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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305화 (62/2,000)
  • # 305

    305화. 전송진

    한립은 어안이 벙벙했다.

    세상에 체취로 사람을 분별해 내는 재주가 있다니 들어본 적이 없었다. 자신이 운이 없다고 여겨질 뿐 겉으로 당황한 기색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어차피 그의 수행과 지닌 보물이 있는데 만호자나 풍희 등의 최강자들이 나타나지 않는 한 두려울 것이 없었다. 여인은 자신의 능력을 보았고 또 홀로 야밤에 찾아와 이야기를 청하였으니 분명 무슨 계획이 있을 것이다.

    “부인이 알아보았으니 부인하지 않겠소. 그런데 부인을 범 좌사라 불러야 할지 범 문주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군요.”

    “보아하니 선배님께서는 제가 묘음문 문주가 된 일을 탐탁지 않게 여기시는 군요. 하지만 당시 마도의 명에 따르지 않았다면 묘음문은 벌써 사라지고 없었을 겁니다. 장문인 자리에 대한 욕심이 전혀 없었다면 거짓이겠으나 저도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묘음문 문주가 누구든 상관없으니 그런 이야기는 할 것 없소. 어차피 나 역시 명의상 장로에 불과하니까. 다만 방금 전 이야기에는 흥미가 가니 어디 한번 들어봅시다.”

    범 부인은 뜻밖이었는지 한립을 쳐다보다가 싱긋 웃었다.

    “한 선배님의 이름을 모두 알고 있지는 않겠으나 고계 선사들 사이에서 유명세를 치르고 계시지요. 결단기 선사가 놀랍게도 수많은 원영기 노괴들 사이에서 허천정이란 보물을 가지고 달아났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 일을 알고 있는 선사 중 9할은 나를 죽일 생각에 밤잠을 설칠 테고 나머지 1할은 어떻게든 보물을 빼앗고자 하겠지요. 범 좌사도 그런 생각을 하는 게요?”

    한립의 차분한 물음에 부인이 고개를 저었다.

    “하하, 소첩이 결단기에만 이르렀어도 그럴지 모르겠으나 이미 수도자로서 더 높은 경지에 오르는 것은 포기한 지 오래입니다. 그런 보물을 저 같은 사람이 지니고 있다가는 화를 부를 뿐이지요.”

    “허천정과 관련된 사실 외에 다른 이야기는 들은 것이 없소?”

    이전에는 고계 선사들을 피해 다녀 자신에 대한 소문을 알아볼 기회가 없었으니 이참에 정보를 수집하려는 것이었다.

    “선배님도 다른 소문을 들으셨나 보군요. 최근 난성해에서 선사들을 살해하고 보물을 빼앗아간다는 충마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알고 있으나 그 자가 선배님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허천정이란 보물을 얻어 숨기에도 급급하실 텐데 어찌 다른 이들의 이목을 끄는 행동을 하시겠습니까?  하지만 많은 선사들이 소문에 선동되어 요수의 범람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벌써 전문적으로 충마를 추적하는 멸마회(滅魔會)가 결성되었을지도 모르지요.”

    한립은 그저 고개를 작게 끄덕일 뿐 그녀의 말에 확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오히려 범 부인이 긴장이 되었다. 설마 소문 속의 악랄한 마두가 정말 한 장로란 말인가?

    “되었으니 이제 오늘 나를 찾아온 목적에 대해 이야기 해보시오.”

    범 부인은 조금 머뭇거리다 이를 악물었는데 아무래도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그리 말씀 하시니 소첩도 돌려 말하지 않겠습니다. 소첩 선배님께 운천소 그 흉악한 도적놈을 없애주십사 부탁드리기 위해 들렀습니다. 일전에 보여주신 능력이라면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요.”

    “운천소라면 범 부인의 뒷배가 아니었던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보셨다시피 묘음문 내에서 소첩은 이미 꼭두각시 문주에 불과합니다. 제가 본문에서 전수되는 미혼술을 쥐고 있고 일부 충성스런 수하들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벌써 문주 자리는 제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외부 세력인 마도의 힘을 빌려 문주 자리를 차지했을 때에는 이런 결과를 예상하지 못했을 리 없겠지. 어쨌든 꼭두각시로나마 문주로서 사는 것이 목숨을 잃는 것 보다는 나을 테니 말이오.”

    여인이 씁쓸하게 웃었다.

    “하지만 지금은 소첩의 목숨마저 위태로운 지경입니다. 얼마 전 본문의 비밀 공법이 적힌 서책이 저를 따르던 측근 제자와 함께 사라졌습니다. 십중팔구 운천소의 수중에 있을 텐데 일단 그 도적놈의 사람이 공법에 대성하면 소첩을 살려두겠습니까?

