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310화 (67/2,000)
  • # 310

    310화. 환혼술

    십여 장에 이르는 돌로 만든 대청에 들어간 원요가 한립에게 차를 대접했다.

    “요 근래 한 형의 명성은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제일가는 보물인 허천정이 결단기 선사의 수중에 떨어질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단시일 만에 결단 후기에 이른 것이 전설 속의 보천단을 복용했기 때문입니까?”

    자리에 앉자마자 허천정 일을 언급한 것이다. 한립은 가볍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알고 계실 테니 숨기지 않겠습니다. 허천정은 제게 있지만 수행이 낮은 탓에 아직까지 열어보지도 못했습니다. 계륵이나 다름없는 것이지요. 수행이 지금에 이른 것은 보천단과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어차피 자신의 수행이 여인을 월등히 압도하는데 굳이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허천정을 열어보지도 못하셨다고요?”

    그 말에 원요가 잠시 놀라더니 입가를 끌어올리며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표정으로 보아 그다지 자신의 말을 신뢰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한립은 더 해명하는 것도 귀찮아 단도직입적으로 할 말을 시작했다.

    “원 소저에게 만년영액이 아직 남아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허천정을 가졌다는 소문이 파다해 이전에 지니고 있던 것을 거의 다 소진해 높은 가격에라도 교환을 하려 합니다. 소저가 손해를 볼 일은 없을 터이니 알려주시지요.”

    외성해에서 만년영액을 지니지 못했다면 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보물의 중요성을 체감했으니 이번 기회에 나머지 반병을 차지할 생각이었다.

    원요는 잠시 미간을 좁히며 말을 삼갔다. 그러다 여인의 손이 허리춤을 스치더니 돌 탁자 위에 푸른 병 하나가 놓였다. 그녀는 주저 없이 그것을 한립 쪽으로 밀어놓으며 말했다.

    “남은 만년영액은 단 한 방울도 사용한 적이 없습니다. 어떤 물건이나 영석도 받지 않고 한 형에게 드리지요.”

    “그냥 주겠단 말입니까?”

    “그러합니다. 아무리 만년영액이 귀한 것이라 해도 생명을 구해 주신 은혜에는 미치지 못하지요. 선사께서는 원요가 여인이라 은혜를 갚을 줄도 모른다 여기십니까?”

    “그것은 아니오만…….”

    말끝을 흐리는 그를 보며 원요의 촉촉한 눈에 웃음이 어렸다.

    “허천전에서부터 생사고락을 함께 했고, 제 목숨을 여러 번 구해주셨으니 앞으로는 그저 원요라 불러주시면 됩니다. 무슨 선사라 칭하시나요?”

    그녀는 허천전 이야기를 꺼내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살며시 얼굴을 붉혔다. 그 아름다운 얼굴에 한립이 잠시 멍해졌다가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원요 소저가 그리 말씀하시니 저도 억지로 예를 차리지는 않겠습니다.”

    이후 탁자 위의 작은 병을 집어 들더니 뚜껑을 열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확실히 만년영액이었다. 만족스런 얼굴로 병을 저물대 안에 챙겨 넣은 그가 잠시 생각하다가 옥으로 된 새하얀 병 두 개를 꺼내 원요에게 건넸다.

    “이게 무엇입니까?”

    “법력 증진에 효험이 있는 단약으로 원요 소저의 수행에 도움이 될 만한 것들입니다. 제 답례라 생각하시지요.”

    “이미 말씀 드렸다시피 만년영액은 제가 그냥 드리는 것인데 이리 답례를 하시면 소녀가 난처해집니다.”

    “거절 하신다면 후회하실 겁니다. 이 단약들은 육급 요수의 요단으로 만든 것이라 원요 소저처럼 결단 초기 최정상에 이른 선사가 복용한다면 결단 중기에 이르도록 도와줄 겁니다.”

    “육급 요수의 요단으로 만든 단약이요?”

    단아하게 웃던 그녀의 얼굴이 놀람으로 뒤덮였다. 원요가 재빨리 병을 들어 안을 살펴보자 정순한 영기가 코를 찔렀다. 그녀는 두 손으로 병을 꼭 쥐더니 마음을 돌렸다.

    “다른 물건이었다면 정말 거절했겠으나 이 단약들은 꼭 필요한 곳이 있으니 감사히 받겠습니다.”

    이 두병이면 원요의 수준을 수십 년을 앞당길 만 했다. 한립 역시 여인이 자신이 건넨 단약을 받아 들자 한숨을 둘렸다. 안 그랬다면 그가 다음 말을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다행입니다. 사실 제가 부탁드릴 일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방금 밖에서 본 청양문의 구령진이 영기를 숨기는데 신묘한 능력을 발휘하더군요. 그 진법에 관련된 자료를 복제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구령진이요?  그러시지요.”

