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9
299화. 범성진편
독교와 거북 요수가 생각 끝에 결국 제안에 응하기로 결정했다.
“기왕 풍 형께서 이리 부탁하시니 저희가 힘이 되어드려야겠지요.”
그 말에 풍희가 기뻐하며 자신감에 찬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진법을 이용해 두 아우님의 흙 속성과 물 속성 공법을 아우르면 잠시 천둥 속성 영력을 융합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거기에 제 바람 속성 공법이 합해지면 풍뢰의 힘이 완성되겠지요. 다만 두 분의 힘의 평형을 맞추고 미세한 차이를 조정하기 위해 려 선사의 나무 속성 공법이 있어야 합니다.”
한마디도 없이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한립을 본 풍희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묘한 미소를 보였다.
“려 선사, 깜빡 잊고 말씀 드리지 않은 것이 있는데 말입니다…… 지난번 음용하신 벽염주가 비록 인간 선사에게 뛰어난 효과를 발휘하지만 어쨌든 요괴 선사들을 위한 술이 아니겠습니까?
그 술은 처음에는 수련의 정체를 뛰어넘게 해줄 정도로 공력을 증진시켜 주지만 몇 년 못가 불순한 사기를 배출합니다. 그때가 되면 진원이 철저히 오염되어 체내의 영력이 폭발해 목숨을 잃게 되지요.”
여기까지 말을 마친 열풍수가 입을 다물고는 서늘한 눈빛으로 한립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를 마주보던 한립은 작게 탄식했을 뿐 전혀 놀라거나 두려운 얼굴이 아니었다.
한립이 지극히 덤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풍 형께서는 제가 어찌 해야 그 사기를 없애 주실 것입니까? 아마 법보 제련이 성공해야지만 제게 살 길을 열어주시겠지요.”
예상 밖의 대답에 풍희와 요수들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풍희가 감정이 없는 얼굴로 서늘하게 말했다.
“허허허, 려 선사가 이리 총명하니 저도 길게 이야기 하지 않겠습니다. 풍뢰시 법도가 성공한다면 선사를 위해 후환을 제거해 주겠으나 실패한다면 제 화를 받아줄 첫 번째 희생양이 되어야합니다. 원영기 선사라도 벽염주의 혼탁한 사기를 제거할 수 없으니 달아나 홀로 해결해 보겠다는 야무진 꿈은 접는 것이 좋습니다.”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들었습니다.”
한립이 고개를 끄덕이며 쓰게 웃었다. 물론 그는 속으로 법보가 성공해도 자신을 살려주지 않을 거라 여기고 있었다. 그런 그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다른 세 요수들은 옥 탁자를 앞에 두고 한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원하는 대답을 듣고 기분이 한결 나아진 풍희가 독교를 향해 물었다.
“듣자 하니 무 선사의 교룡 일족이 이번 만장해(万丈海)의 대대적 공세에 참여 했다던데 정말입니까? 보통 교룡 일족은 그런 일에 잘 관여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러합니다. 저희 일족의 고계 선사 중 일부가 나섰지요.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인간의 도시를 함락하고 원영기 인간 선사를 둘이나 사살했겠습니까?”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이제껏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한립이 미미하게 안색이 달라졌다.
한립이 크게 놀라 귀를 기울인 가운데 풍희가 또 한 번 물었다.
“몇 년 전 무 선사께서 귀 아우의 호법을 설 때 인간 선사들의 기습을 받은 일이 있다 들었습니다. 결국엔 상대를 격퇴했지만 꽤나 고생하셨다고요. 그것이 발단이 된 것입니까? 교룡족은 그래도 우호적인 편이 아니었습니까.”
독교가 차분히 입을 열었다.
“최근 인근 섬에 거주하는 인간 선사들은 오만하게도 주변 해역을 자신들의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저희 같은 화형기 요수들을 아직 야수의 형태를 벗어 던지지 못한 저계 요수와 똑같이 취급했지요. 스스로 화를 자초했을 뿐 제가 겪은 그 사건은 그간의 갈등을 터트릴 작은 불씨에 불과했습니다.”
그가 말을 멈추고 한립을 한번 보더니 차가운 눈빛으로 말을 이어갔다.
