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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312화 (69/2,000)
  • # 312

    312화. 잠입하다

    백의 사내가 섬을 보더니 안색이 달라졌다.

    “섬 위의 이상 현상이 변하고 있습니다.”

    노인과 매 씨 오누이도 역시 그곳을 바라보았다.

    검은 구름이 요동을 치며 섬의 어느 곳을 중심으로 회전하기 시작하니 부근의 음기들이 모여 들며 더욱 규모가 커졌다. 마치 검은 용이라도 나타날 기세였다.

    “보물이 당장이라도 나타나려는 것일까요?”

    “보물이 아니라 누군가 최상급 공법을 수련하는 중이라면 화를 면치 못할 수도 있겠지. 허나 세상에 공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으니 일단 가보자꾸나. 어떤 선배님께서 수련 중이시라면 사정을 설명하고 물러나면 된다.”

    여인의 오라비가 말을 마치자마자 법기를 재촉해 섬으로 날아가 버렸다. 매 소저는 잠시 주저 했으나 그가 걱정되었는지 곧 속도를 높여 그 뒤를 바짝 쫓아갔다.

    이를 본 백의 사내가 머뭇거리다가 소 노인을 보고는 의혹을 드러냈다.

    “소 선사는 가시지 않습니까?  보물이 있을지 모르니 어서 움직여야 한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벌써 생각이 바뀌신 겁니까?”

    노인이 노련하게 웃으며 자신의 수염을 쓸어내렸다.

    “노부는 그저 제안을 했을 뿐 그리하겠다 말한 적은 없습니다. 게다가 이번에는 완배들을 데리고 유람을 나온 차라 위험을 무릅쓰기 어려우니 보물이 있다 해도 세 분께 양보하지요.”

    “흥! 그럴싸하지만 이유를 둘러대시지만 우리를 움직여 어떤 위험이 있는지 알아보려는 마음이시겠지요.”

    눈을 부릅뜨긴 했지만 이미 멀리 가버린 매 소저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그 역시 참지 못하고 몸을 날렸다. 노인이 눈을 가늘게 뜨고 사라져가는 사내를 지켜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미녀는 화를 부르지. 저리 정에 휘둘려서야 고생 꽤나 하겠구나.”

    그 말에 노인 뒤에 서있던 남녀 제자들도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세 선사가 섬 가까이 진입하자 그들 뒤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전해졌다.

    “불필요한 모험을 하지 않다니 현명하구나. 정말 대단한 보물이 나타났다 한들 너희가 얻어 어디다 쓰겠느냐?”

    소 노인은 기겁했다. 그를 선두로 모두가 고개를 돌려 살폈지만 어디를 보아도 사람의 그림자는 찾을 수 없었다. 노인은 마음이 서늘해져 공손히 예를 올렸다.

    “혹시 선배님의 존함을 알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태양종 소초가 선배님을 뵙습니다.”

    아직도 몸을 드러내진 않았으나 서늘한 목소리는 사방에서 들려왔다.

    “태양종이라면 보전공 녀석과 무슨 관계가 있더냐?”

    “보 종주님께서 제 사숙이 되십니다. 저희 종주님을 아시는지요?”

    잠시 주저하던 목소리가 한결 온화해졌다.

    “헤헤, 일면식이 있을 뿐이다. 본래 성가신 녀석들을 모두 처리하고 움직이려 했으나 그래도 지인 문하의 선사들이니 살려두마. 그래도 이곳에서 꼼짝 말고 있는 것이 좋을 게다.”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선배님께서 거슬려 하실 만한 일은 절대 하지 않을 것입니다.”

    노인은 얼굴이 파랗게 질렸지만 그저 문파 어르신의 넓은 인맥에 감사할 뿐이었다.

    * * *

    섬에 도착한 매 씨 오누이와 백의 청년은 골짜기 부근으로 진입하려다가 결계에 저지당했다. 세 선사의 귓가에 어떤 사내의 침착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모두 돌아가시게. 안으로 들어가고자 한다면 나도 더 이상 봐주지 않을 것이니.”

    바로 한립의 목소리였다. 매 씨 오누이와 백의 청년이 놀라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중년 사내가 조금 가라앉은 얼굴로 소리쳤다.

    “누구신지 모르겠으나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알려주시지요!”

    하지만 하얀 결계 뒤의 한립은 이에 답해줄 마음이 전혀 없었다.

    “열을 세겠다. 그때까지 사라지지 않는다면 영원히 떠나지 못할 것이다! 십, 구, 팔…….”

    축기기 선사 셋이 상대의 거만한 언사에 놀랐으나 정말 결단기 선사 이상인지 확신하지 못해 주춤했다. 그들이 시간을 지체하는 사이 빛이 반짝이며 열댓 마리의 거대 원숭이 꼭두각시들이 나타났다.

