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3
313화. 강적
“이런 곳에서 누군가 역천의 술법을 펼치다니 이상하구나. 음기가 몰려드는 형상을 보아하니 개양술(改陽術) 아니면 환혼술을 펼치는 게야.”
하얀 보호막 속의 마차에서 들려온 사내가 바로 환혼술의 정체를 알아 본 것이다. 뒤이어 젊은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는데 냉랭한 어투였지만 사내의 마음을 뒤흔드는 감미로운 목소리였다.
“저렇게 놀라운 현상이 벌어졌는데 보물이 출현하는 징조가 아닙니까?”
“내가 겨우 이보가 등장하는 것과 역천의 술법도 구분하지 못할 성 싶더냐?”
“흥! 그래도 선사의 말만 듣고는 못 믿겠습니다.”
여인의 거침없는 언사에도 사내가 화를 내기는커녕 그녀의 뜻에 따르려 했다.
“알고 싶다면 직접 가보면 될 것이다. 개양술이든 환혼술이든 결단 이상의 수행을 지닌 자만이 펼칠 수 있다. 수행이 상당히 퇴보할 터인데 나도 누가 이런 짓을 벌이는지 궁금하구나. 만일 수행이 그럭저럭 괜찮다면 문하로 들이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
사내가 여인을 유달리 총애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잠시 주저하던 여인이 그의 제안에 동의했다.
“그러시지요. 마차를 타고 비행한 지 1달이 다 되어가 저도 답답하던 차였습니다.”
“보호막을 흩을 테니 잠시 기다리거라.”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마차의 하얀 빛이 흩어지며 두 선사가 등장했다. 남녀가 마차의 양끝에 떨어져 앉아 있었다.
수려한 얼굴의 청년은 삼베옷에 맨발을 하고 있었는데 미간 사이에서 은은히 금빛이 새어 나오는 것이 특수한 공법을 익힌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옆에는 열예닐곱 살 정도의 소녀가 앉아 있었다.
소녀는 면사로 된 하얀 옷을 입고 있었는데 피부가 희고 매끄럽기가 마치 옥 같았고 속세에 찾아 볼 수 없는 절색이었다. 마차에 앉아 있던 소녀는 그다지 즐거워 보이지 않았는데 청년이 말한 대로 보호막이 사라지자 몸을 일으켰다.
줄곧 온화한 시선으로 그녀를 지켜보던 청년 역시 미소를 지으며 함께 마차에서 내렸다.
“원 선사의 예상에 따르면 귀무가 이 근처에서 나타날 확률이 높다고요. 저는 난성해 제일의 재난이라 불리는 귀무의 출현 시간이나 장소는 규칙이 없다고 들었는데요.”
“귀무가 불규칙적인 것은 맞지만 지난 수백 년 간의 기록을 찾아봤을 때 귀무의 일부가 화산이 폭발한지 얼마 안 돼서 나타났다는 거야. 이곳에서 연달아 두 개의 해저 화산이 폭발했었다니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지.”
소녀는 그 말에도 의문이 가시지 않는 듯했다.
“그렇게 많은 시간을 들여 규칙을 알아내고 저까지 데리고 이곳에 온 것은 모두 귀무를 보기 위해서인가요? 보통은 우연히 마주쳐도 최선을 다해 달아날 터인데 어째서죠?”
“안 될 것은 또 무엇이지? 요즘 딱히 할 일도 없으니 우연히 알아낸 규칙이 맞는 지 확인하는 것도 재미있잖아. 어차피 내가 귀무 따위를 피하지 못할 것도 아니고 말이야.”
소녀가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정말 섬으로 가 볼 생각인가요? 아마 술법을 펼치는 이에겐 중요한 순간일 텐데 방해가 될지도 몰라요.”
“나 온천인이 겨우 결단기 선사를 방해할까 두려워할 이유가 있을까? 상대가 분별없이 군다면 멸하면 그만이다.”
청년의 우아한 얼굴에 거만한 기색이 어리자 소녀는 할 말을 잃었다. 그의 능력이 뛰어난 것은 사실이었다. 아직 원영을 이루지 못했을 뿐 동급 선사에 비해 월등했다.
돌연 섬을 살피던 그의 눈에 놀라움이 어렸다.
“음?”
“무슨 일이죠?”
온천인이 한층 신중해진 얼굴로 그녀의 냉랭한 물음에 답했다.
“재미있게 생겼구나. 저 조그만 섬에 결단기 선사가 셋이나 모여 있는데 결단 초기인 나머지 둘은 그렇다 치고 나머지 하나가 특이해. 결단 후기의 수행에 의식이 나 못지않게 강해.”
그 말에 소녀도 흥미를 느꼈다.
