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8
308화. 원요와 청양문(靑陽門)
이후 만인의 저주를 받게 되는 한립은 대나이령을 손에 쥔 채 낯선 곳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신중한 성격의 그는 적을 마주할 가능성을 생각해 이미 또 다른 낯선 얼굴로 변한 후였다.
그가 전송되고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사도 참 성격이 급한 가 봅니다. 우리 두 사람이 가장 먼저 도착했고 다른 이들은 아직 당도하지 않았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그 말에 한립은 움찔할 뻔 했으나 재빨리 머리를 굴려 답하고는 고개를 들었다. 전송진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바위 위에 검은 옷을 입은 사내가 앉아 있었다.
한립의 시선을 받은 그가 미소를 지으며 새하얀 이를 드러냈다. 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한립은 속으로 크게 놀랐다.
생김새가 몹시 흉측한데다 얼굴은 말라붙어 거의 해골과 다름이 없었고 그를 마주보는 눈빛에 푸르스름한 광채가 돌았다. 한립이 보기에 그는 결단 중기의 수행인 것이 난성해에서는 보기 드문 고계 수사였다.
해골 머리 사내 역시 한립이 결단 후기 선사인 것을 알아보고는 한결 공손해졌다.
“다른 이들이 도착하기 전에 함께 잠시 휴식을 취하시지요. 이번 일만 성공하면 적지 않은 보상이 돌아갈 테니까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그것을 그대로 드러낼 수는 없어 상대의 말을 따랐다. 이후 주변을 살핀 한립은 마음을 놓았다.
이곳은 이십여 장 너비의 동굴 속으로 그가 걸어 나온 고대 전송진 외에도 다른 전송진이 두 개나 더 설치되어 있었다. 이곳의 풍경은 범 부인이 설명해준 황명도(皇明島)의 모습과 완전히 일치해 정말 내성해로 돌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곧이어 다른 전송진에서 노란 빛이 번뜩이며 덩치가 큰 사내가 나타났다. 흑의인은 바로 몸을 일으켜 그에게 다가섰다.
그것을 기회 삼아 한립이 발끝에 푸른 검기를 일으켜 자신이 걸어 나온 전송진에 육안으로 찾아내기 힘든 흠집을 냈다.
이렇게 해두면 고대 전송진은 효력을 잃을 것이니 묘학이나 열풍수가 전송부를 구해 뒤를 쫓을 걱정을 덜 수 있었다. 그의 행동은 은밀하기 그지없어 흑의인이나 막 전송되어온 흉악한 용모의 거한이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두 사람은 이미 아는 사이였는지 농담을 주고받으며 반가움을 표했다. 한립이 그런 둘을 보다가 소리 없이 걸음을 옮겨 동굴 밖으로 향했다.
그가 채 몇 걸음을 떼기도 전에 해골 얼굴의 음성이 들려왔다.
“아직 모두 모이지도 않았는데 어딜 가십니까? 총 다섯 선사가 움직인다 했으니 명을 전할 사내와 다른 한 명이 부족합니다. 얼굴이 낯설다 했더니 설마 처음 참여하는 것입니까?”
흑의인은 자신의 의문에 스스로 답을 찾고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한립의 신분을 의심하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슬쩍 미간을 좁힌 한립이 조금 불만스레 중얼거렸다.
“귀찮게 그래야 합니까? 그런 규칙이 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습니다만.”
해골 사내가 혀를 차며 웃어 젖혔다.
“히히히. 분명 선사의 수행이 너무 높아 다른 이들이 말을 아꼈나 봅니다. 조금만 기다렸다가 임무만 완수하면 자유자재로 다니시지요.”
그의 말을 토대로 한립은 현 상황을 짐작해냈다.
한립이 입을 열고 무슨 말을 하려는데 다른 전송진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며 두 사람이 함께 걸어 나왔다. 수염을 기른 회색 장포의 노인과 몹시 마른 노련한 인상의 사내였다.
노인의 장포에 수놓아진 푸른 화염에서 은은히 영기가 느껴지는 것이 평범한 표식은 아니었다. 두 사람이 도착해 동굴 안에는 총 다섯이 모이게 되었다.
그 중 한립이 결단 후기, 해골 사내가 결단 중기, 거한과 노인이 결단 초기였으나 나머지 여윈 사내는 축기 후기의 수행에 불과했다.
* * *
먼저 도착한 해골 사내와 나중에 도착한 노인과 마른 사내도 서로를 알지 못하는 듯 했으니 당연히 한립이 누구인지를 궁금해 하는 이도 없었다. 그 중 마른 축기 후기 사내가 동굴에 모인 다섯 선사들을 둘러보고는 포권을 취하며 설명을 시작했다.
