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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304화 (61/2,000)
  • # 304

    304화. 묘음문을 재방문하다

    금의 장한이나 허운은 이렇게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아직 축기 후기에 머물고 있는 것이 결단에 실패한 듯 했다. 한립이 어두운 얼굴로 입을 열지 않자 역 선사도 긴장했다.

    그가 주저하다가 무언가 말을 붙여 보려 할 때 한립이 서서히 말문을 열었다.

    “나는 묘음문에서 주최하는 비밀 시장을 찾고 있다. 너희 중에 시장이 열리는 시간과 장소를 알고 있는 이가 있더냐?”

    “선배님, 묘음문 비밀 시장이 열리려면 아직 한 달도 더 남았습니다. 다만 장소는 미리 확정되어 이곳에서 서쪽으로 며칠 거리인 쌍봉도(雙峰島)로 알고 있습니다. 원하신다면 저희가 안내해 드릴까요?”

    “됐고, 해역 지도만 넘겨주면 된다.”

    그는 이 무리와 오래 함께할 마음이 없었다. 이 두 사람은 운이 좋아 요수의 범람을 경험하고도 살아남았지만 다른 이들은 화를 당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예! 그럼 비밀 시장의 위치가 표시된 해역 지도를 내어드리겠습니다.”

    금의 장한은 조금 실망한 기색이었다. 현재 외성해에서 결단기 선사를 만나 교분을 맺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일단 고계 선사를 한 명이라도 알아두면 이점이 아주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립의 차갑기 그지없는 표정에 금의 장한은 서둘러 품에서 옥으로 만든 서책을 꺼내 묘음문 비밀 시장의 위치를 표시한 후 넘겼다. 지도를 건네받은 한립은 의식을 불어넣어 지도를 살피고는 바로 날아올라 사라졌다.

    남은 무리는 그저 선망 어린 표정으로 푸른 빛 줄기가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결단기 이상의 고계 선사가 없는 무리는 감히 거처 주변을 멀리 떠나는 것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 * *

    한 달 후에야 시장이 열린다고 들었지만 멍청하게 정말 한 달을 기다릴 마음은 없었다. 그때가 되면 아직 전송진을 찾기도 전에 열풍수가 먼저 그를 따라잡을 수도 있었다.

    그는 범 부인과 운천소를 직접 찾아가 전송진을 이용할 대가를 조정해볼 참이었다. 물론 상대가 너무 재물을 탐하는 우를 범한다면 그들을 핍박해 억지로 원하는 조건을 맞추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며칠 후 한립은 쌍봉도에 도착했다. 섬의 면적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비슷한 높이의 거대한 산봉우리가 두 개 솟아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주위를 몇 바퀴 돌아 지도에 표시된 시장의 입구를 찾아냈다.

    잠깐 고민하던 그는 지난번 비밀 시장을 방문할 때 사용했던 얼굴로 바꾸어 거대한 나무 아래에 멈춰 섰다.

    거목을 올려다보던 그는 곧바로 손가락을 튕겨 하얀 빛 세 개를 쏘아 보냈다.

    펑펑펑.

    곧 녹색 빛이 반짝이더니 나무에 입구가 생겨났다. 그 안에서 나타난 것은 축기 후기의 백의 노인으로 지난날에도 시장 입구를 지키던 이였다.

    노인은 한립이 결단기 선사임을 알아보았다. 지난 번 방문에서 열댓 명의 동급 선사들을 압도했다는 소문을 들었던 탓이다.

    한립의 변형된 얼굴을 알아본 노인이 더욱 공손하게 예를 올렸다.

    “려 선배님이셨군요. 제가 미처 알아 뵙지 못하고 실례를 범할 뻔 했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이신지요?  시장이 열리려면 아직 시일이 남아있는데요.”

    노인은 경외감을 드러내면서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을 했다. 한립이 살짝 고개를 쳐들고는 거만하게 말했다.

    “비밀 시장에 참여하러 온 것이 아니라 범 문주나 운 장로를 만나려 온 것이다.”

    노인이 순간 놀라 주저하는 기색을 드러냈다.

    “문주님과 운 장로님을 말입니까?”

    “어찌, 안 될 것이라도 있더냐?”

    “아닙니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른 노인이 바로 만면에 미소를 띠며 주저하는 기색을 지웠다.

    “다른 분이라면 몰라도 선배님께서는 중요하게 상의할 거리가 있으시겠지요. 이 노인네가 당장 가서 고할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마침 범 문주님께서 시장 일을 주관하시느라 이곳에 계시니까요.”

    “기다리는 것은 딱 질색이니 서두르거라.”

    “예! 전음부를 이용해 알릴 터이니 정말 잠시면 됩니다!”

