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5
295화. 선사 무리를 압도하다
한립이 무표정하게 팔을 휘저으니 열두 개의 소검이 하나로 합쳐져 그의 소매 속으로 사라졌다. 그가 또박또박 다시 말했다.
“이제 계속 이야기를 하시지요.”
방금 상대를 공격해 중상을 입히기는 했으나 상대의 전투 능력을 상실시켰을 뿐이었다.
잠시 후 피로 물든 몸을 간신히 일으킨 운천소가 두려움이 가득 담긴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좋습니다. 제가 졌으니 문사월은 데리고 가든지 말든지 하시지요. 다만 이미 어느 선배님께서 그 아이를 노정으로 삼고자 점찍어 두셨으니 후환을 대비하셔야 할 겁니다.”
그는 창백한 얼굴로 부적 몇 장을 꺼내 자신의 몸에 붙였다. 이어 녹색 빛이 돌더니 상처 부위가 눈에 띄게 아물어 갔다.
‘노정이라니!’
이제야 문사월이 필사적으로 달아나려 한 원인을 알 수 있었다. 상대의 말 속에 숨겨진 경고에 그의 마음이 서늘해 졌다.
“다른 사람이 어찌 생각하든 나는 이 여인을 데리고 갈것이니 위협은 그만 두는 것이 좋을 게요. 지금 기분이 좋지 않아 이곳을 피로 물들이고 싶어질 지도 모르니 말이오.”
아무런 감정 없는 얼굴로 한립이 사방의 선사들을 둘러보았다.
그저 하는 말이 아니었다. 이곳에 결단기 선사가 많아 전부 죽일 수 있다는 확신만 있었다면 당장이라도 깨끗이 없애 입을 막고 싶었다. 그러나 말만으로도 다른 선사들을 공포에 질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선사들은 그의 대담한 언행과 솜씨에 원영기 노괴가 정체를 숨기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잔뜩 긴장한 선사들이 눈도 깜빡이지 않고 한립을 주시했다.
운천소도 생각할수록 이상했다. 겨우 결단 초기 선사가 자신과 같은 결단 중기 선사를 거의 죽일 뻔 했으며 무슨 팔급 요수를 찾아다니고 있으니 말이다.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문사월은 다른 선사의 노정이 되기 싫어 모험을 한 것이었는데 려 선사란 이가 압도적인 위세로 다른 선사들을 모두 제압하니 깜짝 놀랐다.
그녀가 그토록 두려워하던 운천소는 중상을 입었고 범 부인은 파랗게 질려 찍소리도 못 내고 있었다. 마치 행복한 꿈이라도 꾸는 듯 모든 것이 너무 놀랍고 새로웠다.
한립은 다들 자신을 경계하며 몸을 사리는 모습에 냉소하며 손을 저었다. 동시에 까만 선사의 동전 조각이 떠올라 그의 수중에 떨어졌다.
자세히 그것을 살펴보았다.
까만 선사가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감히 불만을 토로하지 못했다. 이미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운천소를 일격에 처리했으니 이길 수 없는 상대라 여긴 것이다.
한립이 동전 조각을 놓고 담담히 물건 주인을 향해 물었다.
“내가 가져가지. 얼마의 영석이면 되겠나.”
“7…… 아, 아니 5,000영석이면 됩니다.”
까만 선사가 놀라 자기도 모르게 가격을 낮춰 불렀다. 한립이 오급 요단을 꺼내 던져주었다.
“이걸로 알아서 교환해 가지시게. 또한 괜히 내가 귀 문의 여 제자를 강탈해갔다 하지 말고 이 재료들은 이 아이를 풀어주는 대가로 가지시오.”
한립이 고개를 돌려 범 부인을 보고는 천천히 방을 나서기 시작했다. 잠시 후 불현듯 정신을 차린 문사월이 서둘러 그의 뒤에 바짝 따라 붙었다.
그때 범 부인이 소리쳤다.
“려 선배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한립이 걸음을 멈추며 왜 그러냐는 표정으로 돌아섰다. 이런 상황에 자신을 멈춰 세우다니 여인의 담이 큰 것은 인정해줄만 했다.
다만 문사월은 긴장으로 몸이 떨리는지 한립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섰다.
“무슨 일이지?”
범 부인이 요사스럽게 웃으며 공손히 답했다.
“선배님께서는 내성해로 돌아가실 생각이 없으신지요. 저희 묘음문이 근 시일 내로 내성해로 돌아갈 방법을 마련할 듯싶어 그러합니다.”
“무슨 뜻이지?”
그의 불쾌함을 감지했는지 범 부인도 말을 돌리지 않고 바로 사실을 털어놓았다.
