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6
296화. 세 개의 머리와 여섯 개의 팔
짧은 시간이지만 그는 문사월의 말을 되뇌어 보았다. 그 결과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그가 이리 조심하는 것은 허천정을 찾기 위해 눈이 벌게져 있을 노괴들 때문이었다.
고금을 통틀어 여인에게 속아 다른 이의 함정에 빠지는 사례는 허다했는데 그 중 하나가 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그래도 문사월이 덫일 가능성은 정말 희박했다.
누구도 자신이 언제 어디에서 나타날 지 알 수 없으며 그가 이용한 환형결에 대해서도 자신이 있었다. 원영 초기 선사라 해도 바로 알아보지는 못할 것이다.
이때 문사월은 불안정한 표정의 한립을 보며 더욱 불안해하고 있었다. 생각을 마친 한립이 그런 그녀를 보고는 미소 지었다.
“약속대로 비밀 시장에서 너를 데리고 나왔고 거처까지 마련해 주었으니 이제 요수의 서식지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거라. 정보를 얻으면 바로 이곳을 떠날 것이니 거래는 끝나는 것이다.”
문사월이 놀라 물었다.
“소녀를 첩으로 두시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홀로 지내는 것이 습관이 되어 누군가를 곁에 둘 필요 없다.”
잠시 침묵하던 그녀가 복잡한 심경으로 고개를 저었다.
“배려해 주시는 것은 감사하나 기왕 첩이되기로 약조를 하였으니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절대 원망하는 일이 없을 것이니 안심하시고 저를 받아주셔요.”
여인의 생각을 이해한 한립이 웃는 듯 마는 듯 농을 건넸다.
“너를 배려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방금 한 말은 모두 진심이었다. 굳이 곁에 남아 첩이되겠다면 나도 말리지는 않겠으나 후회하지 말거라!”
여인이 정말 모르는 사내의 첩 따위가 되길 원할 리 없었다. 비밀 시장에서 한 이야기는 정말 어쩔 수 없이 건 조건이란 뜻이었다. 첩이 노정보다는 낫다고 하지만 축기기 선사가 학수고대할 만한 일은 아니지 않은가?
한립도 문사월의 미모에 마음이 동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이제 막 수련의 중요한 돌파구에 이르렀는데 축기기 여인을 모시고 다닐 수야 없었다.
문사월이 드디어 한립의 말을 이해하고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머뭇거렸다.
“저, 저는…….”
“정말 첩이 되고 싶은지 물었다.”
“그것은 아닙니다. 소첩, 그저 은혜에 감사드릴 뿐이옵니다. 저 문사월이 언젠가는 잊지 않고 이 은혜를 갚겠습니다.”
그녀는 몸을 숙여 예를 취하고는 불안한 눈빛으로 그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한립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럼 그 일은 되었으니 더 이상 언급할 것 없다.”
“감사합니다.”
문사월이 완전히 마음을 놓고 활짝 웃으니 얼굴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는 기분이었다. 그가 차분히 본론으로 들어갔다.
“문 선사, 이제 열풍수에 대해 이야기 해보게.”
웃음을 거둔 문사월이 조금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열풍수의 서식지는 아주 위험한 곳에 있습니다. 심연 가장자리 근처이니 잘 생각해 보시고 가셔야 할 것입니다.”
“심연의 가장자리?”
한립도 일이 조금 어려울 것임을 직감했다. 지금의 심해는 극히 위험한 지역이었다.
* * *
문사월에게서 열풍수 서식지를 알아낸 후 한립은 그녀에게 적합한 단약 한 병을 주고 수련에 임하게 했다. 그녀는 연달아 감사를 표하고는 기쁜 마음으로 폐관 수련에 들어갔다.
그리고 한립은 다른 밀실에서 새로 얻은 동전 조각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일단 가부좌를 틀고 물건을 살펴보았다.
동전 조각의 한쪽 면에는 문자가 새겨져 있었지만 다른 면에는 괴상한 그림이 보였다. 머리가 세 개에 팔이 여섯 개 달린 괴물의 형상이었다.
괴물은 화가 난 듯 눈을 부릅뜨며 여섯 개의 팔로 하늘을 떠받치고 있었는데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한참을 살펴보다가 요수 가죽으로 만든 서책을 꺼내 두 물건의 문자를 비교해 보기 시작했다. 동전 조각의 문자와 요수 가죽 책은 동일한 문장 구조를 갖고 있었다. 마치 연원은 같으나 다른 모습이라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내용은 확인할 길이 없었다. 한립은 바로 동전에 법력을 불어넣어 보았다. 법력이 주입되자 동전 조각이 맑게 울리더니 몸을 떨기 시작했다.