“가장 중요한 원인은 인간들이 막 칠급이 된 만장해 왕족 산예수(狻猊獸)를 죽인 것이었지요. 그로 인해 대로한 일족이 아낌없이 피를 써 만요령(万妖令)을 발동하지 않았다면 어찌 수많은 요수들이 일거에 들고 일어나 인간들을 살육했겠습니까?
저희 교룡 일족이 나서게 된 것은 그 어린 산예수가 죽으며 몸에 지니고 있던 바다 일족의 성물 범성진편(梵聖眞片)을 갈취 당했기 때문인데 원래 온전한 물건이 아니라 실질적 가치는 없지만 그래도 저희 요족 내에서 대대로 전승되어온 물건이니 인간 선사의 손에 둘 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열풍수가 조금 놀라더니 독교를 향해 미묘한 웃음을 던졌다.
“산예수가 죽임을 당한 일은 들어보았으나 범성진편이 도난당했다는 말은 또 금시초문이군요. 그것마저 없어지면 산예수 일족이 왕좌를 유지하기가 더욱 어려워지겠습니다. 혹시 교룡 일족이 나선 것이 그 자리를 차지해 이 해역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아닙니까?”
“일족에서 어떤 의도를 갖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워낙 그런 일에 관심을 갖지 않는 편이어서요. 다만 범성진편에 기록되어 있다는 삼범성공(三梵聖功)은 아쉽습니다. 듣기로는 상고시대부터 요족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위력적인 비술이라던데 온전한 범성진편 네 조각이 옛날에 뿔뿔이 흩어져 버렸으니 말입니다.”
거북 요수가 웃음을 터트리며 끼어들었다.
“하하하하! 무 형, 욕심도 많으십니다. 정말 그런 상고시대의 비술이 전해진다고 믿지 않습니다만 교룡족의 화룡결(化龍決)도 그에 못지않게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건 또 그렇지요. 화룡결을 극성으로 익히면 교룡에서 진정한 용으로 거듭날 수 있으니 저희 일족의 가장 최상급 공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독교가 자부심을 드러내는 것을 들으며 한립은 범성진편에 대해 생각했다.
‘범성진편…….’
그가 손에 넣은 지 얼마 안 된 은색 동전 조각이 떠오른 것이다. 설마 저들이 이야기하는 물건이 자신에게 있는 것일까?
그 은색 동전 조각에 새겨진 것이 바로 요수 선사의 공법이었으며 위력이 상당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비록 범성진편이 어떤 용도인지는 모르나 요족에 전해 내려오는 성물이라는 이야기만 들어도 난처한 일에 휘말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은색 동전 조각의 원주인이던 검은 피부의 선사가 바로 심연 요수들의 범람을 불러일으킨 장본인이었단 말인가? 그의 수행이 결단 중기에 이르렀으니 칠 급 요수를 죽이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한립은 심장이 조금 뛰기는 했으나 그리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어차피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에 처해있는데 그 원인이 한 가지 더 늘어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겠는가?
한립 때문에 더 깊은 이야기를 못하자 풍희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려 선사께서는 막 결단 후기에 이르러 아직 수행이 안정되지 않았으니 저 빛을 따라 먼저 거처로 돌아가 수련을 계속하시지요. 법보를 제련하는 동안 문제가 생겨서는 안 되지 않겠습니까.”
열풍수의 손끝에서 나온 하얀 빛이 한쪽 문을 향해 날아갔다. 선택권이 없는 한립은 억지웃음을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사실 그들의 밀담을 조금 더 듣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말이다.
그때 다시 한 번 풍희의 경고가 들려왔다.
“평소에는 거처에 머무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함부로 돌아다니다가 제가 오해를 하면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으니까요!”
세 요수를 등지고 벌써 문 앞까지 갔던 한립이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가 다시 갈 길을 갔다. 독교가 그가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며 걱정을 표했다.
“괜찮겠습니까? 아무래도 고분고분 최선을 다할 놈 같지는 않은데 법보를 제련하는 중에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아닐지요.”
풍희의 입꼬리가 말렸다.
“어차피 풍뢰시 제련은 우리 세 사람이 이끌 것이고 인간은 나무 속성의 영력을 제공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일단 법보를 제련하기 시작하면 아무리 원치 않아도 훼방을 놓을 수 없다는 말이지요. 게다가 제가 주입해 놓은 사기가 몸에 남아 있는데 무엇을 어찌 하겠습니까?”