    선배님께서 운천소만 처리해 주신다면 묘음문이 쌓아온 재물 절반과 원하시는 여 제자들을 마음껏 바치겠습니다.”

    “그런 일이라면 관심 없으니 돌아가시지요.”

    유혹적인 제안이었지만 한립은 즉시 거절했다. 상대의 말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런 저런 구실로 자신을 속여 기습할 셈이었다면 처음부터 그를 몰라 본 척하고 손을 쓰는 것이 성공 확률이 높았다. 다만 언제든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이가 덮칠 수 있는 상황에 시간낭비를 하고 싶지 않았다.

    여인이 묘음문 전체를 넘겨준다 해도 자신의 목숨보다 중요할 리 없었다. 범 부인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애절하게 부탁을 해도 한립은 전혀 마음을 돌릴 기세가 아니었다.

    결국에는 부인이 이를 탄식했다.

    “만약 단시일 내로 선배님을 내성해로 보내드릴 수 있다면 도와주시겠습니까?”

    이것이 그녀가 가진 최후의 패였다. 한립은 속으로 움찔해서는 즉시 물었다.

    “만일 열흘 내로 내성해로만 보내 줄 수 있다면 고려해 보겠소. 허나 전송진에 필요한 환몽석이 없을 텐데 내게 거짓말을 한 것이오?”

    서늘한 물음에 범 부인이 깜짝 놀라 해명했다.

    “당연히 거짓이 아닙니다. 운천소와 대외적으로 정말 환몽석이 부족한 것으로 되어있으니까요. 다만 묘음문이 외성해로 건너오기 전 각 분점을 연결할 전송진을 설치하기 위해 구비해둔 재료 속에 환몽석이 일부 속해 있었습니다. 제운소가 알게 된다면 내성해 마도를 불러들여 제 입지가 더욱 악화될까 숨기고 있었지요.”

    그 말에 한립은 자연히 크게 기뻐했다. 곧 흥분을 가라앉힌 그가 냉랭히 분부했다.

    “환몽석을 보이고 전송진이 설치되어 있는 장소로 안내 하시오. 충분한 재료와 거의 완성된 전송진을 확인해야겠소.”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나도 어쩔 수 없지.”

    한립은 타협을 거절한다는 말투였다. 범 부인이 난처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재료는 준비가 되었으니 내일이라도 당장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송진을 건설 중인 장소는 이곳과 거리도 있고 대부분이 운천소 쪽의 제자들이라 아무래도 어려울 듯 합니다.”

    “어차피 운 장로를 처리할 것인데 그 제자들이 무슨 문제란 말이오?  미리 그의 날개를 꺾고 일격에 몸통을 치면 그만인 것을. 그런데 운천소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이오?”

    * * *

    이틀 후 쌍봉도 서쪽의 무인도 인근에 푸른 빛 줄기가 나타났다. 빛이 사라진 후 드러난 일남일녀는 바로 한립과 범 부인이었다. 작은 섬을 내려다보며 한립이 고개를 숙였다.

    “여기에 전송진이 있단 말인가?”

    “그러합니다. 총 여덟 명의 본문 제자가 지키고 있는데 제 사람 둘을 제외하면 모두 축기기 마도인들이라 제가 어찌 할 수가 없는 자들입니다.”

    한립의 눈에 흉악한 기운이 스쳤다.

    “알았으니 부인의 사람을 불러내시오.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하겠소.”

    “예!”

    범 부인의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에 전음부가 나타났다. 부적은 곧 붉은 빛을 내며 섬으로 사라졌다.

    전음부는 어떤 언덕 위를 돌더니 평범해 보이는 흙더미 속으로 충돌해 들어갔다. 즉시 붉은 빛이 소실된 것이 아마 어떤 결계를 통과해 버린 것 같았다.

    잠시 후 흙더미 속에서 세 사람이 나타났다.

    두 명의 여인과 한 사내가 허공에 떠있는 범 부인과 한립을 보고는 즉시 날아올라 맞이했다. 풍만한 몸매를 지닌 여인들이 먼저 범 부인을 향해 예를 올렸다.

    “문주님을 뵙습니다!”

    그러곤 한립을 살피다 그가 결단 후기인 것을 발견하고 더욱 공손해졌다.

