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309화 (66/2,000)

# 309

309화. 머리를 빌리다

쿠르릉.

아무 것도 없던 허공에 파문이 일자 경치가 일순간에 달라졌다. 황폐한 석산이 아니라 엄청난 영기가 넘쳐흐르는 절경의 녹음이 펼쳐진 것이다. 해골 선사와 흉악한 인상의 선사 역시 입이 떡 벌어졌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허허, 본 문의 비밀 진법인 구령진(拘靈陣)입니다. 영기를 감추는 데는 세상에 보기 드문 능력을 발휘하는데 요녀의 수행이 부족해 이 정도이군요. 본문 사조님께서 친히 진법을 설치하셨다면 조금의 영력도 드러나지 않았을 겁니다.”

우 노인이 다른 이들의 표정을 살피며 자부심을 드러냈다. 한립 역시 의아해 하다가 노인의 말에 마음이 동했다. 구령진을 어찌 설치하는 지만 알면 이후 그의 거처는 더욱 안전해 질것이다.

푸른 산맥에는 환영이 사라져 커다란 석문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원요의 거처로 통하는 듯 했다. 노인의 얼굴이 흉악해졌다.

“움직이시지요.”

동시에 해골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에서 검은 칼날을 분출했는데 무척 괴이한 생김새였다. 또한 흉악한 사내는 손에서 갑자기 산을 쪼갤 듯한 거대한 도끼를 꺼내 한립을 흠칫 놀라게 만들었다.

이런 거대한 병기 법보를 쓰는 이는 극히 드물었다. 노인 역시 하얀 비검을 입에서 꺼내다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는 한립을 바라보았다.

“선사께서는…….”

작게 미소 지으며 한립이 입을 떼려 할 떼 석문이 갑자기 개방되며 푸른빛이 날아올랐다. 노인도 그것을 보았는지 곧바로 그곳으로 향했다.

녹색 빛이 허공을 한 바퀴 돌더니 검은 치마를 입은 살결이 뽀얀 가인이 등장했다. 촉촉한 눈빛이며 싱그러운 웃음이 고혹적이기 그지없는 여인이었다.

바로 허천전에서 한립과 헤어진 원요였다.

오랜 세월 보지 못했건만 미모는 그대로였고 오히려 더욱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모두를 훑다가 청양문 노인을 발견하더니 안색이 급변했다. 마치 노인에게는 미혼술이 전혀 통하지 않음을 안다는 듯 불편한 마음을 그대로 드러냈다.

“소녀의 거처에 찾아 주신 것은 무슨 연유이신지요?”

뻔히 자신을 알아보고도 그녀가 이리 나오자 우 노인은 뒷골이 땅기는 기분이었으나 노기를 가라앉히고 음산히 웃었다.

“요망한 계집이 이제와 모른 척해봐야 소용이 없다! 본 문 소주를 암살하고 보물을 들고 달아나 언제까지 숨어 살 수 있을 줄 알았더냐?”

노인의 물음에 답하지 않은 원요는 무리의 수행을 하나하나 살폈다. 그 결과 마음이 무거워졌다.

노인과 흉악한 인상의 사내는 자신과 같은 결단 초기로 그런대로 괜찮았으나 해골 같은 흑의인과 평범한 외모의 청색 장포를 걸친 사내는 결단 중기와 후기 선사로 감당할 수가 없음이 뻔했다.

만일 저 넷이 협공한다면 아무리 엄청난 위력의 보물을 퍼붓고 비술을 펼친다 해도 승산이 없을 것이다. 그 와중에 해골 사내와 거한은 원요의 외모를 보고 아쉬운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청양문 삼양 노마에게 원한을 산 여인만 아니라면 저런 절세가인과 수련반려가 되면 얼마나 좋겠는가!

위기의 순간이지만 원요의 표정은 더욱 침착해졌다. 싸늘하게 미소 지은 그녀가 손바닥을 뒤집자 하얀 원반이 나타나 사방으로 빛을 내뿜었다.

대량의 연녹색 운무가 흘러나와 산 전체를 휘감자 노인이 원요를 향해 비검을 날렸다. 그러나 그저 콧방귀를 뀐 원요는 바로 몸을 돌려 짙은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노인이 미간을 좁히며 양 팔을 모으며 법결을 날렸다.

“겨우 환영진 따위로!”

주인의 법술에 힘을 빌어 비검이 맑은 울음소리를 내며 허공에서 회전했고 금세 수레바퀴처럼 회전하며 거침없이 안개를 흩어버렸다.