돌연 노란 빛 기둥이 뿜어져 나와 마주보던 석실 벽으로 분출되었다. 그러자 살아 움직이는 낡은 그림이 눈앞에 나타났다. 기뻐하던 한립은 점차 넋을 잃었다.
온 몸이 비닐로 덮이고 머리에는 뿔이 난 인간형 요수가 그림 속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요수의 모습은 동전 뒷면의 괴물과 똑같았으나 머리가 하나라는 점이 달랐다.
빛이 번쩍인 후 그림 속 요수가 바닥에 가부좌를 하고 앉더니 이상한 수결을 맺으며 몸을 떨었다.
그리고 이상하게 몸이 틀어진다 싶더니 기괴한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자 또다시 몸이 변하며 새로운 자세를 취했다.
꼬박 반 시진이 지난 후에야 동전 조각에서 빛이 사라지며 그림도 흩어졌다. 속으로 가만히 세어보니 그림 속 요수는 총 36가지의 자세를 보여주었다.
그는 동전에 새겨진 문자를 알아내지는 못했지만 방금 본 그림으로 보아 이것은 인간을 위한 물건은 아니었다. 그것은 놀랍게도 요수 선사를 위한 공법이었다.
고계 요수들이 공법 수련까지 할 줄 안다니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보통 요수들은 천성적으로 영기를 흡수해 몇 가지 법술을 부리는 것이 아니었던가! 인간화한 요수에게 이 공법은 대단한 물건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한립은 동전 조각을 쥐고 울상을 지었다. 문자를 해독한다 해도 요수를 위한 공법이니 수련을 시도할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그가 부족한 것은 고계 공법이 아니었다. 아직 현음경도 다 익히지 못하고 저물대에 있었다. 보아하니 까만 얼굴의 선사가 설명하지 않고 거래하려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억울한 마음에 기분이 울적해졌다.
동전 조각에 새겨진 문자가 요수 수사들 사이의 언어라면 아무리 많은 경전을 찾아봐도 정보가 없는 것은 당연했다. 그렇다면 요수 가죽 서책 역시 동일한 내용일 것이니 힘들여 알아낼 필요가 없었다.
길게 한숨을 내쉰 그가 두 물건을 저물대 속에 집어 던지고는 석실을 걸어 나왔다. 기대했던 만큼 실망감도 컸다.
그래도 그는 신속히 마음을 다잡고 심연으로 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반요초는 수도를 하며 더 높은 경지에 이를지 말지를 가르는 주요한 재료였다. 또한 오색 구슬을 복용한 이후 자신의 자질이 날이 갈수록 개선되는 것이 느껴졌다.
비록 천령근이나 이령근처럼 천부적인 자질을 타고난 이들만큼은 아니더라도 영기를 흡수하고 영력으로 변화시키는 속도는 영근을 세 개 가진 선사만큼은 따라잡은 것 같았다.
보천단의 명성이 헛되지 않았다. 스스로 원영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만드는 일이었다.
문사월은 아직도 단약을 소화시키며 수련 중이었으니 두, 세 달 내로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는 침실에 몇 가지 법기과 동굴의 진법을 통제할 구결을 남긴 후 섬을 떠났다.
상공에 떠오른 한립이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방향을 분별하고는 푸른 빛 줄기로 변해 심연 방향으로 날아갔다.
가는 길에 마주친 인간 선사들은 그대로 지나쳤고 몇몇 요수들은 거침없이 처리했다.
* * *
한 달동안 비행한 끝에 겨우 심연 해역 인근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는 기운을 감추고 은닉술을 발현해 조심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곳은 고계 요수들이 득실대는 곳이었으니 조심하지 않으면 화를 입기 십상이었다.
역시 빈번히 각종 요수들을 마주쳤지만 신묘한 은닉술로 인해 들키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며칠 후 멀지 않은 곳에 나타난 작은 섬을 보며 그의 얼굴이 더욱 신중해 졌다. 문사월이 말해 준 팔급 요수의 서식지가 바로 이 섬이었다.
그는 대놓고 섬에 침입할 생각은 없었다. 팔급 요수가 자리를 지키고 있으면 죽으러 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기 때문에 의식을 퍼트려 섬을 탐색할 생각도 버렸다.
