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298화 (55/2,000)

# 298

298화. 풍뢰시

풍희가 그제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현명한 선택을 하실 줄 알았습니다. 미리 조용한 밀실을 준비해 두었으니 따라오시지요.”

먼저 몸을 일으킨 그가 쪽문으로 걸어갔다. 한립 역시 말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요수 선사의 안내를 받아 이리저리 통로를 지나다 보니 불타오르는 듯한 붉은 색 돌벽이 앞을 막아섰다.

자세히 살펴보니 놀랍게도 거대한 산호초를 깎아 만든 곳이었다. 풍희가 손을 뻗어 하얀 빛을 분출하니 벽에 입구가 만들어졌다.

“밀실로 들어가 술을 받아들이시지요. 아마 반년 정도면 성취가 있을 것입니다. 때가 되면 금제를 풀고 선사를 꺼내드리겠습니다.”

무표정하게 안을 들여다본 한립이 걸음을 옮겼다. 여기까지 와서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그가 들어가자마자 입구가 사라졌다. 밖에는 오직 요수 선사 풍희만 남았다.

잠시 자리를 떠나지 않고 고양된 얼굴로 결계 속을 살펴본 그가 하얀 빛과 함께 사라졌다.

* * *

산호 벽 속에 갇힌 한립은 밀실 안을 둘러보았다. 그리 좁은 공간은 아니었지만 옥으로 만든 침상을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가장 이상한 점은 사방에 작은 구덩이 같은 게 파여 있는 것이었는데 마치 사람 얼굴에 남은 마마자국 같았다. 그는 침상에 올라 가부좌를 한 뒤 두 눈을 감았다.

일단 의식을 퍼트려 주변을 탐색해 본 결과 의식은 벽에 가로막혀 모두 튕겨 돌아왔다. 그의 눈에 한기가 돌았다. 생각 끝에 다시 몸을 일으킨 한립이 이번에는 밀실 벽으로 다가갔다.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산호 벽을 바라본 그가 눈부신 푸른 검을 손끝에서 분출했다.

한립이 손가락을 튕기자 푸른 검이 반 촌 정도 벽에 박혀 들어갔다. 그러나 그가 희색을 드러내기도 전에 붉은 빛이 번뜩이며 벽면에 떠올랐고 검을 밀어내 버렸다.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러나 아직 포기하기에는 일렀다. 한립이 조용히 법결을 외우자 옅은 금빛의 뇌전이 검에서 튀어 올랐다. 이어 푸른빛을 내며 회전하더니 맹렬히 벽을 찔러 들어갔다.

펑.

벽사신뢰의 폭음이 울리고 벽을 감싼 붉은 기운도 동요했다. 그러나 한립의 눈에 어렸던 기대감이 곧 실망으로 뒤바뀌었다.

소검이 뇌전의 힘으로 겨우 반촌 정도 들어갔을 때 벽 안에서 튕겨 나온 것이다. 뜻밖에도 요수 선사가 산호벽에 여러 겹으로 금제를 걸어 놓은 것이 틀림없었다.

법보의 힘만으로 벽을 뚫고 나간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검을 체내로 회수한 그가 무의식중에 허리춤의 영수대를 내려다보았다.

아무리 금제가 신묘해도 서금충의 대군에게는 미친 듯이 뜯어 먹히리라 확신했다.

그러나 함부로 영수를 운용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서금충이라지만 결계를 훼손하는 데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동안 풍희가 결계의 이상을 감지하지 못할 리 없었다. 상대의 요사스런 속도를 생각하면 달아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머리를 쥐어 짜보아도 딱히 좋은 방책이 떠오르지 않자 한립은 침상으로 돌아와 앉았다. 뱃속이 은은히 뜨거워지는 것이 벽염주의 약효가 발현되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약효가 어떨지 전혀 알 수 없는데 어찌 방비를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한립은 일단 다른 일을 생각지 않고 가부좌를 틀고 뱃속의 기운에 집중했다. 두 눈을 감고 오직 내면에 집중하기 시작하자 사색의 금단(金丹)에서 한 줄기 푸른 불길이 흘러나와 방금 마신 청록색 액체를 휘감았다.

단화(丹火)로 벽염주를 제련하는 과정은 무척 느려서 한 달이 지난 후에도 사분의 일도 진행되지 않았다. 열풍수가 말한 반년은 필요할 거란 추측이 과장이 아니었다. 그래도 속도가 너무 느렸다.

반 년 후에 정말 결단 후기에 이르지 못하면 열풍수가 주저 없이 자신을 죽일 것이다. 조급한 마음이 들자 금단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 불길이 더욱 굵어졌다.

영력을 아낌없이 쏟아 부어 제련 속도를 높인 것이다. 법력의 소모가 증가하면 어쩔 수 없이 일정기간 마다 아까운 만년영액을 섭취했다.

이렇게 사치스러운 방법으로 단화를 지피니 겨우 두 달 후에 벽염주의 삼분의 이를 제련할 수 있었다. 그제야 마음이 편해졌다.