    매 소저가 한 눈에 그것들의 정체를 알아보고는 안색이 파리해졌다.

    “오라버니, 어서 물러나요! 모두 고계 꼭두각시들로 우리가 상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인이 바로 중년 사내의 어깨를 잡아채 달아나기 시작했고 백의 사내도 민첩하게 그 뒤를 따랐다. 세 선사를 뒤쫓던 꼭두각시들은 그들이 완전히 섬을 벗어나고서야 결계 안으로 돌아와 종적을 감췄다.

    지금 그가 돌려보낸 이들은 시작에 불과했다. 아무래도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면 멀리 떨어진 곳에 있던 고계 선사들도 이 섬에 대한 소식을 알게 될 것이다.

    한립이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마지막 날이 고비라 해도 기껏해야 세, 네 명의 결단기 선사를 끌어 모으는 정도일 것이지 원영기 노괴가 나타날 가능성은 희박했다.

    어쨌든 이곳은 외성해가 아니라 내성해이니 이런 망망대해에 결단기 선사도 얼마 없을 것이다. 그의 예상대로만 된다면 지금 그의 수행과 능력으로 두려워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비록 다른 이들의 주목을 끌면 안 되는 입장이었으나 정말 누군가 경고를 무시하고 결계를 침입한다면 확실히 처리할 생각이었다. 생각을 정리한 그가 차분한 얼굴로 두 눈을 감았다.

    * * *

    이때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온 매 씨 오누이와 부 씨 사내를 본 소 노인이 상황을 묻고 있었다.

    “이렇게 빨리 섬을 돌아보신 겝니까?”

    여인이 아직도 놀란 기색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미 늦었습니다. 섬에 이상한 조짐이 발생한 곳에는 금제가 설치되어 있을 뿐 아니라 고계 꼭두각시를 부리는 선사가 버티고 있었어요. 아무래도 결단기 선사가 있는 듯합니다.”

    “결단기 선사가요?  그럼 정말 섬에 무언가 있긴 있다는 말이로군요?”

    백의 사내가 가볍게 자신의 옥피리를 쓰다듬으며 고개도 들지 않고 답했다.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분명 우리가 가장 먼저 도착했을 텐데 이미 결계를 쳐 놓고 있었다니 무언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 테지요.”

    소 노인이 잠시 생각을 하다 다시 물었다.

    “그럼 상대의 얼굴은 보셨습니까?  노부가 아는 선배님일 수도 있어 그러합니다.”

    그 말에 나머지 선사들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세분 모두 상대의 모습도 확인하지 못하신 겝니까?”

    그 말에 백의 사내가 방금 겪은 일을 떠올렸는지 안색을 굳혔다.

    “흥! 못 믿으시겠다면 직접 한번 가보시지요. 그때도 상대가 살려 보내줄 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말입니다.”

    “하하! 그냥 드리는 말씀입니다. 결단기 선배님이 계신데 제가 어찌 가겠습니까?  우리에게 기회가 있을 리 없지요.”

    “그건 확실하지 않은 일입니다. 제아무리 결단기 선사라도 우리 같은 축기기 선사가 열댓 명이 모이면 상대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백의 사내가 바로 고개를 저었다.

    “농담이시지요?  그렇게 많은 축기기 선사를 모을 수도 없을뿐더러 목숨을 걸고 결단기 선사에게 대항하지 않을 것입니다.”

    백의 사내의 말이라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중년 사내의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무어라 반박하지는 못했다. 그때 여인이 오라비를 보며 제안했다.

    “오라버니, 우리가 나설 곳이 아닌 듯 하니 이만 물러나요.”

    그 말에도 중년 사내는 머뭇거렸다. 아무리 결단기 선사가 나타났다지만 보물을 구경도 못해보고 떠나는 것이 아쉬웠던 것이다. 그들 같은 산수들은 보물을 구경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중년 사내가 고민을 끝내기도 전에 서늘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가긴 어딜 간다는 말이냐?  내 허락이 떨어지기 전에는 아무도 이곳을 떠나지 못할 것이다.”

    화들짝 놀란 매 씨 오누이와 백의 선사가 당장 저물대로 손을 가져가며 주위를 경계했다. 그러나 아무리 사방을 둘러보아도 목소리의 주인을 찾아 낼 수 없었다.

    중년 사내가 의식을 퍼트려 탐색을 하면서 노인을 향해 물었다.

    “소 선사 어찌된 일이오?”

    “제게 묻지 마세요. 저도 이곳을 떠나지 못하기는 매한가지입니다.”