    아마 앞서 받은 단약 탓이었는지 원요가 거침없이 답하며 저물대에서 검은 서책을 꺼내 한립에게 주었다.

    “이것은 청양문 진법 경전으로 구령진 외에도 위력이 대단한 여러 진법들이 기재되어 있습니다. 모두 한 형께 드리겠습니다.”

    그 말에 한립이 즐겁게 서책의 내용을 훑어보았다. 그녀의 말대로 안에는 구령진을 포함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여러 진법들이 적혀 있었다.

    잠시 내용을 살피다 흡족한 마음으로 의식을 거두어들이던 그는 원요가 할 말이 있는 듯한 얼굴로 망설이는 것을 발견했다.

    “원 소저, 무슨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이미 청양문 일을 아셨으니 아마 저에 대해서도 들으셨겠지요.”

    상대가 어째서 지금 그 일을 언급하는 지는 알 수 없으나 한립은 사실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무리에 섞여 원 소저가 청양문 소주의 첩이 될 뻔 했으나 소주를 해하고 달아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물론 그것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요.”

    “그 말은 모두 사실입니다. 저는 그 날강도 같은 자의 첩이 될 뻔 했고 청양문의 힘에 기대 살아갈 허황된 꿈을 꾸었었지요. 아마 한 형께선 수치심도 없는 여인이라 여기실지 모르겠습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원래 수도계가 위세 있는 가문의 출신이거나 엄청난 영근 자질을 타고 나지 못했다면 살아가기 얼마나 어려운 곳입니까! 수많은 여 선사들이 살아남기 위해 고계 선사의 힘을 빌리는 것은 허다한 일입니다.”

    그 말에 원요가 한립을 바라보았다.

    “작은 수도 문파 출신이었던 저와 연려 사저는 자질이 평범해 아무리 수련해도 결단은커녕 축기기에 들기도 힘들었지요. 그래서 문파를 떠나 높은 수행을 지닌 사내를 찾아 반려를 맺기로 하였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합당한 이를 찾을 수 없었고, 저희를 향해 흑심만 품는 무뢰배들만 한 무더기 조우했지요.

    이후 사정이 생겨 연려 사저와 헤어졌고 몇 년이 지난 후 그녀가 청양문 소주의 노정이 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약속을 저버리고 수행을 포기한 그녀에게 화가 나 사정을 따져 물으러 갔다가 청양문 소주의 눈에 들었고, 그는 제가 첩이 된다면 연려 사저를 노정의 신분에서 풀어준다고 약속했습니다.

    당시 식견이 없던 저는 그 자의 높은 수행과 명성만을 보고 흔들렸죠. 연려 사저가 극렬히 반대했지만 깊이 생각지도 않고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과거의 성급한 선택을 후회하고 있다는 듯 그녀의 표정이 아련해졌다가 싸늘하게 변해갔다.

    “청양문으로 들어가는 길에 연려 사저가 그자 몰래 그간의 사정을 얘기해주었습니다. 그녀도 첩실이 된다는 말에 속아 문파로 잡혀가 노정이 되어 버렸다고요. 게다가 그녀와 비슷한 사정을 지닌 여인들이 한둘이 아니며 일단 청양문에 들어가면 철저히 자유를 잃고 갇힌 채 생활한다고 했습니다.

    크게 놀란 저는 사저와 함께 달아나려 했으나 그 소주가 그리 색을 밝힐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청양문에 들아가기도 전에 제 몸을 탐냈고, 어쩔 수 없이 함정을 파 소주를 기습하게 되었지요.

    그 결과 계획은 성공했으나 연려 사저가 그 도적놈에게 당해 몸을 크게 상했습니다.

    간신히 원신만 몸에서 빠져 나와 어느 법기에 의탁하게 되었는데 아무리 강한 음기의 법기라 해도 혼백이 나날이 기력을 잃어갔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써보았지만 연려 사저의 원신은 결국 영성을 잃어갔고 적합한 육체를 찾아도 빼앗을 수조차 없게 되었습니다.”

    잠시 말을 멈춘 그녀의 눈에 아픔이 어렸다. 그때 한립 역시 양혼목을 찾아 허천전에 들어왔던 그녀를 떠올렸다.

    “양혼목을 구하려던 것도 연려 선사의 혼백을 위해서였군요.”

    원요가 다시 기운을 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맞습니다. 청양문 소주에게서 얻은 서책 중 하나를 통해 허천전에서 자라고 있다는 양혼목에 대해 알았고 바로 그것을 위해 허천전에 가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곳이 그리 흉흉할 줄은 몰랐기에 한 형이 여러 번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그곳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을 겁니다.

    이제 연려 사저의 원신이 양혼목의 배양을 받아 원래의 기력을 대부분 회복했으니 스스로 몸을 빼앗지는 못하여도 환혼술(還魂術)을 통해 육체를 얻을 정도는 되었습니다.”