    다만 그녀들 뒤에 서있던 노인은 대충 범 부인을 향해 포권을 하고는 한립을 의문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노인이 막 입을 열어 무언가를 물으려는데 이미 상황 판단을 마친 한립은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는 말 한 마디 없이 손가락을 튕겨 푸른 검기를 뿜어냈다.

    “윽!”

    노인은 크게 놀랐으나 검기가 워낙 빨라 단말마와 함께 머리에 구멍이 뚫리고 말았다. 순식간에 떨어져 내리는 노인의 시체를 보며 나머지 두 여인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그러나 아무 말 없이 침착하게 떠있는 범 부인을 확인하고는 눈치껏 침묵을 지켰다. 범 부인이 그런 여인들에게 물었다.

    “나머지는 모두 아래에 있더냐?”

    “예! 결계 안에 다섯 명이 남아있으니 제자가 안내하겠습니다.”

    “그래 려 선배님께 길을 안내하거라. 그들 중 누구도 살려 보내서는 안 될 것이다.”

    두 여인도 범 부인이 조력자를 구해 운천소와 대적하려는 것을 눈치 채고 지체하지 않고 흙더미 쪽으로 날아갔다. 여인 중 하나가 붉은 빛이 도는 영패를 꺼냈다.

    “열려라.”

    동시에 영패에서 빛이 분출되어 흙더미로 쏟아져 내렸다. 붉은 파문이 커져 갈수록 흙더미 위쪽에 다섯 장은 될 듯한 노란 석문이 드러났다.

    하얀 피부의 여인이 한립을 향해 미소 지으며 당부했다.

    “이곳입니다. 다만 다섯 명 모두 축기 중기에 이른 자들이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알았다.”

    쿵!

    그가 무표정하게 손을 들어 올리자 푸른 빛 기둥이 분사되어 석문이 산산조각 났다.

    안으로 날아 들어가는 한립의 뒤로 두 여인은 걱정스런 기색이었으나 범 부인은 그에 대한 믿음이 있어 뒤를 바짝 ㅤㅉㅗㅈ을 뿐이었다.

    석문에 들어서자마자 나타난 석회암 통로에서 한립은 미간을 좁혔다. 방금 석문이 부서지는 소리를 들었는지 두 명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한립은 둘의 얼굴을 확인하지도 않고 입을 벌려 푸른빛이 반짝이는 투명한 비검 두 자루를 분출했다. 당황한 두 선사는 붉은 천과 노란 방패 등을 꺼내 공격을 막으려 했다.

    쉭-

    그러나 비검들이 통과하자 영력을 잃은 법기들이 바닥으로 떨어졌고 거의 동시에 비명이 전해지며 두 선사도 쓰러졌다. 한립은 시신을 지나치며 잠시도 지체 하지 않았다.

    두 비검이 다시 한립 곁으로 돌아와 선회했다. 뒤 따르던 범 부인 등은 기뻐하며 남아있는 시체를 처리했다.

    세 여인이 백여 장 규모의 거대한 대청에 도착했을 때는 한립은 이미 뒷짐을 지고 중앙에 서있었다. 그는 눈앞의 소형 전송진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연구하고 있었는데 그 옆으로 조각이 난 세 구의 시체들이 피를 흠뻑 머금고는 쓰러져 있었다.

    범 부인이 미소를 지으며 나머지 여인들에게 시체 처리를 맡기고는 서둘러 다가왔다.

    “이 진법이 범 부인이 말하던 전송진이오?”

    “그렇습니다. 선배님도 아시겠지만 이미 팔, 구성 정도 완성된 상태이지요. 몽환석을 더해 조금만 작업하면 바로 사용할 수 있고 부족한 재료는 며칠 전 미리 확인을 하셨습니다.”

    여전히 전송진을 바라보며 한립이 의문을 표했다.

    “범 부인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으니 운천소는 처리해 드리겠소. 허나 이 전송진이 정말 내성해의 황명도(皇明島)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맞소?  내가 알기로는 황명도는 평범한 중형 섬에 불과한데 마도인들은 어찌 그런 곳에 전송진을 설치했단 말이오?”

    ”운천소가 말하기를 황명도에는 상고 시대에 쓰다 버려진 전송진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마도인들이 이를 발견하고 개조해 이용하기 시작했는데 오직 전송을 받기만 할 뿐 전송을 보낼 수는 없는 진이 라더군요.

    그래서 자주 사용하지는 못하지만 그런 전송진이기에 외성해처럼 먼 곳에서 전송된 선사들도 도착을 할 수 있다 합니다. 아마 선배님께서 이용하셔도 큰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한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영기 노괴가 지키고 있지 않다면 그의 능력으로 두려울 것이 별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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