    어차피 상대가 억지로라도 들어가겠다면 자신은 막을 수도 없을뿐더러 아까운 목숨만 버릴 뿐이었다. 신속히 전음부를 꺼낸 그가 나무 동굴 속으로 그것을 집어 던졌다. 그것을 바라보던 한립이 한결 온화해진 얼굴로 물었다.

    “운 장로는 어디 갔길래 없는 것이냐?”

    안색이 어두워진 노인이 망설이기는 했으나 대답을 피하지는 않았다.

    “그것이…… 운 장로님께서 어찌 되셨는지는 저도 알지 못합니다. 다만 최근 시장에 관련된 일을 범 문주님이 홀로 처리하고 계시다는 것만을 알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데 한립이 어찌 상대의 속내를 모르겠는가. 그가 냉소를 하며 더 추궁하지 않자 노인은 크게 안심했다.

    잠시 후 다시 전음부를 받은 노인이 내용을 확인하고는 한립을 향해 말했다.

    “안으로 드시지요.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앞장 서거라.”

    나무 동굴 안의 지하 세계도 이전의 암석 및 비밀 시장과 다를 바가 없었다. 2층으로 이루어진 구조에 생각보다 큰 규모를 유지하고 있었다.

    묘음문 남녀 제자들 열댓 명이 분주하게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을 뿐 다른 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노인은 한립을 데리고 어느 석실 앞으로 걸어갔고 그 앞에는 아름다운 여 선사 둘이 지키고 서있었다.

    “려 선배님을 뵙습니다. 문주님께서는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묘령의 여인들이 한립을 향해 인사를 올리는데 아름다운 얼굴에 교태가 넘쳐흘렀다.

    두 여인을 바라보며 한립이 턱을 쓰다듬었으나 따로 무어라 입을 열지는 않았다. 그 중 하나가 벽에 손을 가져다 대자 푸른빛이 꿈틀거리며 석문이 나타났다.

    노인이 서둘러 인사를 올렸다.

    “그럼 저는 여기까지만 모시고 먼저 물러나 보겠습니다.”

    한립은 그를 신경 쓰지 않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짧은 회랑을 지나자 곧 대청이 나타났다. 연두색 치마를 걸치고 우아하게 화장한 범 부인이 그 중앙에서 미소를 머금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복숭아 꽃 같은 입이 벌어지며 범 부인이 인사를 건넸다.

    “신첩이 미처 선배님을 마중하지 못했습니다.”

    그녀가 아름다운 몸짓으로 한립을 자리로 안내했다. 단향목으로 만든 의자를 보며 한립이 눈썹을 끌어올렸으나 주저 없이 걸어가 앉았다.

    “부인은 내가 방문한 것이 귀문에 해를 끼치리라 여기지 않는 것입니까?”

    “하하, 농도 잘하십니다. 선배님의 수행에 겨우 축기기 완배를 괴롭히실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범 부인이 사뿐히 걸어와 한립 옆에 앉더니 입을 가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미간을 슬며시 좁혔지만 표정만은 평이했다. 그러나 범 부인은 자리를 잡고는 묘한 표정으로 한립을 살피기 시작했다.

    한립의 눈에 한기가 돌며 상대가 이리 나오는 의도를 물으려 할 때 맑은 얼굴의 젊은 여인이 차를 가지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두 선사 앞에 찻잔을 내려놓고는 범 부인 옆으로가 다소곳이 섰다.

    표정이 변하지는 않았으나 범 부인의 눈에 노기가 스쳤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립은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범 부인이 차를 한 모금 하더니 아주 상냥하게 물었다.

    “이번에는 무슨 연유로 본문을 찾아 주셨는지요?  도울 일이 있다면 최선을 다해 도와드리겠습니다.”

    “기왕 먼저 그리 말하니 돌려 말하지 않겠소. 귀문이 준비하던 내성해로 돌아가는 전송진이 준비되었다면 그것을 이용하려 하오.”

    범 부인은 조금 당황한 듯 했으나 생각을 정리하더니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전송진을요?  선배님을 실망시켜 드리겠습니다. 아직 전송진은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아마 시일이 더…….”

    “그래서 얼마나 더 걸린다는 것이오?”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다시 탁자 위에 내려놓은 범 부인이 설명을 시작했다.

    “정확히 말씀 드리기 어렵습니다. 선배님도 아시다시피 전송진을 설치하는데 필요한 환몽석이 부족해서요. 운 장로가 다른 선배님들과 환몽석 산지에 갔다 돌아왔지만 소량에 불과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운 장로가 다음 번 행동을 계획했는데…….”

    “큼!”

    범 부인 옆에 서있던 여인이 돌연 헛기침을 했다. 아리따운 범 부인의 얼굴에 순간 화가 치밀었다 사라졌지만 무언가를 걱정해서인지 그래도 입을 다물었다.

    한립이 의아해 하며 시선을 그 여인에게 옮기자 그녀는 두려운 표정으로 재빨리 고개를 숙여버렸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한립이 몸을 일으켰다.