“저는 가우로 상부의 명을 받들어 선배님들께 명을 전달하고 길안내를 하기 위해 찾아뵈었습니다. 영패를 확인해 주시지요.”
그는 자연스럽게 허리춤에서 꺼낸 영패를 한립에게 건네었다. 먼저 도착해 있던 세 선사 중에 수행이 가장 높은 이를 무리의 우두머리라 여긴 것이다.
손을 뻗어 영패를 받은 한립이 대충 훑어보고는 해골 사내에게 그것을 넘겨주었다. 해골 사내 역시 영패를 자세히 살피지 않고 바로 마른 사내에게 돌려주며 나른하게 명했다.
“영패를 확인해서 무얼 하려는 것이냐. 허가를 받지 않았다면 겨우 축기기 선사인 네가 이곳에 있을 리 없을 터! 어차피 이곳에 모인 이들은 모두 명을 받은 집법사들이니 신분을 확인하며 시간 낭비할 것 없다. 어서 임무나 설명해 보거라.”
이런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는지 해골 사내는 귀찮은 기색이 역력했다. 마른 사내는 그 말에 조금 어색하게 웃더니 헛기침을 하고는 옆의 노인을 소개했다.
“이 분은 정 선배님으로 청양문에서 나오신 호법이십니다. 이번 임무는 세 분 선배님들이 정 선배님을 도와 청양문의 죄인을 포획해 주시는 것이니 구체적인 사항은 직접 이야기 나누시지요.”
말을 마친 가우가 얌전히 뒷걸음질 쳤다. 해골 사내의 푸른 눈이 번뜩였다.
“청양문이라면 삼양 상인이 계시는 그 청양문 말입니까?”
“……!”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흉악한 인상의 거한이나 한립도 안색이 달라졌다. 청양문 정 노인이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나섰다.
“허허! 모두 제 사조님을 알고 계신 듯하니 긴 말하지 않겠습니다. 사조님께서 친히 귀 맹의 육도 맹주님께 도움을 청한 것은 청양문의 보물을 들고 달아난 죄인의 행적을 몇 년 만에 알아냈기 때문입니다.
겨우 결단기에 이른 죄인이기에 사조님께서 나서시면 간단한 일이나 시간을 내기 어려워 여러분의 도움을 받기로 한 것입니다. 결단기 선사 넷이 협공한다면 겨우 요녀 하나를 잡는 것이 무에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요녀란 이야기에 흉악한 인상의 거한이 의문을 품었다.
“여 선사란 말이오?”
한립은 별 다른 내색을 하지 않았으나 머릿속을 스치는 누군가가 있었다. 노인이 생각하기도 끔찍하다는 듯 이를 갈며 설명했다.
“그러합니다. 그 요녀는 원요라 불리는 계집으로 당시 본 문 소주께서 첩실로 들이려 하셨지요. 그 요망한 년이 한패인 다른 계집과 공모해 소문주를 암살한 뒤 온갖 보물과 진귀한 약재를 훔쳐 달아났습니다!
그리고 금단에 성공해 결단기 선사가 되었으니 후계자라고는 오직 소주 한 분만 계시던 삼양 사조께서 분노하시지 않을 수 없었지요. 세 분께서 저를 도와 그 계집을 잡아만 주신다면 본 문에서 큰 보상이 있을 것입니다.”
해골 선사와 흉악한 인상의 사내는 서로 시선을 마주하며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얼굴이었고 한립은 그저 코를 긁적였다.
또 원요라니!
엄청난 절색을 자랑하던 그녀에게 이런 과거지사가 숨겨져 있었다니 예상 밖이었다.
단기간에 금단에 성공하고 다시 만난 이후 몸을 사리던 모습이 떠올랐다. 알고 보니 청양문 소주에게 훔쳐낸 진귀한 단약을 적잖이 복용해 그렇게 빠른 진보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녀가 위기에 처했는데 어떻게 해야 할 지 망설여졌다. 엄청난 교분을 나눈 사이는 아니었으나 그래도 지인이라고 할 수 있는 여인이었다.
이때 옆에 서 있던 해골 선사가 다시 물었다.
“명령이 떨어졌으니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럼 그 여인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이곳에서 모인 것으로 보아 이 근처에 있겠군요.”
