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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297화 (54/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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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7화. 구급 요수 선사

    뻣뻣하게 굳어가는 몸을 간신히 움직여 손에 오행환과 영수대를 들었지만 함부로 공격을 할 수는 없었다.

    “예전에 저를 발견하셨군요.”

    긴장으로 입이 말랐는지 한립의 음성이 듣기 좋지 않았다. 그러나 요수 선사는 그의 말소리를 듣자마자 웃음을 터트렸다.

    “선사가 온 첫 날 바로 발견했지요. 처음에는 그저 지나가는 인간 선사라 여겼는데 근처에서 그렇게 오래 머물 줄은 몰랐습니다. 그래서 흥미를 느낀 것이고요.”

    푸른 장포의 요수 선사가 눈을 가늘게 뜨며 하얀 치아를 드러냈다. 잘못 본 것인지 모르겠으나 그 치아가 너무 날카로워 보기만 해도 한기가 느껴졌다.

    ‘정말 성년 열풍수가 맞는가 보군.’

    한립이 억지로 웃음을 띠며 물었다.

    “그럼 어째서 그때 나서지 않았습니까?”

    “저도 선사를 빨리 보고 싶었으나 방금 두 번째 형태 변화를 마쳐 몸을 안정시켜야 해서 나가기 어려웠습니다. 지금은 몸이 견고해졌기에 나와 본 것이었는데 거처로 찾아들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정말 의외였어요.”

    오행환의 쥔 손에는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했고 얼굴은 더욱 창백해졌다.

    “두 번째 형태 변화라면 방금 구급이 되었다는 뜻이군요.”

    열풍수 요수 선사가 눈을 깜빡이더니 시원하게 답했다.

    “구급이라?  인간들이 우리 요족을 구분하는 등급인가 보군요. 형태 변화의 이단계가 인간들이 말하는 구급 요수일 것입니다.”

    한립이 말을 잃었다.

    팔급 요수만 되었어도 살아나갈 희망이있었다. 하지만 눈앞에 구급 요수 선사를 보고 있자니 모든 희망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보아하니 죽음을 피할 길이 없어 보였다.

    생각을 마친 그가 더는 말을 삼가고 돌연 입을 벌려 열댓 개의 푸른 빛을 내뿜었다. 이어 푸른 빛이 선회하는 속에서 그가 한 손에 들고 있던 영수대를 풀려 했다.

    그 순간 마주보고 있던 요수 선사도 움직였다.

    그러자 한립의 눈앞이 환해지더니 손이 가벼워졌다. 상대가 영수대를 강탈해 간 것이다.

    열댓 개의 비검이 그의 앞을 막아서고 있었지만 상대의 속도가 너무 빨라 미쳐 움직일 틈도 없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있었다.

    한립이 놀라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가 잊고 있던 사실에 따르면 열풍수는 원래도 엄청난 속도로 유명한 고계 요수였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구급 열풍수의 속도는 거의 순간이동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도저히 방어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엄청 나게 많은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파랗게 질렸던 얼굴에 순간 다시 혈색이 돌았다.

    그는 저물대에서 요란한 빛을 내는 금실 구슬을 찾아 들었다. 한립이 순식간에 구슬을 삼켜버리고는 서늘하게 요수 선사를 바라보았다.

    이미 결심한 대로 자신을 죽이려 들면 벽사신뢰를 이용해 뱃속의 건람주를 터트려 버릴 계획이었다.

    꼭 상대와 동귀어진 할 것이라 확신할 수는 없어도 중상을 입힐 것은 자명했다. 열풍수는 한립의 이상한 행동에 의아해 하더니 곧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웃어 젖혔다.

    그가 손에 든 영수대를 이리저리 만져보며 말했다.

    “헤헤, 선사한테 해를 끼친다고 말한 적도 없는데 조급하게 이럴 필요가 있을까요?”

    눈썹을 꿈틀한 한립이 냉랭히 물었다.

    “무슨 뜻이지요?  요수 선사들은 인간 선사들을 잡아 죽이고 있지 않습니까.”

    죽기 직전에 상대에게 실컷 놀아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열풍수가 입을 비죽거리더니 고개를 저었다.

    “인간과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은 이 부근 바다의 일족입니다. 저는 그쪽 관할도 아니고 그저 도깨비 연못이라 불리는 린화담(磷火潭)이 마음에 들어 잠시 이곳에 머물고 있는 중이지요.”

    어안이 벙벙해 졌다.

    바다 생물과 조류가 합쳐진 모습이니 정말 바다 요수가 아닐 수도 있었다. 게다가 상대의 말투로 보아 아예 이곳 출신이 아닌 듯했다.