    “단시일 내로 전송진을 사용할 수 없다면 더는 할 말이 없을 듯 하오. 그럼 먼저 가보겠소.”

    그때 범 부인이 의외의 제안을 했다.

    “전송진에 관한 일은 아쉽게 되었으나 본 문은 줄곧 결단기 선배님들을 홀대한적이 없습니다! 오늘은 이곳에서 하루 머무르시고 내일 떠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단박에 거절하려던 한립은 상대의 눈을 보고는 생각을 바꾸었다.

    “하룻밤이라?  그러겠소.”

    “선배님이 편히 쉬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여봐라, 려 선배님을 가장 좋은 방으로 모시거라.”

    동시에 또 다른 여인이 들어왔고 한립은 말없이 그녀의 뒤를 따라 방을 나섰다. 그러나 대청을 나가기 직전 무슨 생각인지 의미심장하게 뒤를 한 번 돌아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한립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기를 기다린 젊은 여인이 범 부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문주님! 어찌 위험을 무릅쓰고 저 자를 남기신 겁니까?  려 선사는 지난번 저희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습니까?”

    “운금, 네가 가면 갈수록 기고만장해 지는구나. 려 선사처럼 수행이 높은 분과 친분을 쌓아두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을. 언제부터 묘음문의 일에 네가 나서게 되었단 말이냐!”

    “제가 어찌 감히 그러겠습니까. 제자는 그저 운 장로님께서 떠나시기 전 당부하신 대로 행할 뿐이니 문주께 양해를 구합니다.”

    젊은 여인의 말투는 겸손했으나 전혀 물러날 생각 없이 운천소를 들먹였다.

    “흥, 이 일은 운천소가 돌아오면 내가 직접 이야기할 것이다. 본 문주는 할 일이 많으니 비켜 서거라!”

    범 부인은 서늘한 얼굴로 사라져 버렸고 대청에는 젊은 여인만이 남아 인상을 찌푸렸다.

    * * *

    저녁 무렵 고풍스럽고 한적한 방 안에 누운 한립이 눈도 깜박이지 않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돌연 이곳에서 하루 밤을 지내게 되었지만 전혀 근심하고 있지는 않았다. 이미 강력한 의식을 이용해 주변 상황을 탐색해 두었던 것이다. 이곳에서 가장 수행이 높은 이는 범 부인 등의 축기 후기 선사들이었고 원영기는 커녕 결단기 선사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몇 년을 허비해서라도 바다를 가로질러 내성해로 돌아가야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 중이었다.

    똑똑.

    이때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전해졌다. 한립은 침상에 그대로 누워 담담히 말했다. 누가 찾아 왔는지 벌써 알고 있는 모습이었다.

    “들거라.”

    그 결과 여인의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범 부인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사뿐사뿐 방 안으로 걸어오는 여인의 하얀 피부와 검은 머리카락이 도드라졌다.

    향긋한 향기와 함께 거침없이 침상에 가까이 앉은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늦은 시간까지 휴식을 취하고 계시지 않는 것을 보니 소첩이 올 것을 예상하셨나 봅니다.”

    “범 문주가 그렇게 분명히 눈치를 주는데 어찌 모르겠소. 무슨 이야기를 하려 따로 보자 하였는지는 모르나 전송진과 관련된 내용이 아니면 흥미 없다는 것을 알아두시오.”

    “그러시겠지요. 한 장로님께서 이리 많은 원영기 노괴들에게 쫓기고 계시니 외성해를 떠나 돌아가고 싶으신 게 당연합니다.”

    기대 있던 허리를 편 한립이 서늘한 눈빛으로 여인을 응시했다.

    “한 장로라니 누구를 말하는 게요?”

    “소첩은 본 문의 한 장로님을 일컫는 것입니다.”

    그녀를 쳐다보던 한립은 이제 아예 몸을 일으켜 바로 앉았다.

    “어찌 알아보았더냐?  네 수행으로 내 진짜 얼굴을 보았을 리도 만무한데.”

    범 부인이 새하얀 손을 들어 올려 입을 가리고 웃었다.

    “보아서 안 것이 아니라 향으로 알아본 것입니다.”

    “향을 맡아서?”

    한립은 의아해했다.

    “저는 어릴 때부터 다른 이들의 체취에 민감했고 한번 맡은 향은 절대 잊어버리는 일이 없었습니다. 한 장로님의 체취야 이미 예전에 기억해 두고 있었지요. 일전에 뵈었을 때는 한 장로님과의 거리가 너무 멀었고 많은 선사님들의 향과 섞여 판별하지 못하였으나 오늘 대청에서 따로 뵈니 바로 알아 뵐 수 있었습니다.”

    말이 끝나자 범 부인의 눈이 촉촉해 져서는 오래 전 떠나간 연인이라도 보는 듯 애틋함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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