    노인도 정말 어쩔 수가 없었다. 그 말의 진위를 가리기도 전에 십여 장 밖에서 노란 빛이 반짝이며 하얀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 하얀 그림자는 모호하기 이를 데 없어서 운무 속의 환영을 보는 기분이었다. 놀란 매 씨 오누이가 서둘러 방어 법기를 운영하고는 경계심 어린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허! 감히 그런 실력으로 나와 겨뤄보겠다는 것이냐?”

    여인이 상대에게 느껴지는 영기의 파동을 통해 결단기 선사의 신분을 알아보고는 급히 해명했다.

    “그럴리가요. 다만 저희가 선배님께 무슨 잘못을 하였기에 떠나지 못하게 하시는지 여쭙고 싶을 뿐입니다.”

    “너희가 내게 잘못할 능력이나 되더냐?  그저 상황을 파악하기 전에 이곳 일이 퍼져나가는 것을 막고자 할 뿐이니 모두 이곳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말거라. 내 말에 따르지 않는 이는 즉시 멸할 것이다.”

    작게 탄식한 백의 사내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시다면 언제 섬으로 가서 상황을 파악하실 예정이십니까?”

    “바로 움직일 것이니 걱정 말거라! 그 전에 섬에서 보고 들은 것들이나 자세히 일러 보거라.”

    여인이 신중한 얼굴로 먼저 입을 열었다.

    “사실 저희도 아는 것이 많지 않습니다. 그저 열댓 마리의 꼭두각시들에 쫓겨 물러나게 된 것인데…….”

    설명이 다 들은 하얀 그림자가 웃음을 흘렸다.

    “뭐 열댓 마리나 되는 고계 꼭두각시를 조종하는 자라니 축기기 선사일 리 없겠구나. 너희가 영리하게 달아났으니 망정이지 조금만 지체 했다가는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야.”

    하얀 그림자는 말을 마치기도 전에 노란 빛 줄기로 변해 섬으로 날아갔다. 남은 이들이 기뻐하며 막 자리를 뜨려는데 서늘한 음성이 유유히 울려 퍼졌다.

    “내가 돌아오기 전에 달아나는 자가 있다면 내가 추격해 죽이더라도 원망하지 말거라. 나는 그리 관대한 성품이 아니거든.”

    노인 등이 서로 시선을 교환하며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사실 노란 빛이 멀어짐에 따라 달아나고 싶은 욕망이 스멀스멀 끌어 올랐으나 상대의 수행을 보아 감히 떠나는 이는 없었다. 이때 골짜기 입구의 한립은 조용히 두 눈을 뜨고 있었다.

    “기다리는 꼴이 내일이나 되어서 오려나 했더니 참을성이 없는 녀석이로군.”

    약간 불만스런 말투였다. 그가 또 무언가를 감지했는지 노란 빛 줄기가 다가오는 방향과 다른 쪽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또 오는군. 결단기 선사를 위협해 돌려보낼 수도 없으니 아무래도 하나씩 처리하는 수밖에 없겠어.”

    작게 탄식한 그가 주저 없이 허리춤의 영수대를 꺼냈다. 대량의 삼색 서금충이 날아올라 그의 머리 위를 선회하더니 삼색의 거대한 창을 만들어냈다.

    “가거라! 굳이 죽음을 자초한다면 어쩔 수 없겠지!”

    그의 눈에 살기가 스쳤다. 노란 빛은 섬에 진입했으나 결계에 의해 잠시 멈춰 섰다. 곧 하얀 빛이 사라지며 사십 대의 혈색 없는 중년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허공을 쳐다보더니 다시 하얀 빛을 뿜어내며 모호해 지기 시작했다. 다시 허공 속으로 스며든 것이다. 일단 은닉술을 펼쳐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볼 생각이었다.

    곧 섬의 다른 쪽에서 십여 개의 붉은 빛 줄기가 등장했는데 하늘을 나는 아름다운 마차를 둘러싸고 있었다.

    마차는 일곱 장 길이에 목재로 제련된 것으로 기이한 문양과 주술이 빼곡히 새겨져 있었고, 그것을 세 마리의 푸른 괴조들이 끌고 있었다. 괴조들은 각각이 6개의 눈과 4개의 날개를 지닌 흉악한 몰골이었으나 속도만은 극히 빨랐다.

    “멈추거라!”

    마차 안에서 사내의 음성이 들려오자 동시에 푸른 새들이 날갯짓을 멈추었다.

    그 곁을 둘러싼 붉은 빛들이 사라지며 동일한 연녹색 궁장 차림의 여인들이 젊고 아름다운 얼굴을 드러냈다. 그녀들은 모두 검은 머리를 곱게 올리고 등 뒤에 쌍검을 매고 있었다.

    여인들은 마차의 좌우에 질서정연하게 늘어서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모두 축기기 선사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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