그때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죽을 테면 같이 죽자는 마음으로 삼킨 건람빙주를 만약의 순간을 위해 아직도 뱃속에 넣어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 막 법력을 소진하고 만년영액을 섭취하려는 순간, 건람빙주 바깥을 감싼 벽사신뢰에 변형이 생긴 것이다.

이상을 감지한 한립은 놀라서 혼비백산했다.

법력이 거의 고갈되어 반응할 방법이 없었다. 몸 안에서 구슬이 울룩불룩 요동을 치기 시작하자 남아 있던 벽염주를 이용해 건람빙주를 감싸버렸다.

긴장된 마음에 심장이 크게 뛰었고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 건람빙주가 그의 몸 안에서 터지는 상상만 해도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한립의 방법이 효과를 발휘했는지 벽염주에 싸인 구슬이 곧 안정을 되찾았다.

“휴…….”

이마를 만져보니 식은땀이 흥건한 것이 반쯤 죽었다 살아난 기분이었다. 한립은 서둘러 만년영액 한 방울을 섭취하고 법력이 회복하기를 기다려 구슬을 토해냈다.

그가 다시 한 번 몸의 구석구석을 살피다가 돌연 무언가를 깨달았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어느새 결단 중기의 고비를 넘기고 후기에 도달해 있었다!

얼이 빠져 가만히 있던 그의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사실 열심히 벽염주를 제련하고는 있었지만 이렇다 할 효과를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제련을 마치기도 전에 이런 성취를 이루다니 너무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한립은 자신의 수행을 실험해 보고자 동시에 24개의 청죽봉운검을 뿜어내 숙련된 조종을 선보였다.

엄청난 성취였다.

기쁨을 주체할 수 없는 와중에도 남은 벽염주를 낭비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그는 바로 다시 가부좌를 틀고 나머지 액체를 제련하며 결단 후기의 수행을 공고히 다졌다.

* * *

어느덧 약속한 반년이 다가왔다. 반년하고 며칠이 지났을 때 산호벽에 다시금 출구가 나타나며 풍희의 담담한 목소리가 전해졌다.

“려 선사, 그만 나오시지요. 어떻게 성취는 있었습니까?”

여전히 옥으로 만든 침상에 앉아있던 한립이 조용히 눈을 뜨고 걸어 나갔다. 한립이 나타나자마자 그를 훑어본 요수 선사가 박장대소를 했다.

“하하! 후기에 접어든 것을 축하드립니다. 다행히 벽염주를 낭비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희색이 만연한 것이 한립의 공법 대성이 정말 기쁜 것 같았다. 그런 모습이 한립의 눈에는 좋게 보이지 않았다. 풍희가 싱글벙글 웃으며 한결 살가운 태도로 말했다.

“막역한 벗인 요족 두 분을 소개 시켜드릴 테니 같이 가시죠. 세 분이 힘을 합쳐주셔야 일을 성사시킬 수 있습니다.”

“선배님께서 두 분이나 더 계시다고요?”

“그렇습니다. 다른 두 분은 첫 번째 화형기로 인간들이 말하는 팔급 요수 선사이지요. 하지만 워낙 태생적으로 남다른 분들이라 제 수행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바다 종족이니 만나면 말을 아끼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잠시 후 풍희가 이전에 보았던 대청으로 안내했는데 그가 말한 지기들이 이미 와 있었다. 그들의 얼굴을 확인한 한립의 얼굴이 굳었다.

한 명은 교룡의 머리에 전신이 피처럼 붉은 비닐로 뒤덮여 강철 같은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다른 한 명은 푸른 거북이 등껍질을 지니고 체구가 좋았다.

전자가 해무 섬 인근에서 인간 선사들과 대전을 벌이던 독 속성 교룡이었으니 옆에 있는 이는 십중팔구 당시 막 겁을 지내던 거북이 요수일 것이다.

두 요수들이 풍희가 들어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독교가 한립의 얼굴을 보더니 초록색 눈에서 한기가 스쳤다.

“인간, 이전에 날 본 적이 있더냐?”

서늘하기 그지없는 말소리가 조금 모호했지만 알아듣기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 물음에 한립이 주저했다.

당시 피풍의를 뒤집어쓰고 달아나 자신의 모습을 들키지 않았으니 괜히 안 좋은 일을 상기시켜 험한 일을 당할 필요는 없었다. 한립은 헛기침을 해 평정을 되찾고는 답했다.

“처음 뵙습니다. 다만 견식이 얕아 교룡 종족을 처음 접하기에 조금 놀랐을 뿐입니다. 무례하다 느끼셨다면 용서하십시오.”

일단은 최대한 저들의 비위를 맞춰야 했다.

파삭.

독교가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던 커다란 진주를 악력으로 으깨버렸다.

“흥! 인간들은 하나같이 간사하고 교활하지. 어디서 날 보았었는지 모르겠다만 앞으로는 어쭙잖은 거짓말은 하지 않는 것이 나을 게다.”