“묘음문이 내성해로 돌아갈 수 있는 전송진을 준비 중인데 가장 중요한 재료가 부족합니다. 이번 교환회도 여러 선사님들께 관련된 부탁을 드리려 주최한 것이고요. 본 문이 전송진을 완성할 수 있게만 도와주신다면 무료로 내성해로 보내드리겠습니다.”
범 부인의 말에 이곳에 모인 모두가 놀랐다.
이미 요수의 천하가 되어버린 외성해에서 탈출해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누구나 한 번쯤 해보았을 것이다.
다만 전송진이 없으니 아무리 빨리 날아가도 5, 6년은 걸려야 내성해에 도달할 것이다. 물론 그러는 동안 어떤 위험이나 요수를 만나 목숨을 잃을 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백발의 노부인이 냉랭한 목소리로 의문을 제기했다.
“전송진은 있다지만 전송부는 어찌 할 거죠? 설마 묘음문이 전송부까지 제련할 방도를 찾았다는 것은 아니겠지요?”
범 부인이 진지한 얼굴로 답했다.
“청 선배께서는 그 문제를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본 문이 직접 전송부를 제련하지는 못한다 해도 이미 요수의 범람이 있기 전 모종의 경로를 통해 전송부를 매입해 두었으니까요. 이곳에 계신 선사들이 모두 내성해로 돌아가고도 남을 수량은 충분합니다.
다만 전송진에서 가장 중요한 재료인 환몽석(幻夢石)이 너무 희소합니다. 수년간의 노력 끝에 산지를 찾아냈지만 공교롭게도 고계 요수들이 서식하는 지역 인근이었습니다.
요수들은 대략 오륙 등급에 수량도 상당해 소수의 선사들이 깨끗이 처리하기에는 불가능하지요. 한 마리라도 놓쳤다가는 더욱 높은 등급의 요수들이 몰려와 낭패를 볼 것입니다. 이런 연유로 여러분의 도움을 청합니다.”
요수의 소굴을 쳐들어가는 것은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었기에 모두 생각에 잠겼다. 까만 선사가 잠시 후 물었다.
“우리 같은 결단기 선사들이 아니라 원영기 선배님을 한 분이라도 모시는 것이 가능성이 높지 않겠는가?”
범 부인이 쓴 웃음을 지으며 한립을 힐끗 바라 보았다.
“소첩이 찾아다니지 않은 줄 아십니까? 그러나 요수의 범람 이후 대다수의 원영기 선배님들이 종적을 감추었습니다. 겨우 연락이 닿은 것이 묘학 선배님인데 그분이 요구하신 것이 바로 사월이입니다. 원영기 선사가 참여 해야지만 무리 중에서 칠급 요수를 처리할 수 있을 텐데요.”
한립이 그 말을 듣고는 턱을 긁적였다. 그는 잠시 고민은 해보더니 바로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려 모는 이 일에 아무 관심도 없으니 모두 열심히들 하시게.”
말을 마친 그는 거침없이 대문을 향해 걸어갔다. 문사월이 겨우 한 걸음 뒤에서 바삐 그를 쫓았다. 아무도 그를 막아서지 않으니 대청에는 나머지 사람들만이 멍하니 남겨졌다.
범 부인이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으나 줄곧 말을 아끼던 운천소가 상황을 정리했다.
“이왕 려 선사께서는 관심이 없으시다니 본 문도 강요할 수는 없겠지요. 그럼 다른 분들에게 환몽석에 대한 정보를 공유할 테니 각자 이 일에 도움을 주실 수 있는지 옳은 판단을…….”
마치 방금 중상을 입은 일이 없다는 듯 그가 청산유수처럼 말을 늘어놓았다.
* * *
문사월이 그의 뒤에서 조용히 물었다.
“선배님께서는 정말 내성해로 돌아가실 마음이 없으십니까?”
“너는 돌아가고 싶은 게냐?”
“그것은 아닙니다. 다만…….”
점차 여인의 목소리가 작아지며 말을 맺지 못했다. 이미 벽을 빠져 나온 한립이 그녀를 데리고 출구로 질주했다.
어차피 목표는 달성했으니 이곳에 더 머물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문을 지키던 노인의 의아한 시선을 받으며 한립은 아예 지하통로에서 빠져 나왔다. 그리고 곧바로 여인과 함께 하늘로 솟아올랐다.
날아가는 동안 문사월은 말이 없었으며 모든 것을 한립에게 맡겼다. 그도 딱히 설명해줄 마음이 없었기에 묵묵히 비행에만 집중했다.