그래서 한립은 섬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돌섬에 소형 금제를 설치했다. 그곳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휴식을 취하면서 차분하게 섬을 주시할 계획이었다.
팔급 요수의 동향을 파악하기 전에는 경거망동해서는 안 되었다.
아쉽게도 예상초는 팔급 이상 요수에게 전혀 유혹이 되지 못했다. 그렇지만 않았다면 멀리 예상초를 피워 놓고 열풍수를 유혹해 손쉽게 반요초를 얻었을 것이다.
시간이 하루 이틀 지나갔고 한립이 돌섬에 앉아 섬을 지켜본 지도 몇 개월이 지났다. 섬에는 어떤 요수의 흔적도 나타나지 않았다. 인내심이 강한 그라도 참지 못할 때가 온 것이다.
‘설마 벌써 열풍수가 다른 곳으로 옮겨 간 것은 아니겠지? ’
의혹이 꼬리를 물었다. 그리고 다시 한 달이 지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한립은 어쩔 수 없이 직접 들어가서 상황을 확인하기로 마음먹었다.
이튿날 새벽 해가 떠오를 때쯤 전신의 기운을 숨긴 한립이 몰래 섬에 내려앉았다. 작은 섬을 몇 개월이나 관찰했으니 이미 손바닥 보듯 훤하게 꿰고 있었다.
어느 돌산의 산허리로 날아가자 문사월이 말해준 대로 거대한 바위 몇 개로 가려진 동굴이 보였다.
한립은 몸에 각종 보조 법술을 건 후에 허공 속으로 사라졌다. 조심스레 안으로 진입한 그는 천천히 의식을 방출해 곳곳을 탐색했다.
동굴은 매우 깊어서 가도 가도 끝이 없었고 깊이 들어갈수록 습해졌다. 일다경이 지나고 모퉁이에 다다르자 그의 걸음이 멈추며 얼굴에 긴장감이 어렸다.
천천히 눈을 감은 한립이 의식을 퍼트려 전면을 살피자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저하며 이를 악물고 모퉁이를 돌았는데 눈앞이 밝아지며 자연적으로 생성된 거대한 동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면적이 백여 장은 넘을 것 같았고 높이도 십여 장이나 되었다. 암석으로 된 동굴 벽과 천장은 옅은 녹색으로 반짝였고 중간에 위치한 청람색 연못은 은은한 열기를 뿜어냈다.
그리고 연못가에 괴이한 풀들이 자라나 있었다.
한립이 풀들을 보더니 그 중에서 일 촌 길이의 검은 영초를 보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것은 그가 찾던 반요초였다.
팔급 요수 근처에서 자란 반요초만이 저런 검은색을 띠게 되고 나머지는 그저 회색이었다. 그의 시선이 중간의 연못에 닿자 흥분이 가시며 다시 진지한 얼굴로 돌아왔다.
아마 열풍수가 동굴 안에 있다면 십중팔구 저 연못 밑에 살고 있을 것이다. 그가 의식을 이용해 탐색해 보려 해도 얼마나 깊은지 일부만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마른 입술을 축인 한립이 몸을 날렸다.
그가 번뜩이며 연못가로 다가가더니 한 손으로는 저물대에서 옥함을 꺼냈고 다른 한 손으로는 재빨리 풀을 채취했다.
당연히 목표는 오매불망하던 반요초였다.
툭.
반요초가 흙이 묻은 뿌리까지 뽑혀 옥함 안으로 들어왔다. 옥함의 뚜껑을 닫은 한립은 기쁨의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쉽게 반요초를 채취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도 이곳에 오래 머물 수는 없었다. 그가 막 고개를 돌려 날아오르려는데 담담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근처에서 그렇게 오래 머물더니 결국 원하는 것이 풀 한 포기였다니 인간 선사는 정말 이상하군요.”
낯선 사내의 낯선 말투였다. 한립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그는 겨우 요동치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어두운 얼굴로 몸을 돌렸다.
그의 뒤에는 푸른 장포를 입은 요수 선사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상대의 용모를 확인하니 한립도 쓴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머리에 은색 관을 쓰고 짚신을 신은 요수 선사는 청록색의 작은 눈과 뾰족하고 까끌까끌 한 코를 제외하고는 인간 사내와 다름이 없었다.
이렇게 완전히 인간형이 되려면 팔급 요수로는 어림도 없었다. 적어도 소문으로만 듣던 구, 십급은 되어야 가능한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