교룡의 눈에 흉악한 기운이 스쳤다.

속으로 움찔하기는 했으나 한립은 그저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다물었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풍희가 나섰다.

“됐습니다. 이렇게 려 선사와 두 아우님들이 인사를 나눈 것으로 하지요. 전 꼭 세 분의 힘이 모두 필요합니다.”

그가 한립을 탁자로 불러 앉혔는데 다른 두 선사와는 약간 떨어뜨려 두었다. 독교가 눈앞의 큰 술잔을 들어 꿀떡꿀떡 넘기더니 털털하게 말했다.

“풍형, 저희가 서로 알고 지낸 세월이 몇 년인데 무슨 일이기에 이리 말을 아끼십니까. 게다가 인간 선사의 도움까지 필요하다니 겨우 결단기 선사를 어디다 쓴다고요.”

“그렇습니다. 반드시 저희 두 사람이 필요하다니 무슨 위험한 일이라도 계획하시는 것입니까?”

체구는 컸지만 상대적으로 간은 작은 듯 했다. 풍희가 웃으며 손을 저었다.

“귀 선사, 걱정 마십시오. 두 분을 청한 것은 무슨 복수나 위험한 일 때문이 아니니까요. 그저 제가 법보를 제련하는 것을 도와주시면 됩니다.”

“법보를요?”

거북 요수와 독교가 어리둥절해 하며 서로 시선을 마주쳤다. 독교가 바로 고개를 저으며 말리려 들었다.

“잘못 들은 것이지요?  풍 형께서 법보를 왜 제련하십니까?  요수 선사에게는 신체만큼 튼튼하고 강력한 법보가 없는 것을요.”

“무 형의 말대로 입니다. 어떤 법보라도 요수 선사의 신체만한 것이 없지요. 다른 것에 시간과 노력을 쏟기보다는 몸을 단련하는 것이 낫습니다.

예를 들어 무 형은 교룡의 육체를 타고나 태생적으로 물 속성 공법에 능통하며 조금만 수련을 해도 다른 종족보다 백배는 강력한 위력을 내지요.

저 또한 검은 거북의 육체를 타고나 비록 두 분 보다는 못해도 수련을 하면 금강석처럼 강인한 도검불침의 몸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인간들이나 쓰는 법보를 제련한다고 그러십니까?”

풍희는 그들의 말을 들으며 오히려 미소 지었다.

“두 아우님의 말씀이 옳다는 것을 풍 모처럼 오랜 세월을 산 이가 어찌 모르겠습니까. 허나 제가 제련하려는 것은 강력한 무기가 아니라 영성을 지닌 한 쌍의 날개입니다. 풍화시(風火翅)가 아니라 풍뢰시(風雷翅)를 원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두 쌍의 날개를 지니게 되면 천하가 아무리 광활하다 해도 날아갈 수 없는 곳이 없을 것입니다!”

잔뜩 흥이 난 열풍수의 말에 다른 두 요수가 크게 놀랐다.

“풍뢰시라…….”

거북 요수가 눈을 깜빡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이에 풍희가 사정을 설명했다.

“몇 년 전 심해를 유람하며 수련을 하던 중 어느 황량한 섬에서 고대 선사의 유적을 발견했는데 그 안에는 상고 시대에 살던 거대 새의 유골이 남아있었습니다.

뼈만 남은 상태인데도 엄청난 뇌전의 기운을 품고 있어 알아보니 화형기의 끝까지 진화한 천둥 속성의 붕새 요수, 뇌붕(雷鵬)의 뼈였던 것입니다! 뇌붕의 경천동지할 속도는 조류형 고계 요수 중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란 것을 모두 아실 것입니다. 말 그대로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저희 열풍족이 따라갈 수가 없지요.

그래서 저는 그 뼈와 다른 조류 요수들의 날개를 재료로 인간의 법보 제련 기술을 본 따 날개를 만들어 내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그가 얼른 보충했다.

“물론 완전히 천둥 속성으로만 제련을 하면 조종하기 어려울 테니 바람 속성의 영력을 가미해 제게 적합하게 만들어야겠지요.”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독교가 반신반의하며 묻자 옆에 앉은 거북 요수도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이 되었다.

“걱정마세요! 날개 제작을 위해서만 특별히 몇 년간 연구를 거듭했고 모습을 변형시켜 인간 선사들의 법기 제련 책까지 구해다 보았습니다. 인간들의 제련법에 열풍족에게 전수되는 풍화시 제련법을 결합한 법보 제련이란 뜻이지요.

반드시 성공한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칠, 팔성의 성공 확률은 된다고 봅니다. 물론 두 아우님이 힘만 써주신다면 법보 제련에 성공하든 못하든 제가…….”

자신만만하게 말하던 열풍수가 돌연 말이 없어지더니 입술만 달싹거렸다. 아무래도 한립에게 들려주고 싶지 않은 내용을 전음으로 전달하는 듯했다.

한립은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 줄 몰랐기에 자신에게 불리한 내용이 오가더라도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저들에게 따져 물을 입장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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