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6
306화. 매복
다시 자세히 전송진을 살피던 한립이 냉랭히 말했다.
“운천소를 죽이고 바로 이용할 것이니 어서 진법사를 불러 진법을 완성하라 하시오. 5일 내로는 운천소가 돌아와 직접 비밀 시장을 주관할 것이라 했으니 나는 돌아가 기다리겠소.”
말을 마친 그가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한립은 초조해져 갔다. 한 곳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풍희가 자신을 찾아낼 가능성도 높아졌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바람의 기운이 흩어질 거란 풍희의 말은 아직도 실현되지 않았다. 그가 말한 시간이 얼마나 긴지 설마 1년 혹은 몇 년이 지나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여러 번 서금충을 작게 만들어 삼킨 후 천천히 기운을 갉아먹게 하려 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서금충이 바람의 기운을 건드리려면 먼저 그것을 뒤덮은 벽사신뢰의 금빛 실을 치워야 했는데 아주 조그만 틈이라도 생기면 발작이 일어나니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운천소를 간단히 죽일 수 있다는 자신이 없었다면 결코 이곳에 오래 머물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점점 마음이 불안해지고 무언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 * *
쌍봉산으로 돌아온 범 부인은 한립의 도움을 받아 운천소 부하들을 처리하고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5일 후, 대청에 앉아 운기행공을 하는 한립 앞에 범 부인이 불안한 얼굴로 서성이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불빛이 날아들자 그녀의 얼굴이 한결 밝아졌다. 전음부에서는 어느 여인의 당황한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문주님, 일이 어렵게 되었습니다. 운 장로 외에도 묘학 진인이 함께 귀환하여 이미 시장 안으로 들어섰으니 대비를 하시지요.”
놀란 범 부인이 전음부를 없애고 표정을 굳히자 한립이 눈을 뜨고 담담히 물었다.
“벽운문의 묘학 말이오?”
얼굴이 파리해진 범 부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벽운문 노괴가 아니면 누구겠습니까? 이미 늦었습니다. 운천소의 사람을 죄다 죽여 놓았으니 이상한 점을 눈치 채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한립은 여인이 갑자기 자신을 바라보며 말이 없자 눈썹을 들어올렸다.
“그리 보면 어찌하라는 뜻이오? 설마 날더러 원영기 선사와 싸우라는 것은 아니겠지?”
말은 이렇게 했으나 그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만호자나 만천명 같은 부류만 아니라면 적을 죽일 수는 없어도 달아나는 것은 가능했다. 특히 풍뢰시 법보가 있었기 때문에 원영 초기 선사의 손에서 안전하게 벗어날 확률은 더욱 높았다.
그는 재빨리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런 사정을 모르는 범 부인은 이미 안색이 창백해져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묘학과 운천소의 관계는 어떠하오? 만일 내가 나서 운천소를 죽이면 복수를 해줄 사이인가?”
한립의 질문에 범 부인이 잠시 주춤하다가 무언가 깨달은 듯 기쁘게 답했다.
“그럴 리가요. 그 늙은 도사는 운천소에게 노정으로 삼을 만한 본 문의 여제자를 상납 받고 도움을 주는 것뿐입니다. 최근 사이가 가까워지기는 했으나 그보다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한다면 묘음문 문제에 끼어들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만 운천소가 살아남아 그에게 직접 사정한다면 그간의 정을 보아 어찌 나올지 알 수가 없지요.”
“그럼 되었소. 운천소를 따로 불러들이면 내가 단번에 처리해 사정할 시간도 주지 않겠소. 범 부인이 실권을 장악하고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한다면 묘학도 딴 말을 하지는 못할 게요.”
범 부인도 평범한 여인은 아니었기에 상황이 이렇게 까지 되었으니 못할 일이 없었다.
“예, 그럼 그렇게 해보겠습니다. 밀실에서 기다려주시면 운천소를 끌어들이는 것은 제게 맡겨주시지요.”
한립은 대청을 나서 밀실로 통하는 통로로 나서다 돌연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범 문주! 운천소가 죽은 후 묘학에게 내 신분을 밝힐 생각은 마시오. 내 수행으로 묘학을 처리할 수는 없을지 모르나 그 자의 손에서 달아나는 것은 간단한 일이라는 것을 알아두시오. 만일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내가 어찌 나올 지는 범 부인도 분명히 알고 있으리라 믿소!”
범 부인은 흠칫 놀라며 심란한 표정으로 쓴 웃음을 보였다.
