꺼내 들자 곤혹스럽기 그지없었기에 상대의 숨통을 끊어 놓을 치명적인 일격을 가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금색 화염이 사그라지며 순금으로 만든 고대의 거울 여덟 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 면은 반질반질 윤이 났으나 다른 한 면은 울퉁불퉁한 투박한 거울들이었다.

    한립이 눈을 빛내며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형상이라 생각할 때 소녀의 놀란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팔문금광경(八門金光鏡)!”

    ‘팔문금광경? ’

    앵두빛 입술을 가리며 거울에 시선을 빼앗긴 소녀를 바라보던 한립이 드디어 팔문금광경에 대해 떠올리고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온천인 역시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자령 선자를 바라본 후 한립을 향해 냉랭히 돌아섰다.

    “이왕 내 반려가 정체를 알려주었으니 네 놈도 아는 바가 있을 테지. 억울해 말고 곱게 죽거라!”

    미간 사이에 있는 그의 뿔이 금빛을 분출해 거울에 닿자 연달아 여덟 거울을 거치며 금빛이 점점 굵어졌다.

    한립은 눈도 깜박이지 않고 상대의 행동을 주시했다. 늑대머리가 새겨진 옥패를 손에 꼭 쥐고 있는 그의 등 뒤로 은빛이 번지며 은백색의 날개가 펼쳐졌다.

    ‘팔문금광경을 지니고 있다는 게 말이 돼? ’

    어쩔 수 없이 쓴 웃음이 났다. 상대가 꺼내놓은 필살기의 이름을 듣고 처음 든 생각은 달아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야 전설 속에서나 전해지는 보물에 대항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팔문금광경은 성궁의 1대 성주를 죽인 절정의 법보로 그것을 사용하던 선사는 수백 년 동안 난성해에 이름을 떨쳤다. 당시 그 선사는 홀로 성궁 세력 전부와 겨룰 정도의 실력자로 명실상부 난성해의 1인자로 군림했었다.

    물론 그의 명성이 남달랐던 주요 원인은 천경 산인이라 불리던 그의 높은 수행 때문이었지만 그의 본명법보인 팔문금광경은 그 시절 난성해 제1의 공격형 법보였다.

    이 거울 법보로 인해 목숨을 잃은 선사의 수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고 원영기 선사조차 대여섯 명이 당했으니 공포스런 위력을 지닌 것은 분명했다.

    다행히 온천인이 지닌 여덟 개의 거울이 천경 산인이 지니고 있던 법보일 리는 없었고 겨우 복제품에 불과할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온천인의 수행에 정말 그런 위력적인 법보를 지녔다가는 체내에 주입하는 순간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육신이 터져나갈 수도 있다.

    한립도 정말 진품이 등장했다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부리나케 달아났을 것이다. 복제품이라 해도 그는 굳이 자신이 그것을 직접 겪어볼 마음은 없었다. 풍뢰시를 준비한 것도 안 되겠다 싶을 때 즉시 자리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풍뢰시의 전광석화 같은 속도를 믿었기에 긴장은 되었으나 당황하지 않은 것이다.

    이때 금빛이 마지막 거울에 반사된 이후 사람 머리만한 크기의 구체를 형성해 온천인의 머리 위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온천인이 침착하게 그것을 가리키자 금색 구체가 그의 손으로 들어왔다. 그는 잠시 한립 등 뒤의 날개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드러냈으나 곧 신경을 껐다.

    뒤로 물러나 있던 자령 선자는 온천인의 금빛 뿔과 한립의 은색 날개를 번갈아 보며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두 사람이 맞붙을 때마다 보여주는 신위에 그녀는 신세계를 보는 기분이었다. 그들의 어떤 공격에 마주하더라도 소녀는 죽은 목숨일거라 확신했다.

    긴장감이 감도는 분위기 속에서 소녀는 숨을 내쉬는 것도 잊은 채 둘을 지켜보았다.

    드디어 온천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금색 구체를 양손으로 눌러 터트리자 무수히 많은 금빛 파편들이 튀어 올라 다시 괴이한 움직임으로 작은 거울들 속으로 흡수되었다.

    동시에 금색 거울들이 몸을 떨며 사발 굵기의 빛기둥을 쏟아냈다.

    금빛 빛기둥은 나타나자마자 한립 앞에 당도해 그 경악할 만한 속도를 드러냈다.

    파팍.

    가장 바깥층에서 한립을 지키던 검영분광술로 만들어진 비검들의 방어막은 빛기둥에 닿자마자 사라져 버렸다. 청죽봉운검의 본체들마저 아무 반항도 하지 못하고 튕겨 나간 것이다.

    그 뒤의 오행환은 그래도 빛을 반짝이며 잠시 막아내는 듯싶었지만 곧 한립의 눈앞에서 산산조각이 났다.

    한립은 놀라기도 했지만 아까운 마음에 속이 쓰렸다. 오행환이 수행이 높은 선사들을 상대하기에는 부족해도 간단히 상대를 제압하는 데는 따라올 물건이 없어 자주 사용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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