이틀이 지나 결국 영기가 짙은 무인도를 찾아낸 한립과 문사월은 천천히 땅으로 내려갔다.
섬에는 울창한 수목을 자랑하는 높은 산들이 있었다. 한립이 산봉우리 몇 개를 선회하다가 어느 산기슭에 내려섰다.
그리고 한립의 비검들은 몇 시진 만에 작은 동굴 거처를 만들어냈다. 동굴은 해무섬에 있던 것에 비해 훨씬 작았고 구조도 단순했다.
그러나 침실이며 밀실 그리고 법기 등을 보관할 곳과 약초밭은 빠짐없이 만들었다. 잠시 동굴을 둘러본 한립은 만족스러운지 입구에 여러 결계를 치고는 문사월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침실로 들어간 그는 방금 깎아 만든 돌 의자에 앉아 여인을 훑어보았다.
“이제 이곳에서 머물면 될 것이다. 동굴 입구의 진법 구결을 알려 줄 테니 수련에 매진해 결단에 이르도록 노력하거라.”
“려 선배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그녀는 한립의 시선에 무언가 잘못한 것도 없이 긴장하고 있었다. 돌연 한립이 미소를 지었다.
“려 선배라…….”
“아,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아무래도…….”
그녀가 놀라 고개를 떨구고는 망설였다. 첩이 되면 이후 어떻게 불러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던 것이다. 한립이 코를 긁적이며 담담히 말했다.
“그냥 려 선생이라 부르거라.”
그는 아직도 자신의 진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중년인의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문사월이 고분고분하게 답했다.
“예, 려 선생님.”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그가 부드러운 어투로 궁금하던 것을 물었다.
“문 선사는 언제부터 외성해에서 생활하게 되었고 범 부인은 어찌 묘음문 장로가 된 것이지? 묘음문은 줄곧 자령 선자가 이끌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문사월은 상대가 요괴 소굴에 대해 물을 것이라 여기다가 갑자기 묘음문 이야기가 나오자 적잖이 놀랐다.
“본 문의 사정을 잘 알고 계시는군요?”
잠시 생각을 정리한 여인이 붉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설명했다.
“묘음문이 외성해로 옮겨오기 전에는 확실히 모든 일을 소문주가 주관하였습니다. 그러나 소문주가 허천전으로 떠난 사이 변고가 생겼지요. 제가 문파로 복귀하였을 때는 이미 탁 우사의 행방이 묘연했고 문파의 실권이 범 좌사와 외부인들의 수중에 떨어진 지 오래였습니다.
나중에야 그들이 마도 선사들이며 묘음문이 마도에 복속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범 좌사는 장문으로 등극하자마자 대다수의 제자를 이끌고 이곳으로 넘어왔습니다. 저도 그때 휩쓸려 이곳에 오게 되었고요. 이후 본 문이 비밀 시장을 열기 시작하면서 오늘까지 이어진 것입니다.
여 제자들 중 다른 마음을 품었던 이들은 실종되거나 팔려나갔고 신첩도 오늘 려 선생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다른 이의 노정이 되는 신세를 면치 못했을 것입니다.”
“범 문주가 외성해로 옮겨온 이유는 무엇이지? 비밀 시장을 열고자 온 것은 아닐 테고.”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범 좌사와 운 씨 성을 지닌 마도 선사가 비밀 시장을 빌미로 각종 정보를 모으는 것이 무언가를 찾는 눈치였습니다.”
질문을 멈춘 한립이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당초 그녀를 구해주고 난 다음에 묘음문에 반란이 일어난 것 같았다. 자령 선자와 자신이 허천전에 있을 때였다.
그리고 범 부인이 권력을 얻자마자 대량의 제자들을 기연도로 데리고 왔고 그 시기에 맞춰 역성맹에서 천성성 공격을 개시했다.
묘음문을 장악한 마도 세력이 어디인지는 몰라도 역성맹 내에서의 입지가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모든 사건이 이렇게 맞아 떨어질 수가 없었다.
자령 선자가 허천전에서 돌아왔을 때는 묘음문이 텅 빈 후였을 것이다. 다만 마도가 묘음문 여 제자들을 시켜 이곳에서 무엇을 찾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한립은 자신과 상관없는 일에 더는 머리를 굴리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자신과 원수를 진 묘학 진인이 묘음문과 연관된 이상 더욱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범 부인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한 것이다.
어차피 수련 정체기를 돌파해 결단 후기에 이르기 전까지 내성해로 돌아갈 마음은 없었다. 이곳에 요수들이 난리를 친다지만 엄청난 보물을 품은 그에게는 내성해 보다는 안전했다.