“어찌 소첩이 은혜를 원수로 갚겠습니까? 게다가 한 장로님께서 보통 결단기 선사가 아니신 것을 잘 알고 있으니 마음 놓으시지요. 운천소만 해결해 주신다면 기필코 약속을 지키겠습니다.”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한립이 그대로 방을 나섰다. 그가 찾아 들어간 밀실은 방금 전 대청과 비슷했으나 규모가 조금 작았다.
그는 묘학 등 다른 이들이 그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박달나무로 만든 의자 옆에 앉아 가부좌를 하고 몸의 기운을 감쪽같이 감추었다.
이제 결단 후기가 되었으니 특유의 무명 구결로 원영기 초기 선사의 의식은 속일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그의 추측에 불과했으니 가진 바 능력을 모두 쏟아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벽을 사이에 두고 대청에 홀로 남은 범 부인 역시 마음이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입으로는 한립을 굳게 믿는다 했지만 그의 능력이 운천소를 단숨에 해치울만한지 확신이 없었던 것이다.
지난번 교환회에서 보였던 위세가 실제 능력과 직결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범 부인 역시 꽤나 대범한 편이라 차를 마시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따뜻한 차가 목을 넘어가니 마음이 훨씬 안정되는 기분이었다.
이때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오며 유생 차림의 사내와 도복을 걸친 중년 도사가 나타났다. 범 부인은 일부러 놀란 표정을 지으며 찻잔을 내려놓고는 묘학 진인을 향해 깊이 예를 올렸다.
“묘학 선배님과 운 장로님이 아니십니까!”
묘학은 슬쩍 고개를 끄덕였을 뿐 신선이라도 되는 양 말없이 분위기를 잡았다. 그러나 운천소는 대청을 훑어보며 미간을 좁혔다.
“어찌 문주를 보필하는 운금이 눈에 띄지 않습니다? 이렇게 게으름이 피워서야 따끔하게 혼을 내줘야겠군요.”
운천소는 의심스런 마음이 들었으나 짐짓 화가 난 듯 의문을 표했다. 그러자 범 부인이 머뭇거렸다.
“운금은…….”
“묘학 선배님은 외부인이 아니니 편하게 말씀해 주시지요.”
불쾌한 듯 말하는 운천소에 범 부인 역시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그리 말씀하시니 돌려 말하지 않겠습니다. 지니고 다니던 환몽석을 본 문과 거래하고 싶다는 산수가 나타났는데 운금 그 아이와만 교섭을 하겠다하여 지금 그 자와 단 둘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뭐요, 환몽석?”
운천소는 묘학 진인에게 무어라 하려다가 환몽석이란 이야기에 희색을 드러냈다. 묘학 진인 역시 눈에 이채를 띠었다. 그러자 범 부인이 기분이 상한다는 듯 차갑게 말을 이었다.
“흥! 운 장로님의 대단한 제자가 문주인 저도 간섭을 못하게 하니 어찌할 수가 있어야지요.”
“허…… 운금이 조금 과하긴 했으나 모두 본 문을 생각해 내린 결정일 것입니다. 그럼 그 아이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헛기침을 한 운천소가 바로 묘학을 보며 공손히 양해를 구했다.
“묘학 선배님, 제가 이 일만 처리하고 돌아와 상의를 계속해도 되겠습니까?”
“운 선사가 급한 일이 있다면야 빈도는 이곳에서 잠시 기다리지.”
그의 허락에 마음이 편해진 운천소가 다시 범 부인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녀가 억지웃음을 지으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럼 저를 따라 오시지요.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미 몽환석이란 이야기에 정신이 빼앗겼는데 범 부인이 마지못해 안내한다는 얼굴까지 하자 완전히 마음을 놓아버렸다. 사라지는 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묘학은 의자를 찾아 앉았다.
운천소는 범 부인을 따라 문이 굳게 닫힌 가장 안쪽의 밀실로 걸어갔다. 그녀는 문을 가리키며 불만스레 중얼거렸다.
“이곳이니 잘 상의해 보시지요. 문주인 저는 낄 자리가 없는 듯하니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콧방귀를 뀌며 사라지는 그녀를 보고는 운천소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고 들어간 운천소는 방 한 가운데에 앉아 있는 사내를 발견했다. 손에 무언가를 들고 만지작거리고 있는 그를 제외하고 운금이 보이지 않자 경계심이 치솟았다.
“당신은 누구요? 운금은 어디에 있소?”
사내를 뚫어져라 보는 운천소의 몸 안에서 당장이라도 법보가 튀어나올 듯 요동치고 있었다. 한립이 고개를 들고 웃어 보였다.
“헤헤! 운 형께서 그새 저를 잊으셨나 봅니다.”
“당신은?”
사내의 얼굴을 확인한 운천소가 안색이 변해 생각할 것도 없이 자리를 피하려 했다.