다시 안개 속에 가려져 있던 석문이 드러난 것이다. 흉악한 인상의 사내는 그것을 확인하고 거대한 도끼를 더욱 키워 석문을 향해 날려 보냈다.

쾅!

한립 옆에 서 있던 해골 사내 역시 괴상하게 생긴 칼날로 공격에 합세하려다가 놀라 소리쳤다.

“요녀가 산 뒤쪽으로 달아납니다!”

그리곤 주저 없이 검은 빛 줄기로 변해 산 뒤쪽으로 몸을 날렸다. 한립의 눈에 의문의 빛이 스쳤으나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아마 흉악한 거한은 해골 사내를 신뢰하는지 묻고 따질 세도 없이 석문 공격을 멈추고는 그 뒤를 쫓았다. 그 모습에 노인이 반신반의하며 뒤따르지 않고 한립을 향해 물었다.

“저 말이 사실입니까 선사?  이 노인네는 전혀 감지하지 못하였는데요.”

일행 중 한립의 수행이 가장 높으니 그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한립이 노인의 물음에 별다른 기색은 없었으나 묘한 눈빛을 보냈다.

“방금 저 선사 말대로 여인은 산 뒤쪽으로 달아났습니다. 다만 이미 두 선사에게 따라 잡혀 싸우고 있지요.”

뒷짐을 쥐고 태연하게 하는 말에 노인이 기뻐했다.

“잘됐습니다. 저희까지 합류하면 요녀를 포획하는 것은 순식간일 것입니다!”

“확실히 우리가 간다면 그렇겠지요. 그러나 그 전에 선사에게 빌리고 싶은 물건이 있는데 말입니다.”

우 노인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빌리고 싶은 물건이라니 무엇을 말입니까?”

한립이 코를 긁적이며 냉소했다.

“네 머리를 빌려야겠다!”

쉑.

노인의 반응을 기다릴 틈도 없이 한립의 입에서 눈을 찌를 듯한 녹색 빛이 분출되니 순식간에 노인의 목이 떨어져 내렸다. 그가 팔을 휘젓자 푸른빛이 뿜어져 나가 피가 뚝뚝 흐르는 머리를 회수해 돌아왔다.

한립은 푸른빛에 휩싸인 노인의 머리에 시선을 주었다. 너무 빠른 움직임에 아직도 놀란 얼굴이 그대로였던 것이다.

한립은 가볍게 탄식했다.

“날 너무 탓하지 말거라. 전송진이 있던 곳에서 날 본 것이 불운이라면 불운이겠지.”

옆에 서있던 가우와 청양문 제자가 혼비백산해 달아나려다 한립이 흩뿌린 두 줄기 검기에 순식간에 가슴이 뚫렸다. 이어 노인의 저물대를 챙긴 그가 고개를 들어 산 뒤쪽을 바라보았다.

“원요의 수행이 상당히 높아졌구나.”

그는 노인의 머리를 손에 쥐고 재빨리 푸른 빛 줄기로 변해 그 너머로 날아갔다. 푸른 녹음이 가득한 산의 뒤편에는 해골 사내와 거한이 법보를 이용해 쉼 없이 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그리고 원요 역시 검은 기운 안에서 백 개가 넘는 녹색 불꽃을 날리며 다양한 법술을 펼쳐 적들의 공격을 막았다. 그리고 싸우면서도 계속 뒤로 물러나며 달아날 틈을 보았다.

그러나 해골 선사가 적재적소에 법보와 법술을 보내 그녀가 도망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게다가 한립이 다가오는 것을 보더니 두 사내가 희색을 드러냈다.

빛이 사라지고 그 안에서 평범한 중년이 모습을 드러내자 거한이 서둘러 외쳤다.

“어서 서두르시지요. 저희 셋이 한 번에 공격하면 저 계집을 생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 노인은 어딜 간 겝니까?  자기 문파 일이면서 이리 나타나지 않다니요?”

불만어린 거한의 말에 한립이 몸 뒤로 숨겨 놓은 머리를 던지며 외쳤다.

“더 이상 기다릴 것 없습니다. 우 선사는 여기 있으니!”

한립의 말에서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거한은 자신에게 날아오는 머리통을 보며 깜짝 놀랐다. 옆으로 스쳐 지나가는 것을 확인하니 정말 우 선생의 머리였다.

해골 선사도 그것을 보았는지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이를 눈치 챈 순간 두 선사는 즉시 자신의 도끼와 괴상한 칼날을 불러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경계심 어린 눈빛으로 한립을 주시했다. 한립이 비록 결단 후기의 수행을 지녔지만 두 사람이 연합을 하면 이기지 못할 것도 없다 여긴 것이다.