    그의 마음이 복잡해 졌다. 잠시 후 비검을 몸 안으로 회수한 한립이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

    어차피 상대에게 무용지물이니 거두어들이는 게 나았다. 상대가 자신을 속이는 것이라면 최후에는 건람빙주를 폭발시켜 버리면 그만 아닌가!

    한립이 법보를 치우자 열풍수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드러냈다.

    “똑똑한 인간과 교류하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이것도 돌려드리지요.”

    그가 영수대 안을 살피지도 않고 바로 한립에게 건네주었다. 영수대를 돌려받은 한립도 한결 마음이 놓였다. 요수 선사가 한립을 응시하더니 의외의 말을 하였다.

    “선사가 제 거처의 객이 될 마음이 있는지 모르겠군요. 풍 모가 처음으로 인간 선사를 초대하는 것인데 말입니다.”

    열풍수의 말은 나름 예의가 있었으나 한립이 거절할 상황은 아니었다. 그는 쓴웃음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립의 승낙에 좋아하는 모습이 여과 없이 드러났다. 두말 할 것도 없이 손에서 푸른 구슬을 꺼낸 그가 한립과 자신을 그 안에 포함 시켰다.

    한립의 눈앞이 번쩍인다 싶었더니 푸른빛이 돌며 벌써 열풍수 옆으로 끌려가 있었다.

    풍덩.

    푸른 구슬은 두 선사를 품고 연못 속으로 들어갔다. 그 후에는 끝없는 하강이었다. 어차피 구슬 자체도 은은한 푸른색이라 한립은 수중 세계를 어느 정도 살펴 볼 수 있었다.

    손바닥만 한 백색 물고기가 괴상한 생김새로 돌아다니는 것을 제외하면 다른 어류를 찾아 볼 수는 없었다. 새우나 해조류 등도 전무했다.

    열풍수는 한립이 연못의 경치를 호기심을 갖고 관찰하자 옅게 웃으며 무어라 말을 걸지 않았다.

    잠시 후 서서히 속도가 느려진다 싶더니 구슬이 어느 한쪽으로 날아갔다.

    순식간에 거대한 검은 돌문이 눈앞에 등장했고 하얀 빛이 번뜩이는 것이 금제가 걸려있었다. 열풍수가 석문을 손으로 가리키며 아주 예의 바르게 말했다.

    “도착했습니다. 이곳이 풍 모의 초라한 거처이니 너무 비웃지 말아주십시오.”

    한립이 간신히 미소를 지었다. 구슬이 문에 닿자 자동으로 석문이 개방되었다. 동시에 하얀 빛을 통과한 두 선사가 건조한 통로 안으로 진입했다.

    통로는 온갖 빛이 요란하게 반짝였고 벽에는 용의 눈알만한 진주들이 박혀있어 화려했다. 열풍수가 한립이 놀라는 모습에 자랑스러워했다.

    “안으로 드시지요!”

    진주처럼 보이는 것들은 평범한 보석이 아니라 심해 속에서 천년만년 영기를 축적해 불을 막거나 물이 스미는 것을 차단하는 특수한 효과를 발휘하는 보물이었다.

    눈앞의 통로를 보며 한립은 더 이상 들어가고 싶지 않았지만 구급 요수의 기대에 찬 눈빛 속에서 그저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청색 장포를 걸친 열풍수는 그의 뒤에서 차분히 따라오고 있었다.

    통로는 그리 길지 않아서 어느새 각종 산호로 치장한 아름다운 대청에 도달해 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순백의 투명한 옥으로 만든 탁자와 옥 의자가 갖춰져 있었다.

    또한 사방의 모서리에는 각각 고색이 창연한 작은 화로가 있어 검은 향초를 태우며 청아한 향기를 발산했다.

    열풍수가 먼저 의자에 앉고는 한립에게도 앉을 것을 권했다.

    “이리로 앉으시지요.”

    한립은 아무 말 없이 요수 선사의 정면에 자리 잡았다. 열풍수가 눈을 가늘게 뜨고는 온화하게 물었다.

    “아직 선사 성함도 묻지 않았군요. 저는 풍희라 합니다.”

    “저는 려 씨 성을 씁니다.”

    풍희가 머리의 은관을 만지작거리더니 묘한 얼굴로 말했다.

    “허허, 려 선사셨군요. 아마 무척 당혹스러우실 겝니다. 사실 다른 인간 선사를 만났다면 십중팔구 죽였을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인간과 요수가 그리 화목한 관계는 아니니까요.”

    “저의 어떤 점이 풍 선배님의 눈에 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한립은 가슴이 서늘해졌으나 웃음을 유지하며 물었다. 그러자 풍희의 눈에서 녹색 빛이 반짝였다.

    “겨우 결단 중기의 수행으로 심해에 들어온 것은 염기술(斂氣術)을 믿어서겠지요?”

    “염기술이요?”