눈앞의 청년의 의식이 얼마나 강한지는 직접 겪어 보아 잘 알고 있었다. 원영기 노괴와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의식이 강한 결단기 선사가 또 있다는 말은 믿기 어려웠다.
게다가 소녀는 청년이 고상한 척하고 있지만 그리 속이 넓은 이는 아니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손속이 악독하며 감정 기복이 심했고 사람의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여기는 자였다.
그가 소녀의 용모에 푹 빠져 있어 냉랭한 태도를 유지해도 큰 화를 입지는 않았으나 그녀 역시 상대를 분노하게 할 정도로 방자하게 굴지는 않았다.
사내가 자신의 진심 어린 애정을 쟁취하는 것을 아주 흥미로운 놀이라 여기고 있는 것이 그녀에게는 행운이었다.
아마 그런 청년의 성격상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동급 선사를 만나 살심을 품었을 가능성이 컸다. 원영기 노괴에 근접한 결단기 선사로서의 자만이 하늘을 찌르는 그였으니 비슷한 존재를 두고 볼 리 없었다.
* * *
섬 안의 어느 돌무지에는 어떤 이의 흔적도 드러나지 않았다. 돌연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두꺼운 삼색의 창이 등장해 순식간에 허공을 가르자 이변이 일어났다.
퍼석.
분명 아무 것도 없던 곳에 하얀 보호막이 등장한 것이다. 그 안에 몸을 숨기고 있던 하얀 그림자는 공포로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가 입을 벌려 옥으로 제련한 보랏빛 자를 뿜었을 때는 이미 창에 의해 가슴을 뚫린 뒤였다.
짙은 피비린내를 풍기며 시체가 떨어져 내렸고 거대한 창은 언제 딱정벌레 떼로 돌아왔는지 그의 잔해에서 저물대와 보라색 법보만을 챙겨 산골짜기로 방향을 틀고 있었다.
잠시 후 한립은 한 손에는 그 자의 저물대를 들고 살피며 다른 한 손으로 보라색 옥으로 된 자를 갖고 놀고 있었다. 수거한 물건을 대충 챙겨 넣은 그가 천천히 하늘 위를 올려다 볼 때는 안색이 더 없이 어두웠지만 말이다.
서금충을 방출하고 얼마 안 있어 그를 훑는 강대한 의식을 느꼈을 때 한립은 놀라 펄쩍 뛸 뻔 했다. 이 정도의 의식은 원영기 노괴의 것이어야 했다.
한립이 조심스레 그 뒤를 추적하니 그것은 결단기 선사가 내뿜은 의식이었다. 그 결단 후기의 선사는 한립의 의식이 닿는 순간 낌새를 눈치 채고는 금제를 펼쳐 더 이상의 탐색이 불가능하게 의식을 튕겨 내었다.
그의 존재를 파악하자마자 눈치를 보며 숨어있던 하얀 그림자와 시간을 끌고 싶은 마음이 사라져 즉시 서금충으로 하여금 죽이게 한 것이다. 이제 새로 나타난 결단 후기 녀석에게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한립은 고개를 돌려 산골짜기 안을 바라보았다.
이미 검은 기운이 먹물처럼 뭉쳐 있었고 원요의 환혼술 역시 중요한 순간에 다다라 있었다. 지금 누군가의 방해를 받는다면 연려를 구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녀 역시 큰 타격을 받아 중상을 면치 못할 것이다.
미간을 좁힌 한립이 얼굴을 굳히며 생각에 빠졌다.
비록 외모가 젊어 보인다고는 하나 저렇게 강대한 의식을 가진 동급 선사를 경시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두려워할 필요도 없었다.
지금 고민하는 것은 먼저 나서서 상대를 주도적으로 상대를 처리해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였다. 어쨌든 상대의 만만치 않은 실력으로 보아 다른 선사와 협공이라도 한다면 골치 아픈 일이 생길 것이다.
잠시 주저하던 그가 무엇을 감지했는지 즉시 몸을 일으켰다.
청년과 소녀가 타고 있던 마차를 벗어나 이쪽으로 날아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혹시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한립이 열댓 마리의 거대 원숭이 꼭두각시를 그가 있던 곳에 풀어놓았다.
이후 더는 시간을 끌지 않고 푸른 빛 줄기로 변해 남녀 선사를 맞이하러 날아올랐다.
동급의 선사와 산골짜기 인근에서 싸움을 벌였다가는 술법에 매진하고 있을 원요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고 수행이 남달라 보이는 상대를 순식간에 처리할 수 있으리란 보장도 없었기 때문이다.
다행인 것은 남녀가 전력을 다해 비행하고 있지는 않아 다가오는 속도가 비교적 느렸다는 점이었다.
순식간에 한립이 먼저 섬을 벗어나 그들과 조우했다.