검은 안개 속의 원요 역시 뜻밖의 상황에 의혹을 드러냈다. 신중하기 그지없는 성격 탓에 바로 달아나거나 몸을 보호하는 마공을 흩어버리진 않았지만 되돌아가는 도끼와 칼날을 보며 세 사내를 주시했다.

한립은 검은 기운 속의 그녀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고는 눈앞의 두 사내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곧바로 스무 개가 넘는 푸른 소검들이 소매에게 뛰쳐나가 그들을 향해 쇄도했다.

그 모습을 보고 해골 사내와 거한은 눈을 부릅떴다. 엄청난 양의 법보를 보고는 그가 평범한 결단 후기 선사가 아니며 그들의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두워진 얼굴의 해골 사내가 맹렬히 소리쳤다.

“각자 흩어져서 목숨을 보전합시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는 검은 빛 줄기로 변했고 거한 역시 도끼를 회수해 반대 방향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들의 신속한 도주에 얼굴을 굳힌 한립이 양손을 날듯이 움직여 법결을 맺어 비검을 쏘아 보냈다. 동시에 푸른빛이 반짝이며 비검에서 세 개의 동일한 검광이 나타나 원래 스물네 개이던 것이 아흔 여섯 개로 늘어났다.

“가라!”

한층 기세를 키운 비검들이 즉시 좌우로 갈라져 두 무리를 이루어 푸른 벌떼라도 된 듯 각기 다른 방향으로 쏘아져 나갔다. 비검들이 이전보다 더 많아지자 해골 사내와 거한은 핏기가 가셔 비행에 전신의 법력을 쏟아 부으며 더욱 죽어라 달아났다.

제자리에 부유하고 있는 한립은 서늘한 표정 속에서 연민을 드러낼 뿐이었다. 수십 개의 비검들이 연달아 날아가는 속도는 평범한 결단기 선사가 감당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처럼 핏빛 피풍의나 풍뢰시 같은 상상을 초월하는 보물을 지니지 못했다면 달아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아야 했다.

역시 눈 깜짝할 사이에 비검 무리가 적들을 따라잡았다. 어쩔 수 없이 몸을 돌려 각자의 법보로 막아보려 하였지만 하늘을 뒤덮은 수십 개의 비검에 그들은 앞다퉈 비명을 지르며 죽어나갔다.

한립의 차분한 읊조림에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 비검들이 그들의 잔해 속에서 저물대를 챙겨 돌아오고 있었다.

둥지로 돌아오는 새들처럼 그의 소매 안으로 비검들이 사라지자 한립이 그제야 고개를 돌려 검은 구름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가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그 안에서 원요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한 선사시군요! 수십 년 만에 그런 경지에 이르시다니 그저 탄복할 따름입니다!”

말소리와 함께 검은 기운이 흩어져 절색의 가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미모와 빠져들 것 같은 눈동자를 보며 한립은 잠시 말을 잃었다. 그러나 곧 가볍게 웃으며 환형결을 거두고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원 소저가 벌써 알아볼 줄은 몰랐습니다.”

“한 형처럼 수많은 비검을 지닌 이가 난성해에 또 있을 거라고는 믿어지지 않아서요.”

잠시 망설이던 그녀가 그제야 안심하며 몸을 숙여 감사를 표했다.

“도움을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만일 한 형이 아니었다면 위기를 벗어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우연히 알게 되어 나섰을 뿐입니다. 요 몇 년간 원 소저도 수행이 상당히 늘었습니다.”

“한 형에 비할 바가 아니지요. 이미 결단 후기에 이른 선사 앞에서 아직도 결단 초기를 배회하는 제가 수행을 논할 수야 있겠습니까?”

한립은 자신의 수행에 대해 오래 논할 마음이 없어 화제를 돌렸다.

“허허! 원 소저도 겸양이 지나치십니다. 오늘 우연히 마주쳤지만 중요하게 상의할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잠시 의아해하던 원요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그러시지요. 제 누추한 거처도 괜찮으시다면 자리를 옮기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한립도 사양하지 않고 두 손을 모았다.

“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원요가 먼저 몸을 돌려 푸르른 산으로 떨어져 내렸고 한립이 그 뒤를 따랐다. 그녀의 거처는 크다고 볼 수는 없었으나 예스럽고 아담하게 꾸며져 있었고 안으로 들어가는 통로 양쪽에는 수많은 화초를 키워 향기롭고 아름다웠다.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