    한립의 머리에 요수 가죽으로 만든 서책에서 익힌 무명구결이 떠올랐다.

    “그렇습니다. 익숙한 기분이 들어 가만히 생각해 보니 옛 친구에게서 보았던 공법이었지요. 그런 염기술을 인간 선사가 펼치니 신기했을 밖에요.”

    상대에게 가죽 서책을 갖고 있다는 걸 밝히고 싶지 않아 한립은 그저 침묵했다. 풍희가 그런 모습을 보더니 작게 미소 지었다.

    “걱정 마세요. 친구는 죽은 지 오래이니 해명을 듣고자 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인간 선사가 우리 요족의 비술을 쓰는 것이 흥미로웠을 뿐입니다. 제가 선사를 해하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정순한 나무 속성 공법을 익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선사는 지금 살아있지 못했을 겁니다.”

    자신을 건드리지 않은 이유가 뜻밖에도 공법 속성 때문이었다니 한립이 의아함을 나타냈다. 풍희는 그런 표정을 보고도 따로 설명해주지 않았다.

    그가 손바닥을 뒤집으니 하얀 빛이 번쩍이며 금으로 된 술 단지와 옥으로 만든 술잔이 나타났다. 이후 그가 술 단지를 기울여 청록색 액체로 잔을 채우니 짙은 향기가 온 대청을 가득 채웠다.

    그 향기를 맡으며 요수 선사는 이미 취한 듯한 눈빛을 보냈으나 가볍게 잔을 밀어 한립 앞에 내려놓았다. 풍희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자, 제가 직접 빚은 벽염주(碧焰酒)를 드셔 보시지요. 백여 년에 겨우 한 병을 제작하는 귀한 영주(靈酒)입니다. 수행을 증진시켜주고 선사처럼 다음 경지를 앞둔 이들이 경계를 깨도록 도와줄 수도 있습니다.”

    한립은 조금 놀라 술잔에 든 액체를 내려다보았다. 한 눈에 자신의 상황을 파악한 상대의 신통함이 대단했다. 그러나 술 한 잔으로 정체기를 지날 수 있다는 말은 믿기지 않았다.

    수행을 도와주는 단약을 수없이 삼킨 그였다. 먹고 마셔서 더 높은 경지로 갈 수 있다면 벌써 청원검결 구성을 이루지 않았겠는가?  또한 상대의 의도도 모른 채 아무것이나 뱃속에 집어넣을 수는 없었다.

    “어찌 이 풍 모가 술에 무슨 짓이라도 해놓았을까 봐 그러십니까?  한 손가락만 움직여도 선사의 목숨을 취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선배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러나 저를 죽이지 않는 진정한 이유를 듣기 전까지는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말입니다.”

    상대가 굳이 술을 먹이려 들자 오히려 의심이 커졌다. 풍희가 조금 의외였던지 은은히 음산한 기운을 불러일으켰다.

    한참 후에야 풍희가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다시 온화한 안색으로 돌아왔다.

    “보아하니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려 선사의 오해만 깊어지겠습니다. 이 벽염주는 제련이 까다롭고 백여 년이 걸릴 뿐 아니라 형태를 바꾸는 단계에 이른 화형계(化形階) 요수의 요단을 주원료로 합니다. 게다가 우리 열풍수 일족만이 술을 빚는 비법을 보유하고 있지요.

    요수 선사가 아니라면 비법을 안다 해도 자질의 문제로 제련할 수가 없습니다. 제게는 그저 입을 만족시켜주는 사치품이지만 선사와 같은 결단기 선사에게는 한 잔만으로도 체내의 진원을 격동시켜 수행의 정체를 돌파할 수 있게 해주는 효과를 발휘합니다.

    물론 이렇게 진귀한 술을 려 선사에게 마시게 하는 것은 모두 저를 위해서입니다. 선사의 나무 속성 공법을 빌려 처리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다만 결단 중기의 수행은 너무 부족합니다. 물론 다른 선사였다면 결단 후기라 해도 마찬가지였겠지요.

    그러나 선사가 수련한 공법이 정순하고 동급에 비해 농후해 성취를 이루면 그럭저럭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이렇게까지 말씀 드렸는데 술을 거절하신다면 그 결과가 무엇일지는 스스로 아시겠지요?”

    복잡한 표정의 한립이 또 물었다.

    “이 술을 마시고도 수행에 진척이 없으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헤헤! 그럼 제게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지요. 어렵게 제련한 벽염주를 축냈으니 목숨으로 값을 치러야겠습니다.”

    물론 예상한 답변이었지만 직접 들으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생각을 정리한 그가 깊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좋습니다. 마시지요!”

    한립이 손으로 탁자를 내려치자 푸른빛이 반짝이더니 옥잔에 담긴 청록색 액체가 그의 입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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