“선사의 말씀대로 요녀가 숨어 있는 곳은 황명도 북쪽에 있는 섬입니다. 만일 물건을 구매하려 시장에 나왔다가 본 문 제자들에게 들켜 미행을 당하지 않았다면 아직도 근거지를 알아내지 못했겠지요. 그만큼 교활하고 몸에 지닌 보물도 많은 계집이니 주의하셔야 합니다. 특히 본 문의 보물인 청양뢰(靑陽雷)의 위력이 상당합니다.”
경고를 하며 노인이 특별히 한립을 향해 공수했다.
아무래도 무리 중 가장 수행이 높은 결단 후기 선사이다 보니 자연히 중시할 수밖에 없었다. 한립은 원요가 근처에 있다니 일단 그녀를 구한 후 모두를 처리하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가우 등은 구체적인 계획을 상의하고는 모두를 이끌고 출발했다.
* * *
같은 시각 어느 석실 안에는 머리를 산발한 선사가 발밑의 전송진을 내려다보며 어이없어 하고 있었다.
막 전송진에 올라 발동을 하려 했을 때만해도 멀쩡했는데 아무 이유 없이 진법이 영력을 상실한 것이다. 그는 뒤통수를 만지작거리며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 * *
여러 선사들이 겹겹이 지키고 있는 금제들을 벗어나 청양문 노인의 인도를 받아 북쪽으로 날아올랐다.
한립의 수행이 가장 높은 데다 서늘하기 그지없는 얼굴을 하고 있어 감히 먼저 말을 붙이는 이가 없었다. 그 결과 반나절 후 다섯 선사의 눈에 방원 수십 리 밖에 안 되는 작은 섬이 들어왔다.
노인의 눈에 한기가 스치며 먼저 허공에서 멈춰 섰다.
“이곳이 바로 요녀가 숨어 사는 곳입니다!”
모두가 멀리 보이는 섬을 바라보았다. 섬은 몇 그루 없는 초목과 낮은 석산이 몇 개 있을 뿐 영기가 매우 희박한 곳이었다.
흉악한 인상의 거한이 의문을 제기했다.
“우 선사 이곳이 맞습니까? 결단기 선사인 요녀가 이런 곳에서 수행을 하고 있다고요?”
“이곳이 확실하니 걱정 마십시오.”
그가 수결을 맺자 눈부신 노란 빛이 허공을 꿰뚫었다. 잠시 후 그 섬의 한 쪽에서 동일한 빛이 반짝였다. 노인이 희색을 드러내며 서둘러 한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가시지요. 저곳에서 본 분 제자가 줄곧 요녀의 행적을 감시하고 있으니 아직 이 섬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노인은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섬의 노란빛이 비춘 곳에서 붉은 빛줄기가 이곳을 향해 날아왔다.
빛이 가시자 회색 의복을 입은 사내가 드러났는데 축기 중기의 수행으로 노인과 같은 푸른 화염 표식이 소매에 수놓아져 있었다. 물론 노인의 표식에 비해 훨씬 크기가 작았다.
사내는 바로 우 노인을 알아보고 깊이 예를 취했다.
“제자가 우 사백님과 선배님들을 뵙습니다!”
“요녀는 아직 섬을 떠나지 않았겠지?”
“예! 제자가 뒤를 쫓아 이 섬에 온 이후로 자신의 거처를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잘했다! 이번 일이 끝나면 내 너를 내문제자로 받아줄 것이다. 어서 안내 하거라.”
노인의 칭찬에 중년 사내가 기쁨을 숨기지 못하고 답했다.
“사백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제자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가 몸을 돌려 섬을 향해 날아가자 무리가 뒤를 따랐다. 중년 사내는 석산 하나를 가리키며 공손히 말했다.
“요녀의 수행이 높아 다가가지는 못했으나 이곳에서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아마 거처가 이 산에 있는 듯싶습니다.”
그 말에 해골 사내가 눈을 빛내며 살피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강력한 결계가 석산 표면을 뒤덮고 있구나. 아마 이렇게 가까이 다가서지 않았다면 절대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야. 계집이 오랜 세월 숨어살만한 곳이로다.”
노인이 다시 노기를 드러냈다.
“흥! 소주의 여러 경전까지 훔쳐갔으니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일단 제가 진법을 파괴할 터이니 그 이후는 여러분께서 움직여 주시지요.”
“걱정 마십시오. 계집이 육척장신에 날개까지 달렸다 해도 이번에는 달아나지 못할 것입니다.”
노인이 해골 사내의 대답을 달가워하며 양 손을 움직이더니 눈부신 노란 빛을 맹렬히 방출했다.
“없어져라!”
낮은 고함과 함께 노란 빛이 석산의 어딘가를 향해 쇄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