미리 용모를 바꿔 허천정에 관련된 일로 자신을 노출할 가능성을 배제해 놓았기에 꺼릴 것이 없었다.
백여 장 거리를 두고 일남일녀를 바라보는 한립의 시선은 처음에는 무심했으나 곧 놀란 기색이 스쳤다. 미간 사이에서 금빛을 뿜어내는 청년이야 특수한 공법을 익혔으리라 쳐도 그 옆의 소녀는 미모가 놀라운 정도였다.
잠시 시선을 빼앗긴 사이 한립은 불현듯 낯선 소녀의 투명하고 맑은 눈이 어딘가 익숙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저렇게 인상적인 외모를 보고 떠올리지 못할 리 없었다.
청년과 소녀도 한립을 주시하고 있었다. 온천인이 뒷짐을 진 채 미소를 보였다.
“지금 역천의 비술을 펼치는 이와 아는 사이인가? 선사의 이름을 알고 싶소만.”
한립은 속으로 움찔했지만 그런 기색을 드러내지 않고 대답했다.
“내 이름은 알려줄 필요가 없을 듯 합니다. 그만 돌아가시지요. 어차피 이 기상이변은 보물로 인한 것이 아니니 굳이 이리 찾아들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청년은 한립의 거침없는 말에 눈빛이 서늘해졌다.
“내가 이곳에 온 것은 보물 때문이 아니라 당신 때문이오.”
“나 때문이라?”
온천인의 우아한 얼굴에 흉악한 기운이 감돌며 서늘히 소리쳤다.
“정체를 밝히고 싶지 않다면 어쩔 수 없으나 각 문파의 이름이 알려진 결단기 선사는 대략 파악하고 있소. 아마 선사의 낯선 용모로 보아 산수에 불과하겠지. 그렇다면 내가 두 가지 선택권을 주겠소! 본 맹에 가입해 신구당(神鳩堂)에서 집법사를 맡아 내 밑으로 들어오던지 아니면 이곳에 묻히던지 결정하시오.”
옆에 있던 소녀가 돌연 입을 열어 담담히 사내의 신분을 밝혔다.
“온 공자는 역성맹 육도 극성 선배님의 제자이니 선사가 본 맹에 귀순한다면 높은 신분을 보장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육도의 후계자? ’
어쩔 수 없이 한립도 안색이 변했다. 비록 평범한 내력을 지닌 자는 아닐 것이라 여겼지만 한립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온천인은 그런 한립의 표정 변화에 거만한 눈빛을 흘렸다. 육도의 후계자라는 이름에 낯선 선사들이 놀라거나 두려움에 떠는 모습을 은근히 즐겨왔던 것이다.
출생과 신분 역시 실력의 일부분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곧이어 입꼬리를 비트는 한립의 모습에 온천명의 유쾌함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알고 보니 역성맹의 소주께서 왕림하셨는데 몰라 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귀 맹에 들어갈 마음도 이곳에 묻힐 마음도 없으니 다른 제안을 드리지요. 온 소주가 제 대신 이곳에 묻히는 것은 어떠할지요?”
그의 말투에는 비꼬는 기색이 가득했다. 상대의 흉흉한 기세로 보아 어차피 좋게 해결할 수 없을 듯 했던 것이다.
처음부터 역도의 후계란 자에게 은은한 살기를 감지하고 있었기에 자신이 어떤 태도를 보이든 살려 보낼 마음이 없다는 것을 눈치 채고 있었다.
이미 허천정 때문에 온갖 무리에게 쫓기는 형편이니 그 사유가 한 가지쯤 더 추가된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또한 지금은 다른 이의 모습을 하고 있으니 추격을 당해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하하!”
온천인은 화가 치솟아 웃음을 터트리면서도 표정이 살벌했다. 그리고 웃음소리가 그치기도 전에 맹렬히 남색 빛을 방출했다.
슉-
갑자기 사라진 남색 빛에 한립은 생각할 것도 없이 손에 쥐고 있던 옥패를 발동해 노란색과 붉은색이 섞인 보호막을 펼쳤다.
쾅!
이어 보호막 바로 앞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낸 남색 빛이 충돌해오자 한립은 수 장 밖으로 밀려났다.
이때서야 남색 빛이 수 촌 길이의 특이한 송곳 형상을 하고 파지직 거리며 이상한 소리를 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한립의 열 손가락이 허공을 튕기며 푸른빛들이 분출되어 남색 빛을 공격하니 송곳이 일시적으로 튕겨나갔다.
이어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저물대를 스치자 오행환이 맑은 소리를 내며 수중에 들어왔고 소맷자락에서는 스무 개가 넘는 비검들이 미친 듯 분출되어 상대를 기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