거북 요수가 돌연 빙그레 웃었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벽염주에 혼탁한 사기 같은 것이 주입되어 있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습니다. 설마 풍 형이 미리 손을 써두신 겝니까?”
“헤헤, 당연하지요. 인간이 복용한 벽염주는 특별히 제련된 것으로 그 안에 담긴 혼탁한 사기는 혼돈마기(混沌魔氣)라 칭하는 것이 정확한 명칭일 것입니다. 일전에 마도 선사 한 놈을 죽이고 그 몸 안에서 추출한 것입니다.”
독교와 거북 요수가 그의 말에 서로 눈웃음을 짓더니 마지막 남았던 우려마저 없어진 듯 했다.
그때 한립은 하얀 빛을 따라 어느 석실 안으로 들어섰다.
방은 나름 우아하게 꾸며져 있어서 백옥으로 만든 침상 외에도 탁자와 의자 그리고 각종 화초들이 놓여 있었다. 하얀 빛은 한립이 방 안으로 들어서자 곧 사라졌다.
한립은 이를 확인하고는 바로 문을 닫았다. 이어 품에서 각종 진법 법기들을 꺼내 방 안 곳곳에 그것들을 설치하니 소형 진이 형성되었다.
이 진법은 방어 기능은 거의 전무했지만 누군가 의식 탐색을 해오면 미리 경고를 해주는 기능이 있었다. 곧 이를 눈치 챈 열풍수가 화는 내겠지만 이런 사소한 일로 그를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한립은 가장 마음의 걸리는 일을 알아보았다.
침상에 앉아 가부좌를 틀더니 자신의 몸을 샅샅이 탐색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립은 일다경이 지나고 다시 두 눈을 떴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멀쩡한 것이 요수가 허언을 하였거나 사악한 기운이 발작하기 전에는 감지하기 어려운 듯했다. 턱을 쓰다듬는 한립의 얼굴에 고민이 어렸다.
한참 만에 어떤 물건을 꺼낸 그가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 * *
이틀 후 열풍수가 다시 한 번 그의 문을 두드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매우 즐거운 듯 한립에게 방문 목적을 알렸다.
“오늘 법보 제련을 시작할 것이니 함께 가시지요. 무 선사와 귀 선사는 이미 법보 제련용 밀실에서 저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립을 데리고 방을 나선 그는 거의 뛰듯이 걸어갔다. 그 결과 그들은 청옥으로 만들어진 벽 앞에 당도했다.
풍희가 거침없이 벽을 치자 옥이 갈라지면서 작은 문이 생겨났고 그가 한쪽에 서서 한립이 먼저 들어가기를 기다렸다. 서둘러 안을 들여다보니 뜨거운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양 눈썹을 끌어 올린 그가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걸음을 옮겼다. 안에는 역시 거북 요수과 독교가 미리 기다리고 있었는데 한립의 눈길을 끈 것은 그들이 아니었다.
밀실 중간에 십여 장 길이의 방원형 단이 놓여 있었는데 그 안의 연못에서 엄청난 열기의 화염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사방에는 거대하고 복잡한 제련용 진법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볼수록 놀라웠다.
한립이 들어오자 냉랭히 그를 살핀 독교와 거북 요수는 다시는 그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드디어 모두 모였습니다. 두 아우님들께는 미리 제련 과정에 대해 설명을 드렸고, 려 선사는 저쪽으로가 계속해서 나무 속성 영력을 불어넣어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설마 지금 와서 딴 생각을 품지는 않겠지요?”
진법의 어느 한 구석을 가리키던 풍희가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불길이 치솟는 연못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한립이 쓴 웃음을 지었다.
“이제 와서 제가 허튼 생각을 품는다 해도 달라지는 것이 있겠습니까?”
“알고 있다니 다행입니다.”
그러나 풍희의 냉소로 보건대 한립의 말을 온전히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늙은 요괴가 눈치도 빠르네.’
한립이 그가 가리킨 방향으로 걸어가 가부좌를 하고 앉았다. 이를 확인한 풍희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독교와 거북 요괴를 돌아보며 예의 바르게 요청했다.
“그럼 두 아우님들도 진법 안으로 드셔서 준비를 해주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