“이미 늦었다!”
한립의 변조된 목소리가 담담히 울려 퍼지고 손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운천소 옆에서 다섯 개의 고리가 나타나 그를 조여든 것이다.
“윽!”
고리에 묶인 그가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재빨리 법보를 방출하려 해도 법력을 운용할 수가 없자 공포에 질린 그가 미친 듯 소리를 질렀다.
“묘학 선배님! 살려 주십쇼!”
운천소의 비명과 동시에 한립의 입이 벌어지며 푸른 빛 줄기가 나타났고 상대의 목을 둥글게 돌고는 그대로 사라졌다. 목이 잘린 시신에 그가 재빨리 손을 뻗자 저물대와 오행환 등이 다시 회수되었다.
모든 동작이 전광석화처럼 진행되었다.
쾅.
저물대를 거둬들이자마자 한쪽 벽에서 폭음이 들려왔다. 밀실 벽 한쪽이 허물어지며 먼지 속에서 묘학 진인이 나타난 것이다.
도사는 어두워진 얼굴로 목 잘린 시신을 확인하더니 한립을 보는 눈빛에 살기가 감돌았다.
“죽고 싶은 게로구나!”
도사가 손가락을 까딱이자 눈부신 하얀 빛이 방출되며 한립을 기습했다. 한립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오행환이 급격히 몸집을 키워 그 앞을 막아섰다. 동시에 다른 손에는 붉은 색과 노란 색을 띠는 옥패가 나타났다.
수행이 높아지고 처음 맞는 원영기 선사의 공격이었기에 자연히 실력을 가늠해 보려는 마음과 불안이 공존했다.
펑.
하얀 빛과 다섯 가지 빛깔이 부딪쳤다. 한립은 망치에 두들겨 맞은 듯 뒤로 날아올라 호되게 석실 벽에 부딪혔다.
“음?”
그러나 머리가 핑 도는 와중에도 상대의 놀란 소리는 분명히 들었다. 다섯 가지 고리 사이에서 붉은 색과 노란 색이 섞인 보호막이 출현한 것이다.
다시 한 번 맹렬한 공격이 이어졌으나 이번에는 단지 몇 걸음 물러서고는 한립의 몸이 안정을 되찾았다. 원영기 수사의 공격을 두 번이나 막아낸 그의 등에서 은백색 조류의 날개가 펼쳐졌다.
쿠콰쾅.
천둥이 내려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그가 사라져 석실의 다른 쪽에서 나타났다. 멀리서 공격을 지켜보니 묘학의 하얀 빛은 옥으로 만든 작은 망치를 숨기고 있었다.
겨우 손바닥만 한 크기의 망치는 상면에 이상한 문양을 새기고 엄청난 영기를 뿜어냈다. 묘학도 연달아 공격이 먹히지 않자 안색이 달라졌다. 그가 손을 휘젓자 작은 망치가 그의 소매 안으로 종적을 감추었다.
“겨우 결단기 선사가 이렇게 많은 고보를 지니고 있을 줄은 몰랐구나. 이름이 무엇이더냐?”
한립이 막 입을 떼려는데 석실의 문이 열리며 범 부인이 급히 들어왔다.
“묘학 선배님, 려 선사는 소첩이 본 문의 역적인 운천소를 처리하기 위해 특별히 초청한 분입니다. 운천소가 선배님께 약속드리는 것 이상의 보상을 제가 약속드릴 테니 안심하시지요.”
예를 갖추며 범 부인이 하는 말에 묘학이 인상을 찌푸리더니 시선이 이미 목이 달아난 운천소에게 옮겨졌다. 한립은 그저 말없이 서 있을 뿐이었지만 범 부인으로서는 오금이 저리는 순간이었다.
결국 묘학이 다시 평정을 되찾았다.
“어차피 묘음문의 내부 사정이니 빈도가 관여하지 않겠다.”
“소첩 최선을 다해 약조를 지킬 것이니 마음을 놓으시지요.”
고개를 끄덕인 도사가 한립을 바라보며 의문을 지우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려 선사는 어디서 수행을 했기에 이렇게 낯선 얼굴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군.”
“저는…….”
바로 입을 열어 해명을 하려던 그가 안색이 급변하며 얼굴에 푸른빛이 번뜩였다. 벽사신뢰에 감싸 놓았던 바람의 기운이 하필 지금 발작을 시작한 것이다.
맹렬한 기세로 보아 인간의 형상을 한 열풍수 풍희가 지척까지 쫓아온 것이 틀림없었다. 어쩔 수 없이 한립은 법력을 모두 끌어 모아 발작을 억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