    “환혼술이라면 죽은 육체에 혼백을 불어넣는 비술이 아닙니까!”

    “바로 그것입니다.”

    “원 선사,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아시는 겁니까?  그런 술법은 위험하기도 하지만 성공한다고 해도 그 대가를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환혼술의 특성상 시전자는 엄청난 수행의 손실을 겪게 됩니다. 지금 소저의 수행으로 이 비술을 시행하면 십중팔구는 금단을 망치고 축기기 신세로 돌아갈 것입니다.”

    하지만 원요의 표정은 담담하기만 했다.

    “당연히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저 다른 수도자의 몸을 빼앗는 것이라면 몇 가지 원칙만 지키면 되겠지만 이미 죽은 육신에 생명을 불어 넣는 일에 어찌 그만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 모습에 한립이 오히려 답답한 듯 경고했다.

    “연려 사저란 이는 양혼목의 도움을 받고도 스스로 몸을 빼앗을 힘도 없단 말입니까?  아니면 원 소저가 결단 중기에 이른 후에 비술을 시행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수행이 떨어지더라도 완전히 금단을 망치는 결과에는 이르지 않을 겁니다.”

    “사저의 원신이 너무 많은 원기를 잃은 데다 혼백의 형태로 떠돈 지 오래 되어 점차 이지를 상실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양혼목이 있다 해도 일, 이 년 내로 본성을 상실하겠지요. 그때는 환혼술을 시전해도 백치로 깨어날 수밖에는 없습니다. 더욱이 최근 아주 적합한 신체를 찾아 환혼술 진법을 펼쳐 놓았습니다. 누군가 방해만 하지 않았다면 두 달 내로 비술을 시행할 예정이었지요.”

    그녀의 결심은 확고했다. 한참 후 한립이 탄식했다.

    “제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도울 일이 있어서겠지요?”

    “이미 여러 번 신세를 졌는데 또 이런 부탁을 드려서 송구합니다. 하지만 환혼술은 반드시 극히 음한 기운이 흐르는 곳에서 실행해야 하며 누군가 방해를 하면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안 그래도 이 술법 자체가 불러오는 커다란 동요를 감추기 어려운데 청양문까지 저를 찾아냈으니 한 형 외에는 달리 도움을 청할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며칠만 시간을 내주시어 소녀가 비술을 펼치는 동안 호법을 서주십시오. 연려 사저의 생사가 걸린 일이니 어떤 조건을 제시한다 하셔도 원요가 최선을 다해 들어드릴 것입니다.”

    그녀의 결연한 표정에 한립은 말을 잃었다. 그러나 그는 이곳에서 시간을 지체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자신의 코가 석 자이니 또 다른 일을 떠안기가 꺼려진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 단전을 망치면서까지 다른 이의 생명을 구하려는 원요의 간절함이 그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던 어떤 감정을 건드렸다.

    마음을 굳힌 그가 쓰게 웃었다.

    “원 소저가 금단을 포기하면서까지 연려 사저를 구하고자 하시니 호법을 서드리겠습니다. 다른 조건은 필요 없고 이전에 넘긴 명혼주에 대한 이야기나 들려주십시오. 아무래도 꺼려지는 바가 있어 아직까지 제련을 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리고 설마 그 극히 음한 곳이 이미 발각된 이 섬은 아니겠지요?”

    이번에는 원요도 진심으로 감동했다

    “한 형께서 도와주신다니 어찌 감사를 드려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술법을 펼치는 곳은 이곳이 아니니 안심하시지요. 며칠 거리에 불과하긴 하나 잠시 청양문의 추적을 피하는 데는 충분할 것입니다.

    그리고 명혼주 문제는 간단합니다. 본래 제혼 역시 청양문 소주의 것이라 아직 제련을 완성하지 못했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니 제혼을 통제하는 명혼주에도 약간의 결함이 있는 것이지요.

    명혼주를 제련하는 이는 심한 두통에 시달리고 그 두통은 더욱 극심해 집니다. 허천전에서 귀무를 통과하기 위해 저도 제련을 해보았는데 절반도 이르지 못해 두통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지요. 제혼수를 제련하는 방법은 이곳에 있으니 드리겠습니다.”

    그녀는 품에서 녹색 서책을 꺼내 주었다. 한립도 드디어 의문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어쩐지 혼백을 잘 잡아먹기는 했으나 위력이 소문에 못 미친다 했더니 아직 완성되지 않은 제혼이었던 것이다.

    그는 조금 실망해 서책을 대충 저물대 속으로 집어넣었다.

    “이미 이곳은 노출되었으니 만일을 대비해 바로 거처를 옮기시지요.”

    “예, 저도 그리하려 했습니다. 잠시 짐을 챙길 것이니 바로 출발 하시지요.”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